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8권 고려 무신정권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3. 진양부와 정방 및 서방
  • 2) 정방

2) 정방

 최씨정권의 지배기구로 최충헌대에 도방과 교정도감 그리고 진강부가 설치된 데에 이어 최우(이)대에는 정방 및 서방·삼별초·마별초 그리고 진양부 등이 설치되었다. 정방은 최우가 고종 12년(1225)에 그의 사저에 설치한 인사행정 즉 銓政을 취급하던 기구였으며, 최우 이후에도 역대 권신들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또 정방은 무신정권이 몰락된 후에도 오랫동안 존속되면서 변태적인 국가기구로 변하여 고려 말기에 이르는 동안 그 존폐가 거듭되었으며 知印房 또는 箚子房의 이름이 붙여지다가 창왕 때 尙瑞司로 개편되었다.

 정방의 설치는 최씨정권의 기반이 그만큼 강화된 것을 뜻하기도 하여 여기에 대하여≪高麗史≫選擧志 銓注條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즉 고종 12년(1225)에 최우가 사저에 정방을 설치하고 백관의 전주를 행하였는데, 문사를 뽑아 이에 속하게 하여 그 이름을 必闍赤(Biteshi)라 하였다는 것이다. 종전까지만 해도 이부에서는 문관의 인사를, 병부에서는 무관의 인사를 맡아 관리의 재직한 연수와 근태·공과·재주의 여부 등의 성적을 문서에 기록하였다. 그 문서를 정안이라 하여 이에 의하여 인사를 처리하되, 중서성에서 왕에게 상주하고 문하성에서 왕의 결재를 받아 인사를 행하였다. 최충헌이 집권하여 부(진강부)를 설치한 후부터는 정안을 사사로이 취하여 인사의 처리를 마음대로 행하였다. 그의 요좌로서 승선이 되면 政色承宣이라 하고, 그 승선이 된 자가 3품관일 때는 政色尙書라 하며, 4품관 이하일 때는 政色少卿이라 하였다. 그 아래에서 서기의 직을 맡은 자는 政色書題라 하여 이들이 모이는 곳을 정방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한편≪高麗史≫崔忠獻傳 안의 崔怡傳에는 정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고종 12년 백관이 최우(이)의 사저에 가서 정안을 올리면 그는 마루에 앉아 이것을 받았는데, 이때 6품 이하관은 마루 아래에서 재배하고 땅에 엎드려 감히 올려 보지 못하였다 한다. 이로부터 최우는 정방을 사저에 설치하고 문사를 뽑아 이에 속하게 하여 그 이름을 必闍赤라 하고 백관의 전주를 처리하여 批目에 써서 왕에게 올리면 왕은 다만 이를 결재하여 내릴 뿐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이≪高麗史≫에 보이는 정방 설치와 그 내용에 대한 설명인데 이를 통하여 최씨정권의 권력기구로서의 인사행정기관인 정방이 고종 12년에 최우에 의하여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최씨정권에 의한 백관의 인사행정은 이미 최충헌 때부터 시작되었음을 짐작하게 해주며, 최우의 정방 설치는 결국 최충헌 이래의 백관의 인사행정을 최씨정권의 지배기구 속에 구체화·제도화한 것에 불과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위의 설명을 통하여 정방은 문사들을 뽑아 들여 이들을 必闍赤라 하여 사무를 보게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문인의 등용은 무신정권의 성격으로 볼 때 주목을 끄는 일이라 하겠다. 여기에서「必闍赤」라 함은 문사를 의미하는 몽고어로 몽고의 영향을 받은 뒤에 생겨진 것이 분명하다.

 한편 정방의 직제로 政色承宣·政色尙書·政色少卿·政色書題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政色’이라 함은 인사행정 담당을 뜻하는 것이 되 며, 승선은 왕명의 출납을 맡는 정3품직이며, 상서는 6부의 우두머리 관직으로 정3품, 소경은 諸寺의 관직으로 정4품이 된다. 정방의 그것은 정부조직의 그것으로 설치되지 않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정방의 승선에 대하여 李齊賢이≪櫟翁稗說≫前集 1에서 “최씨의 요좌로 승선이 된 자가 궁궐에 들어가서 왕에게 아뢰면 왕은 하는 수 없이 이에 좇았다”라고 한 것을 보면, 정방의 승선은 인사행정 즉 전정에 있어서 왕에게 아뢰는 일을 맡았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설치된 정방은 일국의 인사행정을 오로지 하였는데,≪櫟翁稗說≫권 9의 “백관의 陞黜(進退)은 모두 정방으로 하여금 注擬하게 하였는데, 왕에게 올리면 왕은 하는 수 없이 모두 이를 옳다고 하여 시행하였으며, 재상은 말도 못하고 두 손을 맞잡고 문서를 받들어 행할 뿐이었다”라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최씨정권의 초왕권적 실력행사의 정도를 알 수 있다.

 최씨정권에 의하여 전정(인사행정)이 전단된 것은 이미 최충헌 때부터였고, 최우의 정방 설치로 한층 더 강화되었다. 그러나 권신에 의한 전정에의 간여는 이미 무신정권 초기부터 있었던 일이다. 즉 명종 3년(1173)에 무신정권은 東北面兵馬使 金甫當의 반기를 평정시키고 나서 3경·4대도호부·8목을 비롯하여 군·현·관·역에 이르기까지의 관직을 무신으로써 독점케 하였다.242)≪高麗史≫권 19, 世家 19, 명종 3년 10월. 이 조치는 물론 왕명에 의한 것이지만 무신정권의 강박에 의하여 취하여진 것이 분명하므로, 무신집정의 전정에의 간여가 무신정권 초기부터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무신정권 초기의 전정에의 간여는 이외에도 重房에서도 행하여졌다. 즉 명종 13년(1183)에 중방이 동반(문관)의 관직을 생략하여 줄일 것을 상주한 것으로 보나,243)≪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13년 5월. 명종 7년에 중방이 상주하여 동북양계의 州鎭의 판관은 무관으로서 보직하지 않게 하였다는 것244)≪高麗史≫권 19, 世家 19, 명종 7년 4월. 등으로 보면 중방이 전정에 깊이 간여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최충헌이 집권하고 나서는 직접 인사행정에 간여할 뿐만 아니라 전정을 전단하기에 이르렀고 왕은 형식을 갖추는 존재밖에는 되지 못하였다. 즉 최충헌은 李義旼 일당을 제거하고 나서 명종에게 封事 10條를 올렸는데, 그 가운데 “廩祿이 부족한데 冗官이 많음은 古制에 어긋나니, 고제에 따라 정리하여 적당히 제수하십시오”245)≪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라는 내용은 이미 전정에 돌리고 나서 왕의 추인을 받은 것에 다름아님을 보여 준다. 그리하여 그는 문무관의 전주권을 장악하게 되어 신종 2년(1199)에는 명부상서로서 知吏部事를 겸하여 아침에는 병부에 가고 낮에는 이부에 가서 문무관의 전주를 행하였다는 것이다.246)위와 같음. 이것을 보면 이 때는 그나마 합법적인 형식을 통하여 문무관의 전주권을 장악하였다 할 것이다. 그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원래의 전주의 절차가 문관은 이부, 무관은 병부에서 그 성적을 매겨 중서성에 보고하면 중서성에서는 왕에게 상주하고 문하성에서 결재를 받아 처리하였던 것으로 보아 그러하다.

 그러나 최충헌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신종 5년에 최충헌은 사저에 있으면서 처음으로 內侍員外郞 盧琯과 함께 문무관을 注擬하여 왕에게 상주하였는데, 왕은 이에 대하여 머리를 끄덕거려 승낙하고 이부와 병부의 判事는 政堂에 앉아서 다만 검열을 할 뿐이었다. 최충헌이 전정을 오로지하자 청탁과 뇌물이 공공연히 주고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247)위와 같음. 이리하여 최충헌은 사저에서 한 나라의 전주권을 전단하였던 것으로, 이것을 보면 최우 때의 사저에 설치한 정방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최충헌은 전정을 오로지하여 그 시행하는 시기도 일정하지 않았고 자신의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행하였다.≪高麗史節要≫에는 고종 5년(1218)에 행한 都目政(都目政事:관리의 인사행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즉 “종래의 제도에는 도목정을 매년 12월에 행하였는데, 최충헌이 집권하고 나서는 벼슬을 팔았으나 근래에 전란으로 인하여 뇌물을 바치고 벼슬을 구하는 자가 없으므로 전란을 핑계 삼아 도목정을 미루었다. 이에 이르러 모든 순서를 어기고 전쟁에 공로가 있다고 빙자하여 뇌물을 바친 자에게 벼슬을 주고 공로가 있는 자라 하더라도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벼슬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248)≪高麗史節要≫권 15, 고종 5년 정월.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벼슬이 뇌물에 의하여 좌우되었고, 최충헌의 필요에 따라서는 도목정이라는 종래의 제도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시기를 정하여 처리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도목정에 대하여는≪高麗史≫選擧志 銓注條에 “舊例에는 頒政을 6월에 하는 것을 權務라 하고 12월에 하는 것을 大政이라 하였는데, 이부와 병부의 판사가 여러 요좌와 함께 본부에 모여 공이 있는 자를 올리고 죄가 있는 자를 물리치되 왕명을 받고, 이때를 지나면 비록 결원이 있어도 이를 보충하지 않았다”라고 되어 있다. 곧 도목정은 6월과 12월 두 번 베풀어져, 6월의 것은 權務(政)라 하여 임시성을 띤 것이었고, 12월의 것은 大政이라 하여 기본적인 것이었다. 이 두 도목정이 아니고는 비록 결원이 생기더라도 인사의 행정처리를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충헌은 이러한 옛 제도를 무시하고 언제나 마음대로 인사발령을 내렸다.

 이러한 최충헌의 전단이 결국 정방의 설치로 나타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정방이 최씨정권의 지배기구의 하나로 일국의 전정을 전단하였기 때문에 그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다. 따라서 벼슬을 하여 출세하고자 하는 자는 정방에서 근무하는 것이 둘도 없는 소망이었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실제로 출세의 길이 크게 트여 영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朴暄이 과거에 급제하여 최우의 가신이 되어 총애를 받다가 몇 해도 안되어 요직에 올라 정방에 들어가 조야를 진동시킬만한 권세를 누렸다는249)≪高麗史≫권 125, 列傳 38, 姦臣, 朴暄. 것만으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정방은 최씨정권이 몰락된 뒤에도 오랫동안 존속하면서 그 권능을 발휘하였다. 최씨정권을 몰락시킨 大司成 柳璥이 왕에게 아뢰어 정방을 便殿 근처에 두고 전주를 맡게 하여 국가의 모든 기무를 처리하게 하였다는250)≪高麗史≫권 105, 列傳 18, 柳璥. 것으로 보나, 또≪櫟翁稗說≫前 1에서 “柳文正公 璥은 김인준(김준)과 함께 최의를 죽인 뒤에 정권을 왕실에 돌리고, 정방을 폐지하지 않고 왕실의 중요 기관으로 삼아 권문이 붙인 명칭을 그대로 이어 받았으니 가히 개탄스러운 일이다”라고 한 것은, 정방이 최씨정권이 몰락된 뒤에 변태적이나마 일단 국가기관이 되어 종전과 같이 전정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정방이 국가기관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김준·임연 등이 권력을 잡음으로써 또한 그들에 의하여 조종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정방이 그나마 국가기관으로 기능을 발휘하게 된 것은, 임유무가 피살됨으로써 무신정권이 완전히 막이 내려진 이후의 일로 보인다.

 본래 정방은 최우가 사저에 설치하였던 최씨정권의 사적 기관이었다. 그러나 정방에는 정색승선·정색소경·정색서제 등 정식관직에 준하는 인원으로 채워져 있었고, 또 직접 정안에 따라 전주를 관장하여 국왕의 결재를 받은 것으로 보아 공적기구의 일면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정방이 완전히 국가기관으로 된 것은 최씨정권이 몰락한 이후부터였다. 그후 정방은 고려 말기 창왕 때 상서사로 개편될 때까지 그 폐단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존폐를 반복하였다. 그 존폐는 왕권의 강약에 비례하였던 것으로 왕권이 강할 때는 폐지되었다가 반대로 臣權이 강할 때는 부활되는 양상을 띠었다.

 ≪高麗史≫百官志 諸司都監各色條에서 상서사에 대한 설명을 보면 “尙瑞司는 곧 정방으로 지인방 혹은 차자방이라고도 칭하다가 辛昌(창왕)이 고쳐 상서사라 하였다”라 하였고, 관원은 판사 4인으로 하되 양부(재추)가 겸하고, 尹 1인으로 하되 代言이 이를 겸하며, 少尹 1인, 승·주부·직장·녹사 각각 2인씩으로 하되 모두 타관으로써 이를 겸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정방은 창왕때 상서사로 개편되었는데, 그 개편은 종래의 정방이 최씨정권 몰락 후 변태적으로 운영된데 대한 우려에서였다. 어떻든 이후 상서사는 정식 국가기관이 되었다는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한편 위에 보이는 정방을 ‘知印房’ 혹은 ‘箚子房’이라 하였다는 것은 공민 왕 때에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공민왕 원년(1452)에 정방을 폐지하였다는 기록과 공민왕 5년 6월에 정방을 영원히 폐지하라는 왕명이,251)≪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選法. 보일 뿐, 공민왕 일대에 그것을 부활하였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으며, 공민왕 6년 12월에 전정을 이부와 병부에 복구시켰다는252)위와 같음.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 기록을 검토할 때, 그동안 정방이 부활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과 유사한 기관이 설치되어 전정을 행사하였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유사한 기관이란 바로 지인방 또는 차자방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이렇게 새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은 일단 폐지한 정방을 그 명칭 그대로 부활시키기를 꺼려한 데에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것을 뒷받침하여 주는 기록으로는 우왕 원년(1375) 10월에 차자방을 폐지하였다는 것을 들 수 있다.253)≪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選法.

 그러면 정방이 상서사로 개편된 이유는 무엇일까. 역시 그것은 정방의 폐단에 따른 결과로 여겨진다.≪高麗史≫選擧志 銓注 選法條에 “충렬왕 초에 승선 朴恒이 전주를 맡아 비로소 궁궐에 유숙하였다가 제수를 마치고 나왔다. 옛날에는 정방의 관원이 매양 제수를 당하면 새벽에 들어갔다가 저녁에 나왔으므로 사사로이 면회를 청하는 자가 문에 가득 차더니 이에 이르러 고쳐졌다”라고 한 것254)위와 같음.을 보아서도 정방을 통한 전정의 폐단이 극심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李齊賢이 충선왕에게 권신이 망하였는데도 아직 정방이 남아 있으므로 전정을 잡은 승지는 재상보다도 권세가 크다고 호소하여 마침내 문관의 인사는 典理司에, 무관의 인사는 軍簿司에 돌리게 되었다는255)≪益齋亂藁≫권 9, 上. 것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정방은 국가기관이 된 뒤에도 전정에 강력한 작용을 하여 그 권세는 재상을 능가할 정도로 그 폐단이 컸었다. 그리하여 충렬왕 24년(1298)에 새로 즉위한 충선왕은 정방을 폐지하여 전정을 한림원에 맡기고 학사 崔旵 등 4인과 승지 金昇에게 전주를 맡게 하였다.256)≪高麗史≫권 33, 世家 33 충선왕 즉위년 4월 및 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選法. 곧이어 충선왕은 詞林院(전의 한림원)을 중심으로 전주를 비롯한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는 바 새로 전주를 맡게 된 이들은 신진사류들이었다.

 이렇게 충선왕이 정방을 폐지하고 전정을 신진사류층에 맡기게 된 이유는 정방의 폐단이 컸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기존의 권문세력을 억제하기 위해서였다. 충선왕은 일찍이 볼모로 원나라에 갔다가 충렬왕 24년에 나이가 많은 부왕 충렬왕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그는 대륙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포부도 크고 식견도 높았을 뿐만 아니라 과단성과 적극성이 풍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과감하게 옛 폐해를 개혁하여 널리 인재를 등용하고 田民兼倂을 살펴 문책 또는 금지하여 維新의 정치를 베풀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유신의 정치는 권문세가와 이해관계가 상반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무고로 1년도 못되어 원나라에 소환됨으로써 충렬왕이 그 뒤를 이어 다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자 옛 폐해에 젖은 정방을 폐지하고 젊고 뛰어난 인재를 등용하여 낡은 기성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충렬왕은 재즉위한 지 10년만에 세상을 떠나자 충선왕이 다시 즉위하게 되었고, 그 5년만에 왕위를 충숙왕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충숙왕은 어리석고 음탕하며 사냥으로 일을 삼아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므로 群少의 무리들이 날뛰고 정치는 어지러웠다. 게다가 권문세가는 토지와 노비를 강탈하고 백성들은 조세와 부역에 시달려 유민으로 화했으며, 전정은 더욱 문란하여졌고 왕이 口傳으로 관리를 임명하는 이른바 口傳授職이 행하여졌다.

 충숙왕이 즉위하면서 신구의 대립이 생기자 기성세력은 신진세력을 몰아내어 권력을 잡음으로써 정방이 다시 부활되었다. 즉 충숙왕 7년(1320)에 정방을 다시 설치하여 대언 安珪로써 전주를 맡게하고 右常侍 林仲沇·議郎 曺光漢·應敎 韓宗愈 등으로 하여금 이에 참여하게 하였던 것이다.257)≪高麗史≫권 35, 世家 35, 충숙왕 7년 12월 및 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選法. 이처럼 기성세력이 다시 권력을 잡으면서 부활된 정방은 참신한 운영을 기할 수 없었다. 당시의 부패와 전정에 대하여≪高麗史節要≫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즉 충숙왕 16년 9월에 원나라의 사신 完者가 왔는데, 그의 족당이 고려에 있었으므로 그에게 벼슬을 주기 위하여 內臣密直 金之鏡·大司成 高用賢·右副代言 奉天祐 등에게 전주를 맡게 하였다. 그런데 이때 內臣 申時用이 정방에 가서 김지경에게 꾸짖기를 “오늘 벼슬을 제수하는 것은 사신을 위한 것인데, 어찌 너희들이 벼슬을 팔면서 나의 자손에게는 벼슬을 시키지 않느냐”라고 하였다. 마침 벼슬을 잃은 자들이 뜰에 있었는데, 신시용은 그들을 바라보고 또한 꾸짖기를 “너희들은 돈이 없으니 누구를 원망하겠느냐”라고 하였다. 벼슬을 얻고자 하는 자들이 운집하므로 김지경 등은 밤마다 여염집에 숨어서 주의하였다. 상장군 申丁이 벼슬을 청하였는데 이루어지지 않자, 그는 김지경 및 봉천우에게 “왕의 총명을 가리고 제수를 마음대로 하는 것은 그 무슨 짓이냐. 참으로 돈이 없는 자는 벼슬을 구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꾸짖으니 그들은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批目이 내려지자 일을 처리하는 자들이 앞을 다투어 뭉기고 고쳐 써서 분별하기 어렵게 되니 일반에서는 이를「黑冊政事」라고 하였다. 이와 비슷한 내용은≪高麗史≫의 選擧志 銓注 選法條와 列傳 金之鏡傳에도 보인다.

 정방을 중심으로 한 전정이 문란하였음을 실감케 한다. 국왕으로부터 인사발령의 문서가 내려지게 되면 일을 처리하는 자들이 뭉기고 고쳐 써 마치 어린이가 글씨 연습을 하는 기름종이(黑冊)처럼 만들어 인사행정을 함으로써 흑책정사라는 이름까지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정방의 폐단이 커지자 충혜왕 후 5년(충목왕 즉위년, 1344)에 정방을 폐지하고 전정을 전리사(문관 인사)와 군부사(무관 인사)에 돌리고 京畿의 祿科田을 모두 본래의 전주에게 돌려 주었다.258)≪高麗史節要≫권 25, 충혜왕 후 5년 12월.
≪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選法 및 권 78, 志 32, 食貨 1, 經理.
이는 기성세력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지만, 정방의 존폐가 기성세력의 성쇠와 항상 그 흐름을 같이 하였던 것을 또다시 확인하여 주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때만 하더라도 변변치 못한 왕이 등장하고 친원세력이 날뛰던 때였으므로, 기성세력의 쇠퇴로 폐지되었던 정방은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설치되었다.259)≪高麗史≫권 37, 世家 37, 충목왕 원년 정월. 政丞 王煦가 정방을 폐지하려다가 기성세력의 반대에 부딪혀 파면을 당하였다.260)≪高麗史≫권 37, 世家 37, 충목왕 원년 12월.

 그러나 공민왕 원년(1352) 2월에 정방을 폐지하여 문무관의 전정을 전리사와 군부사에 돌리는 한편 정방의 부활을 청하는 趙日新을 사직케하고, 정방에 있으면서 사사로이 사람들에게 40여 건의 벼슬을 주었던 大護軍 成士達을 투옥하였다.261)≪高麗史≫권 38, 世家 38, 공민왕 원년 2·9월.
≪高麗史節要≫권 26, 공민왕 2년 2·3·9월.

 공민왕 원년에 정방이 폐지되었다고 하였으나 다음의 사실들은 이를 의심하게 한다. 곧 공민왕 5년(1356)에 李穡이 원나라에서 돌아와 왕에게 올린 時政 8事 가운데 정방을 폐지하고 이부와 병부의 전정을 회복할 것을 말한 것이 있는데, 왕은 이를 받아들여 그를 이부시랑 겸 병부낭중을 삼아 문무관의 전주를 맡게 하였다.262)≪高麗史≫권 115, 列傳 28, 李穡. 또 때를 같이하여 왕이 “정방은 권신으로부터 설립되었으니, 어찌 조정에서 사람에게 벼슬을 주는 뜻이 되리요. 이제 마땅히 영구히 폐지하고 그 3품 이하관은 재상으로 더불어 함께 진퇴를 결정하게 하고 7품 이하 관은 이부와 병부에서 헤아려 보고하도록 하라”263)≪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選法.는 교서를 내렸다. 이는 그동안 정방이 일시나마 부활된 사실을 보여주지만, 기록에는 그것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공민왕 때 정방의 존부에 대한 이러한 애매한 기록으로는 “공민왕 6년 12월에 전정을 다시 이부와 병부에 돌렸다”264)위와 같음.라는 내용이 있다. 이것을 보면 이 때까지 전정을 이부와 병부가 아닌 다른 부서에서 행사하였다는 것이 되어 정방의 존재를 시사하여 준다. 또 공민왕 15년(1366) 4월에 좌간의대부 鄭樞·좌정언 李存吾가 상소하여 辛旽을 맹렬히 비난한 것이 빌미가 되어 정추는 東萊縣令, 이존오는 長沙縣監으로 좌천되었는데,265)≪高麗史≫권 41, 世家 41, 공민왕 15년 4월. 동왕 20년 5월에 이존오가 죽고 그해 7월에 신돈이 주살되자 왕은 이존오의 충성을 생각하여 손수 글을 정방에 내려 그의 아들 李安國을 掌車直長에 임명하였다.266)≪高麗史≫권 112, 列傳 25, 李存吾. 앞에서와 같이 여기에서도 정방의 존재를 말하고 있으나, 그동안 정방이 부활되었다는 기록 역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위에서도 말한 것과 같이 정방이 공민왕 원년에 폐지된 것은 사실이나 그 후 부득이 하여 부활하기는 하였으되 종전의 명칭을 피하여 지인방 또는 차자방이라 칭하여 전정을 주관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그 폐단은 조금도 시정되지 않아 우왕 원년(1375)에 사헌부에서 차자방(정방)을 제지하고 문무관의 전정을 이부와 병부에 돌릴 것을 청하였으며267)≪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選法.
≪高麗史節要≫권 30, 신우 원년 10월.
마침내 창왕 즉위년에 정방(차자방)을 상서사로 개편하였던 것이다.268)≪高麗史≫권 77, 百官 2, 諸司都監各色 尙瑞司. 이로써 보면 고려 말에는 정방의 폐지·복구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그 이름도 차자방, 지인방으로 불리웠던 듯하다.

 이렇게 공민왕 원년에 정방을 폐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 다시 설치하게 된 것은 권문세가의 세력이 그만큼 작용하였다는 것이 되며, 창왕 때 정방을 상서사로 개편하여 정식 국가기구로 편입, 권문세가의 전정에의 간여를 어느 정도 봉쇄한 것은 신진세력의 대두로 말미암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 상서사는 역시 전정에 관여하다가 조선시대로 계승되어 符印·除拜 등을 맡았으며 그 뒤 寶璽·符牌·節鉞을 맡는 尙瑞院으로 정착되었다.

 이 정방에서는 문인들이 실무를 담당하였다. 최씨정권 특히 최우 때는 정방을 설치하고 거기에 문인을 등용하여 必闍赤라 하여 전주를 맡게 하였으며, 또 뒤에서 말할 서방을 설치하여 문인들로 하여금 숙위하게 하는 등 종래의 무신정권에서 볼 수 없는 문인 중용정책을 썼다. 그리하여 최씨문중을 통하여 많은 문인이 배출되었는데, 이들 가운데 李奎報·琴儀·金敞·朴暄 등이 특히 유명하였다.

 최씨정권은 이미 최충헌 때부터 유능한 문사들을 많이 포섭·등용하고 그들을 우대한 반면 오히려 무신들을 억압하는 정책을 썼다. 고종 10년(1223)에 추밀원부사 吳壽祺가 일찍이 장군 崔愈恭·金季鳳·낭장 高守謙 등과 함께 중방의 여러 장수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문신들을 모두 죽임으로써 사사로운 원한을 갚으려 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白翎鎭將으로 좌천되었다가 죽음을 당하고, 최유공이 巨濟縣令, 김계봉이 溟州副使로 좌천되고 高守謙은 섬으로 귀양간 일이 있었다.269)≪高麗史節要≫권 15, 고종 10년 정월.
≪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附 怡.
또 그 이듬해 최유공과 김계봉이 대장군 李克仁과 함께 최우를 죽이려다가 일이 발각되어 최우는 그들을 잡아 죽이고 그의 일당 50여 인과 함께 관련자 추밀원부사 金仲龜·상장군 咸延壽·李茂功·대장군 朴文備 등을 섬으로 귀양보냈다.270)≪高麗史節要≫권 15, 고종 11년 7월.
≪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附 怡.
이렇게 최우가, 문신을 대량 제거하려는 무신을 가차없이 숙청한 것은 그의 문사 포섭 및 등용정책과 무신억압 정책의 반영이라 할 것이다.

 최우는 무신으로서 집권자이기는 하였지만 문학을 좋아하고 서예에도 능통하여 이른바 神品四賢(金生·坦然·崔瑀·柳伸)의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의 인물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문사를 좋아하고 그들을 포섭하는 데에 힘썼다고도 할 수 있다. 또 이렇게 유능한 문사를 포섭 등용함으로써 그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더욱 공고히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무신정권이 성립하면서 문신들이 학살 또는 은퇴로 대거 퇴진하고, 중앙과 지방의 중요 관직은 모두 무인이 독점하다시피 되었는데, 이점에서 무신정권의 성격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신들만으로는 실제에 있어서 정무수행이 불가능하였다. 이에 따라 무신정권은 기반이 취약했던 초기에는 문신세력을 제거하는데 무자비했지만, 무신정권을 확립한 최씨정권에 이르러서는 문신이 위험한 존재가 못되었으므로 도리어 그들을 우대하게 되었다. 이에 반해 무력을 가진 무신들을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 그들을 견제하는 정책변화를 꾀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문신등용을 위한 科擧에 있어서도 나타나는 바 과거의 실시는 무신정권기에도 종전과 비슷하였을 뿐만 아니라 과거급제자의 수에 있어서는 종전보다 훨씬 많았다. 이것으로 보면 무신정권기 집권자들은 신진문신을 등용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무신정권은 그 성립단계에 있어서는 문신들을 제거한 듯하였지만, 그 반면 에는 그 성립 초기부터 신진문인을 등용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동안 횡포를 부려오던 기성 문신세력을 제거하고 그 대신 무신정권 아래에서 정무 수행을 담당할 신진문인을 등용하는 일종의 신구세력의 교체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들 문신들은 비록 무신정권에 등용되었다고 하나 성격상 종래 문신정치기의 그들과 같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단지 무신정권을 뒷받침하는 존재에 불과하였고 정치상의 요직과 권력은 전적으로 무인들에 의하여 독점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신정권기에 비록 권력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재상직에까지 오른 문신도 적지 않았다. 예컨대 文克謙은 문신귀족 정치기에 正言으로 있으면서 왕의 총애를 받는 것을 기화로 횡포를 일삼던 宦者·術人 등의 비위를 직언한 것으로 이름이 나서 정중부의 난 때 죽음을 면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신에게 포섭되어 재상이 되고 대장군을 겸하였다. 또 崔惟淸은 經·史·子·集에 두루 능통한 학자로서 평소에 덕이 높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왔다고 한다. 정중부의 난이 일어나자 군사들은 서로 경계하여 그의 집을 침범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친척까지도 화를 면하게 되었고, 곧 무신정권에 포섭되어 재상의 자리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리고 李知命은 群書에 통달하고 문장과 시를 잘하여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고 黃州書記를 거쳐 忠州判官이 되어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모두 감복하였다 한다. 때마침 정중부의 난이 일어나자 백성들이 그를 보호하여 화를 면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무신정권에 포섭되어 간관이 되었고 뒤이어 정당문학에 올라 영화를 누렸다.

 무신정권은 그 초기부터 신진문인을 등용하여 정무상의 실무를 담당하게 하는 한편, 기성문신을 포섭하여 중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씨정권 때에 이르러서는 문인을 대량 요직에 등용하기 시작하여 최우 때는 정방 및 서방을 설치하여 문사들을 가까이하고 우대하였다. 이런 데서 문인이 다시 각광을 받아 저명한 문인들이 배출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문무겸전을 꾀하는 최씨정권이 정권을 정화하기 위한 정책에서 비롯하였으며, 또한 시대적 변화에도 큰 원인이 있었다.

 최씨정권 특히 최우 때는 무신정권 초기와는 사정이 크게 달랐다. 이 때는 무신정권 수립 후 이미 반세기를 지낸 때였으므로 무인에 대한 감정도 사라진지 오래이고, 문신귀족정치기의 문신의 횡포도 하나의 옛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그 뿐만 아니라 무신정권 초기부터 등용하기 시작한 신진문인의 세력 성장도 무시할 수 없었다. 더욱이 이 때는 대륙에서 몽고가 새로 일어나 그와의 관계가 자못 복잡하였고, 끝내는 전쟁으로까지 발전하여 민족적인 일대 시련기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일대 시련기를 무인세력만으로 감당하기는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최씨정권은 지나친 무신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미약하였던 문신을 보호하는 문무겸전의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