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1. 정치조직의 변화
  • 1) 중앙 통치체제의 변화
  • (3) 충선왕대의 관제개혁

(3) 충선왕대의 관제개혁

 충렬왕 24년(1298) 讓位에 따라 즉위한 충선왕은 여러 가지 개혁정치를 추진하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관제개혁이었다. 충선왕은 관제개혁에 즈음하여 敎를 내렸는데 그것은 재상의 수가 너무 많으니 줄일 것, 충렬왕 원년의 관제개정에 미흡한 점이 많으므로 개정할 것, 중국 역대의 관직을 살펴서 원의 관제와 무관한 것은 채용할 것 등이 포함되었으며, 그날로 대대적인 인사 발령을 단행하였다. 이 때 임명된 34명 중 대표적인 사람들의 관직을 보면 새로운 직명이 사용됨을 알 수 있다.0010)≪高麗史≫권 33, 世家 33, 충렬왕 24년 충선왕 즉위 5월.

趙仁規 ― 司徒·侍中·參知光政院事 洪子藩 ― 左僕射·參知光政院事 洪 奎 ― 守司徒·領景靈宮事 鄭可臣 ― 司空·右僕射·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參知光政院事 印 侯 ― 光政使·參知機務 金 琿 ― 檢校守司徒·領奉常寺事 車 信 ― 檢校司徒·資政院使 李之氐 ― 檢校司徒·資政院使

 충선왕 즉위년(1298) 5월의 관제개혁의 첫째 특징은 충렬왕 원년 관제의 司를 폐지한 점이다. 최고정무기구인 都僉議使司와 都評議使司는 그대로 존속시켰으나 4사와 밀직사·감찰사가 6曹·光政院·司憲府로 바뀌어 많은 사가 소멸되었다. 이것은 충렬왕의 관제개혁에서 都僉議使司-典理司-考功司와 같은 세 단계의 관부들이 모두 사를 칭한 기형적인 관계를 시정한 것이었다.0011)이익주,<충선왕 즉위년(1298) 관제개편의 성격>(≪14세기 고려의 정치와 사회≫, 민음사, 1994).

 둘째로 사에 대신하여 院이 출현한 것도 새로운 특징이었다. 즉 光政院·資政院·詞林院이 설치된 것이다. 원래 원의 관제에는 院의 명칭을 가진 고위 관부가 많았는데 충선왕은 이러한 원나라 제도를 본따서 세 개의 중요관부를 원으로 칭한 것이다.

 셋째로 주목되는 것은 광정원의 부상이다. 광정원은 밀직사(종래의 중추원)를 개칭한 것인데 ‘政’의 명칭이 붙음으로써 군사기능이 아닌 정무기능이 명시되었다. 충선왕 즉위년 5월의 관직임명에는 수상인 趙仁規가 시중으로 참지광정원사가 되고, 亞相인 洪子藩이 좌복야로 역시 참지광정원사가 되었으며, 우복야인 鄭可臣도 참지광정원사가 되어 시중과 좌우복야 3인이 모두 참지광정원사를 겸하였다. 이 밖에도 광정원사·동지광정원사·광정원부사·첨광정원사가 임명되어 광정원의 樞臣職이 5직·8명이나 되어 그 지위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0012)이 때 주목할 것은 새로이 參知機務란 관직이 생긴 것이다. 모두 4명이 참지기무를 겸하였는데 그 가운데 3명이 光政院職을 가진 사람이었음이 나타난다. 그만큼 광정원이 국가 기무에 관여함이 많았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넷째는 새로운 資政院이 출현하여 재상 관부가 된 점이다. 자정원은 도첨의사사나 광정원보다 하위였으나 2명의 資政院使와 2명의 同知資政院事가 임명되어 역시 정치기무에 참여하였다. 자정원의 기능에 대하여는 확실한 설명이 없으나 그 관부명칭으로 보아 정치의 자문역할을 담당하지 않았나 추측되며 이런 점에서 역시 재상 관부로 봄이 옳을 것이다.

 다섯째는 국무 담당기구가 다시 6典體制로 환원된 점이다. 충렬왕 원년에 4司로 축소된 6部는 이 때 銓曹·兵曹·民曹·刑曹·儀曹·工曹의 6조로 환원되었다. 비록 부 대신 조를 칭하였으나, 6전체제로의 복구는 그 장관을 判書에서 尙書로 환원한 것과 함께 복고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때 僉議府에 종래의 시중과 좌·우복야를 복구한 것도 그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詞林院을 신설하여 왕명 출납을 담당케 하는 변화가 있었는데, 이 때의 관제개혁은 충렬왕 원년의 기형적인 개정을 정상화시키려는 데 주안점이 있었으며, ‘사’ 대신 元制에 따른 ‘원’을 설치하고 6전체제로 환원하는 등 복고적인 경향을 띠었다. 충선왕의 정치개혁을 혁신적이며 반원적인 성격으로 규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지만 관제개혁의 측면에서 본다면 반원적이라기보다는 원제를 모방하면서도 자주적인 면이 있었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이러한 점은 충선왕 즉위년(1298) 5월의 인사발령에서도 나타난다. 이 때 임명된 고관에는 전대 충렬왕파도 포함되고 종래의 권문세족도 있으나 새로이 충선왕 측근의 신진관료가 부상하였다. 수상인 도첨의시중·참지광정원사로 임명된 趙仁規는 충렬왕파이면서 충선왕 즉위에 협조한 친원세력이다. 충선왕 자신도 원 공주의 소생이면서 역시 원 공주를 왕비로 맞이하고 원에서 자란 사람으로 그 체질상 반원적일 수 없었다. 따라서 충선왕의 개혁정치와 관직임명은 반원적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또한 충선왕의 개혁정치 자체도 역시 한계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충선왕의 개혁정치가 충렬왕 측근정치의 모순과 권문세족의 부패를 그 대상으로 하였지만 충선왕정권에는 詞林院을 중심으로 한 개혁세력에 대비되는 충렬왕파와 권문세족도 다수 잔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는 당연히 제한된 개혁에 그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충선왕의 개혁은 당시의 사회경제적 폐단에 대하여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고 주로 운영상의 문제를 개선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0013)이익주, 앞의 글.

 그러나 충선왕 즉위년 5월의 新官制는 3개월 만에 복구되고 말았다. 즉 8월에 다시 관제를 개정하여 洪子藩을 三重大匡·僉議中贊·判銓曹事, 印侯를 重大匡·僉議侍郞贊成事·判兵曹監察司事, 金琿을 僉議侍郞贊成事·判民曹事로 임명하는 등 35명의 관직 발령을 내린 것이다.0014)≪高麗史≫권 33, 世家 33, 충렬왕 24년 충선왕 즉위 8월 무술. 이 때의 관제개정은 첨의부의 시중과 좌우복야를 다시 중찬·시랑찬성사 등으로 복구하고, 6조상서를 판서로 격하해 호칭하고, 광정원을 밀직사, 사헌부를 감찰사로 환원한 것이었다. 그러나 5월에 신설된 자정원과 사림원은 그대로 존속되었고 6조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니까 이 때의 개정은 역시 충선왕대에 개정했던 자주적 관제명칭을 원의 간섭으로 다시 격하시킨 데 초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때 6조에 재상 判事制가 부활된 점은 주목할 일이라 보인다.

 충선왕은 충렬왕 34년(1308)에 復位함에 따라 다시 관제를 개정하였다.0015)≪高麗史節要≫권 23, 충렬왕 34년 5월. 이 때 관제를 개정한 듯하다. 충선왕 복위 후인 9월에는 이미 새 관제인 讞部가 보이고 있다. 이 때의 커다란 변화는 6조제의 개정이었다. 종래의 이조·병조·예조를 병합하여 選部라 하고 여기에 選軍·堂後·衛尉의 일도 포함케 하였으며, 민조를 民部라 하고 여기 三司·軍器·都塩院의 일을 병합케 하였고, 형조를 讞部라 하고 여기에 監傳色·都官·典獄의 기능도 병속케 하였으며, 그 장관인 판서를 典書로 개칭하였다. 이제 6전체제는 무너지고 3부의 기형적 모습으로 바뀌는 동시에 다른 부속 기능을 병합케 할 만큼 비대해졌다. 단, 조에 대신하여 부를 칭한 것은 이 때 감찰사를 다시 사헌부로 환원한 것과 함께 주목할 점이다.

 다음은 密直司의 승격이다.≪고려사≫百官志에 의하면 충선왕 2년(1310)에 밀직사를 陞秩하여 僉議府와 함께 兩府로 칭하게 되었는데≪高麗史節要≫에는 보다 상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즉 충선왕 2년 8월 나라의 중대사를 관장한 式目都監에 僉議政丞·判三司事·密直使·僉議贊成事·三司右左使·僉議評理 이상을 判事로 하고 知密直 이하는 使로 삼으며, 밀직사를 2품 관부로 승격하여 첨의부와 함께 양부로 부르게 하였다는 것이다. 고려 전기부터 재·추를 양부라 칭하였는데 이 때 굳이 양부를 칭하였다는 것은 그 동안 밀직사의 지위가 낮았는데 이제 다시 원형으로 환원되었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충선왕 복위 원년에 판밀직사사를 둔 것도 이러한 밀직사 승격의 전조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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