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8권 고려 무신정권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 국왕의 권위
  • 3) 국왕과 문반·민중

3) 국왕과 문반·민중

 명종은 의종의 동복아우로 庚寅亂 직후 정중부, 이의방 등 정변의 주동인물에 의하여 옹립되었다. 경인란의 성공으로 많은 문신들이 살해되었지만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도 모든 문신이 학살된 것이 아니고 免禍救命된 문신도 적지 않았다. 무신란에 가담한 무신들 가운데 비교적 온건한 태도를 취했던 집단345)≪高麗史≫권 128, 列傳 41, 鄭仲夫와 권 18, 世家 18, 의종 24년 9월 및 권 100, 列傳 13, 陳俊.
金塘澤,<李義旼政權의 性格>(≪歷史學報≫83, 1979)에서는 初期 武臣政權에 참여한 무신들을「가담집단」과「비가담집단」으로 나누고,「가담집단」을「온건집단」과「행동집단」으로 나누었다.
은 무신란의 확대를 원치 않고 있었다. 또한 政務面에서 미숙한 집권무신들은 정책수립 및 행정실무를 담당할 문신들을 필요로 하였고, 민심을 수습 안정시키기 위하여도 덕망있는 옛문신의 포섭 등용은 효과적인 것이었다.

 무신정권 성립 후 새로 등용된 문신층은 왕의 측근에서 신임을 받고 무신정권에 협조할 수 있는 옛문신과 과거를 통하여 진출하는 신진문신이 주류를 이루었다. 무신란 직후인 명종 즉위년 9월 문극겸의 批目에 의하여 새로 등용된 주요 문신을 보면 다음과 같다.346)≪高麗史節要≫권 11, 의종 24년 9월.

· 任克忠:中書侍郎平章事 · 韓 就:樞密院使 · 尹鱗瞻:知樞密院事 · 文克謙:右承宣·御史中丞 · 庾應圭:工部郎中

 무신들이 집권하는 격변기임에도 불구하고 禍를 면한 문신들이 宰樞兩府로부터 六部·臺省職 등 요직에 임명되고 있다. 무신정권 성립 후에도 문신관료들이 국정에 꾸준히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무신정권 아래에서 행정실무를 담당한다는 중요한 직책에 있었기 때문이지만, 국왕의 전주권이 계속 행사되고 있었다는 점도 큰 몫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국왕의 전주권에 대하여는 이미 앞절에서 언급하였다.

 무신집권기에 정권은 무신이 차지하였다 하더라도 실제로 정무를 다루는데는 문신이 아니고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문신을 양성하기 위한 유학교육이 여전히 행해졌고 비록 儒風이 부진한 가운데도 과거 또한 중단되지 않고 설행되었다.347)李奎報는 14세 되던 辛丑年(1181)에 비로소 文憲公徒가 되어 誠明齋에 들어가 학업을 익혔다(≪東國李相國集≫年譜;≪補閑集≫).

 집권무신들은 국왕과 문신들이 밀착하는 것을 항상 견제·탄압하였고, 무신들의 불법과 부당한 처사에 대한 대간의 탄핵을 그들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여 응징하려 하였으며, 가능한 한 많은 東班職을 차지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신장시키고자 하였다.

 정중부 일파의 문신에 대한 견제와 탄압은 다음과 같은 사례를 통해서 알 수 있을 것이다.

명종 8년 7월 太學博士 盧寶璵를 지방관인 蔚州防禦副使로 임명하게 되자 參知政事 송유인은「文武交差之法」을 이유로 하여 告身에 서명하지 않고 끝내 중방까지 동원하여 자기의 뜻을 관철시켰다. 또 11월에는 문관인 민영모가 먼저 中書侍郎平章事가 되었던 바 왕은 송유인을 민영모보다 윗자리에 班列시키려 하였는데, 그 배경에는 송유인이 정중부의 사위인데다 무신으로서 기세가 드높아 왕의 배려에 의한 것이나, 결국 송유인의 사양으로 원만히 해결되었다. 정중부의 가노가 금령을 범했으므로 臺官인 中丞 宋詝와 御史 晋光仁이 잡아 심문하자 정중부가 노하여 송저 등을 죽이려 하므로 그의 아들 鄭筠이 간하여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왕은 정중부가 분한 마음을 풀지 않을까 염려하여 명종 8년 7월 송저의 관직을 파면시키고 진광인을 工部員外郎으로 좌천시켰다(≪高麗史節要≫권 12, 명종 8년).

문극겸과 韓文俊이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송유인의 미움을 받아 명종 9년 7월 樞密院使 문극겸은 尙書左僕射로, 추밀원부사 한문준은 判司宰事로 좌천되었다(≪高麗史節要≫권 12, 명종 9년 7월).

 이와 같은 일련의 사례를 통하여 볼 때 국왕은 정치의 중심부에서 문신과 무신의 알력·대립을 완화시키고 문신에 대한 예기치 못한 박해를 최소화시키는 조정자의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중부의 횡포에 분개하고 있던 청년장군 경대승이 명종 9년(1179) 정중부일당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게 되자「庚寅亂」에 의해 추대된 국왕이나 집권무신들에게는 일대 충격적인 사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무신들은 경대승을 공동의 적으로 돌리게 되고 경대승은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여 都房348)都房이란 말은 원래 사병들의 숙소를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뒤에는 宿衛隊를 지칭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도방은 경대승의 신변보호 뿐만 아니라 비밀탐지, 반대세력 숙청을 비롯하여 主家의 권세를 배경으로 약탈·살생 등을 자행함으로써 그 폐단이 자못 많았다.이라는 사병집단을 두게 된다. 한편 명종은 경대승에 대하여 내면적으로는 꺼리는 것이 있었으나 겉으로는 두터운 은총을 베풀면서 기존 무신세력과의 알력과 권력적 대립관계를 원만하게 조정해 나갔다.

 경대승은 문신에 대하여 비교적 호의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강건하고 학식 을 중히 여기던 성품은 다음 사료를 통하여 엿볼 수 있다.

항상 무신들의 불법한 행동에 분개하여 개연히 복고의 뜻이 있었으므로 문신들이 기대어 존중히 여기었다. 왕이 (경)대승을 불러 묻기를 ‘정균의 承宣職을 卿에게 제수코자 하노라’하니, 그는 말하기를 ‘신은 문자를 알지 못하니 감히 바랄 바가 아닙니다. …승선은 왕명을 출납함이니 儒者가 아니면 불가합니다’라 하였다. …사람이 많이 따르고 붙었으나 학식과 勇略이 있는 자가 아니면 문득 거절하니 무신들이 모두 그 위엄을 두려워하여 감히 방자하게 굴지 못하였다(≪高麗史≫권 100, 列傳 13, 慶大升).

 무신정권 성립 후 한동안 벼슬과 거리가 멀었던 문사들이 任宦의 길을 찾아 과거에 응시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정치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李仁老는 명종 10년 과거에서 29세의 나이로 장원급제하였으며, 문명이 높은 吳世才도 명종 12년에 나이 50으로 과거에 급제하였고, 科試에 부정적 입장을 취하던 林椿 역시 과거를 거쳐 宦路를 찾으려 하였다.349)≪破閑集≫권 下·≪東文選≫권 59, 與皇甫本書.

 명종 13년(1183) 경대승이 죽은 후 천민 출신인 이의민이 왕의 부름을 받고 새로운 무신집정자로 등장하였다. 무신정권의 시대적 상황에서 국왕이 새로운 무신집정자를 선택할 수 있었다는 것은 무신세력에 대처해 나가는 국왕의 정치적 위치가 결코 허약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명종은 이의민과 제휴함으로써 기성 무신세력에게 신뢰와 안도감을 주고 경대승집권의 충격에서 벗어나 종전의 정치질서를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명종에 대하여 성품이 유약하고 결단성이 없어서 정권을 아랫 사람에게 농단당했다는 史家의 평350)≪高麗史節要≫권 12, 명종 14년 2월.은, 당시의 시대상황을 너무 피상적으로 보고 군주의 책무에 대한 당위성만을 강조한 견해라고 볼 수 있다.

 이의민정권의 등장은 자유분방한 기질을 가진 일반 문사들에게는 시련기요, 암흑기였다. 무신란 이후 혼란한 세태는 문신들로 하여금 현실도피적인 은거생활을 강요하였고 그들 자신이 耆老會나 竹林高會 등을 만들어 자연을 벗삼아 詩酒로써 소일하는 풍조를 가져오게 하였다. 오세재, 임춘 등이 중심이 된 이른바「竹林七賢」351)≪高麗史≫권 102, 列傳 15, 李仁老.의 등장도 이러한 세태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이의민정권이 장기화되면서 명종은 정사를 게을리하고 그림에 열중하는가 하면 관리를 등용할 때 폐신·환자들과 더불어 의논함으로써 엽관운동과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해져 정치기강의 문란을 초래하기도 하였다.352)≪高麗史節要≫권 13, 명종 14년 12월·15년 6월.

 명종 때에 크게 활약하던 重臣 문극겸이 동왕 19년에 죽었고, 그 다음 해에는 연로한 한문준이 세상을 떠났으며, 門下侍郎平章事로 致仕한 민영모도 동왕 24년 3월에 사망하였다. 그리하여 명종의 울타리는 허물어져만 갔다.

 최충헌이 명종 26년(1196) 이의민정권을 타도하고 집권하게 되자 정치적 혼란은 점차 안정되어 갔고 무신정권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최충헌은 집권 초에 趙永仁·奇洪壽·任濡·崔詵 등 그와 친분이 있거나 인척관계에 있던 고위문무관을 측근으로 맞아 들였으며353)≪高麗史≫권 102, 列傳 15, 李奎報·≪高麗史節要≫권 13, 명종 27년 12월.
조영인과 임유는 최충헌의 집안과 인척관계에 있었으며 최선은 최충헌 집권 이전부터 그와 친분을 맺고 있었고 기홍수는 최충헌이 가장 신임하는 무관 중의 한 사람이었다(朴菖熙,<崔忠獻小考>,≪史學志≫3, 1969).
그의 장기적 집권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왕실의 강력한 지지기반인 문신세력과 국왕과의 공식적인 연결 통로를 철저히 차단하려 하였다. 이리하여 최충헌은 집권 후 문무관의 전주를 장악하여 관료사회에 군림하였고, 그의 정권을 보다 확고히 하기 위하여 문반에 대한 우대정책을 썼을 뿐만 아니라 과거제를 강화 운용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조처가 국왕의 문신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을 크게 감소시킨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반계층은 그들의 속성으로 보아 국왕의 잠재적 지지세력으로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음도 간과할 수 없다. 곧 무신정권 몰락 후 왕정복고와 같은 정치적 변화를 맞아 문신들의 향배가 이를 증명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崔瑀의 문신에 대한 정책은 최충헌의 정책을 답습하면서 이를 제도적으로 보완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전주권을 행사함에 있어 政房354)≪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附 怡.의 설치라던가 文 士에 대한 회유책으로 書房355)위와 같음.을 두어 운영한 것이 그것이다.

 최우는 최충헌에 이어 국가의 중대사는 주로 宰樞會議를 통하여 처리함으로써 중방의 역할을 크게 약화시켰다. 왕실과 연결되어 있던 문반이 국왕을 지지하는 세력기반이었다면 피지배층인 민중은 국왕과 무신정권에 대하여 어떠한 관계에 있었나 하는 것을 규명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과제라 하겠다.

 민중은 무신집권기라는 고려왕조의 정치적 격변기에 민란으로 그들의 불만을 표출하면서도 국왕의 타도가 아닌 反武臣政權的 태도를 분명하게 표방하였다. 또한 그들은 고려왕조가 유지될 수 있는 사회적 정치적 세력으로 집단화 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국왕의 지위를 보전케 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하겠다.

 민란의 근본원인은 무신정권 이전인 문신귀족의 전성기부터 존재하여 왔다.356)민란 발생의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守令의 횡포로 백성이 流亡하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는데, 이러한 면은 무신정권 이전 예종대에도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高麗史≫권 12, 世家 12, 예종 즉위년 12월에 “甲申 敎曰…今諸州郡司牧 淸廉憂恤者 十無一二 慕利釣名 有傷人體 好賄營私 殘害生民 流亡相繼十室九室 朕甚痛焉…”이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명종대(중방정치시기)에 민란을 촉발시킨 원인은 중앙의 무신정권과 결탁한 지방관(주로 守令) 및 향리의 탐학과 횡포였다.357)≪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全國 選用監司. 경제적 측면에서 민란의 또 하나의 원인은 토지겸병358)≪高麗史≫권 128, 列傳 41, 叛逆 2, 鄭仲夫.
최충헌형제의 封事 제7조 가운데 “此聞 郡國吏多逞貪 廉恥道息’이란 말이 있어 그 당시 州縣의 吏(那吏)가 탐오하여 염치를 저버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高麗史≫권 129, 列傳 42, 崔忠獻).
에 따른 농촌사회의 피폐와 궁핍화를 들 수 있다. 명종대에 오면 민중들은 신분사회의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무신란의 주역인 정중부·이의방 등 집권무신들은 미천한 신분출신이었고, 그 우익의 무신들도 대부분 그러하였다.359)정중부·이의방을 추종했던 무인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 杜景升·于學儒·奇卓誠·洪仲方·陳俊·崔世輔·朴純弼·李英搢·白任至·鄭邦佑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대체로 “起自行伍” “系本寒微” “門地賤微” “起自電吏” 등으로 표현된 신분의 출신이었다(≪高麗史≫권 100, 列傳 13 참조). 따라서 민란의 다른 원인으로 민중의 사회의식과 신분의식의 상승을 들 수 있다.「庚寅의 亂」을 계기로 민중들도 집권무신들과 같이 정치적 출세와 사회참여가 가능하다고 자각하게 되었고 이러한 민중의 자각은 하극상의 풍조와 함께 민란을 일으킬 충분한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들 민란이 왕권과 무신정권에 미친 영향은 어떠했는가를 사건 별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公州 鳴鶴所에서 일어난 亡伊, 亡所伊의 난은 명종 6년에 일어난 대규모의 농민반란이었다. 그들에 대한 회유책으로 조정에서는 그 해 6월에 그들의 향리인 명학소를 忠順縣으로 승격시키고 수령을 파견하여 안무케 하였다.

 이 난이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은 정중부 일파의 전횡에서 비롯된 것으로≪高麗史節要≫권 12, 명종 6년 8월조에서 “諸領의 군사가 익명의 방을 붙여 말하기를 ‘시중 정중부 및 그 아들 승선 균과 그 사위 僕射 송유인이 권세를 마음대로 하고 방자하였다. 南賊이 일어남은 이로 말미암음이니 만약 군사를 내어 치려면 반드시 먼저 이 무리들을 제거한 뒤에 하는 것이 옳다’라고 하므로 (정)균이 이를 듣고 두려워 하여 해직을 빌고 여러 날 동안 나오지 않았다”라고 하였고,≪高麗史≫권 128, 鄭仲夫傳에서도 “남적이 일어난 것은 당시 무신집정인 정중부 일가의 전횡에 그 근원이 있다”라고 하여 사실상 민란의 원인이 무신정권에 있음을 밝히고 있어서, 민란은 역설적으로 말하여 무신정권을 견제하고 간접적으로 왕권을 유지케 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경대승 집권기인 명종 12년에는 全州에서 官奴의 亂360)≪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12년 3월.이 일어났다. 즉 전주의 司錄인 陳大有 및 上戶長 李澤民 등이 官船의 건조를 督役함이 너무나 가혹하였으므로 旗頭(기수병) 竹同 등 6인이 관노와 불량배를 불러모아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 전주의 난은 그 주체자가 旗頭 竹同 등의 군인이었으나 노예가 직접 참가한 최초의 반란으로서 그 동기가 지방관과 향리의 가혹한 督役, 驅使에 있었으나 보다 근원적인 것은 무신정권과 결탁한 지방관의 고질적인 횡포와 탐학에 있었던 것이다.

 명종 23년 이의민 집권기에 경상도 雲門과 草田에서 일어난 金沙彌와 孝心의 난은 민중과 무신정권 및 국왕과의 미묘한 관계를 잘 나타내고 있다. 당시 무신집정자인 이의민은 신라 부흥의 뜻을 품고 김사미·효심 등과 내통하였으며 그의 아들 李至純(將軍)도 대장군 全存傑의 휘하에서 반군을 치는 관군의 지휘관으로서 南賊과 내통하여 軍中의 동정을 반군에 누설시켜 관군의 패배를 자초케 하였다.361)≪高麗史≫권 128, 列傳 41, 李義旼.

 한편 그 해 12월에 관군의 대토벌 작전이 어느 정도 성공하였을 때 남적의 괴수 가운데 한 사람인 得甫가 대궐에 들어와 생업에 종사할 것을 허락하여 주기를 청하므로 국왕은 有司에 명하여 놓아 돌려 보내어 현지 兵馬使의 처분에 맡긴 일이 있으며,362)≪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23년 12월. 이듬해 8월에는 남적의 괴수가 그 무리 李純 등 4명을 보내어 대궐에 이르러 항복하기를 청하므로 국왕은 그들에게 隊正을 제수하고 布를 하사하여 돌려 보냈다363)≪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24년 8월.는 기록이 있다. 이는 민란의 지도자들이 협상 대상을 국왕으로 하고 집정무신을 제외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도 그들의 목표가 국왕의 타도나 적대감에 있던 것이 아니고 무신정권 내지 그와 연결된 지방관의 탐학·횡포에 대한 항거였다고 생각된다.

 무신정권의 확립기라 할 수 있는 최씨집권기에 일어난 민란에서도 우리는 국왕의 위상과 관계 있는 중요한 사태를 경험하게 된다.

 최충헌 집권 초인 신종 원년(1198) 開京에서 萬積이 주동이 된 대규모의 公私奴婢의 반란이 일어났다.364)≪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이 반란은 개경의 모든 노비들과 연락하여 계획적으로 신분해방, 나아가서는 정권탈취를 꾀하였다는 데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비록 사전에 발각되어 거사는 하지 못하고 말았지만 개경 北山에서 공사노비를 모아 놓고 행한 다음과 같은 만적의 선동적 연설에서 시사받는 바가 크다.

庚癸 이래 朱紫(高官大爵)는 賤隷 속에서 많이 일어났다. 將相의 씨가 따로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찌 육체를 수고롭게 하고도 매질 밑에서 괴로워야 하겠는가. …먼저 최충헌 등을 죽이고 이어 각기 그 주인을 죽여 賤籍을 불살라서 三韓으로 하여금 천인을 없게 하면 公卿將相은 우리가 모두 할 수 있다(≪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여기에서 만적의 주장 속에 “장상의 씨가 따로 있겠는가”라고 한 것이나, 최충헌 등 집권자를 죽인 후 천적을 불태워 삼한에 천인을 없애고 자기들이 공경장상이 되어 정권을 장악하자는 선동은 그들의 봉기목적이 국왕의 타도가 아닌 신분해방 및 정권쟁취에 있었다는 점이 매우 특징적이다.

<羅滿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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