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3. 고려왕조의 멸망
  • 1) 고려왕조 멸망의 배경
  • (1) 이인임 정권의 한계와 무장세력의 대두

(1) 이인임 정권의 한계와 무장세력의 대두

 공민왕 23년(1374) 반원개혁정치를 지속해 왔던 공민왕의 뜻하지 않은 죽음은 고려말 정국을 매우 혼란스럽게 하였다. 더구나 어린 우왕을 옹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로 실권을 장악한 李仁任은 정치개혁 보다는 권력 유지를 위한 파행적인 族黨政治0532)盧明鎬,<高麗後期의 族黨政治>(≪李載龒博士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한울, 1990).를 운영함으로써 고려사회의 정치·경제적 모순을 심화시켜갔다.0533)우왕대 정치세력의 추이에 대하여는 다음의 연구가 있으며 이 글을 작성하는 데 이들을 주로 참고하였다.
朴天植,<高麗 禑王代의 政治權力의 性格과 그 推移>(≪全北史學≫4, 1980).
高惠玲,<李仁任 政權에 대한 一考察>(≪歷史學報≫91, 1981).
姜芝嫣,≪高麗 禑王代(1374년∼88년) 政治勢力의 硏究≫(梨花女大 博士學位論文, 1996).
게다가 이 시기는 100여 년간 고려정치를 간섭해 왔던 元나라가 쇠망해 가고 대신 明에 의해 대륙의 패권이 재편되는 시기여서 외교노선을 둘러싼 親元派와 親明派라는 권력내부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 불안에 설상가상 왜구의 창궐이 그 유래를 볼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해져0534)우왕대 왜구 창궐에 대하여는 羅鍾宇,≪韓國中世對日交涉史硏究≫(圓光大 出版局, 1995) 참조. 전 국토를 황폐화시키며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고, 국가재정의 고갈을 부추겨 고려왕조의 위기를 재촉하였다.

 이인임은 공민왕초에 문음으로 출사하여,0535)星州李氏 이인임의 가문에 대하여는 일반적으로 權門世族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그의 가계분석을 통해 조부 李兆年代에 이르러 비로소 중앙관계에 진출한 향리층이므로 이인임의 성격 역시 신진사대부 계열보다 정확히 말하면, 구세력과 신진사대부 개혁세력의 과도기적 인물로 평가된 바 있다(高惠玲, 앞의 글). 홍건적침입 때 西京存撫使로 활약하였으며, 여러 차례 戰功을 쌓아 공민왕 14년(1365)에는 贊成事에 올랐다. 辛旽집권기에 많은 권신과 무장세력들이 숙청된 것에 비해 이인임은 신돈집권기에는 守侍中으로, 그가 제거된 이후에는 侍中으로 계속 권력을 유지하였다. 더구나 공민왕의 후사 결정에 明德太后조차 종실 가운데 한사람으로 왕위를 계승시키려 한 것을 막고 우왕을 옹립하였으니 이로써 이인임은 명실상부한 실권자로서 정국을 주도해 갔다.0536)≪高麗史≫권 133, 列傳 46, 신우 즉위년 9월·권 126, 列傳 39, 姦臣 2, 李仁任. 그는 우선 공민왕 때 신돈의 집권으로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최영·慶復興·池奫 등의 무장세력을 정계에 복귀시켜 그들의 협조를 받아 국내 집권기반을 다지고자 하였다. 그리고 새로이 우왕이 등극한 사실을 명나라에 알림으로써 우왕 즉위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우왕 즉위년(1374) 11월, 전왕의 諡號와 신왕의 承襲을 요청하기 위하여 전공판서 閔伯萱을 명에 파견하였다. 그런데 마침 귀국 중에 있던 明使 蔡斌이 호송관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함으로써0537)明使 蔡斌은 부사 林密과 함께 공민왕 23년 4월 濟州馬 2천필을 징구하기 위해 고려에 파견된 사신인데 난폭한 행동으로 시중 廉悌臣 이하 많은 관료들을 능욕하여 원성을 일으킨 바 있다. 더구나 그의 귀국길을 책임진 호송관 金義를 여러 차례 모욕하더니, 같은 해(우왕 즉위년) 11월 압록강 開州站에서 김의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金成俊,<고려말의 정국과 원·명관계>(≪한국사≫권 20, 국사편찬위원회, 1994), 370∼372쪽 참조. 양국관계는 경색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채빈을 살해하고 북원으로 도망간 호송관 金義를 통해 공민왕의 시해소식을 들은 원 황제는 瀋王 暠의 손자인 脫脫不花를 고려왕에 임명하였다.

 우왕 옹립의 공으로 이제 막 실권을 쥔 이인임에게 부닥친 명사살해사건과 원에 의한 탈탈불화의 고려왕 임명은 외교적인 난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인임은 元·明 양국 모두에게 사대를 취하는 이중외교정책0538)金成俊, 위의 글, 373쪽.을 채택함으로써 양국을 견제하면서 우왕의 왕위계승을 정당화시켜 자신의 집권기반의 안정을 꾀하고자 하였다. 이에 같은 해 12월 판밀직사사 金湑를 북원에 보내 전왕의 부음을 전함으로써 5년 만에 원과의 외교관계를 재개하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공민왕대 이래 친명정책을 추진해 왔던 신진사대부들의 압력에 못이겨 판종부시사 崔源을 명에 파견하여 명사살해사건의 전말과 조공 재개의 뜻을 전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양면외교는 대내적으로 친원·친명파의 대립이라는 지배층의 분열을 심화시켰다.

 즉 告訃使 김서 파견에 대한 답례로 북원에서 사신을 파견하자 북원사신의 입조에 대한 친명파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전교령 朴尙衷·대언 林樸 등 신진사대부들은 친명정책을 추진해 왔던 先王의 유지에 반대된다는 것과 이를 빌미로 한 대국 명나라의 침입 가능성을 들어 원사의 입국을 적극 반대한 것이다. 중론이 이러하니 이인임 역시 이를 무시하지 못하고 원사를 江界에서 되돌려 보내야 했다.0539)≪高麗史≫권 126, 列傳 39, 姦臣 2, 李仁任.

 이후에도 집정권신과 신진사대부 사이에는 대원외교정책을 둘러싸고 번번이 대립하였다.0540)高惠玲, 앞의 글, 21∼25쪽 참조. 하지만 대외정책을 둘러싼 신진사대부들의 적극적인 제동은 이인임 자신의 집권안정에 방해요인이 된다는 것이 분명한 일이었으므로 이인임은 그들의 요구에 끌려다니기보다는 이들을 제거하는 쪽을 택하였다. 더욱이 이들은 공민왕 16년(1367) 이래 國學中興과 親明改革政治를 통해 성장하여 이제는 정계의 중진으로 자리잡고 있었으므로 이들의 영향력이 더욱 확대되기 전에 그 근원을 끊어버릴 필요가 있었다. 이에 이임인은 우왕 원년(1375) 6월 우헌납 李詹과 좌정언 全伯英이 친원정책을 선두지휘하고 있는 자신과 池奫을 명사살해 등 4罪로써 처벌해야 한다는 請誅上疏를 올리자 田祿生·朴尙衷 등 사대부들을 대거 숙청하였다.0541)이들에 대한 숙청은 응양상호군 禹仁烈과 친종호군 韓理의 주청을 계기로 시작되어 李詹·全伯英·方旬·閔中行·朴尙眞 등이 杖流되고, 정당문학 田祿生과 朴尙衷은 유배 도중 고문독으로 죽었다. 鄭夢周·金九容·李崇仁·林孝先·廉興邦·廉廷秀·朴形·鄭思道·李成林·尹虎·崔乙義·趙文信 등은 이인임을 해치려하였다고 하여 유배되었다(≪高麗史節要≫권 30, 신우 원년 7월). 이들 외에도 元使접대를 반대한 鄭道傳과 북원에 보내는 연명서에 반대한 林樸 역시 탄핵받아 유배되어 있었다(≪高麗史節要≫권 30, 신우 원년 5월·6월). 뿐만 아니라 이인임은 자신의 당여인 지윤·林堅味 등과 함께 그들의 집권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명망있는 대신조차도 과감히 도태시켰다.0542)≪高麗史≫권 126, 列傳 39, 姦臣 2, 李仁任.
≪高麗史節要≫권 30, 신우 2년 12월.

3월에 金續命을 文義縣에 귀양보냈다. 속명은 태후의 인척으로서 궁중의 일을 맡아보면서 청렴 정직하며 말을 바로하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꺼렸다. 일찍이 병으로 집에 있었는데 慶復興·李仁任·池奫이 문병하러 왔다. 김속명이 말하기를 ‘옛 제도에 兩府의 省은 5명이고 樞는 7명인데, 이제 하룻동안에 제수하는 재추가 59명이나 되니 공론을 어찌하려는가’라고 하였다. 경복흥이 말하기를 ‘부득이하여 그리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속명이 말하기를 ‘지금의 재추는 녹만 먹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니 나처럼 마음이 바르지 못한 자가 없다’ 하였다. 이인임이 말하기를 ‘공의 마음이 바르지 않다면 누가 바르겠는가’하니 속명은 ‘내가 都堂에서 伴食하면서 무릇 안건에 서명할 때에 마음으로 그르게 여기면서 입으로는 옳다하니 마음이 바르지 못하기가 누가 나와 같겠는가’ 하였다. 복흥 등이 모두 말이 없었다. 지윤과 이인임이 깊이 감정을 품고 몰래 중상하기를 꾀하였으나 틈을 얻지 못하였는데, 이 때에 와서 司議 許時와 金濤 등을 사주하여 탄핵하기를, … 글을 두 번 올리니 태후가 힘써 구하여 귀양만 보냈다. … 이 때 사람들이 아깝다고 여겼다(≪高麗史節要≫권 30, 신우 2년 3월).

 김속명은 世族 光山金氏 中贊 金之淑의 손자로 門蔭을 통하여 입사하였지만 청렴결백한 성품으로 權貴에 아첨하지 않고 왕에게도 直言을 서슴지 않는 관리였다. 공민왕 10년(1361) 홍건적의 난 때 왕을 호종한 공로로 2등공신에 봉해지고, 공민왕 말년에는 慶尙道都巡問使로서 鎭海縣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한 공로로 端誠揆義輔理功臣이 되었다. 신우초에 三司右使로서 국정을 맡았지만 김속명은 정방제조로서 인사권을 남용하고 있는 이인임과 지윤 등의 파행적인 정치운영을 보고서도 어쩌지도 못하고 있는 자신의 행동을 한탄하면서 간접적으로 그들을 비난하였기 때문에 우왕초에 바로 제거되었던 것이다.

 위 사료에도 지적되어 있듯 이인임 정권에서는 12명에 국한된 재추의 자리에 59명이나 뽑아 관직체계를 어지럽히고, 뇌물의 다소와 친소에 따라 관리를 뽑아 대간·장수·수령의 직에도 모두 그의 당여를 배치하였다. 이러한 파행성은 관리임명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권력을 빙자한 뇌물수수와 불법적인 토지탈점 등 끝이 없었다. 國庫에는 10일의 저축도 없었지만 賣官·賣獄으로 이인임의 저택에는 金帛이 넘쳐있었고, 田園과 奴婢가 전국 여러도에 걸쳐 있었다고 한다.0543)≪高麗史≫권 126, 列傳 39, 姦臣 2, 林堅味. 이인임을 비롯한 집권중신들의 이러한 토지탈점이 민의 유망과 납세자의 감소에 따른 국가 재정의 파탄을 가져오게 한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한편 우왕 즉위초 권력의 중앙에는 이인임을 중심으로 한 족당세력 외에도 무장세력들이 일정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공민왕대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및 덕흥군의 침입, 그리고 조일신의 난, 흥왕사의 변 등과 같은 국내 반란세력을 평정하면서 대두하여 중앙정계에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지만 공민왕 14년말 신돈집권으로 숙청되었다가,0544)≪高麗史≫권 41, 世家 41, 공민왕 14년 5월·6월 기사 참조. 이인임의 집권으로 정치 일선에 재등장하였다. 특히 공민왕 시해 후 정국수습과 심각해진 왜구 창궐로 그들의 역할이 두드러졌고, 添設職 제수로 인한 군공관료군의 지지기반이 강화됨으로써0545)鄭社熙,<高麗末 新興武人勢力의 成長과 添設職의 設置>(≪李載龒博士還曆紀念 韓國史論叢≫, 한울, 1990). 정치적 실권 또한 강화되어 갔다. 북원과의 외교에 반대한 사대부들의 숙청에도 응양군상호군 禹仁烈과 친종호군 韓理 등이 탄핵을 발의하였고, 최영과 지윤 등의 무장세력이 그들의 국문을 맡아 처벌한 사실에서 확인되듯0546)이들에 대한 숙청은 응양상호군 禹仁烈과 친종호군 韓理의 주청을 계기로 시작되어 李詹·全伯英·方旬·閔中行·朴尙眞 등이 杖流되고, 정당문학 田祿生과 朴尙衷은 유배 도중 고문독으로 죽었다. 鄭夢周·金九容·李崇仁·林孝先·廉興邦·廉廷秀·朴形·鄭思道·李成林·尹虎·崔乙義·趙文信 등은 이인임을 해치려하였다고 하여 유배되었다(≪高麗史節要≫권 30, 신우 원년 7월). 이들 외에도 元使접대를 반대한 鄭道傳과 북원에 보내는 연명서에 반대한 林樸 역시 탄핵받아 유배되어 있었다(≪高麗史節要≫권 30, 신우 원년 5월·6월). 우왕 집권초 파행적인 정치운영에도 불구하고 이인임정권이 장기화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군사력을 갖춘 무장세력의 협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하겠다.

 요컨대 우왕대 전반 권력 구조의 핵심은 수시중 이인임과 판삼사사 최영아래, 경복흥·李希泌·尹桓·洪永通·洪仲宣·李成林·權仲和 등의 권문세족과 지윤·임견미·曹敏修·睦仁吉·王安德·邊安烈·都吉敷·禹仁烈 등 무장세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0547)이들은 우왕 원년부터 8년 사이에 재추를 지낸 자들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姜芝嫣, 앞의 책, 23∼24쪽 참조. 그러나 적어도 우왕대 전반 비록 군통수권을 판삼사사인 崔瑩이 장악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최영은 여전히 중앙 권력의 핵심에서는 배제되었다고 보여진다. 최영의 부각은 바로 이인임 족당세력 내부의 연이은 정치적 갈등의 산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