•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Ⅱ. 문화
  • 3. 사서의 편찬
  • 3)≪편년통록≫과 기타 사서의 편찬
  • (3) 기타 사서의 편찬

가.≪구삼국사≫

 ≪舊三國史≫는 고려 초 또는 11세기 이전에 편찬된 삼국시대에 관한 관찬사서이나 현전하지는 않는다.486)따라서 그에 대한 연구 또한 매우 저조한 편이나 인종 23년(1145) 金富軾의≪三國史記≫는 곧≪舊三國史≫의 重撰에 해당한다고 주목한 末松保和,<旧三國と三國史記>(≪朝鮮學報≫39·40, 1966) 이래 두 사서에 대한 인용사료를 비교·분석한 田中俊明,<『三國史記』撰進と『旧三國史』>(≪朝鮮學報≫83, 1977)가 있다. 따라서 그 이름조차 견해가 다양하다. 즉 11세기 초에 저술된≪大覺國師文集≫에는 “海東三國史”라 하였고,487)≪大覺國師文集≫권 7, 孤大山景福寺飛來方丈禮普德聖師影 註. 12세기 말 李奎報의≪東國李相國集≫에는 “舊三國史”로,488)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3, 古律詩 東明王篇 幷序. 14세기 一然의≪三國遺事≫에는 “前三國史”489)≪三國遺事≫권 5, 避隱 8, 信忠卦冠. 등으로 인용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다 異稱일 뿐이며 원래의 서명은≪三國史≫로 보인다.

 편찬 시기 역시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선종 8년(1091)에 景福寺를 방문한 대각국사 義天이 경복사가 설립된 배경은 “≪해동삼국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490)≪三國遺事≫권 3, 興法 3, 寶藏奉老普德移庵.고 한 사실에서 선종 8년에 이미≪구삼국사≫가 편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구삼국사≫에 대하여 이규보의<동명왕펀>서문에 “國史直筆之書”라 하였듯이 개인의 필요에 의해 편찬된 사찬의 사서가 아닌데도≪고려사≫등의 정사 기록에 그 편찬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이것은 아무래도 그 편찬에 대한 기록이 현종 2년(1011) 거란병의 침입으로 궁궐이 불 탈 때 함께 소실된 사료 속에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구삼국사≫는 적어도 11세기 이전에 편찬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나아가 국초에 史館을 설치하여 사서편찬의 실무를 관장하게 하였다는 기록과491)≪高麗史≫卷 77, 志 31, 百官 2, 春秋館. 광종 26년(975) 金廷彦이 監修國史로 이미 활약하고 있었던 기록492)金廷彦,<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碑>(≪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등을 종합해 볼 때≪구삼국사≫는 당·송제를 모방하여 사관제를 설치한 10세기 말 광종 때에 수사관들에 의해 편찬된 관찬사서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 체제와 성격은 주지하다시피 명종 23년(1139) 이규보가 장편의 민족서사시<東明王篇>을 쓸 때≪구삼국사≫의 동명왕 본기를 읽고 그 신성함이 놀랐다는 점으로493)李奎報,≪東國李相國集≫, 권 3, 古律詩, 東明王篇 幷序. 보아 아직 유교사관이 적용되지 않았던 시기에 신이사관에 기초하여 편찬한 기전체 사서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동명왕편>의 分註로 남아있는 동명왕 본기의 문장을 분석해 볼 때,≪구삼국사≫는「漢 神雀 3年 4月 甲寅」·「漢 神雀 3年 壬戌歲」등과 같이 중국의 연호와 간지를 사용해 삼국시대 주요사건들의 연대를 표기 했다는 사실도494)末松保和, 앞의 글, 4∼5쪽.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구삼국사≫는 현전하지 않지만 그 일문인 동명왕 본기의 기록이 명종 23년 이규보가 지은<동명왕편>에 분주로 남아있어 그 체제와 성격을 알 수 있다. 즉≪구삼국사≫는 신이사관에 기초한 기전체 사서로 특히 고려 초에 사관제가 설치된 후 고구려 계승의식 내지는 자주의식이 팽배되었던 광종 때에 사관들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더구나 현존하는 유일한 관찬사서인≪삼국사기≫가 그 서명과 체제에서 알 수 있듯이≪구삼국사≫의 토대 위에서 중국측의 기록을 보충하여 유교적 합리사관에 의하여 중찬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 사학사적 영향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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