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8권 고려 무신정권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4. 무신정권의 붕괴와 그 역사적 성격
  • 1) 김준 정권
  • (2) 김준의 집권

(2) 김준의 집권

 최항의 신임과 지지를 받으며 그에게 충성을 아끼지 않던 김준 등이 최항이 죽은 뒤 불과 1년도 못되어 최씨가를 등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최의의 집권과 함께 변화된 김준의 정치적 위치를 통해 설명될 수 있겠다. 김준은 최의가 崔良伯·柳能 만을 총애하여 신임하고 자신을 멀리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소외시킨데 대해 불만을 품었다. 최의는 고종 44년(1257) 윤 4월에 최씨정권 집권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를 최항의 후계자로 추대한 자들은 최양백과 유능 그리고 宣仁烈이 중심이 된 일군의 정치세력이었다. 최양백은 김준과 함께 최항의 권력계승에서 공을 세워 별장이 되었던 최씨가의 가노였다. 그와 김준과는 사돈 관계로, 최항의 집권기에 김준과 거의 비슷한 성격의 심복이었을 것이다. 최항이 병사하기 전에 최의를 계승자로 지목하고, 그를 보좌하도록 부탁받은 측근 문신이 선인열과 유능이었다. 최씨가의 문객 崔瑛이나 蔡楨과 같은 대장군도 최의의 권력세습에 군사적 지지기반이 되었다. 최의는 자신의 권력계승에 주도적 역할을 한 자들에게 보다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김준을 위시한 나머지 최씨가의 가신들은 최의의 권력승계를 계기로 집권자로부터 소외되었다. 따라서 최씨가의 심복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고, 이로부터 최씨권력기구 안에 가장 강력한 적대세력이 형성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김준 일파에게 정변의 불씨를 던진 것은 대장군 송길유의 유배 사건이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송길유는 김준의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가계가 천하고 병졸에서 입신한 자로 최항을 섬겨 夜別抄 指諭가 되었다. 그가 갑자기 출세하여 대장군까지 오르게 된 데에는 최항의 특별한 배려가 있었다. 최항은 송길유를 賤系이기 때문에 御史中丞에 임명할 수 없다는 유사를 핍박하면서까지 임명장에 서경하도록 한 일도 있었다. 이런 송길유야말로 최항의 대표적인 심복이었다. 최항은 송길유를 시켜 자신의 정적을 살해하도록 하는가 하면, 대몽항전의 일환으로 백성들을 海島入保시키는 일을 맡기기도 하였다. 이에 송길유는 야별초를 이끌고 이를 독려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그가 행한 불법적인 행동이 후일 안찰사 宋彦庠의 탄핵을 받기에 이르렀다. 송길유가 안찰사의 탄핵을 받은 것은 최의가 집권한 후의 일이었는데, 그를 구하려는 김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송길유는 최의에 의해 유배보내졌다. 바로 이 일이 생긴 다음부터 최의는 김준 등을 접견조차도 하지 않았다 한다.122)≪高麗史≫권 122, 列傳 35, 酷吏, 宋吉儒.
鄭修芽,<金俊勢力의 形成과 그 向背>(≪東亞硏究≫6, 1985), 416∼417쪽.

 최씨가의 가노였던 김준이 집권자인 최의에게서 소외된 사실은 그로 하여금 정치적 위기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사실 정치권력의 핵심에 근접해 있는 심복들 간에 집권자의 총임을 독차지하기 위한 갈등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집권자가 강력한 정치적 지지기반을 확보하고 있을 경우 심복들의 갈등은 표면화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집권자의 심복에 대한 의존도가 크면 클수록 심복들의 갈등은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최의는 母系가 천했을 뿐만 아니라 연소했다 한다. 그의 심복에 대한 의존도가 컸음은 당연하고, 그런 만큼 그의 정권은 심복들의 사소한 갈등에 의해 자체 붕괴될 취약점이 내재되어 있었다. 집권자로부터 소외된 김준은 더 한층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이를 타결하기 위해서 집권자를 제거하는 수단까지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고종 45년(1258) 3월, 江都에서는 김준을 위시한 일군의 정치세력이 최의를 주살하는 정변에 성공하였다.123)崔竩를 제거한 정변이 진행된 대강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즉 神義軍 別抄의 장교였던 朴希實과 李延紹가 柳璥·金俊·金承俊·李公柱·朴松庇·林衍·朴天湜·車松祐·金洪就·金大材·金用材·金式材 등을 비밀리 만나, 정변의 이유를 말하고 4월 8일의 觀燈會를 이용하여 거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같은 비밀스런 계획은 탄로되어 즉시 최의에게 보고되었다. 김준의 아들인 김대재가 그의 妻父인 崔良伯에게 협조하도록 요청함으로써 알려진 것이다. 최양백은 겉으로는 거사에 호응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곧 최의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최의는 즉시 유능을 불러 역습을 계획하였다. 유능은 이미 늦은 밤이므로 밤 사이에 변란은 생기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다음날 일찍이 거사음모자들을 체포해도 늦지 않으리라 제의했고, 최의도 여기에 동의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이 긴박한 상황에서 정변은 다음 날로 미루어지지 않고 앞당겨져 바로 그날 늦은 밤에 일어났다. 김대재의 처는 생부인 최양백이 최의에게 보고한 사실을 듣고 김대재에게 알렸고, 이 사실이 김준에게 보고되면서 빨리 역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들들을 데리고 신의군 진영으로 달려가서 박희실과 이연소에게 사태의 급박함을 전하고, 함께 모의에 가담했던 자들과 三別抄를 불러 모아 최의와 그의 측근들을 제거하였다(≪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附 竩). 정변의 모의에 있어서나 그 실행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자들은 최씨가의 가노들이었다. 김준 외에도 金承俊·李公柱, 그리고 金大材·金用材·金式材 등 김준의 세 아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김승준은 김준의 친동생이었으며, 이공주는 최씨가를 3대에 걸쳐 섬겼던 인물로 가노들에게 대부격인 존재였다. 이공주와 이승준은 최항의 권력승계에 기여한 공으로 각각 별장과 대정이라는 하급 무관직을 제수받았던 점에서, 김준과 비슷한 경로를 밟아 출세한 인물들이다.124)崔沆의 집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최씨가의 가노로는 金俊·李公柱·崔良伯으로, 이들은 崔怡집권시기에 殿前承旨였다가 최항의 집권기에 모두 별장이 되었다. 최항대에 와서 관직을 받게 된 최씨가의 가노들 가운데는 校尉에 임명된 聶長守와 隊正에 보임된 金承俊도 있었다. 이들도 김준과 마찬가지로 최항의 권력계승을 계기로 크게 출세한 자들이라 하겠다(≪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附 沆·竩). 따라서 이들 가노세력은 김준이 그러했듯이, 최항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으며 그의 심복이자 막강한 실력자로 성장하였다.

 대사성 유경은 정변의 주동자 가운데 유일한 문신관료였다. 그는 무신정권 이후 재상가로 발돋움한 가문의 출신이었다. 하지만 그 자신이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최항의 집권기부터였다. 이 시기에 오랜동안 정방에 소속되어 인사권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과거시험의 고시관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가 문신임에도 불구하고 최항의 두터운 신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최항정권을 특징지어주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몽고정부는 그를 최항과 함께 出陸還都를 거부한 몇몇의 관료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로 지목하기도 했다. 따라서 최항의 심복들 가운데 유경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라고 하겠다.125)鄭修芽, 앞의 글, 418∼419쪽.

 정변의 또 다른 주모자였던 神義軍 都領郎將 朴希實과 指諭郎將 李延紹는신의군의 단위부대를 지휘하였던 장교다. 이들은 김준에 의해 단순히 동원된 병력만은 아니었다. 최의를 제거하자는 논의가 제일 먼저 이들로부터 나왔던 점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崔竩를 없애지 않으면 그들 자신이 죽음을 면하기 어려웠던 처지에 있었던 것 같다. 또 정변의 모의가 사전에 누설된 사실을 알자마자, 김준이 첫번째로 취한 행동도 이런 상황을 뒷받침해 준다. 그는 일단 신의군 진영으로 달려 가서 이들과 사태의 해결을 위해 의논했던 것이다. 정변 직후의 衛社功臣에 이 두 사람이 나란히 3위와 4위의 높은 서열에 오르게 될 정도로 이 사건의 핵심인물이라고 하겠다.

 박희실 등이 소속된 신의군은 左·右別抄와 더불어 삼별초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던 최씨가의 爪牙였다. 이 부대는 최항의 집권기에 해당하는 고종 41년(1254)에서 동왕 44년(1257) 사이에 조직되었다. 당시는 몽고가 대거 침입한 후 철수의 조건으로 江華政府의 출륙환도를 끈질기게 요구하고 있던 때이다. 집권자 최항으로서는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출륙환도는 자신의 정권의 종말을 의미하기에 항몽을 고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대다수의 관리들은 출륙환도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는 이러한 여론을 묵살하여 자신에게 불리한 정국을 타개하는 방법을 강구해야만 하였다. 이에 몽고로부터 逃還한 사람들로 신의군을 조직하여 몽고와의 강화에 대한 쐐기를 박으려 했던 것이다.126)金塘澤,<崔氏政權과 그 軍事的 基盤>(≪高麗武人政權硏究≫, 1987), 196∼199쪽. 신의군이 이같은 정치적 목적 아래 조직되었던 만큼, 박희실·이연소는 최항의 정권유지에 선봉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미 야별초가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군사조직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것이 항몽을 위한 것이든 혹은 다른 이유이든 최항의 정권유지를 위해 필요한 병력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변의 주체세력 중에는 삼별초 혹은 도방에 소속한 장교들도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인물이 박송비와 임연이다. 박송비는 원래 향리로 軍伍에서 출발하여 김준의 정변시에는 장군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송길유와 함께 김준을 최이에게 천거하였던 인물이다. 그가 속하였던 부대는 잘 알 수가 없지만, 분명한 점은 그가 최이 이래로 최씨집권자나 김준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도 역시 최씨가와 밀착된 무인이었고 따라서 야별초나 도방에 속하였을 가능성이 크다.127)鄭修芽, 앞의 글, 418쪽.
金塘澤, 위의 책, 218∼219쪽.

 지금까지 설명한 바, 최의를 주살한 장본인은 공교롭게도 최씨무신정권을 떠받치던 핵심인물들이었다. 더구나 최항의 신임하에 급작스럽게 출세한 심복들로서, 그의 정권 유지에 앞장섰던 자들이었다. 따라서 최항의 심복 중의 심복이었던 송길유가 최의에 의하여 유배되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이들이 심각한 위기감을 갖게 되었던 점을 주목하면, 김준을 중심으로 형성된 일군의 정치세력이 정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최씨가의 몰락에 동원된 병력에는 김준의 심복이라고 해야 할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임연이라든가 박기 등이 그러한 예에 속할 것이다. 이 밖에 정변에 참여한 다수의 하급 장교들은 어떤 경위로 김준의 군사력으로 동원되었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다만 당시 임연이 都領郎將이라는 직위로 야별초의 단위부대를 지휘하였던 것으로 짐작되며, 신의군 장교였던 박희실·이연소가 신의군을 동원하였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최씨가가 의존해 왔던 군사력이 정변에 이용되었고, 아울러 이들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김준의 정치적 영향권 안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최의와 그의 측근을 없애는 것만이 정변의 목적은 아니었다. 이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정변의 주체자들 가운데, 유경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무인이었고 그들 대부분은 신분이 낮은 하급 무관들이었다. 이런 사실은 김준 등이 당장 國權에 크게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한계점을 충분히 감안하였던 것 같다. 정변 중에 문신인 權密院使 崔昷을 덕망있는 대신이라 하여 추대하고, 거사에 호응을 호소하였다.128)≪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附 竩. 이들이 내세운 정변의 명분은 왕정의 복구로서, 최의 일당을 주살하고 곧바로 국왕에게 復政하였다. 마치 무신정치가 종지부를 찍고 다시 무신란 전과 같이 왕정이 복구된 듯하였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정권이 서서히 정변의 주역들에 의해 장악되어가고 있었다.129)거사의 명분을 얻기 위해 내세웠던 崔昷은 불과 3개월 후에 유배되었다. 그의 아들인 崔文本이 崔竩에게 정변의 계획을 보고한 밀서가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김준과 유경이 최온 부자의 사형을 요구하며 국왕과 대립하다가, 결국 유배보내기로 타협하기에 이른 것이다(≪高麗史節要≫권 17, 고종 45년 6월).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들 내부의 결집력은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최의의 제거라는 공동의 과제가 실현된 다음에는 이들을 함께 묶어 줄 공통의 줄이 없었다. 오히려 누가 정권을 장악하는가라는 궁극적인 문제를 두고, 그들 각자는 이해를 달리하는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정변 이후 몇 차례에 걸쳐서 고쳐진 공신의 숫자와 서열상의 변화가 이런 현실을 입증한다. 이는 곧 공신들의 정치적 위치가 변화하였음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戊午政變」이라 불리우는 이 거사가 성공한 다음 달인 고종 45년 4월 그 주역 8인에게 衛社功臣號가 주어졌는데, 그들의 서열을 보면 柳璥·金俊·朴希實·李延紹·朴松庇·金承俊·林衍·李公柱였다. 이 밖에 김준의 세 아들을 포함하는 19명의 가담자도 同力輔佐功臣에 책봉되었다. 그 후 고종 46년(1259) 5월 12인의 공신이 端午宣賜를 받았는데, 이 때 추가된 4명의 공신은 金大材·金用材·金式材 그리고 車松祐 등이다. 인종 원년(1260)에는 12명의 공신에 다시 金洪就가 포함되어, 최종적으로 13명의 위사공신이 확정되었다. 추가된 공신은 정변 후에 정국의 진행 방향에 힘입어 새로이 부상되었으므로, 이들은 당시 변화된 실질적인 실력자와 연결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5인 가운데 김준의 아들이 3인이며, 나머지 차송우와 김홍취는 원종 9년 김준을 제거하는 정변에서 그와 생사를 함께 나누거나 유배된 김준의 심복이었다.130)許興植,<1262년 尙書都官貼의 분석(上)>(≪韓國學報≫27, 1982), 47∼48쪽.
成鳳鉉,<林衍政權에 관한 연구>(≪湖西史學≫16, 1988), 26∼27쪽.
이로 미루어 볼 때, 공신 수의 증가는 공신집단 내에 김준의 측근세력이 확대되었음을 알려 준다.

 이런 현상은 숫적 증대 외에 그들의 서열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최초 8인의 위사공신을 책봉할 때, 서열 1위였던 유경이 원종 원년(1260) 6월에 5위로 밀려나고 대신 김준이 1위로 부상하였다. 원종 3년(1262) 10월 功臣堂에 壁上圖形된 공신들은 김준·박희실·이연소(李仁桓)·김승준·박송비·유경·김대재·김용재·김직재(金碩材)·차송우·임연·이공주·김홍취 등의 서열로 정해졌다. 김준의 동생인 김승준이 서열 6위에서 4위로 뛰어오르고, 그의 아들인 김대재·김용재·김직재도 역시 7위에서 9위까지의 공신서열에 끼어들어 갔다. 반면에 유경의 서열은 6위로 한 단계 다시 떨어졌으며 임연과 이공주도 각기 서열 11위와 12위로 처지고 있다. 이러한 서열상의 변화도 김준 및 그의 측근세력이 새로이 부상한 반면, 나머지 공신들이 소외되는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131)許興植, 위의 글, 34∼39쪽.
成鳳鉉, 위의 글, 27쪽.

 실제로 노비의 신분에다 보잘 것 없는 직위에 있던 김준으로서는 과거 최씨 집권자가 행사하던 막강한 권력을 다시 장악하지 않으면, 자신의 생존조차도 보장받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더구나 최씨가의 가신에 대한 김준의 영향력은 최씨가가 몰락해버린 상황에서 미미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실은 정변 직후부터 그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정변의 일등공신인 유경이 신속하게 정권을 장악해 나갔던 것이다. 그는 최씨가가 붕괴되자마자 정방을 편전의 옆에 둔 장본인으로, 자신은 樞密院右副承宣에 超遷되어 모든 인사 행정과 국가 기무를 독단적으로 처리하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휘하에 사적인 군사력도 결집시키고 있었다. 그 병력의 지휘관들은 장군 禹得圭나 지유 金得龍·별장 梁和 및 낭장 慶元祿과 같은 인물이었다. 반면에 자기와 함께 정변을 주도했던 다른 공신들의 세력을 억제시켰다. 공신들 가운데 유일하게 문신이었던 유경은 승선직에 있으면서 누구보다도 국왕과 밀착하기가 쉬웠고, 왕권을 배경으로 삼아서 점차 정권을 장악하여 갔다. 이러한 유경의 행동은 김준을 비롯한 나머지 공신들의 반발을 야기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이에 김준은 그들 공신들과 다시 결합하여 고종 45년 11월 유경을 승선에서 薟書樞密院事로 좌천시키고, 그의 심복인 우득규 등의 장교들을 제거하기에 이르렀다.132)鄭修芽, 앞의 글, 436쪽.

 유경이 실각한 뒤에는 김준이 공신들의 대표자가 되어 무신정치를 행하였 다. 그러나 아직 확고한 권력기반을 구축하지 못한 김준으로서는 공신들과의 관계를 신중하게 대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이들이 60여 년 동안 정권을 장악했던 최씨가를 몰락시킨 당사자들이자, 막강한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는 무인집단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각별한 예우를 염두에 두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세력이 자신을 위협할 수 없도록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 그 대상으로서 제일 먼저 지목이 가는 자는 박희실과 이연소 같은 신의군 장교였다. 정변 당시 나타난 그의 역할이나 공신의 서열로 보아도 공신 집단 안에서 김준을 위협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세력이라고 하겠다.

 정변 이후 박희실의 정치적 활동은 주로 몽고와의 외교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정변에 참여하였던 장군 趙文柱·朴天植 등과 함께 고종 45년 12월 몽고에 사신으로 가서, 이듬해인 원종 즉위년 8월에 귀국하였다. 西京과 義州에 들어와 주둔하고 있던 몽고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기 위해 파견된 것이다. 같은 해 11월 출륙환도가 지연되는 것을 책망하는 몽고 사신에게, 그는 嗣王 즉 고종을 이어 등극해야 할 태자가 귀국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환도가 불가능하다는 반론을 펴서 사신을 제압하였다. 당시 대몽정책은 새로운 정권의 안정과 관련하여 더 말할 나위없는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런 만큼 사신의 역할도 큰 것임에 틀림없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박희실 등의 정변 핵심 인물이 대몽외교에 주력했던 것은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원종 원년부터 갑자기 박희실의 정치적 활동은 자취를 감추고 있다.133)鄭修芽, 위의 글, 420∼424·436∼437쪽. 지금 그 이유야 잘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김준의 집권강화 과정에서 박희실 등이 소외되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쩌면 정변 이후 그의 정치적 성격이 김준과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런 추측은 그가 몽고에서 귀국할 때, 元의 황제가 그에게 金符를 주어 萬戶로 삼았다는 사실에서 나올 수 있겠다.134)≪高麗史節要≫권 17, 원종 즉위년 8월. 몽고측에서 親元勢力을 부식시키려는 목적으로 고려의 군관에게 준 직책이 만호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박희실을 위시한 일부 공신의 성격이 오히려 친원적인 성향으로 기울어갔던 게 아닌가 한다. 사실 박희실이 정변 직후 대몽사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정변의 주체자였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사신으로서 일정한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고 보인다. 이미 그는 고종 25년(1238)에 義州別將의 직을 띠고, 사신 金寶鼎 등을 수행하여 몽고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135)≪元高麗紀事≫태종 10·11년(고려 고종 25·26년). 더군다나 신의군이 몽고로부터의 逃還人으로 조직되었다는 사실에서 그가 뒤에도 어떤 형태로든 몽고와 접촉을 가졌음을 알게 된다. 대외적으로는 점차 몽고의 압력이 가중되고 국내에서는 강화에 대한 여론이 거세지던 당시 정황에다가, 이제 몽고로부터 만호의 직까지 제수받은 박희실이 굳이 항몽을 고수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타협적인 입장이거나 더 나아가 친원적인 정치 노선을 띠게 되지 않았나 한다.

 박희실이 몽고에 파견된 시기는 고종 말년과 국왕의 자리가 비어 있던 원종 즉위년이었다. 뒤에 원종이 된 태자 倎은 고종 46년 4월 부왕의 병세가 위독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몽고로 향했다. 몽고측이 군대를 철수하는 조건으로 태자의 입조를 독촉했기 때문이다. 왕위를 이어야 하는 태자가 궐위인 가운데 6월 고종이 승하하였다. 이듬해 4월 태자가 귀국할 때까지 국정은 임시로 太孫에게 맡겨졌다. 요컨대 박희실과 같은 견제세력이 없는데다 왕권마저 행사되기 어려운 시기였으므로, 집권 강화를 모색하던 김준에게 절호의 기회가 제공된 셈이다. 그의 세 아들과 심복 차송우가 바로 5월에 위사공신에 추가된 것도 이러한 권력 장악의 한 단면으로 여겨진다.

 이 때 김준은 군복을 입고, 갑옷으로 무장한 군사들과 동궁의 관속을 거느리고 태손 諶을 받들어 대궐에 들어갔다고 한다. 당시 그는 우부승선의 직책에 올랐는데, 이는 유경이 정변 직후에 모든 인사 행정과 국가 기무를 장악했을 때의 바로 그 관직이었다. 김준은 이 기간에 자신을 중심으로 한 무신집권체제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견고하게 구축해 놓은 자신의 집권체제 안으로 박희실을 또 다시 받아 들일 리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김준이 무신정권의 성격을 고수하는 입장에서, 出陸講和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군사력을 보유한 친몽세력의 존재가 김준정권에 치명적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런 이유로 박희실 등은 김준의 집권체제 밖으로 밀려 났던 것으로 여겨진다.

 원종 원년(1260) 4월 태자는 몽고로부터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5월에는 1년 가까이 국왕을 대신하였던 아들 諶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태자의 책봉에는 원종의 次妃 王氏 등의 방해가 있었으나 김준의 후원으로 순조로울 수 있었다. 곧 이어 6월에 위사공신의 서열이 고쳐져서 김준이 1위에 오르고 이내 權密院使로 승진하였다. 이제 김준은 그에게 가장 위협적인 유경·박희실 등의 공신세력을 제압하고, 국왕의 등극과 태자의 책봉을 지지할 수 있는 실권자의 자리를 확보하기에 이른 것이다.

 김준의 권력장악이 확실시된 원종 3년 彌勒寺의 功臣堂에는 13명의 위사공신이 벽상도형되었다. 여기서 김준 및 그의 자제를 주축으로 한 공신세력의 재편성을 확인해 볼 수 있지만,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최이가 다시 遷都功臣으로 숭앙되어 공신당에 도형이 마련된 사실이다. 그는 최씨정권의 붕괴와 동시에 부정되고 비판당해 왔던 터였다. 대몽항쟁을 주도한 최이가 천도의 공으로 추념받아 공신이 된 것은 과거의 항전에 대한 긍정적 의미부여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최이의 천도와 항몽정책을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최이의 전철을 밟아 강력하게 집권하겠다는 김준의 의지가 뚜렷해지고 있다고 하겠다.136)許興植, 앞의 글(1982), 48쪽.

 김준에게는 2년 후에 권좌의 정상을 치닫게 된 계기가 왔다. 원종은 5년(1264) 8월에 몽고의 요구에 의해 元行하게 되었는데, 이에 앞서 김준을 교정별감으로 삼아 국가의 非違를 규찰하는 권한을 주었는가 하면, 監國의 대권을 맡김으로써 실제로 국내에서 국왕과 같은 권력을 부여해 주었다. 이것은 반대파의 모든 관료나 더 나아가 위협의 우려가 되는 인물들을 적법하게 제거할 수 있는 권한이나 다름없었다.137)金塘澤, 앞의 책, 77∼78쪽. 김준을 추천해서 출세시켰던 은인인 박송비도 그 대상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원종이 몽고로 떠난 직후 파직당했다. 풍수를 업으로 하는 白勝賢의 말에 따라 假闕을 지어 원종의 入朝를 막아 보고자 한 김준에게 반대하였기 때문이다.138)≪高麗史≫권 26, 世家 26, 원종 5년 8월 임자 및 권 123, 列傳 36, 嬖幸 1, 白勝賢. 김준의 정책에 순순히 따르려 하지 않은 자는 비록 자신의 도당일지라도 제거함으로써, 그의 독단적인 무신정권을 더욱 강화시켜 나간 것이다. 그 해 12월 귀국한 원종은 그를 海陽侯로 봉하고 晉陽公의 고사에 따라 예우하도록 함으로써 다시 최씨무신집권기의 체제로 되돌아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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