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2.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
  • 3) 개혁정치의 추진과 신진사대부의 성장
  • (2) 개혁정치의 성격

(2) 개혁정치의 성격

 고려 후기 개혁정치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혁안의 내용과 특징, 개혁정치의 운영 방식과 개혁세력의 성향을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 개혁정치 시기에 제시된 개혁안은 당시 사회 제부문에서 발생하고 있던 폐단을 지적하는 내용과 그 해결 방안을 담고 있다. 교서의 형식을 빌린 정부의 개혁안이든, 上書의 형태로 제출된 지배세력 개인의 개혁안이든 그 가운데 비중있게 다루어진 항목들은 토지문제·수취체제·행정체제·군정체제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토지문제로는 토지탈점과 민의 예속화 문제가 거듭 지적되었다. 즉 농장문제가 현안이 되고 있었다. 농장의 확대는 국가 재정난과 민생문제를 유발하는 등 당시 사회모순의 주요인이었기 때문에 개혁안은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대안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개혁안이 이처럼 농장문제에 관심을 갖기는 하였지만, 그 해결방안은 주로 탈점의 금지와 처벌, 본 주인에게로의 환수, 예속민의 추쇄를 강조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토지겸병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던 賜牌에 대해서도 지급액의 제한이나 사급전제 운영방식을 개선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 당시의 모순구조를 감안할 때, 토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농장의 혁파나 수조권 분급제의 개편, 사급전제의 폐지 등의 대안이 제시되었어야 함에도 당시 개혁안은 이 가운데 그 어느 하나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사회 제부문에서 발생하고 있던 폐단이 근본적으로 토지소유관계의 불균형에서 비롯되고 있었음에도 이 시기 토지문제와 관련한 개혁안은 지배층 내부의 갈등관계를 완화하고, 국가재정의 기반을 확보하는 정도에 그침으로써0458)권영국,<14세기 전반 ‘개혁정치’의 내용과 그 성격>(≪역사와 현실≫7, 1992), 108쪽. 사회모순을 해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수취문제와 관련하여 개혁안은 그 폐단으로 조세의 총액제 수취방식, 공물의 선납·대납, 염전매제의 鹽稅化, 지방관의 중간수탈 등을 지적하였다. 수취체제는 민생문제와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개혁안은 이처럼 이 문제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수취문제의 해결방안 역시 미온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총액제 문제만 하여도 각 지방의 토지면적과 호구수를 제대로 조사하고 이를 근거로 과세가 이루어져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개혁안은 권력층의 조세 포탈을 조사하여 처벌한다던가, 사급전 가운데 본래 액수 이상의 것에 대해서 조세를 부과하는 조치를 취하는 정도였다. 공물의 선납·대납 행위에 대해서도 이를 금지하고 처벌한다는 방안을 제시하는 데 그쳤고, 염전매제 문제만 하더라도 鹽戶의 충원 등 소금 생산을 활성화하여 공급을 늘릴 수 있는 근본적인 방안은 제시되지 않았으며, 지방관의 중간수탈에 대해서도 개혁안은 금지와 처벌을 강조하는 수준에 그쳤다. 이러한 점에서 개혁안에서 제시된 수취문제의 해결방안은 제도의 운영과정에서 드러난 폐단을 수습하는 정도의 소극적인 대책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평가된다.

 행정체제의 정비와 관련하여 개혁안은 인사행정의 정상화, 관료기강의 확립, 도평의사사의 기능강화 등의 방안을 제시하였다. 인사행정의 정상화는 정방의 혁파를 통해, 관료기강의 확립은 감찰기구의 기능강화와 考課法의 실시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도평의사사의 기능강화 문제는 충목왕대 개혁정치에서부터 가시화되기 시작하여 공민왕대에 이르러 구체화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도평의사사는 각 관청의 공문 발송을 관리 감독하고, 권력층에게 탈점된 둔전의 환수 문제나 양전사업을 주관하는 등, 이른바 ‘百僚庶務’를 처결하는0459)≪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職制. 최고 행정기구로서의 지위를 부여받게 되었다.

 이처럼 고려 후기 개혁안은 행정체제의 정비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가 실효를 거둘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정방만 하더라도 개혁정국이 해소되면 이 기구가 곧 복구되고 있어서 인사행정의 정상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지방관의 비행과 관리의 근무태만을 막기 위해 감찰 기능의 강화를 강조하고 있지만, 이 역시 임시방편적인 조치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도평의사사의 위상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도평의사사가 제기능을 다할 수 있으려면 별도의 권력기구가 설치되지 않을 때 가능한 것인데, 공민왕대에도 여전히 내재추와 같은 권력기구가 존속하면서 도평의사사의 기능과 권한을 제약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측근정치 기구나 외세 종속기구와 같은 권력기구를 그대로 유지시키면서 정치와 행정체제의 정상화를 꾀하고자 했던 이 시기의 개혁안은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공민왕대의 개혁안에서는 군정체제의 정비가 강조되었다. 이 때의 개혁안에서 군사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당시 시대적 상황을 감안할 때 당연한 것이었다. 원의 간섭이 쇠퇴해가는 상황 속에서 국방을 자주적으로 담당해야 했고, 특히 왜구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군사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군정개혁안은 군액의 확충, 군수의 확보, 방수체제와 驛制의 정비 등으로 나타났다. 군액의 확충 방안으로는 선군급전제의 복구가 강조되었고, 군수의 확보는 둔전 개발을 확대하여 해결하고자 하였다. 방수체제의 정비와 관련해서 개혁안은 북방의 접경지대와 연해지역의 방수에 동원되는 군사를 그 지역 출신으로 충원케 하는 방안이 모색되었다. 이는 방수지역을 중심으로 그 거리의 원근에 따라 방수의 역과 요역의 부과를 달리하고자 한 것이었다. 역제의 정비는 驛戶의 충원과 역 운영경비의 확보, 역호·역마의 전용 금지 등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다.0460)이상과 같은 공민왕대 군정개혁과 고려 후기 군사제도에 대해서는 權寧國,≪高麗後期 軍事制度 硏究≫(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5) 참조.

 공민왕대의 군정개혁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공민왕 5년(1356)의 군정개혁은 반원 개혁정치를 뒷받침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군사체제의 정비라는 측면에서 보면 공민왕대의 군정개혁도 철저하지 못하였다. 군사조직의 정비에 대해서 이렇다할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군인전의 확보가 어려운 현실에서 선군급전제의 실시를 표방한 것은 실현되기 어려운 조치였다. 역제의 폐단만 하여도 그 근본적인 요인은 역호에 대한 신분적 차별과 과중한 경제적 부담, 토지점탈에 있는 것이었으므로0461)姜英哲,<高麗 驛制의 成立과 變遷>(≪史學硏究≫38, 1984), 100∼104쪽. 이러한 문제의 해결없이 역제의 정상화는 달성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처럼 개혁정치 시기에 제시된 개혁안은 당시 심각한 문제로 나타나고 있던 국가의 재정난과 민생문제를 해결하고 행정과 군사체제를 정비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해결방안이 제도의 운영과정에서 발생하고 있던 폐단을 일정하게 수습하고 보완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과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었다. 고려 후기 개혁정치 시기에 제시된 개혁안은 당시 사회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체제 변혁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기보다는 제도의 운영과정에서 드러난 폐단을 부분적으로 제거하여 체제 자체의 붕괴를 막으려는 체제 보완적, 개량적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고려 후기 개혁정치는 그 실시 배경이나 추진과정에서 정치적 성격을 지나치게 드러내고 있었다. 당시 개혁정치는 국왕의 왕권강화라는 정치적 목적에 활용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개혁교서가 주로 국왕의 즉위초나 권력개편 등 정치적 변동을 겪은 직후에 반포되고 있다는 사실은 여기에 정치적 목적이 개입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하겠다. 국왕은 왕위계승이나 권력개편에 성공한 후 개혁교서를 반포하여 이를 통해 이전 권력층의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와해시키고, 자신의 지지세력을 확보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충선왕대의 개혁정치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충선왕은 즉위와 복위 과정에서 충렬왕 측근세력을 숙청하여 이들이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소지를 어느 정도는 없앨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경제적 기반이 해체되지 않는 한, 언제 왕권을 제약하는 세력으로 재등장할지 가늠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개혁교서에서 권력층의 토지점탈을 여러 차례 지적하고 이를 해결하려 했던 것은 바로 충렬왕 측근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와해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충숙왕 5년(1318)에 개혁교서를 반포한 것은 모처럼 왕권 행사의 기회를 맞은 왕이 친정체제를 강화하고 그 동안 자신의 왕권을 무력하게 만들었던 충선왕 시종신들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동왕 12년의 개혁정치도 비슷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 장기간의 원도 억류와 심왕파의 책동으로 왕권 행사를 정지당했던 충숙왕에게는 그 12년이 즉위한 해나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충숙왕으로서는 이제 왕위를 유지하고 왕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심왕파가 왕위계승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정치 현실 속에서 이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지지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해서는 개혁정국의 조성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충목왕대 개혁정치도 마찬가지였다. 충혜왕을 폐위시킨 데 대한 고려 정치세력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원이 개혁을 지원했다는 사실에서 그러하다. 공민왕대 4차례에 걸친 개혁교서의 반포에도 왕권의 유지와 강화라는 정치적 배경과 목적이 자리하고 있었다. 공민왕의 즉위 역시 충정왕 지지세력과의 경쟁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즉위 후 충정왕대 권력층을 해체할 필요가 있었다. 공민왕 5년(1356)의 반원 개혁정치는 물론 이를 통해 부원세력을 제거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내재해 있었다. 동왕 12년의 개혁정치만 하더라도 홍건적 침입 후 전시체제가 지속되는 가운데 권력층으로 부상한 무장세력을 견제하면서 왕권을 강화할 필요성에서 시도되었고, 이는 곧 신돈집권기의 개혁정치에서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신돈정권하에서의 개혁정치는 권력층으로 부상한 세족출신의 무장세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신장시키고 있던 신진사대부 모두를 견제하면서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내재해 있었다.

 개혁정치를 운영하는 과정에서도 국왕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개입되었고, 이것이 개혁을 더디게 하거나 중단케 하였다. 원간섭기 이후 정치과정은 매시기 측근정치와 개혁정치의 형태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는 공민왕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두 가지 정치형태는 서로 충돌할 소지가 있는 것임에도 당시 국왕들은 이를 공존시키는 방법으로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할 처지에 놓였을 때에 국왕은 대체로 개혁정치를 포기하고 측근정치를 유지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개혁이 측근세력에게 타격을 가하고 측근정치를 와해시킬 가능성이 있으면 국왕은 곧 개혁을 중단하려 했던 것이다. 이는 충숙왕 12년(1325)의 개혁이나, 충목왕대의 개혁정치에서 잘 나타난 바이다. 측근정치가 지속되는 한, 개혁정치는 명백히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고려 후기 개혁정치는 왕권강화라는 정치적 목적에 활용되는 등 정치적 성격을 지나치게 드러내고 있었다.

 개혁은 대체로 위로부터 추진되는 체제 내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를 추진했던 세력집단의 성향에 따라 그 내용과 성격이 규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려 후기 개혁정치가 비록 국왕 중심으로 추진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정치세력의 협조없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당시 정치세력 가운데는 개혁안의 작성에서부터 개혁의 추진에 이르기까지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을 ‘개혁세력’이라 부를 만하다.

 충목왕대 개혁정치는 정치도감을 중심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이 기구의 구성원을 곧 개혁세력으로 설정할 수 있다. 다른 시기 개혁정치에서도 사림원·찰리변위도감·전민변정도감 등이 개혁기구로 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기구는 그 구성원 자체가 소수이거나 구성원의 일부만이 확인되고 있어서 당시 개혁세력을 이들만으로 한정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개혁정치 시기에 활동하고 있던 관료들을 우선 그 대상에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물론 현직 관료로 활동했던 모든 사람들을 개혁세력으로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개혁정치 시기에 기용된 인물들은 국왕의 즉위나 권력투쟁에 협조했던 인물들이 대폭 기용되고 있었다. 이렇게 발탁된 관료들 가운데는 개혁적 성향을 가진 사람도 있었지만, 개혁과는 전혀 관계없이 측근세력 등 국왕과의 긴밀한 관계 때문에 기용된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러므로 개혁정치 시기에 활동했던 관료라고 할지라도 단순히 국왕의 권력기반을 뒷받침하고 있던 측근세력은 개혁세력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고려 후기 개혁세력은 일단 현직 관료를 대상으로 하여 개혁적 성향을 지녔거나 학사직이나 언론직에 있으면서 직접 개혁활동에 참여했던 사실이 확인되는 인물로 한정해야 할 것이다.0462)고려 후기 개혁세력으로 활동했던 인물들에 대해서는 閔賢九, 앞의 글(1980) ;朴鍾進, 앞의 글(1983);鄭希仙, 앞의 글;金光哲,<高麗後期 改革勢力과 世族>(앞의 책);李淑京,<李齊賢勢力의 形成과 그 役割>(≪韓國史硏究≫64, 1989) 참조.

 고려 후기 개혁세력은 세족에서부터 향리출신에 이르기까지 그 가문배경에 있어서 다양한 구성을 보이고 있었다. 특히 세족출신 사대부가 개혁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충선왕대 개혁세력이었던 洪子藩·崔有渰·金倫·閔漬·崔冲紹·尹珤 등은 모두 그들의 가문배경이 세족이었다. 충목왕대 정치도감의 책임자인 판사 4명도 安軸을 제외하고는 모두 세족출신이었다. 王煦·金永旽·金光轍은 그들의 가문이 각각 안동 권씨·안동 김씨·광주 김씨로서 세족이었기 때문이다. 공민왕대 이후에도 세족출신 개혁세력이 상당수 있었다. 공민왕대 개혁세력의 한 갈래로 볼 수 있는 李齊賢勢力에는 元松壽·金敬直·鄭樞·金九容·李岡·韓脩·廉興邦·閔霽 등 세족출신 사대부가 상당수 포함되고 있었다.0463)李淑京, 위의 글, 53∼54쪽 참조. 이외에 金續命·金齊顔·權近·廉悌臣 등도 세족출신이면서 공민왕대의 개혁에 참여하고 있었다.0464)金光哲, 앞의 책, 203∼206쪽 참조. 뿐만 아니라 위화도회군 이후의 사전개혁에도 세족출신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사전혁파를 강력히 주장했던 趙浚과 許應 등은 모두 세족출신이기 때문이다.

 개혁세력의 내부구성이 이처럼 다양하였지만 이들은 대부분 과거출신 관료였다는 점이 공통된 특징이다. 충선왕대 개혁세력인 학사직·언론직 종사자들이 모두 과거합격자들이었으며, 충목왕대 정치관들 역시 대부분 과거출신이었다. 개혁세력에 과거합격자가 많았음은 공민왕대 이후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들은 현실의 폐단을 직시하고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식견과 소신을 굽히지 않는 기개, 합리주의적 공정성을 바탕으로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0465)閔賢九, 앞의 글(1980), 135쪽. 특히 개혁세력이 과거출신 관료들이었다는 사실은 그 가문배경이나 경제적 기반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굳게 결속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과거합격자와 지공거 사이에 맺어지는 좌주·문생의 관계는 마치 부자 사이의 관계처럼 그 결속력이 강하였다.0466)李楠福,<麗末鮮初의 座主·門生관계에 관한 一考察>(≪藍史鄭在覺博士古稀紀念 東洋學論叢≫, 高麗苑, 1984), 206∼210쪽. 그래서 일찍이 공민왕도 유생들이 당여를 이루고 있다고 비판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개혁세력은 동일한 정치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현실인식의 소유자들이었으며, 이것이 그 출신기반이나 경제적 기반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속하여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개혁세력의 구성이 이처럼 다양하였지만, 이들은 대부분 기본적으로 지주층으로서의 경제적 기반을 갖고 기존의 체제에서 일정하게 기득권을 누리는 부류였다. 물론 가문배경과 직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이들의 토지소유 규모는 달랐을 것이며, 수조권의 집적이나 권력의 향유도 그 정도를 달리했을 것이다. 이러한 차이가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지배세력 내부의 토지소유관계나 권력배분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 의견을 달리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지주층으로서의 경제적 기반을 갖고 기득권을 향유하고 있던 이들이 추진한 개혁은 그들의 존립기반을 와해시키지 않는 범위내의 것이었다. 사회모순을 비판하면서 개혁활동을 벌였던 이들 개혁세력이 기득권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그것은 체제 내에서의 비판과 개혁에 그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원간섭기에는 원의 종속구조가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데다가, 관료들 자신이 대부분 친원적 세계관에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에 종속구조를 청산하는 반원적 활동을 전개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개혁정치의 배경과 개혁안의 내용, 그리고 개혁세력의 성향을 고려할 때, 고려 후기 개혁정치는 심화되고 있던 사회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여 새로운 사회체제를 지향하려는 것이었다기보다는 현실의 폐단을 일정하게 수습하면서 기존의 지배체제를 유지·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개혁정치는 민생문제의 해결을 표방하면서도 이를 해결하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국가재정의 확충과 지배세력 내부의 갈등 해소, 국왕의 왕권강화 등에 그 목표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고려 후기 개혁정치는 반원적일 수도 체제 부정적일 수도 없는 것이었다.

 고려 후기 개혁정치가 이처럼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지만, 지배체제의 유지와 정치세력의 변동이라는 측면에서는 기여한 바가 크다. 우선 여러 차례의 개혁을 통해 제도의 운영과정에서 드러난 폐단을 수습함으로써 상당 기간 체제의 붕괴를 막을 수 있었다. 정방의 혁파 등을 통해 인사행정의 파행성을 일정하게 극복할 수 있었고, 토지점탈에 대해 이를 금지·처벌하고 환수하는 조치를 취하여 일시적이나마 토지겸병이 가속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총액제 수취방식, 공물의 선납과 대납, 임시세의 무거운 부과, 염전매제의 염세화에 따른 폐단을 거듭 지적하고 이를 금지·처벌하는 등 수취문제의 해결에 관심을 보임으로써, 민에 대한 수탈을 어느 정도 완화하고 국가 재정난을 타개할 수 있었다.0467)권영국, 앞의 글(1992), 109쪽. 아울러 개혁정치가 추진되는 기간 동안에 여러 가지 폐단이 지적됨으로써 지배세력에게 체제의 위기와 체제 유지의 필요성을 인식시키는 부수적인 효과도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고려 후기 개혁정치는 당시 심각한 상황에 있던 민생문제의 해결을 강조하였다. 민의 곤궁화와 그에 따른 유망은 지배체제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정부나 지배세력으로서도 이 문제를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개혁정치 시기에 제시된 민생문제의 해결책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고리대 문제의 해결과 지방관의 중간수탈 방지, 구휼기관의 기능강화 등이었다. 그래서 고리대 문제는 이른바 ‘子母停息法’의 적용으로 해결하려 하였고, 지방관의 중간수탈은 엄격한 통제와 처벌을 통해 이를 방지하려 했다. 구휼기능의 정상화는 貢賦의 감면조치나, 惠民局·濟危寶·東西大悲院 등 구휼기관을 수축하고 기능을 강화하는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0468)고려 후기 개혁정치 시기의 민생문제 해결책에 대해서는≪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借貸·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및 권 84, 志 38, 刑法 1, 職制 참조.

 이같은 민생문제의 개혁방안은 물론 근본적인 것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기존의 체제가 유지되는 선에서 제도의 잘못된 운영 때문에 발생하고 있던 민생문제는 부분적으로 완화되었을 것이다. 비록 민생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실효를 거두지 못한다 하더라도 정부나 지배세력은 이를 대민지배에 적극 활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당시 개혁정치가 국가재정의 확보, 지배세력 내부의 갈등 해소, 왕권의 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것임에도 국왕과 정부는 그 궁극적인 목표가 민생문제의 해결에 있는 것처럼 포장하면서 민을 체제 내에 묶어두려 하였을 것이다. 사회모순의 담지자였던 민에게는 민생문제의 해결을 표방하는 개혁이 마치 그들의 처지를 개선하여 현재보다 나은 삶을 보장해줄 수 있는 것처럼 인식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당시 개혁정치는 심화되고 있던 사회모순을 일정하게 은폐하면서 민의 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을 상당 기간 예방하는 데 활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회모순이 심화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말에 이르기까지 민의 집단적인 항쟁이 나타나지 않는 요인의 하나도 정부와 지배세력의 이러한 개량화 조치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개혁정치의 추진은 지배세력의 내적 분화를 촉진시키면서 개혁에 참여했던 관료들의 정치적 지위를 강화하고, 이들이 정치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개혁세력은 민의 유망 등 체제위기에 직면하여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해 체제를 정비하면서 기득권을 누리려는 지배세력이었다. 그러므로 개혁세력은 국왕측근세력 등 권문과는 달리 일정하게 민의 지지를 받으면서 공개적이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정치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개혁세력으로 활동했다는 것 자체가 그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 줄 수 있는 요소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혁세력은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명분과 정당성을 확보하고, 내부적으로는 가문배경의 차이를 극복하면서 동일한 정치적 지향을 갖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려 후기 개혁정치는 혈연관계를 바탕으로 한 폐쇄적인 정치세력의 틀을 깨고, 보다 개방적이고 다양성을 지닌 정치세력을 태동시켰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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