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3. 고려왕조의 멸망
  • 2) 이성계의 집권과 고려왕조의 멸망
  • (2) 공양왕 옹립과 이성계의 실권 장악

가. 공양왕 옹립과 회군공신의 책봉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창왕이 옹립되었지만, 실권자인 이성계는 그의 즉위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대신 이성계는 군사적 기반 위에서 정도전·조준 등의 지지에 힘입어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다져갔다. 그는 사전개혁문제를 빌미로 창왕 옹립에 적극적이었던 대사헌 조민수를 탄핵하여 창녕으로 귀양보낸 뒤 신진사대부의 대부인 李穡을 문하시중에, 자신은 수시중의 자리에 올라 집권체제를 강화하였다. 하지만 온건개혁파로서 권문세족의 후원을 받고 있던 이색과의 聯政은 정치불안을 가중시킬 따름이었다. 이같이 불안한 연정은 창왕 원년(1389) 11월에 발생한 ‘金佇의 獄’을 계기로 파기되었다. 결국 창왕은 폐출되고 전제개혁에 반대입장을 보인 세족과 온건파사대부들은 대거 정치일선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前大護軍 金佇와 前副令 鄭得厚가 몰래 黃驪(여주)에 가서 (신)우를 알현하였다. … 우가 울면서 말하기를 ‘답답하게 이 곳에 있으면서 손을 묶고 앉아 죽음을 받을 수는 없다. 다만 力士 한 사람을 얻어 李侍中(이성계)만 해친다면 내 뜻은 성취할 수 있다. 내가 평소에 禮儀判書 郭忠輔를 좋아했으니 네가 가서 보고 이 일을 도모하라’하고는 … 김저가 충보에게 알리니 충보는 겉으로 승낙하고는 달려와 우리 태조에게 말하였다(≪高麗史節要≫권 34, 공양왕 원년 11월 갑술).

 위의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듯 이 사건은 예의판서 곽충보 등 구세력과 연계하여 이성계를 제거하려 한 우왕의 계획이 탄로나 빚어진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邊安烈, 李琳, 이색, 禹玄寶·禹洪壽 부자, 禹仁烈, 王安德 등 舊勢力 및 온건파사대부가 유배되고 우왕 역시 멀리 강릉부로 옮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이성계일파에 의해 언제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우왕이 이미 실권이 없는 전대호군 김저(최영의 조카)와 전부령 정득후에게 한 일종의 하소연에 불과한 것으로 보아 넘길 수도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김저가 바로 이성계에 의해 쫓겨나 있던 최영의 조카라는 사실과 창왕이 그들의 전제개혁에 비협조적이었다는 점에서 창왕을 중심으로 한 사전개혁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계기로 이용된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이성계는 판삼사사 沈德符, 찬성사 池湧奇·鄭夢周, 정당문학 偰長壽, 평리 成石璘, 지문하부사 조준, 판자혜부사 朴葳, 밀직부사 정도전 등을 興國寺로 모이게 하여 소위 ‘禑昌非王說’을 ‘廢假立眞’의 명분으로 삼아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였다. 공양왕, 즉 定昌君 瑤에 대하여 이성계는 “神王(신종)의 7代孫으로서 族屬이 가장 가까우니 마땅히 세움직하다”고 하였지만 조준과 성석린 등이 자질부족을 들며 반대하였을 정도로 인군의 재목은 아니었던 듯하다. 하지만 공양왕은 개인적으로 이성계와 인척관계에 있었고,0604)공양왕의 이종사촌이 이성계의 일곱째 아들 芳蕃의 妻였다. 나약한 성격의 소유자로 이후 이성계의 집권에 방해가 되지 않을 인물이었기 때문에 추대된 것으로 보인다.0605)李相佰, 앞의 책, 48∼58쪽 및 劉璟娥, 앞의 책, 95쪽 참조.

 공양왕을 옹립한 뒤 이성계는 창왕을 강화로 내쫓고 이임(창왕의 외조이며, 李仁任의 外從) 및 그의 아들 貴生, 사위 柳琰·宋濂, 외손주 사위 盧龜山, 조카 李懃을 멀리 귀양보냈다. 또 김저의 음모에 관련이 있다 하여 문하평리 鄭地·李居仁, 전판후덕부사 柳惠孫·李乙珍, 전밀직 李惟仁·柳蕃·趙瑚·安柱 등 27인도 유배하였으며, 전왕을 두둔한 관계로 이색과 그의 아들 種學을 파직시키고 조민수를 서인으로 삼아 李崇仁·河崙·權近 등과 함께 모두 귀양보냈다. 그리고 이성계 일파는 후환을 막기 위하여 그 해 12월에 정당문학 徐鈞衡을 강릉에 보내어 우왕을 시해하고, 예문관대제학 柳珣을 강화에 보내어 10세의 창왕을 살해하였다.

 이성계일파는 이와 같이 반대파를 제거하는 한편으로 이미 3년 전의 위화도회군에 협조한 군인 및 사대부들에 대한 포상조치를 취하였다. 공양왕 2년(1390) 4월에 회군의 공로자들에 대한 책봉문제가 논의되어 이듬해 3년 2월 功臣田을 하사하는 포상조치가 내려짐으로써 회군공신의 책봉작업은 일단락되었다. 회군논공 대상인원은 최영과 군사적으로 대치한 상황에서 요동공격군으로 출정한 원수들과 회군의 주장에 동조한 고위관원 일부를 포함하여 모두 54명에 이르렀다.0606)姜芝嫣,≪高麗 禑王代(1374년∼88년) 政治勢力의 硏究≫(梨花女大 博士學位論文, 1996), 111∼112쪽 참조. 1등공신에는 이성계, 2등공신에는 沈德符·裴克廉·尹虎·柳曼殊 등 17인이, 3등공신에는 30명이 책봉되었으며, 그 밖에는 등급에 없었다.0607)≪高麗史≫권 45, 世家 45, 공양왕 2년 4월 임인.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錄功敎書에 나타난 공신 책봉의 명분이 “거짓 인군 辛禑를 제거하고, 遼陽을 침범하여 天子에게 죄를 얻어 사직이 위태로운 때에 나라를 구했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교지 내용대로라면 회군공신의 책봉은 요동정벌의 책임을 물어 최영을 숙청한 당시라던가 창왕을 옹립했던 조민수 숙청 당시에 행해졌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논공을 공양왕 2년에 와서야 한 것은 ‘김저의 옥’을 계기로 전제개혁의 반대 세력을 제거한 후 어느 정도 자신들의 집권 기반을 다질 수 있게 되어 여유가 생겼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위화도회군의 정당성을 합리화하고 나아가서는 정권을 장악하는 초석을 다지기 위한 명분이요, 자신에게 충성을 바친 군관들에게 그 정치적 지위를 확보해주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하겠다.0608)朴天植,<戊辰回軍功臣의 冊封顚末과 그 性格>(≪全北史學≫3,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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