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8권 고려 무신정권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1. 무신란과 초기의 무신정권
  • 3) 정중부 정권

3) 정중부 정권

 정중부의 아들 鄭筠에 의한 이의방의 살해는 조위총의 난에 대한 제2차 토벌군의 출동 중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정균의 이러한 거사는 從軍僧들과의 결탁 아래 은밀히 행하여졌는데, 집권자 이의방의 피살이 토벌군 사이에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토벌군이 커다란 동요를 일으키지 않았음은 한가닥 의 문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당시 토벌군 지휘부의 편성을 살펴 본다면 이러한 의문은 풀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즉 토벌군의 지휘부는 기탁성·진준·경진 등을 주축으로 편성되었던 것이다.

 기탁성·진준·경진은 모두 무신란 이전부터 고위직에 올라 있던 무인들로서 무신란 당시 온건한 태도를 취했던 인물들이다. 따라서 정균에 의한 이의방의 제거는 무신란 당시 온건한 태도를 취했던 고위 무신들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들은 제1차 출정군이 조위총을 토벌하지 못하고 대패한 데 대한 책임을 이의방에게 돌려 그를 살해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023)安永根,<鄭仲夫政權과 宋有仁>(≪建大史學≫1, 1989), 7쪽.

 이의방이 제거된 후의 무신정권이 정중부를 비롯한, 무신란 당시 온건한 태도를 취했던 무인들의 손에 넘어간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이의방의 제거 며칠 후인 명종 4년 12월의 인사발령에 뚜렷이 나타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중부:문하시중 양 숙:참지정사 경 진:지문하성사 기탁성:지추밀원사 송유인:추밀원부사 이광정:추밀원부사·어사대부

 이들은 송유인 한 사람을 제외하면 모두 무신란 당시 온건한 태도를 취했던 인물들인 것이다. 그러나 송유인이 정중부의 사위가 되었음을 감안하면 정중부 정권은 그와 뜻을 같이 하는 무인들만으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중부정권 아래서는 하급 무신들과 고위 무신들의 갈등이 심각했던 듯하다. 다음의 사료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일이다.

檢校 將軍 이하 散員 同正 이상의 무산관들이 동반의 권무관직을 빼앗을 것을 논의하였다. 중방이나 대간은 그들의 입을 두려워 하여 감히 무엇이라고 말하지 못하였다. 홍중방이 홀로 말하기를 ‘나라에서 관제를 정하고 직무를 분장시켜 온 이래로 오직 卿·監을 제외하고는 무신이 문관직을 겸한 경우가 없었다. 경인년 이후로 우리 무신들은 대간에 들어가고 또한 朝班에 늘어서는가 하면, 校尉·隊正에게도 僕頭를 쓰도록 허락했으며 서반의 散職이 외관에도 임명되었는데, 이는 진실로 선왕의 제도가 아닌 것이다. 만약 또 갑자기 권무관까지 빼앗는다면, 그 동반·서반을 정한 제도는 어찌한단 말인가. 나는 차라리 죽을지라도 이에 찬성할 수 없다’고 하니 논의가 드디어 그쳤다. 이에 서반의 산직관들이 길에 무리지어 모여서 높은 관리를 볼 때마다 호소하더니, 하루는 홍중방을 만나 길을 막고 욕하였다. 홍중방이 소매를 걷어 올리고 말을 달려 헤치고 나와 중방에 이르러 말하기를 ‘내가 오늘 거의 죽을 뻔 하였다. 아랫 사람이 윗 사람을 능멸함이 어찌 이렇게까지 되었는가’라고 하였다(≪高麗史≫권 100, 列傳 13, 洪仲方).

 이 기록은 정중부집권기인 명종 7년의 것이다. 하급 무신들의 동반 권무관직 임명요구에 대해 大將軍 洪仲方은 이의 부당함을 지적하였다. 이미 선왕의 제도와 어긋나는 현상들이 많이 나타났으므로 이것마저 허락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선왕의 제도는 기존의 법제를 의미한다. 따라서 선왕의 제도에 어긋나는 현상들은 곧 무신란 이후의 변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홍중방은 무신란 이후의 변화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그가 하급 무신들의 요구가 부당하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무신란 이후 무인에 의한 문반직 兼帶가 지나쳤음을 강조했던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변화 자체에 불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변화의 폭이 큰 데에 불만이 있었던 것이다.

 하급 무신들의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한 인물은 홍중방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관철된 것을 보면, 상당수의 고위 무신들이 그의 의견에 동조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그들은 어느 정도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급격한 변화를 반기지 않았음은 당연해 보인다. 급격한 변화는 그들의 지위를 위협하는 것으로 판단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들과는 달리, 동반의 권무관직을 요구한 하급 무신들은 변화를 바라는 존재들이었다. 따라서 정중부집권기 고위 무인들과 하급 무인들의 갈등은 무신란 이후의 변화에 대해 그들이 인식을 달리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하급 무신들이 변화를 적극적으로 요구했다면, 일반 군인들의 경우는 두말할 나위가 없었을 것이다. 이는 무신란이 일어나자 그들이「봉기」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은 무신란을 일대 변혁의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정중부정권은 이러한 일반군인들의 반발을 감수해야만 했었다. 일반 군인들이 정중부정권의 타도를 주장하는 익명의 방을 붙였는가 하면, 정중부집권기 동안 옥사가 연이어 일어났다는 사실이 이를 반영한다. 사실 일반군인들의 정중부정권에 대한 불만은 당연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정중부정권이 무신란 당시 온건한 입장을 취한 인물들로 구성되었음을 감안하면 그의 정권이 적극적으로 변화를 추구했을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정중부정권은 하급 무신들과 일반 군인들의 반발에 강력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군인들의 정중부정권 타도 주장에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관직을 그만 둘 것을 청하고 며칠 동안 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나, 하급 무신들의 동반 권무관직 요구에 대간이나 중방이 그들을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알 수 있는 일이다. 정중부정권은 그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무신란을 성공으로 이끄는데 그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음을 염두에 두면 이상할 것은 없다. 그들은 무신란에서의 그들의 역할이 있었기에 정중부정권도 성립할 수 있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정중부는 당시 26세에 불과했던 청년 장군 慶大升에 의해 제거되었다. 경대승의 정중부 제거에는 牽龍軍 장교 수 명과 그들이 거느린 견룡군, 그리고 死士 30여 인이 동원되었다고≪高麗史≫는 전하고 있다. 死士는 그 표현만으로 미루어, 죽음을 무릅쓴 결사대였다고 할 수 있다. 경대승은 이들 결사대로 야간에 요소를 장악하고 견룡군으로 하여금 정중부 일당을 살해하도록 하는 한편, 禁軍을 출동시켜서 정중부를 체포하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사실이 경대승의 집권을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의 집권은 정중부 제거와는 또 다른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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