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1. 정치조직의 변화
  • 4) 군제의 개편
  • (2) 군역체계의 변화

(2) 군역체계의 변화

 13세기 후반부터 고려는 이미 중요한 군사행동이나 실질적인 방어의 필요성에 대처하기 위해 각 지방의 농민들을 동원하여 군인으로 삼은 바 있다. 이처럼 軍人田과 같은 경제적 기반이 없는 각 지방의 농민들이 중요한 군사적 임무를 짊어지게 된 것은 농업 생산력의 발달을 바탕으로 농민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전보다 상승하였음을 반영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조선 초기의 奉足制와 비슷한 助役제도 또한 단초적으로 실시되었다.0096)일찍이 원종 15년(1274) 3월에 일본정벌을 위한 준비가 한창일 때 造船役徒 가운데 單丁은 귀농시키고 雙丁만을 머물게 한 바 있다(≪高麗史≫권 27, 世家 27, 원종 15년 3월 병술). 그러나 원간섭기 동안은 이 군역체계의 변화 움직임이 제도화되지 못하여 그 과제를 14세기 후반으로 넘기게 되었다.

 군역제도의 개편은 공민왕 5년(1356) 6월 반원정책에 뒤따른 일련의 개혁 속에서 시도된 뒤로 본격화되었다. 이 때의 군제 개혁안의 요점은 고려 전기의 軍戶制 회복에 의한 중앙군 강화와 지방군에 대한 助役 규정의 마련이었다. 군호제의 회복은 모든 제도를 문종 때를 기준으로 삼아 고려 전기의 것으로 복구하려는 시도의 일부로서, 탈점당한 군인전을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주고 부당하게 급여된 閑人田이나 奇轍 등 친원분자로부터 몰수한 땅을 군인전으로 돌리는 것이 그 방법이었다.0097)≪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공민왕 5년 6월. 그러나 원간섭기에도 군인전에 입각한 군호제도로 복구하려던 시도가 모두 실패한 바 있거니와 이 때의 시도 또한 토지제도를 복구할 수 없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전혀 불가능하였다.

 이에 비해 지방군에 대한 조역 규정은 전국 해안지대가 이미 국방선으로 변한 상황에서 연해지역 주민을 국방에 충당하여 이들이 군인으로 복무할 때에는 1호 안에 장정이 1명뿐이면 면제해 주고, 장정이 2명인 경우에 1명을 뽑도록 한다는 현실적인 내용이었다.0098)위와 같음. 이어서 공민왕 20년(1371)에는 이 원칙을 강조하면서 1호 안에 장정이 2명을 넘지 못할 때에는 2호를 합쳐서 조역을 확보할 수 있을 때 군인으로 징발하도록 하였다.0099)≪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戶口 공민왕 20년 12월. 요컨대 해안방어에 동원되는 군인은 현실에 맞게 군역체계를 개편하여 충당함으로써 원간섭기 이래의 체제대로 유지 발전시키는 한편 새로운 정세 아래 절실히 요구되는 중앙의 상비군 확보를 위해서는 군호제를 복구시키려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중앙 상비군 확보책은 현실성이 결여된 까닭에 실효를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급박한 형세는 어떤 형태로든 중앙 상비군 조직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그리하여 공민왕 13년 7월 각 도에 인원을 배당하여 ‘良家子弟’로 표현되는 상층 양인농민에서 군인을 뽑아 2군 6위를 보충해서 번갈아 宿衛시키기에 이르렀다.0100)≪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宿衛 공민왕 13년 7월. 이어서 원·명의 교체에 따른 복잡한 국내외 정세 속에 고려의 군사행동이나 왜구에 대한 대처를 위해서 군사력의 확보가 더욱 절실해진 공민왕 22년 10월에 崔瑩이 六道都巡察使가 되어 전함 건조와 아울러 軍戶를 뽑아 軍籍에 올리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 때 파악된 군인의 규모가 우왕 2년(1376) 8월에 각 도별로 보고되었는데,0101)우왕 2년의 點兵 내용은 崔瑩이 軍戶를 파악한 지 3년 뒤의 체계적 통계라는 점, 최영의 軍戶 錄籍이 우왕 6년까지도 ‘六道都巡察使軍目’이라 하여 각 도 군인 수의 기준으로 존중된 점 등에서 최영이 뽑아 정한 軍戶의 규모와 가까운 것으로 추정된다(閔賢九, 앞의 글). 이것을 앞서 공민왕 13년에 2군 6위를 보충하기 위해 뽑은 인원과 함께 정리하면 다음의<표>와 같다.

분 류 공민왕 13년의
2군 6위 보충
우왕 2년의 군호 파악
騎 兵 步 卒
楊 廣 道
慶 尙 道
全 羅 道
交 州 道
江 陵 道
朔 方 道
平 壤 道
西 海 道
8,500 
9,000 
5,500 
3,000 
1,000 
 
 
 
5,000
3,000
2,000
400
200
2,000
600
500
20,000
22,000
8,000
4,600
4,700
7,000
9,000
4,500
25,000
25,000
10,000
5,000
4,900
9,000
9,600
5,000
합 계 27,000 13,700 79,800 93,500

<표>공민왕 13년의 2군 6위 보충과 우왕 2년의 군호 파악 (단위:명)

 위의 통계에서 알 수 있듯이 공민왕 13년에 5도에서 27,000명, 우왕 2년에는 전국에서 10만 명에 가까운 군인이 파악되었다. 이들은 토지 지급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군인으로 복무하도록 강제된 한편, 출신도별로 파악되어 필요에 의해 본도에 남아 국방에 종사할 수도 있는 존재였다. 특히 최영은 전보다 광범위하게 농민층을 망라하여 군역 부담자로 파악하였음이 나타난다. 결국 군역제도의 재편은 토지관계를 개의치 않고 각 지방 농민들 가운데 일부를 군호로 삼고 조역을 위한 봉족을 지급하는 체제로 귀착된 것이다. 최영이 이들을 기록한 군적의 내용은 뒷날 ‘六道都巡察使軍目’이라 하여 중요시되었거니와 이렇게 두 차례에 걸쳐 군인으로 파악된 존재가 바로 뒷날 조선초의 侍衛軍으로 연결되는 새로운 성격의 군대인 農民侍衛軍이다.0102)閔賢九, 위의 글, 347쪽. 이들은 호적을 토대로 뽑혀서 군적에 오르게 되었던 만큼 다른 농민들과 구분이 엄격하지 않았고, 왜구 침입이 격심해져 전국 각지가 전장으로 되었기 때문에 상당수는 그 도에 머물면서 국방의 주력을 담당하였다.

 이 시기의 군역체계 변화에서 또한 중요한 사실은 閑散軍의 신설이다. 일찍이 12세기초 別武班을 조직할 때와 원간섭기에 일본정벌을 위한 전투부대를 편성할 때에도 동원된 바 있는 閑散官을 공민왕대에 이르러 여러 번 임시로 동원하여 5군에 분속하거나 숙위토록 함으로써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0103)≪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공민왕 16년 2월·18년 12월 및 권 82, 志 36, 兵 2, 宿衛 공민왕 16년 8월.
이러한 조치는 고려 후기 이후 지속된 관인계층의 양적 확대와 지역적 확산에 대처하여 이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려는 정치적 목적도 지니고 있었다(閔賢九, 위의 글).
고려 전기의 군호제를 복구할 수 없는 현실에서 비교적 부유한 계층인 한산관에서 군사를 확보하여 중앙 군사력의 일부로 삼고자 한 것이다. 이어서 우왕 때에는 곧 돌려보내기는 했지만 한산관에서 뽑은 군대를 한산군으로 부르면서 馬兵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토록 하였다.0104)≪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신우 3년 6월. 고려말 조선초에 마병으로서 赴京宿衛의 의무를 진 한산군의 군사적 책무는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결국 공민왕 5년(1356)의 반원운동에 뒤따른 군역제도의 개편 노력은 당시의 여러 가지 여건의 영향을 받아서 농민시위군과 官人閑散軍이라는 이원적 군역체계를 낳게 된 셈이다.

 공민왕 5년 반원운동의 일환으로 군사행동에 착수한 이후는 말 그대로 병란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이같은 상황은 농민시위군과 관인한산군 외에도 여러 가지 형태로 군사를 뽑게 만들었다. 왜구의 침입으로 개경이 불안해지는 경우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개경의 장정을 널리 모아서 방어에 임하게 하였고0105)공민왕 22년 5월에는 왜구가 開京 가까이 침입하자 10戶로 1統을 삼아 人丁 1인을 내어 赴防케 했고, 우왕 3년 4월에는 호마다 가옥 칸수에 따라 인정 1∼3인이나 장비를 내게 하였다. 특히 후자의 경우에는 사실상 奴가 많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閔賢九, 앞의 글, 337쪽). 지방에서의 병력동원 권한을 갖고 있는 元帥가 侍衛軍 외에 煙戶軍·別軍의 명목으로 장정을 모아 백성들이 실농할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0106)≪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신우 2년 5월.

 이같이 국방을 위해 그 지역에 있는 장정을 망라하여 동원해야 했던 필요에서 마침내 우왕 4년(1378) 12월에 왜구가 멈출 때까지 시한부로 전국에 翼軍을 설치하여 그 제도적 장치를 갖추기에 이르렀다.0107)≪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신우 4년 12월. 공민왕 18년 8월에 西北面에 설치하였던 익군을 이제 왜구에 대처하기 위해 전국에 확대 실시하여 양반과 백성에서 人吏, 驛子, 公·私奴까지 이르는 그 지역의 모든 장정을 군사력으로 파악·확보하게 하고, 1,000명·100명·10명을 통할하는 千戶·百戶·統主를 두어 모두 유직자가 맡도록 하였다. 익군에서 주류를 이루는 것은 물론 농민군인데, 여기에 관인한산군 계통이나 인리 이하의 연호군까지 망라하는 군민일치제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익군은 각자 생업에 종사하다가 유사시에는 전투에 동원되는 군인으로, 무기는 스스로 마련해야 했다. 이 조치는 군인을 종적·횡적으로 확대시켰다는 점에서 고려 후기 군역제도의 발전에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이 익군의 확대실시는 이로부터 야기된 여러 가지 혼란 때문에 왜구의 침입이 계속되고 있었음에도 반년 만에 중단되었다.0108)≪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신우 4년 5월. 당초 西北面의 翼軍처럼 貢賦에 대한 책임이 면제되도록 제도적으로 보완되어 익군의 확대 실시가 이루어지지 못했던 결과 국가의 貢賦와 差役이 모두 나오는 남도지방의 농민들이 실업하고 국가재정이 치명적 타격을 받게 된 것이 익군의 확대실시를 포기한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李基白,<高麗末期의 翼軍>,≪李弘稙博士回甲紀念 韓國史學論叢≫, 新丘文化社, 1969, 211∼212쪽). 그러나 이 뒤로도 더욱 넓은 신분층으로부터 군인을 뽑아서 군역을 담당하도록 하는 대세가 지속되어 우왕 14년 2월에는 각 도의 양반·백성·향리·역리를 군인으로 삼되 일이 없으면 농사에 힘쓰게 하고 일이 있으면 징발케 하였다.0109)≪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신우 14년 2월. 곧이어 이 해 5월 威化島回軍이 감행되어 고려의 정치정세가 근본적으로 뒤바뀐 뒤 군역제도도 병농일치 또는 군민일치를 지향하여 정착되었다. 공양왕 3년(1391) 정월에 군사최고통수기관으로서 三軍都摠制府가 설치될 때 受田品官, 곧 閑散軍도 그 예하에 소속되었고 같은 해 5월에 科田法이 공포되면서 軍田은 閑良官吏만이 지급받아 숙위의 책임을 맡도록 규정되었다. 그리하여 군민일치의 원칙에 따라 농민들이 군역을 담당하되 그들에게는 군역과 관련된 토지 지급이 없는 반면, 한량관리에게 군전이 지급됨으로써 새로운 군역체계의 방향을 확정짓게 되었던 것이다.0110)이상 군역체계의 변화는 주로 閔賢九, 앞의 글에 의거하여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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