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8권 고려 무신정권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2. 최씨무신정권의 성립과 전개
  • 2) 최씨가의 권력세습

2) 최씨가의 권력세습

 최씨정권은 대를 이어 권력을 세습하였다. 최충헌에서 최의에 이르는 4대 60여 년 동안 최씨정권은 지속되었던 것이다. 명종 26년(1196)에 정권을 장악한 최충헌은 고종 6년(1219) 사망할 때까지 23년 동안 집권하였으며, 이후는그의 아들 崔瑀, 즉 최이가 권력을 세습하였다. 그리고 고종 36년(1249)에는 최이의 서자 최항이 집권자가 되었으며, 동왕 44년(1257) 최항이 병사하자 그의 노비 소생인 崔竩가 그의 뒤를 이었다. 이러한 최씨정권은 최의가 고종 45년(1258) 3월 柳璥·金俊 등에게 제거 됨으로써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러한 형태의 권력세습은 한국의 역사상 유일한 것이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주로 이러한 점에 초점을 맞추어 최씨정권의 전개과정을 살펴 볼 예정인데, 이에 관해서는 이미 일찍부터 학계의 관심이 모아진 바 있다. 그 결과 최충헌은 강력한 사병조직을 통해 정적을 제어했고 따라서 권력의 세습도 가능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과연 무력만으로 정적의 제어가 가능했는가, 또한 최충헌에 의해 조직된 사병이 어떻게 그의 후계자에게까지 충성을 바칠 수 있었는가 하는 등의 의문은 남는다. 우선 최씨정권이 정적들을 어떻게 제어했을까 하는 점을 최충헌의 경우를 통해 알아 보기로 하자.

 최충헌집권기에 재추에 오른 무인 가운데 상당수는 최충헌에 의해 숙청되었다. 이러한 인물 가운데는 정권의 성립에 기여함으로써, 그의 집권 초기에 재추에 올랐던 인물들이 특히 많았다. 두경승·우승경·정숙첨은 그 대표적인 인물들일 것이다. 최충헌정권의 성립에 크게 기여한 이들이었고 보면, 그들의 숙청 이유가 궁금해진다.

 쿠데타 직후 최충헌에 의해 중서령에 임명되었던 두경승이 숙청된 이유를 밝혀주는 적절한 사료는 없다. 다만 최충헌의 쿠데타가 그의 족인들을 중심으로 계획되고 추진되었다는 사실과 쿠데타 당시 최충헌의 지위가 攝將軍에 불과했다는 점은 이와 관련하여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최충헌보다 직위가 높았던 무인들은 최충헌의 독주를 방관했을 것 같지 않다. 그들은 직위를 이용하여 최충헌보다 우위를 점하려 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이는 이의민의 餘黨 토벌에 협력했던 대장군 李景儒·崔文淸 등의 무인들을 최충헌이 제거한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최충헌은 고위 무신의 대표적인 존재였던 두경승 역시 방치해 두기는 어려웠던 것이 아닌가 한다. 결국 두경승이 최충헌을 모해하려 한다는, 사실이 아니었을지도 모르는 익명서 하나로 최충헌은 두경승을 紫燕島에 유배시켰던 것이다.

 우승경이 최충헌에 의해 유배된 것은 희종 7년(1211)이었다. 희종과 王濬明이 최충헌을 살해하려 한 사건에 그가 연루된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이 사건이 있기 이전부터 우승경은 최충헌과 갈등이 있었던 듯하다. 우승경이 최충헌을 살해하려 한다는 내용의 익명서가 최충헌의 집에 던져졌던 사실로 미루어 그러하다.054)≪高麗史節要≫권 14, 희종 6년 3월. 이 익명서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었으나, 이러한 익명서가 나타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최충헌과 우승경의 틈이 벌어져 있었음을 알려 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들 사이의 갈등은, 우승경이 쿠데타 직후부터 정치적 실력자였음을 감안하면, 불가피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정숙첨은 최이의 장인으로, 그에 대해서는 후에 상술될 기회가 있을 것이 나, 아무튼 이 사실만으로도 그가 대단한 정치적 지위를 누렸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최충헌에 의해 숙청된 인물들은 무인 재추 가운데서 도 정치적인 실력자였던 셈이다. 사실 최충헌과 함께 쿠데타를 모의하고 수행한 최충수·박진재는 재추에 오르기도 전에 제거되고 말았던 것이다.

 최충헌집권기의 정치적 실력자들이 최충헌에 의해 제거되었다는 사실은 최충헌의 무인에 대한 통제가 그만큼 철저했음을 알려 준다. 따라서 최충헌의 무인에 대한 통제방법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면, 최충헌정권의 전개를 이해하는데 보탬이 될 것이다. 그와 최충수의 관계에 대한 검토로부터 이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풀어보기로 하자.

 이의민의 제거 이후 최충헌의 가장 강력한 정적으로 등장한 인물은 그의 동생 최충수였다. 이의민의 제거를 먼저 제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쿠데타 이후의 정치적인 주도권을 최충헌이 장악한 데 대한 불만으로 최충수는 그의 형에게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최충헌과 최충수의 마찰은 최충수가 그의 딸을 太子妃로 들이려 한 것을 계기로 권력쟁탈전의 양상을 띄었다. 여기에서 세력의 열세를 실감한 최충수는 최충헌과의 싸움을 포기하려 하였다. 그러자 장군 吳淑庇·俊存深·朴挺夫 등은 최충수를 부추기어 일전을 독려하였다. 다음의 기록에 주목해 보자.

충수가(국왕과 諸衛의 장군들이 충헌을 돕는다는 사실을 듣고) 두려워 하여 그 무리에게 말하기를 ‘아우가 형을 공격하는 것은 悖德이다.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毬庭에 들어가 형에게 죄를 빌고자 하니 너희들은 마땅히 각기 도망하여 가라’ 하였다. 장군 오숙비·준존심·박정부 등이 말하기를 ‘우리가 公의 門에서 놀았던 것은 공에게 세상을 덮을 만한 기개가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이제 도리어 겁냄이 이와 같으니 이는 우리들을 멸족시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청컨대 일전하여 자웅을 가립시다’고 하였다(≪高麗史≫권 129, 列傳 42, 崔忠獻).

 최충수는 최충헌에게 잘못을 빌겠다는 뜻을 그의「무리」에게 알렸는데, 장군 오숙비 등이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 한다. 따라서 오숙비 등은 최충수의「무리」의 구성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최충수와 그의 무리는 생사를 같이 할 정도로 밀착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최충수가 최충헌에게 그의 죄를 빌기로 한 후, “너희들은 마땅히 각기 도망하여 가라”고 그들에게 숨을 것을 권유한 것이나, 그들이 “(공이) 이제 도리어 겁냄이 이와 같으니 이는 우리들을 멸족시키는 것이다”라고 하여, 최충수가 최충헌에게 항복하면 그들도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강조한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최충수의「무리」가 최충수의「門」에 모였던 이유는, 오숙비 등의 지적처럼, 그가 ‘세상을 덮을 만한 기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을 덮을 만한 기개’란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므로, 그들은 최충수의 정권 장악을 기대하고 모여든 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최충수가 정권을 장악한다면 그들도 그들의 지위 향상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최충수에게 있어서 그의「무리」는 곧 그의 세력기반이었다. 이들 최충수의 무리는 최충수의 門客이었음이 분명하다.055)金鍾國,<高麗武臣政權の特質に關する一考察>(≪朝鮮學報≫17, 1960), 64쪽. 오숙비 등의 말 가운데 ‘우리가 公의 門에서 놀았다’는 표현으로 미루어서도 짐작된다.

 최충수의 문객이 최충수로 하여금 최충헌과의 일전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면, 문객을 보유한 무인이야말로 항상 최충헌의 경계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박진재의 경우를 예로 들어 검토해 보자.

 박진재의 문객은 그 수에 있어서 최충헌의 문객에 비교될 정도였다. 박진 재가 이처럼 많은 수의 문객을 보유할 수 있었던 것은 최충헌이 묵인하였기 에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최충헌은 그의 조카였던 박진재의 도움을 바탕으로 그의 정권을 성립시킬 수 있었으므로, 박진재의 문객은 때에 따라 최충헌의 군사적인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056)E. J. Schultz, 앞의 글, 137쪽. 따라서 최충헌은 박진재의 문객 보유를 허용했다고할 수 있다. 그리나 최충헌정권이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이러한 사정은 변할 수밖에 없었다. 외부의 정적이 제거된 상황에서 최충헌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 자들은 그 내부에서 나타나기 마련이다. 박진재는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이에 최충헌은 정권 유지를 위해 박진재를 제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최충헌이 박진재에 대한 제어의 한 방법은 그의 문객에게 관직을 제수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박진재의 문객에게 관직을 제수하는 것은 곧 박진재의 세력 확대와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박진재를 비롯한 그의 문객들이 반발했음은 물론이다. 박진재는 “외숙은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다”고 최충헌을 노골적으로 비난했는가 하면, “만약 최충헌이 없다면 정권을 오로지 할 수 있다”라고 하여, 최충헌 제거를 암시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의 문객 역시 최충헌에게 반기를 들었음은 최충헌이 박진재를 제거하기 이전인 신종 2년에 박진재의 문객인 神騎指諭 李勛中이 黃州牧守 金俊琚와 함께 난을 모의했던 사실로 미루어 알 수 있다.

 박진재의 문객은 최충수의 제거과정에서 최충헌 자신이 이용하기도 했던 자들이다. 이들에게 관직을 제수하지 않았다면, 다른 무인들의 문객에게는 말할 나위도 없었을 것이다. 한편 문객은 그 주인에게 충성을 바치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기대하는 자들이었다. 따라서 봉사에 대한 대가를 기대하기 어려웠을 때 문객은 흩어지기 마련이다. 李義方의 형인 李俊儀와 그의 문객과의 관계에서 그 실례를 엿볼 수 있다. 이준의는 당시의 집권자였던 그의 동생 이의방과 틈이 벌어져 이의방에게 죽음을 당할 뻔하였다. 다른 사람들의 만류로 이준의는 목숨을 보전하였으나 문객은 흩어졌다. 당시의 집권자 이의방의 미움을 산 이준의의 문객이 되어 보았자, 그들에게 돌아 올 것은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객이 되어도 관직을 제수받기 어려웠을 경우 문객은 모여들지 않았을 것이다. 최충헌이 집권한 이후 다른 무인들의 문제에 관한 기록이 그 이전과는 달리 거의 나타나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무인들의 문객 보유를 철저하게 견제한 것은 최충헌만이 아니었다. 그 이후의 최씨집권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최이집권기의 기록인 다음을 참고해 보자.

(李子晟이) 東京을 평정한 후에 장사들이 매일 그 문에 모여들었다. (자성은) 權貴의 꺼려하는 바가 될 것을 두려워하여 병을 칭탁하고 문을 닫았다. 사람들이 그 知幾를 칭찬하였다(≪高麗史≫권 103, 列傳 16, 李子晟).

 이자성이 동경에서 일어난 崔山·李儒의 亂을 토벌한 것은 고종 20년(1233)의 일이었다. 이자성이 동경을 평정하자 장사들이 날마다 그「문」에 모여들었다 한다. 이자성의「문」에 모여든 장사들은 이자성의 문객이 되려는 자들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에 이자성은「권귀」의 꺼리는 바가 될 것을 두려워하여 병을 칭하고 문을 닫았다는 것이다. 여기의「권귀」는 당시의 집권자 최이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문객이 모여드는 것을 최이가 꺼릴까 두려워하여 이자성이 병을 칭하고 문을 닫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최이가 무인들의 문객 보유를 어느 정도로 철저하게 견제했는가를 알 수 있다. 무인들의 문객 보유는 곧 자신의 정권을 위협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최이가 이를 견제했을 것은 당연하다.

 결국 최충헌은 무인들의 문객에게 관직을 제수하지 않음으로써, 무인들이 문객을 보유할 수 없게 만들었고, 따라서 그들의 세력 확보를 저지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최충헌은 무인들이 그들의 합의기구를 통하여 공동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길마저 봉쇄하였다. 重房의 권한을 약화시킨 것이 그것이다.

 무신란 이후의 중방은 궁성의 시위와 일반 치안을 담당하였으며, 시장의 교역을 살폈는가 하면 인사행정에도 관여하였다.057)金庠基,<高麗武人政治機構考>(≪東方文化交流史論攷≫, 乙酉文化社, 1948), 209 ∼213쪽. 최고의 권력기구였음을 감안하면 당연하다 하겠다. 그런데 중방의 역할과 관련하여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정치적인 모반 사건을 중방에서 처리했다는 점이다.

 이의방집권기인 명종 4년(1174)에 西京留守 조위총은, 중방이 북계의 여러 성을 토벌하려 한다는 것을 내세워 군사를 일으켰다. 즉 북계인은 중방의 북계토벌 계획에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 조위총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중방이 북계의 여러 성을 토벌하려 했던 것은 무신란 이후 북계의 여러 성에서 모반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난 때문이었다. 특히 명종 2년 6월의 昌州人·成州人·鐵州人의 반란은 병마사가 제어하지 못할 정도였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 중방은 모반사건의 대책을 논의한 기구였다고 이해된다. 이러한 점은 정중부집권기나 경대승집권기, 그리고 이의민집권기에도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정중부집권기에는 興王寺의 승려가 德水縣人의 모반 사실을 중방에 고했다는 기록이 있으며,058)≪高麗史≫권 19, 世家 19, 명종 8년 정월 무오. 경대승 집권기에는 중방이 난에 대비하여 철저하게 경비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던 것이다.059)≪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宿衛. 또한 이의민집권기였던 명종 16년(1186) 校尉 張彦夫 등이 난을 일으키려 한다는 뜬 소문에 접한 중방은 주모자인 장언부를 색출하여 처단하였다.060)≪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16년 정월 계미.

 중방은 독자적으로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했었다. 명종 9년, 연밀에 變이 있을 것이라는 妖言에 중방은 금군으로 하여금 칼을 뽑아 들고 국왕을 호위케 하였으며,061)≪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9년 12월 임자. 동왕 16년에는 중방이 남을 무고한 자를 잡기 위해 금군을 풀어 시정을 엿보게 했다는 기록도 있는 것이다.062)≪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16년 10월 정축. 비록 금군을 동원한 예이기는 하지만, 이를 통해 중방이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음을 아는데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중방이 정치적인 모반사건의 처리를 담당한 기구였음을 감안하면 무리가 아니다.

 중방은 무인집권자에게 위협을 가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는 중방이 이의방을 살해한 승려 宗旵을 유배보냈다거나, 정중부가 죽은 뒤에 경대승의 제거를 공언한 무관이 있어서 경대승이 도방을 조직하여 이에 대비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짐작된다. 이의방이 죽은 후, 중방의 무인들은 이의방을 살해한 종감 등 10여 인을 유배보냈다. 그런데 종감 등이 이의방을 살해한 것은 정중부의 아들 鄭筠의 사주에 의해서였다. 따라서 중방무인들의 종감 유배는 곧 정중부정권에 대한 일종의 반발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경대승의 정중부 살해에 불만을 품고 경대승의 제거를 선언한 무관은 중방의 무인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무관이 단순히 한 개인에 불과했다면, 당시의 집권자 경대승이 도방을 조직하여 이에 대비할 만큼 두려워 했을까 의심된다. 정중부정권 아래에서 특권을 누려온 고위 무신으로서 중방을 배경으로 경대승을 비난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지우기 어려운 것이다. 고위 무신들은 그들의 합의기구인 중방을 통해서 집권자를 위협했던 것이다. 상·대장군의 합의기구였을 뿐만 아니라 병력 동원의 능력까지 갖춘 중방이었고 보면 이상할 것은 없다.

 최충헌으로서는 이러한 중방을 약화시키는 방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敎定都監의 설치와 재추회의의 활성화는 이러한 방책의 일부였다고 이해된다.

 교정도감은 靑郊驛吏의 최충헌 살해 모의를 계기로 설치되었다. 희종 5년(1209) 청교역리 3인은 최충헌을 살해하기로 모의하고 公牒을 돌려 절의 승도를 모았다. 이에 최충헌은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그 일당을 색출했는가 하면 연루자를 처벌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교정도감의 기능은 정치적인 모반사건의 처리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리한 기능을 담당하는 중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정도감을 설치한 것은, 이로 하여금 중방을 대신하려 한 최충헌의 정치적인 의도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정치적 모반사건에 대한 처리의 권한을 중방에 대신하여 교정도감이 행사했다면, 이와 함께 중방의 병력 동원의 능력도 소멸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다만 尹世儒라는 인물이 고종에게 “(우복야) 鄭稹과 그의 동생 추밀원사 정숙첨이 不軌를 꾀하려 하니 신으로 교정별감을 삼아 巡檢軍 일번을 붙여 주면 가히 (이들을) 소탕하겠습니다”라고 했다는 사실을063)≪高麗史≫권 96, 列傳 9, 尹瓘 附 世儒.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고종 2년의 기록으로 최충헌집권기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윤세유가 국왕에게 교정별감의 직책과 아울러 순검군을 이용할 수 있도록 청한 점이다. 이로 미루어 교정도감에서는 모반사건의 치죄를 위해 순검군과 같은 국왕의 시위부대까지 동원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모반사건의 치죄권을 교정도감에 이양한 중방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리마저 상실했을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중방이 무인집권자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소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교정도감은, 그 구조를 분명히 밝히기는 어렵지만 합의기구는 아니었다. 그 장관인 別監이 정권을 행사할 수 있던 기구였다고 이해된다. 그런데 교정별감이 누구였는가에 대해서는 상반된 견해가 있어, 여기에서 무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즉 최충헌 자신이 교정별감이었다는 견해와,064)金庠基, 앞의 글, 217쪽. 다른 인물이 임명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065)邊太燮,<武臣亂과 崔氏政權의 成立>(≪한국사≫7, 국사편찬위원회, 1973), 120쪽. 그것이다. 설사 최충헌 아닌 다른 인물이 교정도감에 임명되었다 하더라도, 그가 최충헌과 밀착된 인물이었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교정도감은 최충헌의 의도대로 움직여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중방은 최고의 권력기구였기에 인사행정에 관여했는가 하면, 시장의 교역을 규찰하기도 했다. 그런데 교정도감이 정치적인 모반사건의 처리를 목적으로 설치되면서 중방의 이러한 권한까지를 대신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정보기관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다.066)金潤坤,<高麗 武臣政權時代의 敎定都監>(≪文理大學報≫11, 嶺南大, 1978). 정보의 수집은 정치적인 모반의 방지나 치 죄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므로, 교정도감에서 이러한 역할을 수행한 것은 매우 당연하다 하겠다. 이제 교정도감이 최고의 권력기구가 된 것이다. 사실 정치직인 모반사건의 진압이야말로 정권의 최대 과제이기에, 이를 관장하는 기구가 최고의 권력기구화 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한편 최씨집권기에는 宰樞會議가 빈번하게 개최되어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하였다. 최충헌의 집권과 더불어 재추는 山川裨補·延基에 관한 일이나 지방반란의 진압, 그리고 국왕의 사망에 따른 복상기간의 결정 등에 관한 사항을 논의했던 것이다. 이러한 논의에 국가의 고위 관료들인 재추가 참여한 것은 당연해 보인다. 따라서 최씨집권기의 재추가 국정에 관여한 사실을 여기에서 특기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충헌 이전의 무신정권 아래에서는 재추의 역할이 이처럼 돋보이지 않았으므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무신란 이후 최충헌의 집권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도 재추가 국정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있다. 재추는 조위총의 난 이후 지속된 서경지방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회의에 문무 3품 이상과 함께 참석하였으며,067)≪高麗史節要≫권 12, 명종 8년 3월. 중방·대간과 함께 시중의 되〔斛〕와 말〔斗〕을 일정하게 하는 데도 관여했던 것이다.068)≪高麗史節要≫권 12, 명종 11년 3월. 그러나 재추가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데 빠짐없이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국가의 중대사는 재추보다는 중방에 의해 처리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069)이에 관해서는 金庠基, 앞의 글, 208∼215쪽 참조. 재추가 문무 3품 이상이나 대간과 함께 국정에 참여했던 것으로 미루어, 국가의 중요한 관료들 모두가 참여한 경우에만 재추도 의례적으로 참여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무신란 이후 재추의 역할이 감소되었음은 都兵馬使에 관한 기록이 무신란 이후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도병마사는 변경의 군사적인 문제를 비롯하여 국정 전반을 논의하는 기구였는데, 그 고위직은 재추가 겸임하였다.070)邊太燮,<高麗都堂考>(≪高麗政治制度史硏究≫, 1971), 85∼92쪽. 이러한 도병마사가 무신란 이후 사료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071)邊太燮, 위의 글, 93쪽. 중방의 출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중방이 그 기능을 대신한 때문이었다. 따라서 재추는 도병마사를 통해서 국정에 참여할 기회마저 잃었었다.

 무신란 이후 국정에 참여하지 못했던 재추가 최충헌의 집권과 더불어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데에 예외없이 관여한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 이에 대한 해답과 관련해서 주목되는 사실은, 이러한 논의에 중방이 배제되었다는 사실이다. 재추들만의 회의에 의해 국가의 중대사는 결정되었던 것이다. 국가의 중대사가 중방을 제외한 재추들의 합의에 의해 결정되었다면, 중방의 권한은 그 만큼 약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최충헌은 중방을 약화시키는 방법의 하나로 집권과 더불어 의도적으로 재추를 국정에 참여시켰던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재추가 모두 문신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재추회의는 중방과 달리 다수의 문신들이 참여하는 모임이었다. 그러한 만큼 중방처럼 무인들이 그들의 힘을 모아 집권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최씨집권기의 재추회의는 최씨에 의해 소집되었고 그들의 私第에서 국정을 논의하였다. 재추회의의 회의 장소가 최씨의 사제였던 셈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추들이 최씨와 반대되는 견해를 제시할 수 있었을까는 의문스럽다. 최이집권기의 기록인 다음은 이와 관련해서 참고된다.

최우(즉 최이)가 재추들을 그의 집에 모아 천도를 논의하였다. 이 때는 오랜 동안 태평하여, 京都의 인구는 10만에 이르렀고 좋은 집들이 즐비하였으며, 사람들이 편히 살고 있었으므로 옮기기를 어렵게 여겼다. 그러나 최우를 두려워하여 감히 한 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다(≪高麗史節要≫권 15, 고종 19년 6월).

 몽고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강화천도를 논의하는 과정을 알려 주는 기록이다. 여기에서 재추들은 천도를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이가 두려워 감히 한 마디의 말도 못했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최이는 이미 천도를 결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최이는 천도를 결심한 후, 자신의 결정을 지지해 주도록 하기 위해 재추를 소집했다고 이해되는 것이다. 정책의 결정에 재추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재추는 고려의 최고 관리들이었다. 이들에 의해 국가의 중대사가 결정된다 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또한 이들에 의한 결정은 설득력을 지닐 수 있었을 것이다. 설사 최씨의 의도대로 재추가 움직였다 하더라도, 단순히 최씨 개인 의사가 아닌, 재추회의의 결정이라는 사실은 훨씬 설득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의 검토에서, 최충헌은 재추회의의 활성화와 교정도감의 설치를 통해 중방의 약화를 기도했음을 알았다. 결국 최충헌은 무인들의 문객에게 관직을 제수하지 않음으로써 무인들의 세력확보를 저지했을 뿐만 아니라, 무인들이 그들의 합의기구를 통해 자신의 정권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제도적인 장치를 통해서 배제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권력세습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권력세습과 관련된 또 다른 의문, 즉 최충헌의 사병이 어떻게 그의 후계자에게도 충성을 바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을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다른 무인들의 문객 보유를 철저히 방해했던 것과는 달리, 최충헌 자신은거대한 문객집단을 거느렸다. 그가 궁성을 출입할 때 그를 시종한 문객은 3천 명에 이르렀다 한다. 3천 명에 이르는 최충헌의 문객집단은 都房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다.072)柳昌圭,<崔氏武人政權下의 都房의 설치와 그 向方>(≪東亞硏究≫6, 西江大, 1985), 387∼389쪽. 이러한 도방은 ‘文·武·閑良·軍卒 가운데 강하고 힘센 자들’을 그 구성원으로 하여 6번으로 나뉘어 최충헌가를 숙직하고, 그가 출입할 때 그를 옹위하는 조직적인 체계를 갖춘 집단이었다. 즉 최충헌이 그의 문객 집단을 보다 조직적인 체계로 편성한 것이 도방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최충헌의 도방은 최이·최항·최의에게 차례로 계승되었다. 즉 도방은 최충헌의 뒤를 이어 권력을 세습한 자들에 의해 거느려졌던 것이다. 최씨가의 권력세습과 도방의 승계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궁금한 것은 최씨가의 권력세습에 있어서 도방이 행한 구체적인 역할과 아울러 최충헌의 도방이 어떻게 그의 후계자에 의해 거느려질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관한 해답을 구하는 것은 결국 최씨가의 권력세습이 가능했던 이유를 밝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최의의 권력세습 과정을 예로 들어 검토해 보기로 하자.

일찍이 최항은 최의를 宣仁烈과 柳能에게 부탁하여 ‘만약 (최의를) 도와서 (그가) 가업을 계승하게 되면, 이는 오직 너희들의 공로이다’라고 말하였다. 최항이 병이 들자 (그는) 인열·능 등의 손을 잡고 ‘그대들이 이 자식을 보호하여 주니 나는 죽어도 한이 없다’하였다. 최항이 죽자 殿前 崔良白은 이를 숨겨 發喪하지 않고, 칼을 어루만지면서 侍婢를 꾸짖어 울지 못하게 하는 한편, 선인열과 함께 최항의 말을 문객 대장군 崔瑛과 蔡楨, 그리고 유능 등에게 전했다. (그들이) 야별초·신의군·서방 3번·도방 36번을 모아 (최의를) 옹위하고 이에 발상하니, 왕이 최의에게 借將軍을 제배하고 또 명하여 교정별감을 삼았다(≪高麗史≫권 129, 列傳 42, 崔忠獻 附 竩).

 선인열과 유능은 최항의 문신 문객이었음이 분명한데, 최항이 그들에게 최 의가 권력을 계승할 수 있도록 부탁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또한 최의가 권력 을 계승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최항의 말을 최양백과 선인열이 문객 대장군 인 최영과 채정 등에게 전했다는 것도 권력 세습에 있어서 문객의 역할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인열과 최영·채정 등이 야별초·신의군·서방 3번·도방 36번을 모아 최의를 옹위하자, 국왕이 최의를 교정별감에 임명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국왕에 의한 최의의 교정별감 임명이 문객의 지지를 전제로 하였음을 알려 준다. 교정별감에 임명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곧 무신집권자가 되었다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감안하면, 최항 문객의 동의에 의해 최의는 집권자로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최항이 선인열에게 최의로 하여금 이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당부한「가업」이 결국은 정권의 장악을 의미하는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다만 최항이 권력의 승계를「가업」의 계승으로 표현한 점이나, 이를 그의 문객들에게 당부한 사실은 음미해 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최항이 말한「가업」의 계승이란, 정권 장악 이전에 그의 문객을 거느릴 수 있는 권리의 계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의 문객에게 ‘가업’의 계승을 당부한 사실로 미루어 그러하다. 따라서 최의로 하여금 ‘가업’을 계승할 수 있도록 한 최항의 부탁은 곧 최의를 구심점으로 문객이 단합해 달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최의가 최항 문객의 구심점이 되면, 정권의 장악은 자연스럽게 뒤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장 강력한 세력집단의 우두머리가 집권자가 된다는 것은 매우 당연해 보이기 때문이다. 최의와 최영·채정의 관계에서 그 실례를 엿볼 수 있다.

 최의가 권력을 계승할 당시 최항의 문객인 최영과 채정은 모두 대장군이었으며, 최의는 그 이후에야 비로소 借將軍에 오를 정도로 낮은 직위에 머물러 있었다. 즉 최의는 최항의 문객보다 공적인 지위가 낮았던 것이다. 최의가 집권자가 된 것은 그가 그들의 구심점이었기 때문이다. 최씨집권자와 문객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그들의 관계가 종속관계였다거나073)金鍾國, 앞의 글, 137쪽. 혹은 복종을 강요하는 주종관계였을 것이라는 견해가074)鄭杜熙,<高麗武臣執權期의 武士集團>(≪韓國學報≫8, 1977), 83쪽. 있는데, 아무튼 공적인 지위보다는 사적인 지위가 최씨가의 문객 내부에서는 중시되었던 듯하다.

 최씨와 문객과의 이러한 관계를 통해서 볼 때, 최항 문객의 대부분은 최의 를 중심으로 다시 결속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최항에게 충성을 바치고 그 대가를 기대하는 자들이었다. 즉 최항을 통해서 그들의 현실적인 지위를 누려온 인물들이었다. 최항이 죽은 뒤에, 그들은 최항의 가계를 잇는 자를 내세워 그들의 지위를 유지해 보려고 했을 것이다. 따라서 최씨의 가문을 잇는 자는 최씨의 문객을 거느리게 되고, 나아가 권력을 계승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최씨가의 권력 계승에 있어서, 문객의 승계가 권력 계승의 전제가 되었음은 최항의 경우에서도 확인된다. 최이는 최항에게 그의「家兵」5백여 명을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가병」이 문객의 일부인가 아니면 별개인가는 단언하기 어렵다. 다만 최이의 군사적인 기반이었다는 점에서, 설사 별개의 존재였다 하더라도 그 기능적인 면에서는 문객과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은 것이다.

 최씨집권자들이 도방을 거느리게 됨으로써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모든 도방 무인들이 최씨가 후계자로 지목한 인물을 지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후계자로 지목된 인물에게 반기를 들기도 했던 것이다. 어떠한 무인들이 후계자에게 반기를 들었으며, 그 까닭은 무엇이었나를 알아보기 위해 최이의 권력계승 과정을 주목해 보기로 하자.

최충헌이 병이 나자 글을 올려 사직할 것을 청했다. (국왕이 그에게) 姓을 내림에 미쳐, (그는) 아들 瑀(怡)에게 몰래 이르기를 ‘병이 장차 낫지 않으면 내부에서 변이 일어날까 두려우니, 너는 다시 오지 말라’고 하였다. 우는 그의 사위 金若先을 보내 병을 시중들게 하고, (자신은) 병을 칭탁하고 가지 않았다. 일찍이 충헌에게는 桐花라는 여종이 있었는데, 용모가 아름다워 마을 사람들이 많이 사통하였으며 충헌도 역시 사통하였다. 어느날 (충헌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너는 누구를 남편으로 삼겠느냐’ 하니 그 여종이 興海貢生 崔俊文이라고 대답하였다. 충헌은 즉시 준문을 불러 집에 머무르게 하고 종처럼 부리다가 隊正에 보임시켰는데, 날로 총애를 더하자 (충헌에게) 부탁하려는 자들은 모두 그에게 붙었다. (준문은) 여러 번 옮겨 (벼슬이) 대장군에 이르렀다. 또 충헌의 집 곁에 사제를 크게 지어 놓고 용사들과 사귀었으며, 上將軍 池允深·將軍 柳松節·郎將 金德明 등과 더불어 충헌의 羽翼이 되었다. 충헌이 병이 나자 4인이 모의하기를 ‘공이 세상을 버리면 우리는 반드시 우에게 참혹한 죽음을 당할 것이다. 막내 아들 珦은 담력이 뛰어나니 가히 대사를 맡길만 하다’ 하였다. 이에 최우가 문병하는 것을 엿보아 이를 제거하고자 하여, 우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영공께서 병이 위독하여 급히 공을 보고자 한다’ 하고 사람을 여러 차례 보내니, 우가 더욱 의심하여 이르지 않았다. 덕명이 도리어 그 모의를 瑀에게 고하니 우가 그를 위로하여 머물게 하였다. 조금 있다가 준문과 윤심 등이 와서 말하기를 ‘공의 병이 급하니 속히 가서 뵈라’고 하자 우가 곧 2인을 잡아 송절과 함께 먼 섬에 나누어 귀양보냈는데, 도중에 준문을 죽였다(≪高麗史節要≫권 15, 고종 6년 9월).

 최준문 등이 최우, 즉 최이의 권력계승을 저지하다가 도리어 죽음을 당했다는 내용의 기록이다. 최준문은 도방 무인이었음이 분명하다. 최충헌의 집에서 노예처럼 부림을 당한 그가 대정을 거쳐 대장군에 이르렀다거나, 최충헌의 집 곁에 사제를 지어 놓고 용사들과 사귀었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는 곧 그가 최충헌의 신변호위를 담당했음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최준문과 함께 최충헌의 우익이었다는 상장군 지윤심·장군 유송절·낭장 김덕명도 도방 소속의 무인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익’이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그들은 도방 무인들 가운데서도 최충헌의 심복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최충헌의 심복이 최이의 습권을 저지한 셈이다. 그들이 최이의 권력계승을 반대한 이유는 최이에 의해 죽음을 당할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최이가 정권을 장악하면 자신들이 무사하지 못할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바로 이 점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최충헌의 심복이면 최이로부터도 적절한 대우를 기대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으므로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최충헌의 후계자와 최충헌의 심복이 정치적으로 적대관계에 놓이게 된 이 유를 밝히기 위해서는 최충헌과 최이의 정치적인 관계를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부자 사이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집권자와 후계자 사이였던 최충헌과 최이의 관계를 달리 설명할 수 있는 사료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이에 최이와 그의 사위였던 김약선의 관계를 참고해 볼까 한다. 그들 역시 집권자와 그 후계자였기에 적지 않은 시사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최이의 후계자로 내정되었던 김약선은 그의 처, 즉 최이의 딸의 무고로 최 이에 의해 살해되었다. 일찍이 김약선의 처는 종과 사통했는데, 김약선이 이를 알자 그의 처는 ‘다른 일’로서 최이에게 고했다는 것이다.075)≪高麗史≫권 101, 列傳 14, 金台瑞 附 若先. 김약선의 처 가 최이에게 고한 ‘다른 일’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김약선의 최이 에 대한 정치적인 모반사건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가 후계자로 지목한 인물을 평범한 계기에서 살해했을 까닭이 없는 것이다.

 김약선의 처가 최이에게 고한 ‘다른 일’이 무고였음이 밝혀진 것은 김약선이 제거된 이후였다. 최이는 김약선의 처가 고한 ‘다른 일’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조사해 보지도 않고 김약선을 제거했던 것이다. 김약선에 대한 최이의 경계심이 대단했음을 알려 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김약선은 고종 22년 그의 딸을 태자비로 들임으로써 명실상부하게 실력자로서의 위치를 굳혔던 듯하다. 그의 처가 궁궐에 들어갈 때, 국왕은 그녀가 태자비의 어머니라 하여 왕비의 例에 의거하여 儀仗을 갖추게 했던 것으로076)≪高麗史節要≫권 16, 고종 23년 2월. 미루어서도 짐작되는 일이다. 김약선의 이러한 위치에 최이는 불안을 느꼈고, 따라서 그를 제거하기에 이르렀던 것이 아닌가 한다. 결국 최이는, 비록 그의 후계자라 하더라도 그를 능가할 정도의 세력 확대는 용납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김약선에 대한 최이의 태도가 그러했다면, 최충헌 역시 그의 독자적인 세력 확대를 달갑지 않게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 鄭叔瞻의 행동에서 그러한 단서를 잡을 수 있다.

 정숙첨은 최이의 장인으로서, 희종 6년 희종과 王濬明 등의 최충헌 살해 음모 사건 당시 거의 죽게 된 최충헌을 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는 契丹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출정한 종군승들의 최충헌 살해 모의에 연루되어 河東에 유배되었다. 고종 4년의 일인데 당시 그는 中軍元帥로 출정하였다. 출정 중이었던 그가, 거란의 침입을 최충헌의 실정의 결과로 돌려 최충헌을 비난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이 사건에 무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설사 무관했다 하더라도, 종군승들이 그를 끌어들일 만큼 그와 최충헌의 관계는 이미 멀어졌던 것 같다. 당시 정숙첨은 거란 토벌의 원수로 임명된 것에 불만을 품었다 한다. 최이의 장인으로서, 최충헌정권의 실력자였던 그가 출정군의 원수직을 반겨했을 까닭이 없을 듯하다. 그러나 그의 불만의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정숙첨은 최이에 힘입어 죽음을 면하고 하동에 유배되었는데, 곧 최이에 의해 소환되고 평장사에 임명되었다. 최이가 정숙첨을 구했다는 것이나, 그가 집권과 더불어 정숙첨을 소환하여 평장사에 임명한 사실에서, 정숙첨의 최충헌에 대한 적대행위는 최이를 의식한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정숙첨은 그의 사위인 최이의 독자적인 세력 확대를 기도했고,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최충헌과 갈등을 일으켰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 정숙첨의 출정군 원수직 임명도 최이 세력에 대한 최충헌의 견제책의 일부였는지도 모른다. 최이와 적대 관계의 최충헌 심복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최충헌의 최이에 대한 견제의 가능성을 한층 크게 만들어 준다. 결국 최충헌은 그의 심복들을 통해서 최이의 독자적인 세력 확대를 견제했고, 따라서 그들은 최이의 권력 계승을 반대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최충헌의 심복이 최이의 권력 계승을 저지하려 했지만, 그는 대부분 문객의 지지에 의해 권력을 승계할 수 있었다. 가장 강력한 세력집단인 최충헌의 문객을 거느린 최이는 자연스럽게 정치권력을 장악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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