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1. 정치조직의 변화
  • 1) 중앙 통치체제의 변화
  • (4) 공민왕대의 관제개혁

(4) 공민왕대의 관제개혁

 고려의 정치제도는 공민왕대에 이르러 또 한 번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대륙에서의 漢族의 궐기와 원의 쇠퇴는 고려에도 영향을 끼쳐 공민왕은 자주적인 개혁정치를 단행하였으니 이는 관제개혁에도 나타나게 되었다. 즉 공민왕 5년(1356)에 첨의부를 고쳐 종래의 3성인 중서문하성·상서성을 복구하고 6部制로 환원하였으며 다시 밀직사를 추밀원으로 고쳐 ‘文宗舊制(文宗官制)’를 실시하였던 것이다.0016)≪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5년 7월 정해 및 권 76, 志 30, 百官 1.

 이러한 공민왕 5년의 관제개혁은 충렬왕 이후 원의 강요로 격하된 정치제도를 원래의 명칭으로 환원한 것이었다. 奇轍 등 부원파의 숙청과 정동행성이문소의 혁파, 雙城摠管府의 옛 땅의 수복, 원 연호의 폐지 등 일련의 반원적인 공민왕의 혁신정책이 관제복구로 나타난 것이다. 중서문하성에 侍中·平章事 등 5宰가 임명되고 상서성에 左右僕射, 추밀원에 判事·使 등이 설치되었으며, 이·병·호·형·예·공의 6부에 尙書가 두어지게 되었다. 이 때 御史臺·翰林院·史館·國子監 및 秘書監·閣門 등 諸司도 옛 제도로 복구되었으니, 이제 고려는 원래의 정치제도로 정상화된 것이다.

 그러나 공민왕의 의욕적인 반원적 개혁정치는 아직도 대륙에서 여력을 가지고 있던 원의 압력에 의하여 좌절되는 운명을 맞이하였으며 이는 관제의 환원으로 구체화되었다. 문종 구제로 개정된 지 6년 후인 공민왕 11년(1362) 다시 관제가 개정되었으니 이것은 다시 충렬왕대의 제도로 회귀된 것이었다. 즉 중서문하성에 대신하여 都僉議府가 설치되고 시중이 右左政丞으로 바뀌었으며 상서성 대신 다시 三司가 복구되었다. 6부는 典理司·軍簿司·版圖司·典法司·禮儀司·典工司의 6사로 바뀌고 상서도 판서로 격하되었다. 이 때 추밀원은 밀직사로 되돌아갔으며, 어사대는 監察司, 한림원은 藝文館, 국자감은 成均館, 그리고 각 사도 역시 前制로 환원되고 말았다.0017)≪高麗史≫권 40, 世家 40, 공민왕 11년 3월 갑자 및 권 76, 志 30, 百官 1. 모처럼 공민왕에 의해 단행된 반원적이며 자주적인 문종 구제의 실시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원제의 모방과 압력에 따른 격하가 점차 원래의 모습으로 복구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하나의 추세였다. 비록 공민왕 11년에 도첨의부가 되었으나 이듬해에는 우좌정승이 左右侍中으로 개칭되었으니, 시중의 호칭이나 원제에 따른「右」의 상위제에 대하여 원래와 같이「左」가 상위로 바뀐 것은 그 하나의 표현이었다. 드디어 공민왕 18년에는 다시 많은 관제가 원형으로 개정되었으니, 도첨의부가 門下府로 개정되고 그 장관도 門下左右侍中이라 개칭되었으며, 6사도 選部·摠部·民部·理部·禮部·工部의 6부로 환원되고 판서를 다시 상서로 격상 호칭하였다. 이 때 밀직사 및 몇 개의 관부명은 그대로 존속되었으나 감찰사가 사헌부로 되고 비서감·각문 등 諸司도 복구되었다. 문하부와 시중, 6부와 상서 등 대체로 문종 구제로 환원되어 자주성이 짙어졌던 것이다.

 그 뒤 공민왕 21년에 6부가 다시 典理司 등 6사로 되고 상서가 판서로 격하되었으며, 그 밖의 제 사도 역시 11년 관제로 되돌아갔으나 문하부는 그대로 존속되었다. 공양왕 원년(1389)에는 6사가 다시 이조·병조·호조·형조·예조·공조의 6曹로 개칭되었으나 그 밖의 관제에는 큰 변함이 없었다. 이렇게 보면 공민왕 이후 고려의 정치제도는 자주적인 원형으로의 복구와 원제에 따른 격하의 악순환이 연속되다가 결국은 양자의 중간적 모습으로 정착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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