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2.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
  • 2) 신진사대부의 대두와 그 성격
  • (2) 사대부의 성격과 용어에 대한 논의

(2) 사대부의 성격과 용어에 대한 논의

 고려 후기의 지배세력을 權門世族과 新進士大夫의 대립국면으로 설정하고 권문세족의 親元的 태도나 불법적으로 농장과 노비를 증대시키며 정치 질서를 문란케 한 사실을 비판하면서 새로 등장한 사회세력이 신진사대부였다는 인식은 최근 20년 가까이 일반화된 것이었다. 이에 따라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그에 대한 연구도 심화되어 왔다.0294)閔賢九,<高麗 後期 權門世族의 成立>(≪湖南文化硏究≫6, 全南大, 1974).

 그러나 최근에는 권문세족과 사대부의 본질과 성격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부정하고 새로이 개념을 규정하기도 하였다. 즉 권문세족 또는 신진사대부 등 용어의 용례를 검토하여 이들을 정치지배세력으로서의 대립적 존재로 보는 것이 잘못된 구도이며 그 개념도 잘못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0295)金光哲,≪高麗 後期 世族層과 그 동향에 관한 연구≫(東亞大 博士學位論文, 1988).
李益柱,<忠烈王代의 정치세력과 그 성격>(≪韓國史論≫18, 서울大, 1988).
金塘澤,<忠烈王의 復位過程을 통해 본 賤系 出身 官僚와 ‘士族’ 出身 官僚의 정치갈등>(≪東亞硏究≫17, 1989).
논의의 주된 내용은 먼저 士大夫를 지방 중소지주적 경제기반, 한미한 가문출신으로 보고 정치적 향배도 반원적 개혁의 주축으로 보던 기존의 견해에 대해 사대부에는 권문세족 출신도 다수 포함되어있다는 사실을 밝혀, 종래의 입장을 부정하고0296)金光哲, 위의 책. ‘사대부’라는 용어의 개념을 검토하여 고려 후기 신진관료층을 사대부라고 칭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하였다.0297)金塘澤, 앞의 글. 용어에 대해서도 이들을 신진사대부 대신 新進(興)士類,0298)朴龍雲,<權門世族·新進士類의 성립과 개혁운동>(≪高麗時代史(下)≫, 一志社, 1987), 539∼543쪽.
金泰永,<高麗後期 士類層의 現實認識>(≪創作과 批評≫44, 創作과批評社, 1977).
新進官僚,0299)李起男,<忠宣王의 改革과 詞林院의 設置>(≪歷史學報≫52, 1971). 新興官人,0300)金潤坤,<麗末鮮初의 尙瑞司>(≪歷史學報≫25, 1964). 新興士族0301)李泰鎭, 앞의 책. 혹은 新興儒臣0302)박재우,<고려말 정치상황과 신흥유신>(≪역사와 현실≫15, 1995). 등으로 지칭할 것을 제시하는 입장으로 집약된다.0303)高惠玲,<士大夫의 槪念과 時期區分>(앞의 책), 8쪽.

 그러면 사대부와 관련하여 고려 후기 지배세력에 대한 현재까지의 연구성과를 일별하여 보기로 하자.

 무신집권기에 새로운 官人의 형성 과정에 대한 초기의 연구에 의하면 吏族출신이나 지방의 향리층이 많이 중앙에 진출하였는데 이들은 예전의 문신이나 무신과는 형태를 달리하는 지배계급으로 ‘能文能吏’의 신관료였다. 이들은 주로 科擧를 통하여 등장한 관인으로서 ‘학자적 관료’이며 ‘관료적 학자’0304)이들의 성격을 ‘학자적 관료’ 또는 ‘관료적 학자’라고 규정한 것은 燕岩 朴趾源이≪燕岩集≫8, 別集, 放橘閣外傳에서 “讀書曰士 從政爲大夫”라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의 성격을 갖는 ‘사대부’의 祖型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때의 향리층은 新興官人=士大夫의 모태가 되었을 뿐이고 향리층의 전면적 官人化를 달성한 것은 아니어서 향리층과 신흥관인=사대부를 동일선상에 놓고 파악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고려 후기에서 말기로 접어들면서 정치사회적 기반을 확립시키고 나아가 조선건국에 주동적 사명을 담당하였다는 것이다.0305)李佑成, 앞의 책, 70쪽. 이러한 견해는 이후 학계에서 크게 긍정적으로 수용되면서 고려 후기 정치적 변화에 따라 나타나는 새로운 세력들에 관한 연구가 이어졌다.

 무신집권하에서 지방출신의 新進士人들은 政房을 통해서 官人으로 성장 발전하여 갔고 무신정권이 붕괴된 후에도 이들이 남긴 낡은 권력구조의 유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정방으로 인연해서 기신하였던 관인들이 무신의 권력구조의 유제를 이어 전주권을 천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이 권력구조에 반발하는 신흥관인층은 기성관인층을 거세하기 위해서 정방을 폐지하여 그들로부터 전주권을 탈취하려 하였다. 정방은 초기에 新進官人(또는 新進士人)들의 관료로의 진출에 교량적 역할을 하였지만 후에는 도리어 이렇게 진출한 기성관인들의 세력구축의 발판으로 이용되고 있었으므로 새로이 진출하는 신흥관인층은 자기발전을 위해 정방의 혁파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정방의 권신과 신흥관인층사이의 정치적·경제적 이해관계의 상반으로 고려말까지 신·구관료의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방은 치폐를 거듭하였다. 이후 정방 치폐의 과정은 곧 관인층 내부의 분열 대립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말 李成桂 등 신흥관인층은 정방대신에 尙瑞司를 설립하고 전주권을 회복하였으니 이는 신흥관인층의 승리를 의미한다는 것이다.0306)金潤坤,<麗末鮮初의 尙瑞司>(≪歷史學報≫25, 1964), 22∼35쪽. 그러나 이 연구에서는 무신집권하에서 정방에 참여한 신진사인과 정방의 폐지를 내세우는 후기의 신흥관인층을 직접 연결짓지는 않았다.

 이와 함께 충렬왕대에는 신흥권력층이 등장하였으니 원과의 관계로 세력을 얻은 사람들과 軍功으로 등장한 사람들이다. 이들 중에 政房의 必闍赤으로 활동한 사람들을 신진세력이라 하여 신흥권력층에 포함시키려는 견해가있다.0307)李起男, 앞의 글, 55∼99쪽. 충렬왕대의 정방은 宰樞와 같은 機務·參決權이 주어졌고 구성상으로는 겸직으로 왕과 친밀한 인물과 신진세력이 임명되어 왕의 직속관부와 같은 위치에 있었다. 신진세력들은 여기에 참여함으로써 ‘宰相之族’이 되고 또 경제적 부를 누리는 신흥권력층으로 당대에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충선왕은 충렬왕대의 신흥권력층을 배척하고 신진관료를 등장시켜0308)≪高麗史≫권 33, 世家 33, 충선왕 원년. 이들을 통해 개혁정치를 수행하려 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개인의 능력에 의해 출사한 신진세력으로 淸廉하거나 또는 惠政을 베풀려고 노력하였고 지방출신의 과거급제자였다는 점을 들어 충선왕의 정치는 사대부정치의 성격을 지녔고 그것은 사대부사회가 성립되어가는 하나의 과정을 나타내 주고 있다고 보았다.0309)李起男, 앞의 글, 82∼96쪽. 이 연구에서는 무신집권기에 정방에 참여한 신진세력과 충선왕이 중용한 학사들을 중심으로 한 신진관료를 구분하고 후자를 사대부로 규정지었다.0310)李起男, 위의 글. 그러나 그들의 학문이나 사상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이상의 일련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고려 후기 지배세력으로서 ‘권문세족’과 이에 대하여 새로운 세력으로 대두되는 ‘신흥사대부’가 설정되기에 이르렀다.0311)金潤坤,<新興士大夫의 擡頭>(≪한국사≫8, 국사편찬위원회, 1974).

 신흥사대부의 사회경제적 성격은 지방의 향리출신으로서 중소지주거나 자영농민이었으므로 자기의 성실한 노력으로써 토지를 개간하거나 혹은 구입하여 농장을 가지게 된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 농장은 재향지주인 그들이 전호나 노비를 써서 경영하거나 혹은 직접 경작을 하였다는 점에서 부재지주인 권문세족의 것과는 성질이 달랐다. 그리고 이들은 대체로 청렴결백한 인품의 소유자들0312)李基白,≪韓國史新論≫(一潮閣, 1976), 193쪽.이라고 하여 ‘신흥사대부’의 성격을 일반화시키게 되었다.

 고려 후기 정국에서 개혁추진세력의 주체와 이들의 성격을 분석하려는 시도를 통하여 사대부의 존재는 더욱 구체화되었다.0313)閔賢九,<整治都監의 설치경위>(≪論文集≫11, 國民大, 1976).
―――,<整治都監의 성격>(≪東方學志≫23·24, 延世大, 1980).
충목왕대의 정치적인 관계는 權門世族 및 儒臣을 중심으로한 정통세력과 부원세력 등의 비정통적 정치세력이 서로 상이한 입장에 있었다. 정통적 정치세력은 蔭敍나 科擧 등 정규적 방도로 관계에 진출하여 일정한 수준 이상의 정치적 식견을 갖은 사람들이고 비정통적 정치세력은 宦官·嬖幸 출신, 또는 신분적으로 賤人이거나 결함이 있는 자이며 비정규적 방도로 관직을 제수받고 원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자들이라고 보았다.0314)閔賢九, 위의 글(1976), 82∼83쪽.

 충목왕 3년(1347) 整治都監의 설치는 전시대의 비정통적 정치세력에 의해 누적된 모순과 비리를 척결하려는 것이었다. 整治官들 가운데 고위급인 判事중에는 安東權氏 王煦, 安東金氏 金永旽, 光山金氏 金光轍 등 당시 유력한 가문 출신이 큰 비중을 차지하나 屬官 중에는 문벌 출신이 적고 또 入仕방식으로는 科擧에 의존하고 있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그리고 정치관들 가운데는 많은 사람들이 臺諫이나 法官으로 크게 활약한 바 있고 공정하거나 정직하다는 인물평을 받고 있다는 점도 공통적인 성격으로 추출해 낼 수 있다. 즉 정치관들은 대체로 일정한 정도 이상의 식견과 소신을 굽히지 않는 기개, 그리고 합리적인 공정성을 지닌 사람들이었으며, 이는 유교적 소양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정치도감에서 활동한 재추급 이하의 실무진을 보면 가문적 배경이 미약하고 유학적 소양을 갖추었으며 공정성과 유교적 합리성을 지닌 신진관료들로서 당시 고려 사회의 제모순을 통찰할 수 있는 식견과 권력자에 굴하지 않는 기개를 가졌다. 그리고 이 때의 유학은 성리학에 대한 어느 정도의 造詣를 수반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들 신진관료는 다음 공민왕의 개혁적 배경과 辛旽의 집권기간 동안에 성장하여 공민왕대에 성장한 신흥문신세력의 연원이 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0315)예를 들면 이 때의 白文寶는 공민왕대에 요직에 등용되어 활약하였고 李元具는 辛旽집권기에 개혁정치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공민왕 이전까지는 과거출신의 신진세력과 권문세족과의 정치적 갈등이 그리 심각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 능문능리의 관인층이 곧 사대부라는 설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0316)閔賢九, 앞의 글(1976), 82쪽.

 지금까지 사대부에 비견되는 새로운 정치세력에 대한 견해들을 비교해 보았다. 이를 보면 신진세력에 대한 인식에 상당한 견해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진사대부가 고려 후기의 신관인층으로서 조선 건국의 주동세력이 되었다는 설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인식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무신집권기의 능문능리의 관료군과 성리학을 수용하여 불교를 배척하고 고려말 개혁의 주체가 된 신진사대부를 동질적인 존재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고, 이 점에서 무신집권하의 능문능리의 신관료와 고려말 개혁세력으로서의 신진사대부와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개혁세력으로서의 신진사대부의 모습이 뚜렷해지는 것은 공민왕대부터라는 견해가 대두되었다.0317)李泰鎭, 앞의 글(1983), 1∼13쪽. 무신란(1170)에서 조선개국에 이르는(1392) 220년간은 한 사회단계의 생성기간으로 지나치게 길다는 전제하에 무신정권기의 능문능리의 문사가 신진사대부의 祖型으로 보기에는 동질성이 박약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문신이라는 입장은 같지만 성리학에의 접촉이나 관심을 전자에서는 찾기 어려움을 그 이유로 들고 있다.0318)能文能吏의 문사와 여말의 士大夫와의 사이에 있는 이질성이 바로 그들을 똑 같이 취급하지 못하고 士大夫의 祖型으로 보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그리하여 충선왕대(1298, 1309∼1313)부터 충목왕대(1341∼1344)까지 간헐적으로 추진되던 개혁이 공민왕대의 개혁과 동질성을 갖고 있고 시간적으로도 연계가 있음에 착안하여 여말선초 사회변동기의 상한을 13세기 말∼14세기 초로 잡은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진사대부 세력의 대두 자체를 가능케 하는 근본 動因은 당시의 시대적 여건에서 찾았다. 무신정권의 몰락, 몽고와의 講和, 원간섭기 친원 귀족중심의 사회 등의 시대적 여건에서의 과제는 외세에 의해 조장된 체제모순을 척결하는 것이었고 이는 반원적 개혁정치로 나타난다. 개혁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사회적 발전은 일반 피지배층이 토지소유 내지는 분배관계의 개선 또는 신분체제상의 개선 등 지위 향상을 위한 능동적 노력을 한 결과였고 또 이 시기의 농업기술상의 성과에 의한 휴한법의 극복과도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0319)李泰鎭, 앞의 글(1983). 14세기 이후의 농업기술의 발달이 新興士族의 등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니 여말선초의 정치와 학문·사상뿐 아니라 농업에 있어서도 신흥사족은 지방의 중소지주라는 사회적 위치 때문에 일반백성의 ‘理生’문제에 보다 더 큰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여 새로운 역사의 주도층으로서 자리를 잡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0320)李泰鎭, 앞의 책(1986), 103쪽.

 한편 1980년대 후반에 들어오면 고려 후기의 지배세력을 권문세족과 사대부의 대립으로 서술해 온 데 반대하여 이들은 계층적 기반을 달리했던 정치세력이라고 볼 수 없다는 입장에서 고려 후기 지배세력을 논한 연구가 있다.0321)金光哲, 앞의 책, 11∼13쪽. 그에 의하면 고려 후기의 개혁 추진세력으로서의 사대부라 일컬어지는 존재속에는 世族출신이 다수 포함되어 있음을 주장하고 사대부는 정상적으로 진출한 官人이었을 것으로 보았다. 정상적으로 진출한 관인이란 入仕路나 출신기반에 관계없이 일단 관직에 종사했던 관인들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사대부들 가운데 대지주인 경우도 있을 수 있고 중·소지주인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또 사대부에는 세족출신도 있을 수 있고 세족은 못되지만 관인을 배출한 경험이 있는 가문출신이 있을 수 있으며, 향리출신을 포함한 布衣가문 출신이 포함될 수 있다. 만일 고려 후기 또는 말기에 이 중에 어느 한 쪽이 지배적이었다고 한다면 사대부를 그 우세한 부류와 관련지어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경향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0322)金光哲, 위의 책, 170∼175쪽.

 여기에서 그의 世族에 관한 견해를 살펴보기로 하자. 기왕의 연구에서 사용되던 ‘權門世族’은 단일한 용어로 사용되는 경우가 거의 발견되지 않으며 ‘권문’과 ‘세족’은 별개로 사용되고 있었다.0323)金光哲, 위의 책, 18쪽. ‘권문’·‘권신’의 경우 전기부터 나타나는 용어이고 대체로 집권자이거나 왕권을 압도할 수 있는 권력의 소유자인 반면 ‘權勢之家’에 해당하는 부류는 왕권이 일정하게 작용하는 정치구조 속에서 제한된 권력을 행사하던 존재들이다. 특히 ‘권세지가’ 등은 신왕의 즉위나 정치세력에 변화를 가져왔을 때 구폐책이 제시되면서 前代의 권력층을 총칭하는 용어가 되고 있으며, 긍정적인 방향에서 사용된 경우는 거의 없다. 그리고 여기에 해당하는 인물들은 특정계층 출신만이 아니라 세족에서부터 賤類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러므로 특정 신분이나 계층을 지칭한 용어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집단화된 정치세력을 지칭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특정개인이 향유하고 있던 정치권력을 상징한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권문’·‘권세지가’라는 용어로써 계층을 지칭하려 하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다고 하였다.0324)金光哲, 위의 책, 34쪽. 그리고 ‘世族’의 용례를 검토하여 이 단어는 고려 후기 특히 원간섭기 이후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고 이는 특정의 姓貫 전체를 지칭했다기보다는 고급관인을 배출한 특정의 家系를 지칭한 것이고, 권력층을 상징하였다기보다는 가문의 사회적 지위를 말해주는 계층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기왕의 연구에서 고려 후기 정치 지배세력을 지칭하는 용어로 써온 ‘권문세족’ 대신에 ‘세족’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다.0325)金光哲, 위의 책, 18∼43쪽.

 이와 함께 신진관료의 세족화 경향에 대한 연구도 추가되었다. 신진관료란 한미한 가문, 특히 향리출신으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起身한 부류를 말하는데 충렬왕대의 신진관료들은 柳璥과 그의 천거를 받은 元傅·許珙 등 현임재추들의 문생으로서 좌주·문생의 유대관계를 통하여 정치세력을 형성하여 나갔다. 그러므로 이들의 정치적 입장은 보수적인 성향을 띠었으며 자신이 재추의 반열에 오를 뿐 아니라 자손대에까지 재추의 반열에 오름으로써 이후 권문세족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므로 충렬왕대의 개혁을 주도하고 여기에 참여한 신진관료들은 국왕 측근세력에 대하여 크게 대립하지 않으면서 국가정책의 결정이나 대원외교 등 국정에 참여하여 타협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0326)李益柱, 앞의 글.
朴鍾進,<忠宣王대의 財政改革策과 그 성격>(≪韓國史論≫9, 서울大, 1983), 71쪽.
한편 신진관료로서 국왕 측근세력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경우 이들은 재추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고 승진에 장애를 받았다. 측근정치로 인한 정치적·사회적 모순이 심화되는 가운데 이들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공감대를 확대시켜 가면서 성장하였다. 그 성장의 결과가 충목왕대 整治都監의 활동이나 공민왕초의 반원개혁으로 나타났으며 원의 간섭을 배제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고려의 자체적인 개혁이 가능하게 된 공민왕대 이후, 구체적으로는 공민왕 14년(1365) 신돈의 집권을 계기로 개혁정치를 추진하면서부터 새로운 정치세력으로서의 신진사대부로 이어지는 것으로 전망하였다. 이 점에서 원간섭기에 국왕 측근세력과 대립하였던 일단의 신진관료들을 여말 신진사대부의 맹아적 형태로 보았다.0327)李益柱, 위의 글, 219쪽

 뒤이어 사대부는 문무관료를 지칭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연구도 있다.0328)金塘澤, 앞의 글. 사대부의 개념을 검토하여 사대부는 문무관료를 말하는 것이며, 관료의 가족을 ‘士族’이라 하였고 이들은 관리가 되는 데 있어서 아무런 신분적 제약을 받지 않은 관료계층을 지칭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에 의하면 賤系출신 인물들의 官途 진출에 강한 불만을 품은 계층이 사족이었다고 한다. 즉 관도에 진출하는 데 있어서 신분적인 제약을 받지 않은 기존 관료계층을 사족이라했고, 사족 출신의 인물들은 士林이라고 불렀으며 사림 가운데 특히 관도에 오른 인물들을 사대부로 지칭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용어들은 모두 관리의 신분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용어들이 원의 간섭 이후에 빈번하게 史書에 등장하는 이유는 이러한 용어로써 자신들을 천계출신과 구분하려 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0329)金塘澤, 위의 글, 215∼217쪽. 사대부가 하나의 정치세력화하는 것은 충렬왕대인데 그것은 이 때 천계출신 인물들의 정치적 진출이 두드러진 결과였다. 이렇다면 원간섭 이후 고려말까지의 정치적 지배세력을 ‘權門世族’ 혹은 ‘權門勢族’과 ‘新進士大夫’로 양분하는 것은 재검토되어야 하며 나아가서 ‘宰相之宗’은 대부분 왕비나 재상, 그리고 다수의 과거합격자를 배출한 가문이었으므로 그들이야말로 고려의 전형적인 사대부였다고 논증하였다.0330)金塘澤,<忠宣王의 復位敎書에 보이는 ‘宰相之宗’에 대하여>(≪歷史學報≫131, 1991), 27쪽. 따라서 ‘재상지종’은 ‘권세지가’와는 다른 존재였고 ‘권세지가’는 충선왕의 측근이나 충렬왕의 측근들을 그렇게 지칭하기도 했는데 어느 경우에도 재상지종이 여기에 포함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충선왕이 ‘재상지종’을 선정한 이유는 자신과 혼인한 집안들, 왕비를 배출한 것으로 유명한 가문, 사회적 지위가 높은 가문들을 지정하여 대외적으로는 원에게 자신과 趙妃 등의 혼인이 정당한 것이었음을 내세워 원이 자신의 결혼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방지하려 했고 대내적으로는 실추된 자신의 권위 회복을 기대하였다는 것이다.0331)金塘澤, 위의 글, 28∼29쪽.

 이상에서 ‘권문세족’과 ‘사대부’ 용어를 둘러싼 논의의 대략을 살펴보았다.역사적인 용어와 그 범주에 대한 검토는 분명히 필요한 작업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그 용어가 가지고 있는 개념과 범주의 역사적 의미도 더욱 중요하다. 이에 여기에서는 고려 후기에 등장한 새로운 정치세력으로서의 사대부의 성격을 역사적 의미에서 재검토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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