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Ⅱ. 문화
  • 4. 문학
  • 2) 향가 및 그 잔영

2) 향가 및 그 잔영

 신라에서 생겨난 鄕歌는 고려 전기까지 계속 창작되었다. 고려 전기 향가의 대표적인 작품은 물론 均如(923∼973)의<普賢十願歌>11수이다. 균여는 신라가 멸망하기 전에 태어났지만, 태어난 곳은 서라벌에서 멀리 떨어진 黃州이고, 그 곳은 이미 고려의 영토였다. 균여가 한창 활약하던 시기는 광종이 지방 호족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고려 전기의 통치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때였다. 균여는 華嚴宗의 종단을 통일하고, 광종의 정책을 뒷받침하는 이념 수립을 담당하면서 향가를 지었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 전기 향가의 문학사적 위치를 이해하는 데 소중한 단서가 된다. 균여는 신라 유민으로서 신라 문화에 대한 회고의 느낌 때문에 향가에 애착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려인으로서의 임무를 자각하고 신라와는 다른 고려의 통치질서를 수립하는 데 깊이 관여하면서 향가를 계승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균여가 향가를 지은 이유는 역사의 커다란 전환이 이루어졌어도 고려 전기의 사회와 문화가 신라의 경우와 근본적인 동질성을 지니고 있었던 데서 찾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고려 전기의 향가는 신라에서만큼 활기를 띠지 못했다. 균여의 향가만 하더라도 원래의 서정성을 순수하게 지니지 못하고 불교적인 교화를 표방했다. 균여의 향가는 그래도 다섯 줄의 짜임새를 갖춘 詞腦歌이지만, 그 후에는 그런 것이 다시 나타나지 않은 듯하다. 예종 15년(1120)에 지었다는 <悼二將歌>는 넉 줄 향가의 모습을 하고 있어 다섯 줄이라야 하는 사뇌가의 범위에는 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전반부와 후반부가 나누어져 있다는 점에서 민요에 다시 접근하고 있다. 그보다 몇 십 년 지나서 鄭敍가 지은<鄭瓜亭曲>은 사뇌가와 거의 같은 형식을 갖추고 있어서 주목되지만, 후대와 국문표기로 전할 따름이다.

 <도이장가>와<정과정곡>이 향가의 잔존 형태라고 하는 견해는 적절하다. 이 두 작품이 향가가 12세기까지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그러면서 향가가 이미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할 수 없게 되었던 사정도 함께 알아볼 수 있게 한다. 이러한 현상이야말로 고려 전기 문학의 특징을 아주 선명하게 나타내준다. 향가는 고려문학으로서 적극적인 구실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쇠퇴의 길에 들어섰다지만, 향가를 대신할 새로운 서정시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보현십원가)는≪華嚴經≫에 근거를 두고, 그 한 대목을 노래로 풀이했다.530)均如의<普賢十願歌>는 楊熙喆,≪高麗鄕歌硏究≫(새문사, 1988)에서 자세하게 고찰했다.≪華嚴經≫의<普賢行願品>에는 普賢菩薩이 열 가지 긴요한 행실을 소원으로 한다고 말한 대목이 있다. 그 내용은 보살이 아니더라도 부처를 믿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수행이다. 그렇다고 해야 누구나 보살일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화엄경≫에서도 보현보살의 말로 그 열 가지 소원을 자세하게 이른 다음에 偈頌으로 다시 풀이했던 것인데, 균여는 한문 경전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이라도 그 요점을 이해하고 마음에 새겨둘 수 있게 하기 위해 사뇌가를 지었다. 노래를 짓게 된 연유를 밝히면서 서문에서 그 점을 분명하게 했다.

대개 詞腦란 세상사람들이 놀이하며 즐기는 도구요, (보살의) 소원이란 보살이 행실을 닦는 데 긴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얕은 곳을 건너야 깊은 데로 돌아가고, 가까운 곳에서 출발해야 먼 데 이르게 되듯이, 세속의 도리를 따르지 않고서는 둔한 바탕을 인도할 길이 없으며, 세속적인 말에 기탁하지 않고서는 크고 넓은 인연을 나타낼 수 없다. 이제 쉽사리 알 수 있는 가까운 일에 의거해서 생각하기 어려운 먼 뜻을 깨치도록 하자고, 열 가지 큰 소원을 말한 글에 따라서 열한 수의 거친 노래를 짓는다(≪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均如傳≫).

 그러면서 노래를 즐겨 외면 보살의 소원과 인연을 맺게 되고, 비방하면서 왼다 하더라도 이익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했다. 사뇌를 세상사람들이 놀이하는 도구요, 세속적인 말로 된 거친 노래라고 한 데서 사뇌가 당시에 널리 유행하던 사정을 알아볼 수 있다. 또한 사뇌가는 아무리 불교적인 내용을 충실하게 갖춘다 하더라도 偈頌을 대신할 수는 없다고 본 균여의 생각도 함께 확인된다. 그렇지만 널리 유행하는 노래를 방편으로 삼아 교화를 펴고자 하는 것은 새로운 시도였다. 신라의 사뇌가에는 경전에 의거해서 信心의 발로인 수행을 나타낸 것은 없었는데, 균여는 자기 심성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대신 이미 정해져 있는 교리를 담은 敎述的 사뇌가를 내놓았다.

 균여가 스스로 총괄하는 이름을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普賢十願歌>라고 도 하고,<普賢十種願王歌>라고도 하는 노래 11수 가운데 10수는 제목도≪화엄경≫에서 그대로 따왔다. 차례대로 들어보자.<禮敬諸佛歌>는 여러 부처에게 두루 절하자는 노래이며,<稱讚如來歌>는 여래를 칭송하자는 노래이다.<廣修供養歌>는 부처 공양하는 공덕을 널리 닦자는 것이고,<懺悔業障歌>는 스스로 잘못을 저질러 그르친 바를 참회하자는 내응이다.<隨喜功德歌>는 다른 사람이 공덕 닦는 것을 기뻐하자는 노래이다.<請轉法輪歌>는 법륜을 굴려서 설법해 주기를 부처에게 청하자는 것이며,<請佛住世歌>는 부처가 항상 세상에 머물기를 바라는 노래이다.<常隨佛學歌>는 항상 부처를 따라 배우자는 노래이다.<恒順衆生歌>는 항상 중생의 뜻을 따르자는 노래이다.<普皆廻向歌>는 스스로 닦은 공덕을 모두 다른 사람에게 돌리자는 노래이다. 그리고 끝으로 열한번째로<總結无盡歌>를 두어서 끝없는 사연을 마무리하는 노래로 삼았다.

마음의 붓으로 그리온 부처 앞에

절하는 몸이여 법계 없어지도록 일러다오.

티끌마다 부처 절이며, 절마다 모셔놓은

법계 차신 부처께 九世 내내 절하옵고자.

아아, 몸·마음·뜻의 業에 싫지 않게 이리 되어 있노라.531)金完鎭,≪鄕歌解讀法硏究≫(서울大出版部, 1980)의 해독에 의거해 현대역을 한다. 이하 향가 인용은 모두 이와 같다.

 첫 노래인<禮敬諸佛歌>를 미흡한 대로 현대역을 해보면 이렇다. 신라 사뇌가를 표기했던 바와 같이 다섯 줄로 잡았다. 앞줄의 후반부가 뒷줄의 전반부와 더욱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경우가 더러 있다.≪화엄경≫에 나타난 내용과 견주어 보면, 거기서는 부처가 무수히 많다는 것을 강조하고서 그 모든 부처를 눈앞에 대한 듯이 믿으라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마음의 붓으로 그리는 부처라고 한 점이 특이하다. 그렇게 해서 내면적인 인식을 강조한 데서 서정적 표현의 독자적인 영역이 마련되었다.

미혹과 깨달음 한 몸임을 연기 이치에서 찾아보니,

부처 되어 중생 없어질 때까지 내몸 아닌 사람 있으랴.

닦으심은 바로 내 닦음인저, 얻으실 이마다 사람이 없으리.

어느 사람의 善業인들 기뻐함 아니 두리이까.

아아, 이리 견주어 나가면 질투의 마음이 이르러올까.

 이것은 다섯째 노래인<隨喜功德歌>이다. 다른 사람이 공덕을 닦는 것을 질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을 나타냈다. 알기 쉬운 말로 마무리를 했지만, 이치가 그렇다고 하는 전제는 경전에서 말한 바를 대담하게 요약해서 표현을 바꾸어 놓았으므로 따져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나와 다른 사람의 구별이 연기의 이치에서 본다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서, 그렇기 때문에 남의 공덕이 나의 것이고, 공덕 닦아 얻은 바가 다른 사람이라고 따로 분별해 놓은 누구에게 돌아가지는 않는다고 했다. 이런 대목은 이해하기 쉬운 세속의 말로 나타냈다고 하지만, 깊은 이치를 갖추고 있어서 만만치 않다. 사뇌가가 철학적인 시로 바뀌었다.

삶의 영역 다한다면 내 원 다할 날도 있으리마는,

중생 갱생시키고 있노라니, 갓 모르는 소원의 바다요.

이처럼 여겨 저리 행해 가니 향한 곳마다 선업의 길이요.

보현이 행하는 원이 또 부처 일이로다.

아아, 보현 마음에 괴어 저 밖의 다른 일 버릴진저.

 열한번째인<總結无盡歌>이다. 여기 해당하는 내용은 경전에 없다. 그러나 그 동안에 열 가지로 나누어 노래했던 바를 총괄해 표현만 다듬으면 되지 새롭게 지어내야 할 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보현보살은 중생이 다 없어지도록 제도하기를 바라는 소원을 실행하고자 하니, 보현보살의 마음에 잔잔하고 괴어있는 자비를 따를 일이지 다른 생각은 버리라고 끝으로 강조해서 말했다. 그 동안 노래해 온 사연이 모두 확고부동한 신심의 발로임을 재확인했다.

 그런데 보현보살을 따르며 다른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이 신앙의 자세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세속에서도 국왕의 통치에 따르기만 하고 사사로운 주장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방침과 정확하게 대응된다. 그 점은 지방 호족의 잔존세력과 밀착되어 있던 禪宗에서 내세우던 이념과 불교적인 면에서나 세속적인 면에서나 대립된다. 중생이라고 지칭되는 일반 백성을 어느 쪽이 더 잘 살 수 있게 하는가를 두고 경쟁이 벌어 졌기에, 항상 중생의 뜻을 따르겠다는 노래까지 지었다고 보아도 좋겠다.

 ≪三國遺事≫에 전하는 향가가 14수에 지나지 않는데,<보현십원가>는 모 두 11수나 된다. 그렇게 많은 작품을 남긴 사람이 신라 때에는 없었다. 月明師나 忠談師쯤 되면 노래짓는 것을 업으로 삼았겠으나, 지금까지 전하는 작품은 두 편으로 한정되어 있는데, 균여는 자기 직분을 시인으로 삼은 사람이 아닌데도 지은 노래들을 고스란히 전할 수 있었다.<보현십원가>덕분에 향가가 생명을 이었을 뿐 아니라 깊은 이치를 갖춘 철학시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러나 고독한 시인이 세상과 부딪치면서 느끼는 갈등을 승화시킨 순수한 서정의 모습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보현십원가)는 崔行歸의 한역시와 함께 전한다. 최행귀는 균여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었으며, 균여의 노래가 이루어지자 바로 번역했던 것 같다. 한시 번역은 명역으로 평가되었으며, 번역을 통해서 이 노래를 안 중국사람들이 균여를 높이 우러러보았다는 말도 전한다. 신라 향가에는 그렇게까지 알려진 것이 없었다. 하지만 한시로 번역한 의도와 거기에 따르는 문제는 단순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다.

 최행귀는 崔彦撝의 아들로, 중국 吳越國에 유학하고 돌아와 광종을 섬겨 총애를 받다가 죄를 받아 죽었다.532)≪高麗史≫권 92, 列傳 5, 崔彦撝. 그가 한문학에 상당한 소양이 있었기에 번역을 맡았을 것이다. 번역의 의도를 밝힌<譯歌序>에서 한시와 향가의 관계를 두고 아주 주목할 만한 논의를 전개했다. 즉 한시는 중국말로 지으면서 5言 7字로 다듬고, 향가는 우리말을 3句 6名으로 배열한다고 했다. 말의 음성을 논하면 중국쪽과 우리쪽이 쉽사리 분별되고 거리가 멀지만, 시를 짓는 이치를 보면 실력이 서로 맞서 있어서 강약을 가리기 어렵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중국 글을 아는데, 중국사람들은 우리 글인 鄕札을 모른다고 했다. 이렇게 요약할 수 있는 세 가지 논의를 어느 것도 예사롭게 넘길 수 없다. 향가가 3구 6명으로 짜여 있다는 것은 향가 율격의 어떤 규칙을 지적한 듯한데,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풀이해 보았으나 무슨 뜻인지 선명하게 이해되지 않고 있다. 한시와 향가가 강약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라고 한 말을 실감나게 나타내기 위해서 창과 방패가 서로 맞서고 있다는 비유를 들었다. 우리는 중국 글을 아는데 중국사람들은 모른다고 한 데서는 문학적 능력에서 우리가 앞선다는 논리가 도출될 수 있다. 그 모든 논의가 중세의 보편주의에 구애되지 않고 민족문학의 의의를 처음으로 분명하게 제시한 점에 의의가 있다.

 이상에서 서술한 바는 모두<均如傳>에 자료가 전한다.<균여전>은 赫連挺이라는 사람이 편찬한 균여의 전기이다. 혁련정은 성이 혁련이고 이름이 정이며, 진사였다는 것 외에는 행적이 알려지지 않았다. 문종 29년(1075)에 균여에 관한 자료를 모아서 모두 10장으로 된 전기를 완성했다. 균여의 탄생에서 사망까지의 사적을 담았는데 제7장이<歌行化世分>이라 하여 균여가 노래를 지어 세상을 교화했음을 말하고 노래 원문을 실은 대목이다. 제8장은<譯歌現德分>이라 이름짓고서, 최행귀의 한역시를 소개했다.

 서술 태도는 균여를 숭앙하자는 것이었으며, 신이로운 행적을 들어서 숭앙의 이유를 대고자 했다. 노래를 실은 데 이어서, 균여의 노래가 세상에 전파되어 담이나 벽에도 적혀 있었다고 하고, 노래를 외니 병이 나았던 일도 있었다고 했다. 향가를 숭앙하는 것은 신라 이래의 전통인데, 거기다가 균여가 고명한 스님이고, 노래의 사연이≪화엄경≫에서 유래한 내용을 전했기에 권위가 보태졌으므로 그렇게까지 숭앙되었을 것이다. 이 기록은 또한 저자 혁련정은 물론이고, 11세기의 일반 사람들이 한 세기 전에 이루어진 균여의 향가를 어렵지 않게 해독할 수 있었다는 증거이다.

 향가에 관한 그 다음 기록은<玄化寺碑陰記>에서 찾을 수 있다. 현종은 불행하게 세상을 떠난 부모를 추모하기 위해서 현종 12년(1021)에 현화사를 창건했다. 蔡忠順에게 명해서 짓게 한 그 글에 의하면, 절이 완공되어 낙성식을 거행할 때 현종 자신이 먼저<鄕風體歌>를 짓고, 이어서 신하들로 하여금 경축하고 찬양하는<詩腦歌>를 바치게 했더니 모두 열한 사람이 지었다고 했다. 작품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나, 이런 기록은 소중한 의의를 지닌다.

 향풍체가와 시뇌가라는 말은 물론 둘 다 향가를 일컫는 말이다. 신라 때에도 향가라는 말과 시뇌가라는 말이 둘 다 쓰였듯이 여기서도 함께 나온다. 둘을 구별할 수 있다면, 향풍체가는 詞腦歌가 아닌 다른 형식의 향가가 아닌가 싶다. 그 시절에는 임금이건 신하건 향가를 지을 수 있었음을 말해주고, 고려 향가의 작품이 지금 남아 있는 것보다 훨씬 많았다는 명확한 증거가 된다. 형식이 사뇌가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해서 이해했던 점까지 짐작하게 한다.

 현종 자신이 노래를 먼저 지었다는 사실은 다음 작품인<悼二將歌>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향가를 지은 왕이 둘이나 되는데 그런 일이 신라 때에는 없었다. 현종이 한시에 어느 정도 능했던가는 확실하지 않으나, 예종은 문신들과 어울려 모여 놀며 한시로 즐겨 화답했다. 그런데 아주 감격스러운 일이 있자 향가도 지었다. 현종은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예종은 건국 공신을 추모하고자 향가를 지었으니 창작 동기도 상통하는 바 있다.

 <도이장가>를 지은 사연은 자세하게 전한다 예종 15년(1120)에 왕이 서경에 가서 八關會를 보는데, 허수아비들이 관복을 갖추어 입고 말을 타고 뛰면서 뜰을 돌아다녔다. 이상하게 여겨 물으니, 좌우에서 ‘이 분들은 申崇謙·金樂입니다’라 하고 행사의 내력을 설명했다. 그러자 슬픔에 잠긴 예종은 감격하여 두 공신의 후예를 묻고, 한시와 향가를 함께 지었다는 것이다. 이런 내력과 지은 작품이≪壯節公遺事≫라고 줄여서 부르는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신숭겸과 김락은 태조 왕건이 견훤과 싸우다 궁지에 몰렸을 때 왕건을 대신해서 죽은 공신이다. 그 공적을 높이 치하해서 추모하는 행사를 태조 때부터 벌였다. 태조가 팔관회를 열고 뭇 신하와 함께 즐기다가 두 공신이 그 자리에 없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두 공신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복식을 갖추고 자리에 앉게 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두 공신은 술을 받아 마시기도 하고, 생시와 같이 일어나서 춤을 추기도 했다고 한다. 누군가가 두 공신의 가면을 덮어쓰고 허수아비 춤을 추는 놀이를 했던 것이다. 죽은 사람을 그런 방식으로 추모하는 것은 신라 때 이래로 오랜 유래가 있었는데, 두 공신의 일을 연유로 해서 팔관회의 절차에 편입되어 예종 때에 되풀이되었다고 보면 전후의 일이 두루 이해된다. 예종은 두 공신의 모습을 보고 한시를 먼저 지었다 한다. 한시는 5언 여덟 줄이다. 두 공신에 대한 생각을 걷잡을 수 없다 하고서 나라를 위해 죽은 곳은 적막하지만 추모행사를 하는 그 곳에 공적을 끼쳤다고 했다. 충의는 천고에 빛나지만 죽음은 한 순간의 일이라 했다. 임금을 위해 칼날을 맞이해 왕업의 기틀을 보존했다고 찬양했다. 이렇게 크게 찬양하고서도 만족스럽지 않아 다시 향가를 지었다. 두 공신의 내력을 서술하고 죽음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한시의 기능이었다면,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을 보고 느낀 벅찬 감격을 표현하는 것은 향가가 맡았다.

 향가는<端歌二章>이라고 했다.<단가>는 토막노래라는 뜻일 것이다.<이장>이라고 함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말일 것이다. 즉석에서 노래를 지어 부르며 감격을 바로 나타냈기에 사치가 형식을 갖출 겨를이 없었고 민요에서 혼히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단락지우느라고 토막 노래 둘을 만들었던 것 같다.

님을 온전케 하온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니,

넋은 가셨으되 몸 세우고 하신 말씀.

 

직분 맡으러 활 잡는 이 마음 새로워지기를,

좋다 두 공신이여, 오래오래 곧은 자취를 나타내신저.

 해독을 현대어로 바꾸어 두 줄씩으로 표기해 보면 위와 같다. 해독을 하는 데는 두 공신의 허수아비가 일어나고 춤도 추었다고 한 기록이 적지 않게 고려되었다. ‘몸 세우고 하신 말씀’은 일어선 거동을 말하고, ‘직분 맡으러’이하는 뜰을 돌면서 춤을 춘 것을 그렇게 한 행위라고 보았다는 데 근거를 둔 해독이다. 예종이 실제로 목격한 바를 말로 나타내면서 다른 사연을 첨가했다고 이해하면 어려울 것 없는 작품이다. 그렇지만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나타나 있지 않고, ‘새로와지기를’과 그 다음 말이 잘 연결되지 않는다. 노래 두 토막이 처음 석 줄로 나누어져 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 같다. 그렇다면 형식은 혼란되어 있다. ‘직분 맡으러’ 이하가 ‘하신 말씀’의 내용이라고 보아야 뜻을 이해할 수 있다.

 다시 살피면 좀더 알아볼 것이 있다. 마음·넋·몸을 나누어서 말해 주목된다. 죽었으니 넋이 갔다고 했다. 그런데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친다고 했으니, 마음은 죽은 다음에도 남아 있다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몸을 세웠다는 것은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을 두고 하는 말이다. 마지막 줄에서는 오래오래 곧은 자취를 나타내라고 했다. ‘하늘 끝까지’라는 공간 설정이 ‘오래오래’라는 시간적 표현으로 바뀌었다. ‘곧은 자취’는 마음의 표상인 몸을 다시 일컬은 말이다. 그런데 곧은 자취를 오래오래 나타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잠시 동안이고, 그리고는 공신의 행적은 역사기록에 묻혔을 것이다. 그런 느낌까지 자아낸다고 보면 단순한 노래가 아니다.

 <도이장가>는 이렇게 풀이하더라도 안정되어 있는 작품은 아니다. 넉 줄 향가인 듯하나,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고, 두 부분 사이의 균형이 갖추어 지지 않았다. 형식과 내용의 불일치가 보인다.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노래의 오랜 전통을 이었더라도 향가 본래의 격식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쇠잔기의 향가 또는 향가의 잔존형태에 해당한다고 하는 견해가 타당성을 갖는다.

 鄭敍는 생몰년대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으나, 여러 자료를 종합해 보건대 예종·인종·의종·명종 4대에 걸쳐서 살았던 사람이다. 일찍이 李資謙의 권세에 맞섰고 妙淸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는 개경 쪽에서 공을 세웠던 아버지 鄭沆(1080∼1136) 덕분에 蔭敍로 진출해서 벼슬이 정5품인 내시낭중에 이르렀다. 인종과는 동서간이었으니 처가의 배경도 대단했다. 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고려사≫열전에서는 성격이 경박하나 재주가 있다고 했다.533)≪高麗史≫권 97, 列傳 10, 鄭沆 附 敍. 인종에 이어서 자기 이질인 의종이 왕위에 오르자, 의종의 아우를 추대하려는 음모에 가담하고 있다는 참소를 입어 의종 5년(1151)에 고향인 東萊로 귀양가게 되었다. 의종은 “오늘 일은 조정 의론에 핍박되었으나, 가서 있으면 마땅히 소환하겠다”고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귀양에서 풀려난 것은 무신란이 일어나 의종이 쫓겨나고 명종이 즉위한 뒤의 일이었다.

 소환한다는 명령을 기다리다가, 거문고를 어루만지며 노래를 지으니 그 사설이 슬펐다는 말이≪고려사≫열전에 보인다. 이어서 정서가 스스로 호를 瓜亭이라 했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그 곡조를<鄭瓜亭>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노래를 지은 연대는 의종 10년(1156) 전후가 아닌가 추정되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고려사≫樂志에서는 노래를 지은 연유를 다시 소개하고, 李齊賢이 小樂府에서 한역한 것을 실었다. 국문으로 된 사설은 16세기 문헌인≪樂學軌範≫에 전하는데, 곡조 이름을 따서<三眞勺>이라고 했다. 작품 이름은<정과정곡>이라고 부르기 일쑤이고,<鄭瓜亭歌>라고 해야 마땅하다는 의견도 있다.

내 니믈 그리와 우니다니

山 접동새난 이슷요이다

아니시며 거츠르신 아으

殘月曉星이 아시리이다

넉시라도 님은   녀져라 아으

벼기더시니 뉘러시니잇가

過도 허물도 千萬 업소이다

힛 마러신뎌

읏븐뎌 아으

니미 나 마 니시니잇가

아소 님하 도람드르샤 괴오쇼셔

 음악의 악조구성을 나타내는 前腔, 附葉 같은 말을 빼고, 사설만 적어보면 전문이 위와 같다. 악조 구성을 나타내는 말이 들어 있을 때마다 줄을 바꾸어 적어 열한 줄이 되었다. 처음 두 줄에서는, 님을 그리워하며 울고 있는 모습이 산에 사는 접동새와 비슷하다고 했다. 그 다음 두 줄은 자기 죄가 임금이 잘못 알고 있는 바와 다르고, 참소를 당했다는 것을 새벽녘 남은 달과 별이 알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넋이라도 한데 가고 싶다고 하던 사람이 누구였던가 하며, 임금이 자기를 버린 것을 원망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과도 허물도 천만 없다 하고, 그 모두가 참소하는 무리의 말일 따름이니 사라지고 싶다고 했다. 마지막 두 줄에서는 님이 자기를 벌써 잊었는가 묻고, 마음을 돌리어 사랑해 달라고 간청했다.

 ≪악학궤범≫에서<삼진작>이라 한 노래는 후대 자료에는 악보도 남아 있다.「진작」은 곡조 이름이라고 보아 마땅하며, 번호로 곡조의 빠르기를 표시했다고 생각된다. 一眞勺이 가장 느리고 二眞勺보다 三眞勺이 더 빠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진작」은<정과정곡>외에 다른 노래에서도 광범위하게 발견되니 사설을 지으면서 또는 지은 다음에 기존의 곡조에 얹어서 불렀다고 보아야 하겠다. 악조 구성을 나타내는 말을 다시 살피면, 처음 세 줄이 前腔·中腔·後腔을 이루고, 그 다음의 것들은 葉이라 해서 거기 붙어 있는 부분들로 처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음악에서는 확대형식이라 하지만, 사설은 그렇지 않다. 사설은 앞에서 한 말을 부연 설명하지 않고, 어느 대목이나 대등한 자격을 가지고 순차적으로 펼쳐져 있다. 일단 열한 줄로 나누어 적어본 것을 다시 정리할 수 있다. ‘힛 마리신뎌’와 ‘읏븐뎌 아으’를 합치면 열 줄이 된다. 다시 두 줄씩 합쳐보면 다섯 줄이라 사뇌가 형식이다.

 이러한 사실은<정과정곡>이 사뇌가의 잔존 형태라는 견해의 근거가 된다. 향찰로 표기되지는 않았다는 점이 문제이기는 하나, 오로지 구전으로만 전해졌다고 보기는 어렵고, 향찰표기가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다섯 줄로 볼 수 있으면서도 사치가 본래의 격식과는 아주 달라진 데가 있으니, 바로 감탄구가 놓인 위치이다. ‘니미 나’하는 말 앞에 와야 할 감탄구가 ‘아소 님하’에 들어가 있다. 그래서 사뇌가가 해체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겠다. 사뇌가가 아닌 향가는 민요에 혼히 있는 형식을 그대로 따왔으니 해체가 확인되긴 어렵지만, 고도로 세련된 짜임새를 자랑하는 사뇌가는 감탄구가 놓인 위치만 달라져도 본래의 격식에서 이탈했다.

<趙東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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