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Ⅱ. 문화
  • 4. 문학
  • 3) 설화문학

3) 설화문학

 고려의 통치체제가 확립되고 이념 정립도 아울러 이루어지자, 설화는 적지않은 타격을 입은 듯했다. 화엄종이나 천태종으로 대표되는 이론불교가 초경험적인 영역에 대해 함부로 상상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유학에 입각한 합리주의 또한 인간 만사를 說話로 풀이하는 데 대해 비판하고 나섰다. 신라 때와 비교해 보면 고려 전기의 설화는 빈약하다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이유를 자료가 전하지 않는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 민간 전승의 저류가 상층문화와 연결되었던 상황까지 알아본다면, 우선 설화를 둘러싼 논란이 심각했던 데 거듭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성종 때 나라사람들이 華風만 좋아하고 國風을 좋아하지 않자, 李知白이라는 사람이 나서서 燃燈會와 八關會를 다시 열고 仙郎을 두는 풍속도 이어야 나라를 보존할 수 있다고 했다.534)≪高麗史≫권 94, 列傳 7, 徐熙. 화풍은 중국 전래의 문화를 존중하는 기풍이니 말하자면 국풍과 대립되는 것이다. 일찍이 태조는 그 둘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방침을 내놓았지만, 광종 때의 개혁을 거치면서 균형이 깨어지고 말았다. 불교든 유학이든 통치체제를 정비하면서 내세운 이념은 화풍을 존중하는 쪽으로 기울어졌으므로, 불만을 가진 세력이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성종은 이지백의 제안을 일단 따른 것으로 되어 있으나, 문제는 표면에 나타난 정도 이상의 심각한 양상을 띠었다. 북방민족의 침입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나라를 보존하자면 화풍에 의한 문화수준을 높이면서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인가, 아니면 국풍의 전통을 존중하면서 진취적인 기상을 길러야 할 것인가 하는 논란은 그 시기에 해결을 볼 수 없었고, 金富軾과 妙淸의 대결로까지 치달았다. 국권을 장악하고 있는 문벌귀족 세력은 세련되고도 합리적인 역사의식을 내세워 납득할 수 없는 신앙이나 허황된 이야기에 근거를 둔 자기 과시를 애써 격파했다. 군사적인 승리를 거둔 데 이어서 역사 서술을 통해 불변의 정통을 수립하고자≪三國史記≫를 내놓았다.

 싸움은 역사와 설화를 두고서 벌어진 것 같이 보인다. 상층으로서의 지위를 굳힌 세력은 종잡을 수 없는 설화 따위를 일소하고 명분과 도리를 갖춘 역사를 서술하고자 했다. 상층이라도 기존 체제에 불만을 가진 세력은 하층의 민간전승과 연관을 가지고 신이한 설화를 이으면서 민족의식을 드높이고자 했다.≪高麗史≫는 양쪽의 움직임을 다 보여준다. 그러나 엮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앞쪽에 동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뒤쪽은 허탄하다던가 요사스럽다던가 하는 인상을 주도록 다루었으며, 민간전승 자체의 모습은 어떤 정치적인 사건을 일으키는 경우가 아니라면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중국사신이 와서 남긴 견문기인≪高麗圖經≫같은 것은 전혀 다른 자료를 남기고 있어 주목된다. 즉 祠宇條를 두어서 도교사원과 불교사원을 소개한 끝에 나라에서 무시할 수 없는 민간신앙의 제당을 여럿 들고 그 유래를 설명했다.

 순서대로 열거하며 崧山廟·東神祠·蛤窟龍祠·五龍廟라고 하는 네 곳이다. 그 가운데서 우선 주목되는 것이 동신사이다. 위치와 당집 모습을 설명한 다음에 거기 모신 신은 東神聖母라고 했다. 신이 나무로 깎은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서, “夫餘의 처이며 河神의 딸인데, 朱蒙을 낳아 고려의 시조가 되었으므로 제사를 모신다”고 했다. 고구려의 건국신화가 신앙적인 상징물을 갖추고 생동하는 기능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세 곳에서도 신상을 세워 제사를 지낸다고 했는데, 모두 다 수호신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무렵인 고려 전기에도 역사서가 여럿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단서는 여기저기 보인다. 대부분은 설화에 가까운 역사를 취급했거나 설화집이 아니었던가 한다. 우선≪舊三國史≫가 있어서 그것을≪삼국사기≫로 개작했다. 朴寅亮은≪殊異傳≫을 편찬하거나 다듬었으리라고 해서 주목되고,≪古今錄≫을 지어 비밀스러운 곳에 간직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金仁存(?∼1127)이 예종에게 올리려고 다른 몇 사람과 함께 음양·풍수지리 등에 관한 자료를 모아≪海東秘錄≫이라는 책을 편찬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음양이나 풍수지리는 설화를 예증으로 들어야 실감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남아 있어 내용을 살필 수 있는 것으로, 문종 때의≪駕洛國記≫와 의종 때 金寬毅가 편찬한≪編年通錄≫도 잊을 수 없다.

 그러고 보면 고대부터의 역사를 설화자료와 함께 엮어서 자기 시대의 이념을 수립하기 위해 상당한 작업을 한 셈이다.≪가락국기≫는 다른 데서는 거의 취급하지 않은 가락국의 역사를 정리한 저술인데, 민속이나 설화를 대폭 수용했다.≪수이전≫은 전승된 설화를 다양하게 모았으므로 아주 소중한 자료이다.≪편년통록≫은 고려 건국의 신화적 내력을 전한다.≪고금록≫이나≪해동비록≫은 어떤 내용인지 구체적으로 확인할 길은 없으나 고대부터 그 당시까지의 비정통적인 자료나 전승을 수록했을 것이다.

 이러한 책은 대부분 처음 이루어질 때에도 지배적인 이념과는 맞지 않아 이단에 속하는 것으로 취급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배격되기도 했고 배격되는 데 맞서서 더욱 치열한 반론을 펴야만 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묘청이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을 때 護國白頭岳 太白仙人 이하 여덟 성인을 모셨다고 하는데, 이는 민간전승과 깊은 연관을 가진 이단적인 역사관이 반역의 사상적 배경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래서 김부식은 그 동안의 이단을 두루 청산하고자≪삼국사기≫를 지어 정통적인 역사를 확립했던 것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왕실의 선조가 신이한 내력이 있어서 태어나고 신화적인 과업을 이루었다고 하면서도, 태조 왕건 이하 군주는 三韓을 아우르고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켰지만 실제의 행적에다 어느 정도의 상상을 보태 소개하는 데 그쳤다. 그래서 신화에 의지하지 않고, 영웅전설이 지닐 수 있는 설득력도 동원하지 않으면서 통치이념을 확립하는 것을 기본노선으로 삼았다.

 태조를 도와서 건국과 통일의 과업에 뛰어난 공적을 이룩한 인물을 들자면 아주 많다 하겠는데, 그 가운데서도 하필이면 崔凝을 두고서 탄생이 예사롭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다. 최응은 원래 궁예의 신하였다가 왕건을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한 공적이 있는 문신일 따름이고, 자기 자신이 무슨 대단한 과업을 성취하지는 않았다. 그런데≪고려사≫최응열전 대목의 서두에 전하기를, 어머니가 임신을 했을 때 집에서 오이줄기에 참외가 맺히는 일이 생겨서, 고을 사람이 궁예에게 고하니 궁예가 점쳐보고 말하기를 “생남하면 나라에 불리하니 기르지 말라”고 했다 한다. 그래서 부모가 숨어서 길렀는데, 나중에 궁예에게 발탁되자 궁예는 “성인을 얻었다 함은 이 사람이 아닌가” 했다 한다.

 신라 때에는 고승의 신이한 행적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많았으며, 신이한 행적이란 다름이 아니라 거짓되게 굳어진 격식을 파괴하고 삶의 발랄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결단이라고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고려에 들어와서는 고승을 주인공으로 삼은 설화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으며, 있다 하더라도 신이한 행적과는 거리가 먼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불교가 체계적인 교리를 통해 설득력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설화와 개입을 되도록이면 배제했다 하겠고, 민중불교가 재현되지 않았기에 파격적이거나 희극적인 표현이 다시 요구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런데 균여만은 어느 정도 예외이다. 균여와 義天을 견주어 보더라도 의천에 관한 설화는 그 많은 자료에서 찾을 수 없으나,<균여전>에는 설화라고 해야 할 것이 더러 보이니, 그 사이에 무엇이 달라졌는지 알 수 있다. 균여의 경우에는 탄생, 수난, 지은 노래의 영험 등을 설명할 때 신이한 사연이 곁들여 있어서 한편으로는 고답적인 이론을 전개하는 데 힘쓰면서 또 한편으로는 예사 사람들과 가까워지고자 한 면모가 확인된다. 그 가운데서도 탄생설화가 특히 흥미롭다.

 잉태할 때 어머니가 꿈을 꾸니 鳳이 한 쌍 보였는데, 누런 색이었다는 것이 첫머리이다. 봉이 하늘에서 내려와 품에 안기어, 어머니는 나이 예순이었는데도 아기를 20旬, 그러니까 7개월만에 낳았다고 했다. 태몽이 예사롭지 않아 위대한 인물을 잉태했다는 것인데, 거기다가 임신기간이 예외적으로 짧았다는 말까지 보태놓았다. 균여를 예사사람 이상이라고 높이는 말과 그 이하라고 낮추는 말이 함께 보여 주목된다.

 姜邯贊이라는 구국의 영웅이 널리 숭앙되었던 사정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흔히 지나쳐버릴 수 있는 자료에서 주목할 만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강감찬은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 장수이다. 현종이 찬양하는 시를 지었고 일반 백성이 널리 숭앙했다. 거란이 거듭 침공을 할 때 요구조건을 들어주자는 쪽과 나아가서 싸워 물리치자는 쪽이 조정에서도 대립되어 있었는데, 강감찬이야말로 문약에 빠진 무리의 주장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행동으로 입증했다고 평가되었다. 강감찬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야기는 많게 마련이다. 후대에는 강감찬이 무슨 기이한 연유로 태어났다던가, 도술을 어떻게 부렸다던가 하는 말도 파다하게 전해졌는데, 그 연원은 이 시대에 이미 마련되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補閑集≫에 보이고≪고려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만 되어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使臣이 밤에 始興郡에 들어가 큰 별이 인가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관리를 보내 알아보게 하니, 마침 그 집 며느리가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다. 사신은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해서, 데리고 돌아와 길렀다. 그 아이가 강감찬이다. 강감찬이 재상이 되자, 송나라 사신이 보고서 자기도 모르게 절을 하며 말하기를, ‘文曲星이 보이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더니, 지금 여기 계시는구나’라고 했다고 한다(≪高麗史≫권 94, 列傳 7, 姜邯贊).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강감찬이 시흥군의 어느 인가에서 태어났다고 했을 뿐이지, 가문이 어떻고 아버지는 누구라는 말은 하지 않은 점이다. 이 자료를 수록한≪고려사≫강감찬열전에서는 아버지가 태조를 섬겨 최고 공신의 지위를 차지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세상에 전하는 이야기에서는 거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강감찬이 이름없는 백성의 자식인 양, 그래서 태어난 집에서 자라지 않고 누가 데려다 길렀기에 나라에 알려질 수 있었던 것으로 꾸며놓았다. 이러한 개변은 바로 강감찬을 민간영웅으로 만들려는 데서 나온 것이다. 자세한 사정은 생략되어 있지만, 부모 슬하를 떠나도록 이야기를 꾸민 데 상당한 의미가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강감찬이 비범한 인물이라는 증거가 천상의 무슨 별이 떨어져서 태어났던 데 있다고 한 것은 민간영웅에게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이다. 천상의 별이 떨어지거나 그 별에 해당하는 仙官이 지상으로 귀양을 왔기에 태어난 아이가 탁월한 능력을 지닐 수 있었다는 설정은 도교적인 발상에 근거를 두고 중국 설화에서 먼저 모습을 드러냈던 것으로서,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나 이 자료를 증거로 수용을 확인할 수 있다. 송나라 사신이 와서 사실을 확인했다는 말은 그러한 설정이 독자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더욱 필요했을지 모른다. 그러고 보면 강감찬 탄생설화에는 민간영웅을 내세우는 전승과 새롭게 나타난 華風의 숭상이 서로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후대에도 강감찬이 미천한 영웅임을 강조하는 전설이 널리 관심을 끄는 반면, 별이 떨어졌다는 곳을 落星垈라고 부르며 명소로 삼았다.

 ≪삼국유사≫에 실린<가락국기>머리말에 “문종 시절 大康년간에 金官知州事로 있던 문인이 지은 것인데, 여기에 그 개요를 간추려 적는다”는 말이 있다. 대강은 요의 연호로서 1075년에서 1083년까지인데, 1075년은 문종 29년이고, 1083년은 문종 37년으로 문종이 죽던 해이다. 금관은 지금의 김해이며 지주사는 지방수령이다. 문종 29년에서 37년 사이에 김해지방 수령으로 있던 어떤 문인이 지은<가락국기>를 일연이≪삼국유사≫를 편찬하면서 그 개요를 수록했다는 말이다. 그 문인의 이름은 전하지 않고,<가락국기>의 원본은 구해 볼 길이 없으나, 그 때 그런 책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문종 때라면 중앙집권적 통치질서가 이미 확고하게 다져졌을 시기이다. 지방 호족세력은 몰락했고, 호족을 대신한 향리는 정치적으로 무력했을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할 능력이 과연 어느 정도였었던가 의심스럽다. 수도 개경의 귀족문화는 날로 융성해지는 반면 지방문화는 더욱 보잘 것 없게 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추세였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수령이 예사롭지 않은 책을 저술한 것이다.

 지금의 김해인 금관은 옛날 駕洛 또는 伽倻 중의 한 나라가 번영을 누려온 터전이다. 가야가 여섯 나라나 되었다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늘에서 내려온 首露王이 세웠다는 金官伽倻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그런데 가야는 신라에 망하고, 신라는 다시 고려에 합병되고도 백여 년이 지났으니 모두 과거일 따름이라고 하기 쉬우나,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 고장에서 수로왕의 후예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향리 노릇을 하면서도 위대한 전통을 이어 스스로의 지위를 높이고, 민속이며 설화며 하는 것들을 들어 자기네 문화를 자랑했다. 지방수령으로 간 사람이 이에 감명을 받아<가락국기>를 저술했던 것이다.

 <가락국기>는 구태여 분류를 하자면 역사서지만 문화의 총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가락국의 신화적인 내력을 서술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서, 그 당시에도 계속되는 민간전승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데까지, 캘 수 있는 자료는 빠뜨리지 않고 그 지방 사람들이 자랑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의미있게 받아들였다.≪삼국유사≫에 실린 것이 개요라고 하는 데도 실로 풍부한 내용을 갖추고 있으니, 원본은 얼마나 다채로웠을까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차례도 어떤 기존 역사를 따르지 않고 다각적인 서술을 하는 데 알맞게 구상했다.

 ≪수이전≫은 언제 누가 편찬한 책인지 확실하지 않다.≪삼국유사≫圓光西學의 내용을 보면 저자가≪古本殊異傳≫을 참고했다는 말이 있다. 權文海의≪大東韻府群玉≫에서는 자료를 인용하면서≪新羅殊異傳≫을 崔致遠이 지었다고 했다. 覺訓의≪海東高僧傳≫에서도 자료를 이용하고,≪수이전≫의 작자를 박인량이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삼국유사≫의 위에서 말한 부분에서는 金陟明이라는 사람이 항간에 떠도는 말로 원광법사의 전을 잘못 보완해서, 그 폐단이≪해동고승전≫으로 이어졌다고 했는데, 문제되는 자료가 바로 각훈이≪수이전≫에서 따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하면,≪수이전≫은 일단 신라 때에 이루어졌으며, 원작자는 최치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로 넘어오면서 원래의 것은≪고본수이전≫또는≪신라수이전≫으로 일컬어졌는데, 새로운≪수이전≫이 나타났기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수이전≫은 고본을 보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최치원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도 들어있는 것이 바로 보완의 증거이다. 개작자는 박인량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각훈이 그렇게 말했을 뿐만 아니라, 글재주나 행적을 보아 박인량은 그런 일을 할 만한 사람이다. 그리고 김척명은≪삼국유사≫에서「鄕人」이라고만 했으므로 누군지 알기 어려우나, 일연과는 동향의 선배이고, 각훈보다는 먼저 활동했던 사람이겠다. 김척명이≪수이전≫을 한 차례 다시 개작했으리라는 추정도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수이전≫은 여러 사람이 오랜 기간에 걸쳐 계속 보태고 다듬은 책이다. 신라 이래의 설화 가운데 신기해서 흥미로운 것들을 모으고 새로운 구전을 보태고 하는 동안에 단계적으로 형성되었고, 문학적 윤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개작에 참여했다. 그러는 동안에 분량도 상당히 많아졌으리라고 생각된다. 누적되고 개작되는 것이야말로 설화의 특징과 부합되고, 설화를 글로 적으며 다듬는 것은 문학사의 당연한 과정이다. 고려 전기 문학의 판도에서≪수이전≫은 ≪삼국사기≫와 대립되는 위치를 차지하며, 민간 전승이 국풍을 존중하려는 문인의 관심과 깊이 연결되었던 자취를 나타내준다.

 박인량이≪수이전≫을 개작했으리라고 하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인량은 요나라 때문에 시달리고, 송나라와의 관계도 유지해야 하는 어려운 시기에 외교의 중책을 맡아 분주하게 활동하면서, 그럴수록 우리 문화의 전통이 민간 전승을 통해서 계승되는 양상을 존중해야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아닌가 싶다.≪고금록≫을 지어서 은밀한 곳에 간직했다는 말을 그런 각도에서 다시 음미할 필요가 있다. 시를 잘 지어서 이름을 떨친 것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으니, 최치원 이야기를 다듬으면서 요긴한 대목마다 시를 삽입하는 데서 익힌 솜씨를 발휘했을 만하다.

 그런데 지금 전하는 것은 부스러기뿐이다.≪해동고승전≫에서≪대동운부군옥≫에 이르기까지 여러 책에서≪수이전≫을 인용했다고 하며 적어놓은 대목을 모아 원래의 모습을 짐작해 보는 것이 고작이다. 남은 자료를 모아보면 모두 13편으로 설화이거나 설화에 근거를 두고 다듬어 쓴 글들이다. 대부분은 짤막한데, 요약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것으로 보이고, 최치원 이야기 한 편만은 분량이 상당하다. 최치원 이야기는 요약된 것이 별도로 전해지고 있어서 주목된다.

 이야기 주인공을 정리해 보면, 이른 시기의 인물은 脫解이다. 그 다음으로 延烏郎과 細烏女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이 두 자료는≪삼국유사≫에 실린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승려로는 阿道와 圖光의 이야기가 있어, 그 내용이≪해동고승전≫에 옮겨 실려 있다. 선덕여왕에 관한 설화가 두 편 있는 데, 그 가운데<心火燒塔>이라는 이야기는≪삼국유사≫에서는 관련 내용을 한마디로만 언급했던 것이다. 金庾信을 등장시킨 것도 두 편인데, 역사적인 사실과는 거리가 멀고≪수이전≫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金現이라는 사람이 호랑이 처녀와 사랑을 나누었다는 이야기는≪삼국유사≫에 실린 것의 異本이다. 이 밖에 寶開니 崔伉이니 하는 인물도 주인공으로 삼았는데, 이름을 뭐라고 붙여도 그만일 예사사람이다. 최치원 이야기가 두 편 있음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이처럼 주인공은 성격이 정해져 있지 않고 다양하기만 하다. 제왕·고승·명장에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두루 등장시켰는데, 공통점이 있다면 기이한 행적을 보여주었다는 것뿐이다. 자료 선정의 기준이 주인공에 있지 않고 사건 전개방식에 있다 하겠다. 사건은 어느 것이나≪수이전≫이라는 표제에 걸맞게, 일상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의 한계를 깨고 미처 상상할 수 없었던 경험을 전하는 것을 특징으로 삼는다. 대부분은 잘 알려진 인물과 결부시켰기 때문에 신빙성을 갖도록 하면서, 그런 인물이 훌륭했다는 통념을 뒤집 어 엎는다.

 아도와 원광의 이야기는 내용이 특이하다. 아도는 중국사람을 아버지로 하고 고구려사람을 어머니로 해서 태어났는데, 어머니가 異人이어서 어머니의 말에 따라 신라에 불법을 폈다고 했다. 그리고 원광은 늙은 여우가 신으로 둔갑해 도와주어 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고승은 스스로 위대한 경지에 이른다는 통념을 깼으며, 부처나 보살의 도움을 받았다고도 하지 않았다. 이인인 어머니나 늙은 여우는 민간 전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통력의 주체일 따름이다.

 선덕여왕과 김유신이 관련된 이야기가 각기 두 편씩 있어서 흥미롭다. 신라의 인물 가운데 여자라면 선덕여왕이고, 남자라면 김유신이라고 할 수 있기에, 그 두 사람에 빗대서 예사롭지 않은 상상을 해본 것이다.<花王>은 선덕여왕이 당나라에서 모란씨를 보내자 무슨 꽃인지 알아냈다는 내용인데, 그 핵심은 누가 주인공이라도 상관없는 지혜담이다.<심화요탑>은 역졸인 志鬼가 선덕여왕을 사랑하다가 마침내 불귀신이 되었다는 것으로서, 신라의 설화를 다룰 때 이미 살폈듯이 상하관계의 규범을 넘어선 지귀의 번민에 공감을 가질 수 있게 한다. 더욱 기발한 이야기로서 김유신과 만난 이름없는 백성이 놀라운 도술을 보이더라는<竹筒美女>와<老翁化狗>가 있다.<죽통미녀>는 대나무통에 미녀를 넣고 다니는 사람을 보고 김유신이 당황했다는 것이다.

 <보개>는 아들이 장사길에 나섰다가 바다를 건너가서 소식이 없자 보개라는 여자가 관음보살에게 기도를 드리니 아들이 와서 손을 잡더라는 이야기로 불교에서 흔히 하는 영험담이라 하겠다. 그런데 아들이 그 동안 파선을 해서 익사할 뻔하다가 겨우 살아나 중국사람의 종이 되어 밭갈이를 하던 신세였다는데 고생스럽게 사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요소가 있다.<首揷石枏>은 최항이라는 사람이 사랑을 이루지 못하다가 죽은 다음에 여자를 찾아가서 뜻을 이루었다는 이야기인데, 사람 사이의 애틋한 정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성취되어야 한다고 하는 점에서<심화요탑>이나<보개>와 상통하는 바가 있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살피면<수삽석남>은 죽은 사람과 사랑을 나누었다는 屍愛說話 또는 冥婚說話이다. 그런 것이 최치원을 다룬 데서도 보인다. 최치원이 중국에 갔을 때 오래 전에 죽어 묻힌 여자의 무덤 곁에 머문 일이 있어, 그 때 하룻밤의 사랑을 나누었다는 이야기이다.<仙女紅袋>는 짤막하게 요약되어 있고,<최치원>은 줄거리에 장황한 수식이 들어있고 요긴한 대목마다 시로써 서로의 정을 나타내고 있다. 설화를 기록하는 일반적인 형식이 아니기 때문에, 별도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최치원>의 문체와 수식을 보면 소설이라고 할 만하다. 정감어린 아름다운 글로 작품을 이끌어 나갔으며, 독자가 거기 빠져들어 가도록 한다. 머리말에서 최치원이 중국 어느 고장에 들러 客館에 머물렀는데, 객관 앞에 雙 女墳이라고 하는 오래된 무덤이 있길래, 여자 둘이 거기 묻혀 적적하게 원망스러운 봄을 보낸 것이 모두 몇 해나 되었는가 하는 수작으로 시를 지었다. 그날 밤에 두 여자의 시녀가 찾아와 화답하는 시를 전해서 만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객고에 시달리던 나그네가 우연히 지나던 고장의 미녀와 뜻하지 않게 인연을 이루는 과정은 후대의 염정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와 같다. 여자가 둘이어서 만난 다음에도 주고받는 시가 더 많아지고, 사연이 장황해졌다.

 그런데 결말은 하룻밤의 인연을 즐긴 다음에 두 여자는 사라지면서, 나중에 그 곳을 다시 지나거든 황량한 무덤을 보수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최치원은 이튿날 무덤가에서 길게 이어지는 시를 다시 지어서 인생이란 쓸쓸하고 덧없다는 탄식을 늘어놓았고, 그 때문에 신라로 돌아온 다음에는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읽는 이의 감회를 돋을 따름이지 그 이상 뚜렷한 주제를 지니지는 않는다. 무덤 속의 여자와 사랑을 나누다가 날이 밝자 모두 다 허망하다는 것을 알았다는 기이한 전설의 기본설정은 그대로 두고서 거기다가 문학적 수식을 보태어 긴장이 조성되지 않고 대결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 점이 나중에 나올 金時習의 冥婚小說과는 판이하다 하겠다.

 이런 작품의 기본 성격은 傳奇라고 보아 마땅하다. 전기는 이미 신라 말쯤에 생겨나서 고려에 들어와서도 계속 나타났으리라고 생각되는데, 작품의 예가 흔하지는 않다.≪삼국유사≫에 실린 調信의 이야기를 들 만하고,≪삼국사기≫에서 조금 더 발견할 수 있을 따름이다. 전기의 작가가 대단한 포부를 지녔던 것은 아니다. 설화에 대한 깊은 관심을 자기대로 살리면서 문학적 수식의 역량을 거기다가 쏟아보기는 했어도, 그 결과가 깊은 문제의식과는 쉽사리 연결되지 않았던 것이 전기 작가의 한계이자 전기의 한계가 아니었던가 한다.

<趙東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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