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1. 정치조직의 변화
  • 2) 지방 통치체제의 변화
  • (1) 감무제의 확산과 농촌사회의 변화

(1) 감무제의 확산과 농촌사회의 변화

 고려 후기에 들어 집권세력과 그에 결탁한 수령 및 향리들의 대토지겸병이 나타나 대읍중심의 군현제와 전시과제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농민의 離村流亡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미 仁州李氏의 세도정치하에서 농민들의 避役抵抗·抗租運動·유망 등이 격화되기 시작하였다. 문종대에 “逋民 13,000호가 발생했다”거나 “諸衛軍人의 亡命者가 아주 많다”는 지적이 있었고,0022)≪高麗史節要≫권 4, 문종 원년 10월.
≪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문종 25년 6월.
예종대에는 “유망이 서로 이어 열에 아홉 집이 비었다”고 할 정도였으며, 구체적으로 谷州·峽溪⋅儒州·安岳·長淵, 그리고 牛峯·兎山 등 24개 屬邑의 유망현상 등이 지적되었다.0023)≪高麗史≫권 12, 世家 12, 예종 즉위년 12월 갑신.
≪高麗史節要≫권 7, 예종 원년 3월·4월.
또 인종대에는 이들이 무리를 이루어 강도나 도적으로 바뀌어져가는 상황이 야기되었다.0024)≪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盜賊 인종 2년 判 및 권 79, 志 33, 食貨 2, 農桑 인종 6년 3월. 이와 같이 逋戶·流民·盜賊 등 농민의 저항이 계속되었고, 또 봉기의 양상이 시대가 내려올수록 더욱 격렬해졌다. 여기에서 유망과 관련된 다음의 조처를 주목해 보기로 한다.

詔를 내려 말하기를, ‘요전에 서해도의 儒州·安岳·長淵 등 縣의 인물이 유망하여 비로소 監務官을 차정하여 안무케 하였더니 드디어 유민이 점차 돌아와 산업이 날로 성하게 되었다. 지금 牛峯·兎山 등 24현의 인물 또한 점차 유망하니 유주의 예에 따라 감무를 두어 招撫하라’고 하였다(≪高麗史節要≫권 7, 예종 원년 4월).

 즉 유주·안악·장연 등 현의 농민들이 유망하여 처음으로 監務官을 파견했다는 것이다.0025)≪高麗史≫地理志에서 고려초에 洪州의 驪陽, 古阜의 大山·仁義 등지에 감무관이 설치되었다고 하였지만(≪高麗史≫권 56, 志 10, 地理 1, 楊廣道 洪州 驪陽縣 및 권 57, 志 11, 地理 2, 全羅道 南原府 古阜郡), 이것은 誤記임이 분명하다(李樹健,<朝鮮初期 郡縣制整備와 地方統治體制>,≪嶺南史學≫1, 1971). 그리고 그 감무가 유민을 안무하였더니, “마침내 유민들이 점차 돌아와 산업이 날로 성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로써 감무제의 시행은 ‘농민의 유망’으로 인한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따라서 감무관의 설치지역이 확대되었다는 것은 유민의 수가 증대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 기록에서 예종은 우봉·토산 등 24현의 농민들이 점차 유망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초무하기 위해 감무를 둔다고 했다. 그러나 그 24현의 지명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런데≪高麗史≫世家 예종 원년(1106) 4월 경인조에는 그 군현명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즉 우봉·토산·積城·坡平·沙川·朔寧·安峽·僧嶺·洞陰·安州·永康·嘉禾·靑松·仁義·金城·堤州·保寧·餘尾·唐津·定安·萬頃·富閏·楊口·狼川 등의 군현이 바로 그것이다. 이로써 당시 감무관이 설치된 군현이 거의 전국에 산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종 원년부터 동왕 3년에 이르기까지 경기 12, 충청 25, 경상 7, 전라 7, 강원 3, 황해 12, 평안 1 등 모두 67읍에 감무관이 파견되었다는 사실에서0026)李樹健, 위의 글, 19쪽<감무관설치표>참조.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전국적으로 그러한 현상이 증대되어 감을 알 수 있다.

 12세기 이후 대읍중심의 군현제 속에 편재된 일반민들이 피역저항, 항조운동과 더불어 유망을 하게 됨으로써, 종래의 농촌사회 질서는 붕괴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권문세족들의 대토지겸병으로 인한 전시과제도의 붕괴에 따른 사회경제적 모순에서 비롯되는 것인 동시에, 부세수취와 力役동원의 단위체인 군현제도가 더 이상 사회발전에 적합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농민의 유망이 주로 속읍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간 主邑에 의한 속읍 수탈로 나타난 현상인지 알 수 없다. 대읍중심의 군현제도는 외관의 극소화, 향리층의 숫적 극대화 속에서 국가와 재향세력을 축으로 하는 대농민 지배방식을 채택하였기 때문에 국가와 재향세력의 민에 대한 불법적 수탈이 용이할 수 있는 구조적 모순을 안고 있었다. 또한 속읍보다는 주읍, 그 주읍 가운데에서도 대읍에 권력집중을 초래하여 속읍 및 향·소·부곡 등에 부세수취의 부담이나 역역의 부담이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속읍의 주민들은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신분적으로까지 차등적인 처우를 받는 등 불리한 여건에 처하게 됨으로써 그 지방민의 이탈현상이 상대적으로 많이 나타났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정이 이러했음에도 불구하고 속읍과 주읍과의 관계는, 마치 신하와 임금, 자식과 아버지, 비천하고 연소한 자와 지체높고 나이 많은 자, 아내와 남편 등의 사이처럼 비유되기도 하였던 것 같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 당시의 ‘東京’이란 노래에서 어느 정도 간취할 수 있다.0027)≪高麗史≫권 71, 志 25, 樂 2, 三國俗樂 東京.

 군현제의 모순에 따른 속읍지역 및 부곡지역의 민들이 일단 유망하면 그 지역의 남은 민들에게 族徵·隣徵 등의 형태로 부담이 가중되었다. 나아가 주읍에까지 그 부담이 돌아오게 되어 이제 이들마저 소농으로서의 기반을 잠식당하고 저항하게 되는 구조적 모순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 결과 국가와 재향세력을 축으로 민에 대한 직접적 지배를 관철하려는 국가적 수취질서와 그 매개체로의 대읍중심의 군현제는 더 이상 농민층을 장악할 수 없게 되어 농민층의 離村流亡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에 고려정부는 감무제의 시행을 통한 대읍중심의 군현제의 개선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와 더불어 국가에서 감무제의 확대시행과 함께 그 동안 농민에게 가장 큰 질곡이 되어온 병폐부터 제거해주는 유화정책을 실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예컨대 예종 3년(1108) 2월에 여러 주현의 公私田이 陳田으로 변하여 耕種을 할 수 없게 된 지경에서 만약 관리가 그 佃戶·諸族類·隣保人에게 稅粮을 징수할 때 侵害作弊者가 있으면 이를 금지케 한 조처가 바로 그것이다.0028)≪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租稅 예종 3년 2월. 그러나 이 안무책을 유의해 보면 그것이 기만적 술책임을 곧 발견할 수 있다. 이 조처는 단지 관리들이 전호 및 제족류·인보인 등에게 각 주현의 진전의 세량을 징수할 때 침해작폐를 하지 말라는 뜻이지, 세량을 징수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요, 또 족징·인징의 제도를 폐지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각 주현의 공·사전 중에서 ‘川河漂損’·‘樹木叢生’ 등으로 인하여 耕種도 할 수 없는 진전에, 그 전호 및 제족류·인보인 등에게 세량을 계속 징수하겠다는 것은 가혹한 수취이며, 기만책인 것이다. 따라서 농민의 유망은 계속 확산될 수밖에 없었다.

 농민의 유망으로 인하여 공부의 수납액이 계속 줄어들자 국가에서는 권농정책으로 그것을 보충하려고 시도하였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인종 23년(1145) 5월에는 輸養都監에서 각 도의 주·현으로 하여금 地品, 즉 토질에 따라 뽕나무·밤나무·옻나무·닥나무 등을 재배하도록 勸課하자고 건의하고 있으며,0029)≪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農桑 인종 23년 5월. 명종 18년(1193) 3월에는 왕이 節候에 맞추어 각종 곡식을 재배할 것을 명하였다.0030)≪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農桑 명종 18년 3월. 두 경우의 시간적 간격은 약 50년일 뿐이다. 그러나 전자는 ‘지품’에, 후자는 ‘절후’에 각각 초점을 맞추어 영농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지품’에서 ‘절후’에 이르기까지 영농방법의 개선을 권장하고 있다는 것은, 그 사이의 발전상을 반영해주는 것이다. 아울러 堤堰의 수축과0031)≪新增東國輿地勝覽≫권 28, 慶尙道 尙州牧 山川 恭檢池. 荒蕪地의 개간을 장려하기도 하였다.0032)崔 瀣,≪拙藁千百≫권 1, 送安梁州序.

 이와 같이 감무제의 확대 실시를 통한 지방군현제의 개편은 속읍민의 유망·저항을 안무 방지하기 위한 것임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이와 아울러 족징·인징의 완화와 지품·절후에 맞추어 영농할 것을 권장하거나 제언의 신축과 수축, 그리고 황무지의 개간장려 등의 정책은, 그것의 또 다른 수단인 동시에 농민의 유망으로 인하여 발생한 貢賦의 결손을 보충하려는 대책이었을 것이다. 고려정부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던간에, 군현제의 개편과 권농정책의 개선을 통하여 영농방법의 발전을 이루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은 당시 농촌사회의 진보를 말해주는 것이다. 속읍에 현령·감무가 파견됨으로써 향리층의 재량권은 그만큼 축소되기에 이르렀고, 주읍에 의한 속읍의 수탈은 어느 정도 배제될 수 있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속읍의 전반적인 성장이 가능하였으니, 그러한 성장은 곧 속읍민들의 투쟁에 의한 산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고려 중기에 오면 대읍중심의 군현제도하에서 속읍이 성장하였지만 무신정권이 성립된 후, 대규모 토지겸병의 성행으로 인해 전시과제도는 거의 유명무실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농촌사회의 일보 전진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도리어 국가 및 지배층은 세액의 증대 등을 통한 수취강화를 시도하였다. 이는 결국 군현제도의 커다란 변화를 수반하였다. 첫째 예종대에 비롯된 감무제를 더욱 확립케 함으로써 대읍영속관계의 구조적 변천을 촉진케 하였으며, 둘째 文科출신의 仕路였던 이른바 ‘州縣外補’를 ‘文武交差制’의 시행 등을 통해 무신들이 지방관직을 점유하는 한편, 이로 인한 지방관간의 갈등이 표출되어 군현제도가 크게 이완되었다는 점이다. 우선 전자의 경우부터 살펴보고, 후자의 경우는 항을 달리하여 그 내용을 알아보기로 한다.

 무신란 직후인 명종 2년(1172)부터 동왕 6년까지 전국의 군현 중에서 감무를 파견한 곳은 58읍이나 되었으며, 이와 같은 추세는 계속되어 고려말의 공양왕 3년(1391)에 이르러 전국의 속읍은 161읍만이 남게 되었다.0033)李樹健, 앞의 글, 23쪽 참조. 성종대의 10道 관할 580여 개의 州郡 가운데0034)≪高麗史≫권 56, 志 10, 地理 1, 서문. 73곳만 外官이 파견된 것에0035)邊太燮,<高麗前期의 外官制>(≪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1971). 비하면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변천이 있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속읍이 전국적으로 감소되었다는 것은, 고려 전기의 대읍중심 군현조직의 구조적 변질을 뜻하는 것이다. 이 군현조직의 구조적 변질은 각 지방에 縣令·감무 등을 새로 파견함으로써 속읍이 감소했다는 것과, 그 현령·감무 등이 이웃의 다른 속읍까지 겸임함으로써 새로운 ‘주읍-속읍’의 조직체계를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따른 예로써 대읍중심의 군현조직이 변질되기 시작한 예종대부터 고려 말기에 이르기까지의 군현조직체계 변질의 대강을 살펴보기로 한다.

 경상도의 경우 고려 초기에서 예종∼공양왕에 이르러 東京留守官 관내의 35속읍 중 24읍에 知州·郡事, 현령, 감무 등이 새로 파견되어 ‘無守令’ 속읍은 11개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尙州牧 관내의 53속읍 중에 총 30곳에 지주·부사, 현령, 감무 등이 새로 파견되어 무수령 속읍은 23개만이, 晉州牧 관내의 28속읍 중 11읍에 지군사·현령·감무 등이 새로 파견되어 무수령 속읍은 17개만이 각각 남게 되었다. 더욱이 비록 무수령 속읍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고려 초기의 영속관계가 고려말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변함없이 지속된 것은 아니다. 즉 무수령 속읍 중에서도 예종∼공양왕 시기에 이르러 종전의 유수사·목사·부사·지주사 등의 직접적 지배를 받지 않고, 그 사이에 각 지방에 파견된 현령·감무 등의 통치를 받게 된 속읍들이 19읍이나 되었다. 이러한 ‘移屬’의 경우 상주목의 속읍이었던 多仁縣이 安東府 관내의 基陽縣으로, 합주의 속읍이었던 加祚縣이 巨濟縣으로 각각 이속된 것처럼 종래와 동일한 관할구역에 있지 않고 다른 관할구역의 군현으로 이속된 경우도 있다.

 한편 전라도의 경우 全州牧 관내의 39속읍 중 19곳에 현령⋅감무 등이 파견되어 20속읍이 남게 되었고, 羅州牧의 경우 48속읍 중 17곳에 현령⋅감무 등이 파견되어 31속읍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楊廣道의 경우 淸州牧의 50속읍 중에 31곳에 현령⋅감무가 파견되어 19속읍만이 남게 되었으며 忠州牧의 13속읍 중에 8곳에 현령⋅감무가 파견되어 5속읍만이 남게 되었다. 특히 廣州牧의 경우 7속읍 모두가 주읍이 됨으로써 속읍은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였다. 속읍에서 주읍으로 된 지역 가운데 다시 속읍이 된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상의 통계는 약간의 가변성이 있지만 속읍의 주읍화는 역사적 추세였다.

 요컨대 예종∼공양왕의 기간에 전국 각 지방의 지주·군사, 현령, 감무 등의 설치는 고려 초기 대읍중심의 군현조직체계의 양상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이러한 영속관계의 변화는 국가가 농민의 逃散을 방지하기 위해서 부득이 취한 조치였다. 그러나≪고려사≫지리지를 비롯한 각종 사서에서 지주·군사, 현령, 감무 등을 설치한 이유를, 그 지방 출신의 유력자의 공로에 의한 것처럼 기록해 놓은 경우가 있다. 예컨대 淸道郡과 河陽縣의 경우에 다같이 지군사 혹은 감무 등의 설치가 마치 그 지방 출신의 유력자의 작용에 의하여 승격되었던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0036)청도군의 경우 충혜왕 복위 4년(1343)에 郡人 上護軍 金善莊의 ‘有功’으로 知郡事로 승격되었으며(≪高麗史≫권 57, 志 11, 地理 2, 慶尙道 淸道郡), 하양현의 경우 縣人 上將軍 吳仁潁의 공로로 인하여 감무를 두게 되었다(≪慶尙道地理志≫河陽縣). 그것이 비록 사실이었다고 하더라도 유력자의 작용은 그 지방민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라 하겠다.

 다음 원종 4년(1263)에 청도 감무로 부임한 閔宗儒의 아래와 같은 활동을 주목해 보기로 한다.

청도읍은 大姓이 많다. 그런데 감무의 관질이 낮아 모두 더불어 함께 할 수 있다고 여기고 무례함이 많아 평소 다스리기가 어렵다고 이름나 있었다. 공(閔宗儒)이 나이 젊고 경륜이 없을 것으로 여기고 사람들이 처음에는 가벼이 여겼다. (하지만) 그 莅任에 미쳐 請謁을 받지 않고 일체 법으로 다스리니 감히 저항하지 못하였으며 잘 다스린다고 알려졌다(崔 瀣,≪拙藁千百≫권 1, 有元高麗國故重大匡僉議贊成事上護軍判摠部事致仕謚忠順閔公墓誌).

 위의 사례를 통하여 당시 지주·군사, 현령, 감무 등의 파견이 大姓, 즉 토착세력의 농민에 대한 불법적 수탈을 방지하려는 데 그 목적의 하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속읍의 主邑化 조처 등의 군현제 개편은 모두 위와 같이 국가적 의도와 필요에 의에서만 이루어지게 된 것은 아니다. 특히 무신이 정권을 장악한 직후 鄭仲夫가 西海道 군현을 자기 본관인 海州牧에 이속시키고, 李義方이 그 外鄕인 金溝에 현령을 둔 것이나0037)≪高麗史節要≫권 11, 의종 24년 10월. 무신집권 초기에 50여 현에 일시적으로 감무를 신설한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예종⋅인종시기의 감무 파견이 유망민의 안집과 중앙집권화의 확대의 의도로 전개된 것과는 달리, 무신집권 초기의 감무파견은 호구의 다소와 면적의 광협에 관계없이 그들의 세력기반 구축에 그 뜻이 있었다. 무신정권은 이를 통해 자기 세력의 지방 布置와 함께 신설된 감무를 통해 지방의 조세⋅공물의 징수와 역역자원을 확보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경제적 기반 구축이 가능했던 것이다. 특히 명종 2년(1172) 한해 동안 일시에 50여 명의 감무를 파견할 때에는, 이들의 대부분이 당시 집권무신들의 휘하나 문객 중에서 발탁되었던 것이며, 동왕 8년에는 무산계에 간단한 시험을 거쳐 외관에 보임하였다. 이들은 대개 탐오한 외관이 되기 마련이어서 당시 농민봉기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0038)李樹健,≪韓國中世社會史硏究≫(一潮閣, 1984), 370쪽.

 원간섭기부터는 수령의 임용제도가 더욱 문란해져서 ‘秩卑人微’한 諸司胥吏·參外·權務까지 현령·감무에 충당되었으므로, 지방의 豪强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군현이 잔폐해 갔다.0039)≪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選用守令 공민왕 8년. 이러한 非士流 출신의 감무 진출은 왕권 대행자로서의 수령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것이며, 따라서 중앙집권화를 약화시키는 한 요인이 되었다. 공민왕은 이러한 폐단을 덜기 위하여, 그 2년(1353)에는 京官 7품을 현령·감무에 충당하고 동왕 8년에는 이들을 安集別監으로 고쳐 5, 6품으로 승격시켰으나, 그 후 첨설직 남발과 함께 폐단은 여전하였다.0040)위와 같음.

 이러한 수령임용제의 문란은 고려말에 올수록 더욱 심하여, 집정권신의 私用人을 현령·감무에 충당하였기 때문에 목민관으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단지 자기를 발탁해준 권신들에게 ‘求媚媒進’하기 위하여 농민을 침어·상납하는 데 주력하는 실정이었다.0041)≪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選用守令 신창 즉위년 8월.

 고려 중기 이후 군현제도상의 변천은 새로운 외관의 파견으로 인한 지배조직면에서의 변화뿐만 아니라 鄕·所·部曲의 해체·성장에 따른 군현화 현상 및 이속화현상, 그리고 직촌화현상의 변화까지 포함한다. 향·소·부곡이 군현으로 승격된 예를 살펴보면, 加也鄕은 충렬왕 때 護軍 金仁軌의 功으로 春陽縣으로, 德山部曲은 충선왕 때 敬和翁主의 本鄕이라 하여 才山縣으로, 또 退串部曲은 충혜왕 때 宦者 姜金剛의 공으로 奈城縣으로 각각 승격된 것이다. 이것의 공통점은 충렬왕에서 충혜왕 시기, 즉 원의 간섭이 본격화된 시기라는 점이다. 이 시기에 비단 위의 향·소·부곡만이 아니라 거의 전국적으로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향·소·부곡이 현으로 승격되었다. 예를 들면 梨(利)旨銀所의 경우, 그 지방 출신인 那壽와 也先不花가 원나라 궁중에서 사환하여 공로를 쌓았다는 이유로 至元 後元年(충숙왕 후4 ; 1335)에 현으로 승격되었고, 이에 따라 그 지방민들은 ‘稅白金’의 부담을 감면받게 되었다.0042)崔 瀣,≪拙藁千百≫권 2, 永州梨旨銀所陞爲縣碑. 나수와 야선불화 등은 이지은소의 거주민들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준 결과가 되었으며, 또한 그 거주민들은 숙원을 풀게 된 셈이다. 당시 현으로 승격된 향·소·부곡의 거주민들이 일률적으로 이와 같은 혜택을 입었다고 단정할 수 없으나, 현으로의 승격은 그들의 숙원이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향·소·부곡의 상태보다 독립의 현 단위로 승격됨에 따라 각종 행정적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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