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8권 고려 무신정권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1. 사병의 형성과 도방
  • 2) 도방

2) 도방

 都房이 처음 설치된 것은 慶大升이 정권을 장악하면서이다. 경대승은 명종 9년(1179) 정중부 일당을 제거하고 26세의 나이로 집권하게 되는데, 신변에 위협을 느껴 결사대를 그의 私第에 머물게 하고 이를 도방이라 불렀다 한다.203)≪高麗史≫권 100, 列傳 13, 慶大升. 경대승이 조직한 도방은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그 조직이 치밀하고 지휘체계가 일사불란하게 확립되어 있었던 것같지는 않다. 도방의 구성원 가운데는 개인적으로 약탈 행위를 하는 등 불법적인 행위를 빈번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행동은 도방의 구성원이 일정한 질서 가운데 체계화된 조직이 아닐 것이라는 짐작을 가능하게 하여 준다. 경대승의 도방은 명종 13년 경대승이 죽은 후 폐지되었으나 무신 집권자 개인이 자신을 위한 사적인 군사기구를 가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도방이 무신정권의 군사기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최충헌정권이 들 어서고 난 이후이다. 최충헌은 집권한 지 5년이 지난 신종 3년(1200) 도방을 설치하였다. 그렇지만 도방이 갑자기 조직되었던 것은 아니고 그가 5년 동안 집권하면서 닦아 놓은 기반 위에 이룩한 것이라고 하겠다.

 최충헌이 도방이라는 사적 군사기구를 조직하게 된 배경을 알아보기 위하여 그의 집권 과정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집권한 것은 명종 26년(1196)이다.204)최충헌정권의 성립과 관련하여 金塘澤,≪高麗武人政權硏究≫(새문사, 1987)를 참고 바람. 이의민을 제거할 당시 최충헌은 눈에 두드러질 만한 세력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 최충헌은 자신의 아우 최충수, 그리고 그의 족당으로 알려진 朴晋材·盧碩崇 등과 더불어 이의민을 제거하였다.205)≪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이밖에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할 무렵 그를 추종하는 군사집단은 보이지 않는다.

 최충헌은 이의민을 살해한 이후 그의 남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壯士 불러 모았다. 이들이 어떠한 사람들이었는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최충헌이 대장군 李景儒, 崔文淸 등과 함께 장사를 불러 모은 것으로 보아 그들은 대장군 이경유와 최문청의 권위에 의해 최충헌에게 가담할 수 있었던 군인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들 장사들이 최충헌에게 가담함으로써 여러 衛의 군사가 합세한 것으로 보아 장사는 여러 위에 속한 군사와는 구별되는 군인이며, 그들의 향방에 따라 여러 위의 군사가 태도를 결정할 만큼 강한 영향력을 가진 집단이었다고 하겠다.206)柳昌圭,<崔氏武人政權下의 都房의 설치와 그 向方>(≪東亞硏究≫6, 西江大, 1985), 382쪽.

 최충헌은 이들 장사를 중심으로 곧 바로 자신의 직속 군사를 편성하였다. 최충헌이 자신에게 반기를 든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衆’이라고 표현된 군인을 이끌고 대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러하다. 자신이 거느린 군인이 이 의민 제거 당시에는 보이지 않다가, 이의민을 제거한 이후 나타나는 것은 신속하게 자신의 군사집단을 형성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최충헌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거느리게 된 군사들은 이의민 세력을 제거한 이후 최충헌 일파의 정권이 공고해져 가면서 더욱 정비되었다. 최충헌이 집권한 지 1년이 지난 후 杜景升 세력을 축출할 당시 그 일파가 동원한 군사를 살펴 보면 최충헌 형제를 비롯한 박진재, 김약진, 노석숭 등이 자신들의 군사를 中軍으로 하고, 여러 위의 군사로 좌·우·전·후의 4군이 되도록 하여 5군을 편성하고 있다.207)≪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이로 보아 최충헌 일파가 거느린 군사가 여러 위의 군사와 함께 전투체제를 갖출 수 있을 만큼 수적으로 증가되었으며 지휘체계가 정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최충헌과 그의 동생 최충수가 대립하는 과정을 살펴 보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명종 27년(1197) 최충수는 자신의 딸을 東宮의 妃로 들이려고 하였으나, 최충헌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208)≪高麗史≫권 129, 列傳 42, 崔忠獻. 이로 말미암아 서로 대립하여 싸우게 되었는데, 최충헌과 최충수는 각기 1,000여 명에 달하는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최충수의 경우 1,000여 명에 달하는 군사를 몇 명의 장군이 나누어 지휘하였으며, 최충수가 최고 우두머리로 이들을 모두 관할하였다. 최충헌도 최충수와 마찬가지로 지휘체계를 갖추고 그의 군사들을 거느렸을 것이다.

 최충헌은 장사를 집결시켜 자신의 휘하 군사를 만들고 그들을 일정한 전투능력과 지휘체계를 갖춘 집단으로 만들었지만, 아직 특정한 조직의 형태를 갖추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최충헌이 최충수와 대립하던 명종 27년까지만 하여도 그 군사는 단순히 ‘衆’이라고 표현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종을 축출하고 신종을 즉위시킨 최충헌 일파는 그들이 거느린 군사와 그들과의 관계를 어느 정도 정비하여 사적 군사집단을 새로운 형태로 발전시켜 나아가게 되었다.

 최충헌의 측근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박진재의 경우 신종 2년(1199) 수 백명에 이르는 문객을 거느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209)위와 같음. 수 백명에 달하는 박진재의 문객은 일시에 갑자기 구성된 것이 아님은 말할 나위 없다. 박진재의 문객은 이미 그 이전부터 ‘衆’이라고 표현된 군사집단을 중심으로 하여 구성한 것이라고 보아 마땅하다. 그리고 이들은 최충헌과 더불어 같은 집단에 소속하여 반대 세력과 싸우기도 하였다.

 박진재가 최충헌 집권 초에 거느렸던 그의 군사들을 문객집단으로 형성하였을 때 최충헌은 그의 군사를 어떻게 하였을까. 최충헌 역시 박진재와 마찬가지로 그의 집권 과정에 참여하였던 그의 군사를 문객집단으로 형성시켰을 것이다. 최충헌과 박진재가 거느린 군사들이 그 속성상 큰 차이가 있다거나, 서로의 관계에 차이가 있다고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비슷한 모습을 갖추었다고 보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또한 박진재가 문객을 거느리고 있을 당시 최충헌이 門卒을 파견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210)≪高麗史≫권 129, 列傳 42, 崔忠獻. 여기의 문졸이란 문객에 포함되는 일반 병사를 일컫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러므로 최충헌 역시 문객집단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최충헌이 거느렸을 문객도 ‘衆’이라고 표현된 군사집단이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집권하기 위하여 모집한 장사들이 주축이 되었던 것이다.211)旗田巍, 앞의 글(1977), 1∼7쪽.

 최충헌과 박진재 등이 정권을 장악하는 데에 커다란 기여를 한 그의 군사들을 문객집단으로 형성한 것은 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의미를 갖는 것으로 여겨진다. 최충헌과 박진재의 입장에서는 자기 스스로의 뜻에 의해 그들의 정권획득과정에 참여한 군사들을 계속 자신의 측근으로 두면서 세력을 확고히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최충헌에게 제거당한 최충수의 경우는 그의 측근에 있었던 장군들이 최충헌과 대결하는 것을 부추겼으며, 최충수 자신도 역시 그들의 뜻을 무시하기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최충수가 그의 측근의 군사의 뜻을 함부로 막을 수 없었으며, 최충수 자신도 그의 군사의 뜻을 따름으로써 계속하여 그의 군사를 자신의 세력으로 묶어두려 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최충헌과 박진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한편 최충헌과 박진재 등에게 가담하여 그들의 정권 장악을 가능하게 한 군사들은 자신의 지위를 향상시키길 원하였으며, 그 어떤 보상을 바랐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러한 입장으로 말미암아 최충헌과 박진재는 그들의 군사들과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기를 원했으며 그들의 군사들 역시 바라던 바였을 것이다. 최충헌과 박진재 그리고 그들의 군사들 양 편이 서로 일치할 수 있는 관계는 상하의 절대적 주종관계보다는 자율적인 상하의 복종관계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서로의 이해관계를 절충하기 위하여 문객집단의 형성이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문객집단이 형성되었다고 하여 그들 간의 이해가 반드시 일치하거나, 강한 결집력을 가진 것은 물론 아니었다. 예컨대 박진재의 문객을 수적인 면에서는 최충헌의 문객과 비슷하고 모두 용감하였는데 관직을 얻은 자가 적어 항상 불만을 가졌다 한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그의 문객들이 상대적으로 낮은 대우를 받고 있음에 대하여 불평을 가지고 있었으며, 박진재는 그 사실에 대하여 염려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문객집단의 결집력을 유지하기 위하여서는 그 최고 실력자가 항상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준비하여야 하였던 것이다. 그 만큼 문객집단은 서로의 관계가 상호 이해에 밀접하게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문객집단을 형성하여 사적 집단을 거느린 최충헌은 신종 3년(1200)에 都房이라는 기구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최)충헌은 스스로 방자하게 행동한 것을 알고 어느 사이에 변고가 생길까 두려워 하였다. 대소 문무 관리, 한량 그리고 군졸 가운데 강한 자를 모두 불러 6番으로 나누어 날을 바꾸어 그 집을 밤에 지키도록 하고 都房이라 불렀다. 출입할 때에 모두 합쳐 둘러싸 호위하니 전투에 나가는 것 같았다(≪高麗史節要≫권 14, 신종 3년 12월).

 그는 그의 신변 보호, 그 집의 숙위 등을 담당하도록 하기 위하여 도방을 두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먼저 관심을 끄는 것은 종래에 존재하였던 문객집단은 어떻게 하고 새로이 도방을 두었는가 하는 점이다. 즉 도방과 최충헌이 종래 거느렸던 문객집단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느냐 하는 점이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충헌은 희종 2년(1206) 晋康候로 책봉되고 興寧府를 세우게 된다.212)≪高麗史≫권 129, 列傳 42, 崔忠獻. 이 때 최충헌을 시종하는 문객 3,000여 인이 보인다. 그런데 최충헌을 시위하는 임무는 도방이 맡고 있었으며, 실제로 최충헌을 제거하기 위한 사건이 궁내에서 벌어졌을 때 최충헌을 호위하였던 군사가 도방에 소속한 이들이었다는 기록도 보인다.213)위와 같음. 최충헌이 출입할 때 시위 임무를 담당한 도방과 같은 역할을 문객들이 맡고 있었던 것이다. 도방과 시종 문객은 그 기본적인 역할에서 이렇다 할 차이가 나지 않는다. 따라서 양자의 구성원이나 기본적 성격도 같은 것이었다고 보아도 무리한 것은 아니다. 곧 문객집단이 도방의 구성원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214)金塘澤, 앞의 책, 79∼82쪽.

 최충헌 이전의 무인집권자나 최충헌 당시의 일부 무인세력자 가운데도 문객집단을 거느린 자가 있었다. 최충헌 자신도 그와 같은 문객집단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문객집단이 일정한 체계 아래 지휘된다거나, 통제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최충헌은 문객집단으로만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거나, 다른 세력을 누를 수 있는 군사력을 확보하는 것이 곤란하다고 판단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그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자신을 뒷받침해 주는 집단을 더욱 공고히 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최충헌이 도방을 설치한 것은 문객집단의 수를 증가시킴과 동시에, 문객집단을 조직적인 체계 속에 편제하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다. 단순한 문객집단의 경우, 그들을 일률적인 체계 아래 조직화시켜 지휘한다는 것이 어려운 반면에, 그들을 도방과 같은 조직 안에 편성하여 지휘함으로써 더욱 조직적으로 그들을 거느릴 수 있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충헌은 도방의 구성원으로 대소 문무관리과 한량, 군졸 가운데 힘있는 사람을 불러모았다 한다. 그런데 그 구성원이 일시에 형성된 것은 아니며, 최충헌이 집권하는 과정에서 거느렸던 군사들이 주축이 되어 형성한 문객집단이 구성원으로 편입되었다. 물론 도방의 구성원으로 종래의 문객 이외에 다른 사람들도 새로이 편입되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먼저 도방 구성원의 한 부류를 이룬 군졸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이 군졸은 무관층 이하에 속하는 일반 군사라고 생각된다. 일반 군사로서 도방에 속하였던 사람들은 최충헌의 집권에 협력한 군인이었을 것이다. 최충헌에 협력한 일반 군사 가운데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대상은 최충헌집권 초기에 가담하였던 장사로 불려진 군사들이다. 이들은 최충헌집권이 안정되어 감에 따라 최충헌으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아 무관으로 진출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일부는 무관으로 진출하지 못하고 계속 일반 군인으로 남아 있으면서 도방의 구성원이 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밖에 최충헌이 집권하는 데에 있어서 그의 측근 군사로서 직접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기여를 한 여러 위의 군사를 꼽을 수 있다. 여러 위의 군사는 최충헌이 이의민 일당을 제거할 때나 최충수를 제거할 당시에 최충헌에게 상당한 군사적 도움을 주었다. 따라서 최충헌이 도방을 설치 하면서 새로이 그 구성원으로 불러들인 군사는 여러 위에 속한 중앙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215)金塘澤은 禁軍이 도방의 구성원으로 초치되었으며, 도방을 조직하게 된 동기 가운데는 금군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막고 반대로 이들을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한 도구로 삼고자 한 의도가 있었다고 하고 있다(위의 책, 180∼184쪽). 도방에 소속한 여러 위의 군사들은 국가의 공적인 군인으로 활동하면서 최충헌과 사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나갔을 것이다. 특히 그들은 도방의 하층부를 구성하면서 최충헌을 위한 실질적인 군사활동 및 시위에 충당되었을 것이다.

 한편 도방의 구성원으로 포함된 閑良은 그 신분이 분명하지는 않다. 특별 한 관직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지는 한량은 일반 군인보다는 상위의 신분으로 도방에 소속하여 하급 무관층에 준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든지, 일반 군인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앙관직을 갖고 있지 못하였던 한량은 도방의 구성원이 됨으로써 최충헌에게 충성을 하는 한편, 자신들의 이익을 보장받았다고 하겠다.

 도방 내에서 하위층을 구성한 일반 군인이나 한량은 도방에 속하지 않은 다른 일반 군인이나 한량보다도 승진할 기회나 관직에 나아갈 기회를 더욱 많이 가졌다. 최충헌은 손님을 맞이하여 연회를 베풀 경우 도방의 구성원으로 하여금 手搏 등의 시합을 시켜서 이기는 자에게 校尉나 隊正職을 상으로 주곤 하였다.216)≪高麗史≫권 129, 列傳 42, 崔忠獻.
≪高麗史節要≫권 14, 희종 5년 9월.
최충헌은 다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도방의 구성원에게 하위 무관직을 주었던 것이다. 그 만큼 최충헌은 도방의 구성원에게 혜택을 주는데 꺼려하지 않았으며, 그 같은 혜택은 빈번하게 주어지지 않았나 여겨진다.

 최충헌은 도방의 구성원들에게 그와 같이 포상함으로써 도방의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으며, 그 구성원은 더욱 최충헌에게 충성하였을 것이다. 중앙의 하위 무관직을 맡게 된 도방의 구성원은 중앙군의 무관으로서 활동하였으며, 도방 내에서도 하위 무관층으로서 그에 걸맞는 지위를 인정받았을 것이다.

 도방의 상층부에는 문무관리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들은 그 직책에 따라 도방에서 나름대로 활동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최충헌이 조직한 도방이 주로 군사적 임무를 수행하였으면서도 그 구성원으로 문인 관리까지 포함시킨 것은 문객집단 전체를 도방의 조직으로 편성하였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즉 최충헌 집권기에는 문인출신 문객을 위한 별도의 조직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인들도 도방 안에 흡수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도방 안에서 문인 관리들의 역할은 그렇게 커다란 것은 아니고, 다만 도방에 편입되어 최충헌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는 데에 의미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도방의 군사적 역할에 비추어 보아 도방의 상층부로서 그 구성원을 지휘 한 사람은 무인 관리였을 것이다. 이들은 공적으로 중앙군의 상층부로서 존재하였으며, 도방의 상층부로서 도방에 소속한 군사들을 사적으로 지휘하였다고 하겠다. 도방의 상층부를 구성한 무인의 활동을 직접 보여주는 기록은 없으나, 문객 가운데 장군 또는 대장군 등의 직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활동한 기록은 보인다.217)≪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附 怡 및 권 123, 列傳 36, 嬖幸 1, 李汾禧. 그들은 문객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도방에 소속하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혹 그렇지 않더라도 도방의 상층 무인의 활동을 이해하는데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이들은 중앙군의 대장군, 장군직에 있었던 만큼 중앙군의 통솔자로서의 의무도 어느 정도 수행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최씨가에서 사적으로 맡은 임무에 그 책임을 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도방의 상층부 인물들이 중앙의 고위 관직을 가지고 최씨가의 사적 군사기구에 소속하였다는 것은 서로 간에 상당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최씨가의 입장에서 볼 때 도방에 소속한 상층부 인물들이 중앙의 고위 관직을 가질수록 중앙 정계에서 최씨가의 세력을 공고히 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여겼을 것이다. 중앙군의 상위층에 도방 구성원이 자리함으로써 중앙군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시킴은 물론, 중앙군 가운데 도방에 속하지 않은 군사를 간접적으로 최씨가의 세력으로 끌어 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방에 소속한 무인 관리들도 최씨가에 충성함으로써 나름대로 승진의 기회와 경제적 혜택을 얻는 데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였을 터이다. 최씨가와 그 도방의 무인 관리들은 서로의 이해가 일치하여 서로 결합하여 도방을 관장하였다고 하겠다.

 최충헌이 설치한 도방에 소속한 사람들은 한량을 제외하고 대개 중앙군이거나 중앙관직의 담당자였다고 할 수 있다. 도방의 소속원이면서 중앙의 관직을 갖고 있거나 중앙군에 속하였던 사람들은 사적으로 최충헌의 도방에 결속되어 있으면서도 공적으로는 중앙정부의 직무를 수행하였다고 여겨진다. 물론 중앙정부의 일보다 최씨가의 개인적 일이 우선시되었을 것으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최충헌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도방도 최씨가의 사적 집단이었기에 도방에 소속한 구성원이 도방이라는 조직을 통하여 활동하는 경우가 압도적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최충헌 자신이 그들의 공적 활동을 막지는 않았을 것이다. 왕이 존재하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이 존재한 상태에서 도방 구성원의 공적 활동을 억제하는 것은 자신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빚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최충헌은 도방의 구성원 가운데 중앙 정부와 공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이 도방을 통한 결속력과 최충헌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약화하지 않는 한 중앙의 직책을 수행하도록 배려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도방의 구성원이 대체로 중앙 정부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로 구성되었다는 점은 때로 도방의 구조적 취약점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었다. 거란이 침입하여 왔을 때 최충헌과 최우의 문객 가운데는 관군을 따라 종군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어 섬으로 유배를 보내기도 하였다 한다.218)≪高麗史≫권 129, 列傳 42, 崔忠獻. 여기의 문객은 도방의 구성원들이었다고 보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이들이 종군을 희망한 것은 자발적이었던 것 같은데 그들이 왜 종군을 희망하였는가 하는 점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분명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최충헌에게 충성함으로써 관직 상승 등의 기회가 있었지만 종군하여 군공을 세움으로써 더 높은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한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만약 이러한 이유로 종군을 희망하였다면 이는 도방의 구성원이었지만 최충헌으로부터 직접적인 보상을 받을 기회가 적었던 일반 군인이나 하급 무관에게 해당하였으리라 믿어진다. 다른 이유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도방 소속 군사가 사적으로는 최씨가에 충성하고 있었지만, 공적으로는 중앙군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외적의 침입에 종군하여야 할 의무를 느꼈거나, 아니면 최충헌 측근이 아닌 다른 중앙군의 책임자로부터 압력을 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편 최충헌과 최우가 그의 문객 가운데 종군을 희망하는 사람에 대하여 섬으로 유배를 보낼 만큼 강경한 조치를 취하게 된 이유도 생각하여 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최씨가의 문객이 도방을 통하여 결속되어 있었지만 그의 문객의 다수가 종군함으로써 도방의 결속력에 문제가 생길 것을 염두에 둔 때문은 아니었을까. 중앙군에 소속한 최씨가의 도방 소속원이 종군하게 되면 그에 대한 충성심이 다른 방향으로 쏠리게 될 것이고, 이로 인하여 종래의 사적 유대관계가 약화되는 것이 아닌가 판단하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최씨 입장에서 강경하게 조치를 취한 것은 문객의 다수가 종군을 희망하였다는 반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최충헌이 조직한 도방은 최씨가의 사적인 군사기구로서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최충헌이 장기집권의 기틀을 마련한 것도 이와 같은 조직적인 군사기반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종래의 무인 집권자들이 거느린 문객집단과는 달리 사적인 기능을 가짐과 동시에 국가권력과의 관계를 통한 공적 기능도 아울러 보장되고, 최씨정권이 이를 인정하고 도와주었다는 점에서 더욱 치밀한 조직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최충헌에 의하여 조직된 도방은 이후 무신정권이 몰락할 때까지 존속하였 다. 하지만 그 집단의 구성원이 최씨가의 집권자와 항상 이해를 같이 하면서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최씨가의 권력 승계와 관련하여 도방의 구성원은 민감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다. 최우(이)가 최충헌의 권력을 승계할 당시에는 일부 도방의 상층부 세력이 그에 반대하고 나섰다. 최우의 승계에 반대한 인물로 崔俊文이 보인다. 최준문은 貢生으로 최충헌에게 발탁되어 대정에 임명되었다가 대장군에 이른 인물이다.219)≪高麗史≫권 129, 列傳 42, 崔忠獻 附 怡. 그는 私第를 짓고 勇士들과 결탁하고 있었다는데,220)위와 같음. 이 용사는 바로 도방에 소속하였다고 보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최준문은 최충헌의 측근이었던 상장군 池允深·장군 柳松節·낭장 金德明과 함께 모의하여 崔珦으로 하여금 권력을 승계하도록 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도방의 구성원이었다고 짐작된다.

 최충헌이 조직한 도방의 주요 구성원이었을 것으로 믿어지는 최준문 등이 최우에게 반대하여 최향을 권력의 승계자로 지지한 것은 그들의 세력 관계에서 빚어진 것이라 여겨진다. 즉 최준문과 최우는 평소에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하는데,221)金塘澤, 앞의 책, 82∼87쪽. 그들이 기반으로 하는 세력이 서로 다른 구성체였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최준문 등은 최충헌의 힘에 의하여 관직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최충헌에게 속한 도방의 구성원이었다. 이에 비해 최우는 최충헌이 집권하고 있을 당시부터 이미 자신의 문객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들은 최우의 사제에서 활동하였다. 따라서 최충헌이 집권하고 있을 당시 도방에 소속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도방을 통하여 결집된 최충헌의 문객은 최우의 문객과는 불편한 관계에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최우가 집권하게 된다면 그의 문객이 도방을 장악하게 되므로 최준문 등은 자신의 지위에 위협을 느꼈을 소지가 충분하다.

 최준문 등이 최충헌의 후계자로 지목한 최향은 최우와 같은 독자적인 문객집단을 거느리지 못하였던 것 같다. 최향은 최준문과 비슷한 지위에 있었으며, 비슷한 정도의 군사를 거느렸다. 그는 장군으로서 1領軍(1,000명)을 거느리고 최준문 등과 함께 행동하고 있었다.222)≪高麗史節要≫권 15, 고종 4년 5월. 최향은 차라리 최충헌의 도방에 소속하여 활동하였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최준문 등이 최향을 최충헌의 후계자로 등장시키고자 한 이유도 그가 도방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짐작된다. 동일한 기반 위에서 성장한 최향을 지지함으로써 최준문 등은 그들의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을 것이다.

 최우는 최충헌의 도방에 기반을 두고 성장한 최준문 등의 반대를 받았지 만 그 자신이 권력을 계승한 이후에도 도방을 없애지는 않았다. 그것은 최우 자신이 거느린 문객에 대하여서도 조직적인 기구로서의 장치를 마련하여 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또한 최우 역시 도방이라는 사적인 군사기구를 필요로 하였기 때문이다. 최우는 도방을 內外都房으로 구분하였다. 아마 內都房에는 자신이 거느렸던 문객들을 수용하였을 터이고, 外都房에는 종래의 도방원을 그대로 충원하였던 것은 아닌가 추측된다.223)金庠基,<高麗武人政治機構考>(≪東方文化交流史論攷≫, 1948), 231쪽. 그러나 최우는 집권한 이후 馬別抄·夜別抄·書房 등을 조직하여 자신이 거느린 군사력을 다른 조직을 통하여 확대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최우정권 때에는 여러 조직을 통하여 그 군사적 지지 기반을 넓혀 더욱 확고한 세력을 다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우가 죽은 이후 권력을 계승할 때에 분열이 생기게 되었다. 최우를 뒤이은 崔沆은 家兵 500명을 물려받았음에도 최우의 병이 위독하게 되자 자신의 사제로 돌아가고 있다.224)≪高麗史≫권 129, 列傳 42, 崔忠獻 附 沆. 이 때 知吏部事 上將軍 周肅이 야별초와 내외도방을 이끌고 왕정을 복고하려고 하였는데, 최씨가의 가노 출신인 李公柱·崔良伯·金俊 등이 최항을 지지하자 결국 최항의 승계에 찬성하였다 한다.225)위와 같음.

 최항이 집권할 때에도 도방의 구성원 가운데는 최씨가와의 사적인 관계에서 이탈하려는 세력이 있었던 것이다. 도방 구성원 모두가 최씨가에 대를 이어 충성하여야 한다는 데에 꼭 찬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도방 구성원의 결집력에 문제가 생겼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최씨가로부터 도방이 최충헌시대와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는 점을 암시하여 주기도 하는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최우정권 때에 최씨가의 가노였던 이들이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상당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최항의 집권에도 가노로 구성된 가병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아 최씨가와의 관계에서 새로운 집단이 부상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도방은 자연히 최씨가의 중추적인 핵심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최항은 도방을 36번으로 나누었는데 도방의 규모가 확대되어진 것으로 해석되어진다.226)金庠基, 앞의 글, 231쪽. 도방이 최씨가의 사적 군사기구로서 역할을 계속하였으며, 최씨가의 권력이 계속 유지되었다는 점에서 그 사적 군사기구가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도방의 번의 증가가, 도방이 최씨가로부터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음을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나 여겨진다. 최항의 집권에 도방 구성원 가운데 어느정도 반대 의사를 가진 인물들이 있었으며, 가노로 구성된 가병집단이 성장하고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최항과 도방조직이 밀착되기는 어려웠다고 판단된다.

 도방과 최씨가와의 관계는 崔竩가 피살되어 최씨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끝났다. 그렇지만 柳璥·金俊 등에 의해 최씨정권이 몰락한 이후에도 도방은 존속하였다. 최씨정권이 몰락한 처음에는 도방이 왕의 호위를 맡는 등 사적 군사기구로서의 성격을 탈바꿈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227)≪高麗史節要≫권 17, 고종 45년 3·4월. 그러나 계속된 무신집권으로 말미암아 도방은 계속 무인 집권자의 사적 군사기구로서 남아 있게 되었다. 다만 종래와는 달리 무인 집권자 자신의 시위나 호위의 임무 뿐만 아니라, 왕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기도 하였다는 점에서 그 기능이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무인 집권자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그 성격 자체가 변화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 林衍이 정권을 장악하였을 때 도방은 다시 6번으로 운용되었다.228)≪高麗史節要≫권 18, 원종 10년 7월. 최항이 집권할 때에 36번으로 되었던 도방이 언제 6번으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김준정권 이후 도방에 대한 역할이 중요시되면서 다시 6번으로 조직된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도방은 임연·임유무 정권이 몰락하고 무신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柳昌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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