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1. 농장의 성립과 그 구조
  • 1) 전시과체제의 붕괴

1) 전시과체제의 붕괴

 고려 전기의 사회체제를 경제적으로 지탱해 준 것은 田柴科制度였다. 전시과체제에서는 위로는 왕족으로부터 문무양반과 군인·향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배층은 국가에 대한 복무의 대가로 수조지를 분급받았고, 왕실로부터 중앙 각사나 지방의 말단기관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배기구 역시 수조지를 배정받아 재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백성들은 자기의 소유지인 民田의 자가경영을 통해 생활의 토대를 마련하는 한편, 부세를 납부하여 녹봉과 국용 및 군수 등을 지탱해 주고 있었다. 다시 말해 지배기구와 지배신분에 대해 수조지를 광범위하게 분급하고 그 토지를 매개로 하여 지배신분을 직역에 동원함으로써 농민에 대한 지배와 수취를 실현하는 것이 고려 전시과체제의 본질이었다.

 그런데 10세기 후반 무렵에 이루어진 이 체제는 12세기 초엽부터는 점차 붕괴의 조짐을 보이더니 무신란으로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파탄하기 시작하였다.0629)田柴科體制의 붕괴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가 있다.
周藤吉之,<高麗朝より朝鮮初期に至る田制の改革>(≪東亞學≫3, 1940).
姜晋哲,<田柴科體制의 崩壞>(≪高麗土地制度史硏究≫, 高麗大 出版部, 1980).
浜中昇,<高麗末期の田制改革について>(≪朝鮮史硏究會論文集≫13, 1976).
金泰永,<科田法의 成立과 그 性格>(≪朝鮮前期土地制度史硏究≫, 知識産業社, 1983).
李景植,<高麗末期의 私田問題>(≪朝鮮前期土地制度硏究≫, 一潮閣, 1986).
그간에 야기된 정치적인 혼란과 더불어 전시과체제의 모순이 표면화된 데다가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으로 종래의 질서에 변화가 불가피하였기 때문이다.

 전시과체제에서 관료들이 받는 수조지는 무신란을 전후한 시기의 정쟁과 농민항쟁의 폭발, 몽고와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을 거치면서 지배층에 대한 관료적 통제가 마비됨에 따라 수조지에 대한 관리와 운영능력이 감퇴되자 수조권자들은 자기 수조지에 대한 권한을 강화하고 世傳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수조지의 세습은 정부의 수조지 관리능력의 마비로 인해서만 야기된 것은 아니었고 원래 전시과체제 아래에서 사실상 이루어지고 있던 현상이었다. 양반관료들은 관직의 취득을 통해, 향리·군인 등은 職役의 세습을 전제로 하여 현실적으로 세전되었다. 다만 이 전수과정에서 관의 공인이 매개되어야 하는데 이른바 ‘田丁連立’이란 官의 파악 아래에서 수조지가 世傳·遞受됨을 말하는 것이었다. 사전수조지는 그 受得者가 특별히 범법행위를 하여 처벌되지 않는 한, 관의 인정을 받아 본인 당대는 물론이요 처·자손에게 전수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려 전기의 수조지는 국가권력의 규제를 벗어나게 되면 수조권자의 권한은 강화되어 갈 수밖에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사전의 세전, 특히 사적인 전수는 “당사자가 죽으면 국가에 납부한다”0630)≪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서문.는 규정을 사문화시켰다. 즉 직역에 따른 頒給과 占有라는 수조지분급제의 기본원칙이 무너진 것이었다. 직역담당자는 수조지점유에서 갈수록 배제되고 이에 반하여 무자격자가 수조지를 세전하는 사태는 더욱 심해져갔다. 수조권에 가해지던 양적 제한도 유명무실해졌다. 지배신분계급을 18科로 구분하여 각과에 따라 차등있게 지급하던 전시과의 액수제한은 허구화되었다. 수조지의 세전과 분급제의 와해는 수조지의 겸병을 수반하였다. 국가권력과 수조권자 사이의 관계는 법제대로 유지되지 못하였고, 그러한 법제의 유지를 통해 수립되고 있던 집권적 질서는 크게 흔들리게 되었으며 수조권자들의 수조지에 대한 권한은 강화되었다.

 그러나 수조권의 강화가 국가와의 관계에서만 나타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수조권은 납조자인 전객농민에 대한 전주의 지배라는 측면에서도 강화되었다. 전주의 수조권이 국가권력의 간여를 배제하고 그 소유권자에 대한 지배력을 사적으로 강화함에 따라 전조수취는 법정조율을 훨씬 상회하는 선에서 집행되었다. 사전의 가산화, 즉 祖業田化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말 가산화한 사전은 수조권과 수조지에 근거하고 있는 점에서는 전시과적인 토지지배와 동일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전주인 수조권자의 사적 권한이 강하게 발휘되는 토지였다. 이런 조건에서 소유권, 소유지 그 자체에 대한 침식도 일어났고, 경우에 따라서는 탈점도 강행되었다. 이것은 고려 전기 관료체제를 유지하던 수조권분급제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와 관련된 토지겸병과 수취체제의 문란 등은 전시과체제의 전면적 붕괴를 수반하였다.0631)李景植, 앞의 책, 7∼16쪽.

 한편 농업생산력의 발전과0632)魏恩淑,<12세기 농업기술의 발전>(≪釜大史學≫12, 1988). 수공업의 발전0633)홍희유,≪조선중세수공업사연구≫(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79 ; 지양사, 1989).
魏恩淑,<고려후기 직물수공업의 구조변동과 그 성격>(≪韓國文化硏究≫6, 釜山大, 1993).
등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은 사회분화를 가속화시켰다. 고려 전기는 일반민을 토지소유와 노동력의 보유실태에 따라 丁戶層과 白丁層으로 분류하고 기본적으로 정호층에게는 직역을, 백정층에게는 요역을 부과하는 국역동원체제를 토대로 국가를 운영하였다.0634)金琪燮,<高麗前期 農民의 土地所有와 田柴科의 性格>(≪韓國史論≫17, 서울大, 1987).
安秉佑,<高麗前期 地方官衙 公廨田의 설치와 운영>(≪李載龒博士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한울, 1990).
그리고 이러한 토대는 당연히 고려 전기 전시과체제 운영에 있어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 후기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은 농민층의 분화를 가속화시켜 ‘務農治富’하여 신분을 상승시키는 존재도 나타나게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농민층이 몰락하여 ‘無田農民化’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이러한 일반 기층민의 변동은 자연히 고려 전기의 사회편제를 근본적으로 동요시켰으며 전시과체제 역시 동요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토지겸병과 인구집중으로 표현되는 전시과체제의 동요현상은 이미 12세기 초엽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즉 李資謙의 집권과 반란을 전후한 시기부터였다. 예종연간에 이자겸의 인척이었던 李資諒이 院館을 造營하면서 吏民의 田園을 침탈하였는데 그 일을 관장하는 자가 그것을 구실로 謀利하여 백성에게 해를 끼치므로 서해도안찰사였던 崔奇遇가 이를 금지시키자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는 기사가0635)≪高麗史≫권 98, 列傳 11, 崔奇遇. 보이고 있고, 또 이자겸이 남의 土田을 강탈하고 僕隷를 풀어 車馬를 약탈하여 자기의 물건을 운송하였다고 하는 것이나,0636)≪高麗史≫권 127, 列傳 40, 叛逆 1, 李資謙. 이자겸이 몰락한 인종 5년(1127) 10월에 有司에게 명하여 여러 李氏들이 탈점한 土田과 臧獲(노비)을 모두 本主에게 돌려주게 하였다는 것0637)≪高麗史≫권 15, 世家 15, 인종 5년 10월. 등에서 이자겸과 그 일문에 의한 토지탈점과 겸병이 상당히 만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사회전반에 걸쳐 진행되어 전시과체제가 결정적으로 타격을 입는 것은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이자겸집권기에는 주로 이자겸 자신과 그 일문에 의한 것이었지만 무신집권기를 전후해서는 무신집권자들뿐 아니라 토호와 승려들도 탈점자로 나서고 있다. 초기 무신집권자였던 鄭仲夫는 侍中에 임명되어 전원을 확대했고, 그의 家童·門客들도 그 세력에 의지하여 橫恣하였으며,0638)≪高麗史≫권 128, 列傳 41, 叛逆 2, 鄭仲夫. 권신이었던 文克謙 역시 僕從들을 나누어 보내 전원을 넓혔다.0639)≪高麗史≫권 99, 列傳 12, 文克謙. 권세가 이외에도 京人의 농장이 鄕邑에 널려 있고, 승려들이 諸處의 농장에서 함부로 貢戶를 만들어 良人을 사역시키거나 각처의 부강한 양반들이 고리대를 운영하여 예전부터 경작해 왔던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의 丁田탈점 등은 무신정권 초기에 이미 농장이 상당히 확산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한 상황은 명종 26년(1196)에 崔忠獻·崔忠粹 형제가 李義旼을 제거한 후 시정해야 할 폐단으로 건의된 ‘封事 10條’ 가운데에도 보이고 있다. 즉 관리들이 탐오하여 公·私田을 빼앗아 겸병하여 한 집에서 소유한 기름진 옥토가 몇 고을에 걸쳐있어 나라의 부세가 삭감되고 軍士가 결핍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0640)≪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그러나 최씨무신집정 이후에도 그러한 현상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에 의한 토지겸병은 오히려 심화되어 갔다. 최씨무신집정들은 각기 수천명에 달하는 私兵을 거느리고 그것을 통해 정권을 유지하였으므로 그와 같이 많은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조지나 그들에게 특별히 사여된 食邑인 晋陽에서의 수입만으로는 부족하였기 때문에 광대한 농장을 경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0641)金鍾國,<高麗武臣政權の特質に關する一考察-私兵集團と經濟的基盤を中心として->(≪朝鮮學報≫17, 1960).
許興植,<1262년 尙書都官貼의 分析(下)>(≪韓國學報≫29, 1982).
尹龍爀,<대몽항쟁기 고려 무인정권의 江都生活>(≪崔永禧先生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 探求堂, 1987).

 최씨집권기의 토지겸병과 인구집중은 최씨일문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었고 최씨와 인척관계에 있거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많은 권력자들과 그 휘하의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었다.0642)宋炳基,<高麗時代의 農莊-12世紀 以後를 中心으로->(≪韓國史硏究≫3, 1969), 3∼4쪽. 崔竩가 제거된 후 최의 및 만종(崔沆)의 노비·전장·銀帛·米穀 등이 국가에 의해 적몰되고, 최의의 창고에 저축된 곡식도 分賜되었다. 이 때의 사급내용을 보면 太子府에 2,000斛, 제왕·재추·문무백관으로부터 서리·군졸·조예·방리인에 이르기까지 적더라도 3斛을 내려가지 않았다고 하는데0643)≪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附 竩. 이와 같이 막대한 부의 축적은 많은 토지와 인민을 그의 예하에 집적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최씨집권기뿐 아니라 다른 무신들의 경우도 비슷하였다. 최의를 제거하고 집권한 金俊도 농장을 列置하고 가신 文成柱로 하여금 전라도를, 池濬으로 하여금 충청도를 관할케 하였으며, 그의 아들들도 토지와 노비를 탈점하는 데 광분하였다.0644)≪高麗史≫권 130, 列傳 43, 叛逆 4, 金俊. 김준과 함께 최의를 타도한 문신 柳璥도 김준과 더불어 衛社功臣으로 많은 토지와 노비를 지급받았는 데도 권세를 잡은 이후 그 부가 전보다 배는 더하여 사람들이 三韓의 거부로 일컬었다고 한다.0645)≪高麗史≫권 105, 列傳 18, 柳璥.

 이러한 토지겸병의 확대는 무신집권이 끝나고 원간섭기가 시작되는 원종 11년(1270) 이후에는 더욱 보편화되어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이전의 것은 주로 무신집권자들과 그 족당·관인·일부의 토호나 승려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후로는 관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왕·왕실·국가권력기관·내료·부원배 등이 주체로 나섰고 토호나 사원의 토지겸병도 본격화되었다.

 30여 년에 걸친 몽고의 침입과 삼별초의 난, 일본원정 등으로 고려는 막대한 인구의 손실과 농토의 황폐화를 감수하여야 했다. 그 결과 국가나 왕실의 재정은 파탄상태가 되어 백관의 녹봉을 지급할 수 없었음은 물론, 內莊宅의 쌀이 떨어져 하루 저녁의 御飯米를 마련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기까지 하였다.0646)≪高麗史≫권 27, 世家 27, 원종 14년 2월 경자.

 이러한 상황에서 왕과 왕실, 국가기관에서도 토지겸병의 대열에 가담하였다. 왕에 의한 토지겸병은 충렬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시기는 특히 왕실의 원으로의 盤纏(여비)이 막대하였기 때문에0647)朴鍾進,<忠宣王代의 財政改革策과 그 性格>(≪韓國史論≫9, 서울大, 1983), 61∼69쪽. 국가재정이 고갈된 상태에서 그 비용을 충당하고자 과렴을 행하였을 뿐 아니라 內房庫라는 御庫를 별도로 설치하여 환관 1인으로 하여금 관장케 하고, 권농사라는 명칭의 조신을 각 도에 파견해 공사양전을 택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경작케 하고 공부를 면제해 주는 방식으로 왕이 직접 토지겸병과 인구집중에 앞장서기도 하였다.0648)≪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科斂 충렬왕 15년 3월. 그것은 이후 충혜왕대에도 계속되어 田民을 탈취하여 寶興庫에 소속시켰고,0649)≪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科斂 충혜왕 4년. 五敎兩宗의 亡寺田과 선대의 功臣田을 모두 內庫에 소속시켰으며,0650)≪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公廨田柴 충혜왕 후4년 7월. 이른바 ‘四件奴婢’를 빙자하여 노비를 빼앗아 北殿에 두고 직물을 생산하게 하기도 하였다.0651)≪高麗史節要≫권 25, 충혜왕 후4년 6월.

 왕실이나 권력기관이 토지겸병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원간섭기부터였다. 왕실인 諸王들은 이미 원종조에 경기지방의 기름진 토지를 광점하고 있었고, 충렬왕대에 들어서면 元成殿·貞和院 등의 궁원이나 將軍房·忽只·巡軍·鷹坊 등의 원과 관련된 권력기관 역시 촌락을 탈점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諸道의 忽赤·司僕·巡軍과 權門에서 파견한 사람들이 인민을 影占하고 土田을 據執하였다.0652)≪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職制 충숙왕 5년 5월 下敎. 특히 원과 관련하여 등장한 권력기관들은 그들 기관의 소요경비를 조달하는 데 원래 목적이 있었지만 결국 그 기관의 관원들에 의해 사적으로 탈점되어 갔다.

 특히 이 시기에 있어 대토지소유가 확대되어 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 중의 하나가 賜牌田이었다.0653)고려 후기 사패전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가 있다.
姜晋哲,<高麗의 農莊에 대한 一硏究>(≪史叢≫24, 高麗大, 1980).
浜中昇,<高麗後期の賜給田について>(≪朝鮮史硏究會論文集≫19, 1982).
박경안,<高麗後期의 陳田開墾과 賜田>(≪學林≫7, 延世大, 1985).
李景植, 앞의 책, 16∼29쪽.
李淑京,<高麗後期 賜牌田의 분급과 그 변화>(≪國史館論叢≫49, 國史編纂委員會, 1993).
전쟁으로 인한 인구의 감소와 농경지의 황폐를 복구하여 농업생산력을 회복하고 증대하여 국가재정을 확보하는 길은 농경지를 개간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농경지의 개간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전쟁으로 노동력과 노동도구를 거의 상실한 일반농민층보다는 많은 노동력과 재력을 투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豪富家와 權勢家들이 주도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사패전은 이들의 개간을 국가가 제도적으로 뒷받침해 준 것이다.

 원래 특정공신에게 임의로 토지를 사여하는 賜田은 이전부터 있었다.0654)姜晋哲,≪高麗土地制度史硏究≫(高麗大 出版部, 1980), 163∼164쪽. 그러나 고려 후기의 사패전은 몽고와의 전쟁으로 황폐해진 농경지를 복구하고 유민을 정착시키기 위한 한 수단으로 황무지나 陳荒地를 지배층이나 권력기관에 분급하여 주고 그들로 하여금 개간하고 소유하게 하는 제도였다. 즉 충렬왕대에 諸王·宰樞·扈從臣僚·宮院·寺社 등이 閑田을 望占하였는데 국가는 務農重穀하는 뜻에서 사패를 주었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0655)≪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經理 충렬왕 11년 3월.

 사패전의 분급은 이러한 개간문제와 연결되어 등장하는 제도였지만 수조권분급제의 마비 및 붕괴와도 관련이 있었다. 전쟁 후에도 여전히 고려정부는 지배층에 대한 경제적 보장을 제도적으로 마련해 주어야 하였으나 전시과의 급여나 녹봉의 지급이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게다가 원의 간섭으로 정치적으로 불안정하였던 왕실은 사적인 지배기구와 정치세력을 이용하여 통치하였고 그에 상응하는 경제기반도 사적인 데 의존하는 경향이 컸다. 사패전은 국왕 개인의 의지에 의해 지급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고려의 국왕들은 이 제도를 통해 자신의 지지세력을 확보하였다. 사패전의 수득자들은 대개 제왕·재추·호종신료·궁원·사사·공주 및 그의 怯怜口 및 內僚 등으로 지적되고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왕의 측근세력으로서 왕권유지에 필요한 존재들이었다.

 사패전으로 지급된 진황지는 山川으로 표시될 정도의 광대한 것이었으며 소유면적에 특별한 제한이 가해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1인의 사패전이 적게는 30∼40결에서 많게는 2천∼3천결에 달하였다. 그리고 개간된 사패전은 소유권이 인정됨과 동시에 면조의 조처가 취해진 것으로 보인다.0656)李景植, 앞의 책, 20∼21쪽. 이 결과 사패전을 통한 대토지집적은 성행할 수밖에 없었고, 개간이 거의 완료된 후에도 사패를 빙자하여 타인의 토지를 수조지건 소유지건 또는 국가소유지건 가리지 않고 閑曠地·無主陳荒地라고 사칭하여 탈점하고 권력에 의지하여 公租를 납부하지 않는 현상은 날로 심해져 갔다.0657)≪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經理 충렬왕 24년 정월 충선왕 즉위 下敎·田制 祿科田 충목왕 원년 8월 및 권 82, 志 36, 兵 2, 屯田 공민왕 5년 6월. 이 결과 토지분쟁은 물론이요 국가수조지인 공전을 감축시킴으로써 재정부족을 더욱 촉진하였던 것이다.

 정부에서는 면세와 피역에 대해서는 사패의 취소나 조세의 징수, 부역의 부과 등을 시행하기도 하고, 타인의 토지겸병에 대해서는 수시로 본래의 소유주에게 환급하도록 하는 조처를 취하거나, 지급결수를 제한하는 定限制를 도입하기도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사패전의 취득자들은 왕실과 여기에 연결된 권세가들이었고 게다가 이들의 정치적 배후는 원황실과 연결된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사패전은 이 시기에 있어 토지제도를 문란케하고 사회문제를 유발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의 하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원간섭기의 파행적인 권력구조에 편승하여 토지겸병에 진출하는 세력이 나타나는 것도 이 시기의 특징이었지만 이외에도 은퇴한 관인, 지방의 부호, 향리, 사심관 등도 토지겸병과 인구집중에 나서고 있었다.0658)宋炳基, 앞의 글, 7∼8쪽.

 은퇴한 관인이나 부호들은 적어도 향읍에 있어서는 농민들에 비해 사회경제적 지위가 월등한 豪右들이었고 그들은 지배질서의 문란과 한편으로는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적극 이용하여 많은 토지와 인구를 집중할 수 있었다.0659)洪榮義,<高麗後期 富戶層의 存在形態>(≪擇窩許善道先生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 一潮閣, 1992), 200∼203쪽 참조. 대표적으로 충혜왕대에 사환하였다가 나주로 내려간 金鋐0660)≪高麗史≫권 125, 列傳 38, 姦臣 1, 金鋐.이나, 충숙왕에서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5조를 섬기고 칠원으로 낙향한 尹桓0661)≪高麗史≫권 114, 列傳 27, 尹桓. 등을 들 수 있다. 향리는 지방행정의 실무자로 지방사정을 훤히 알고있어 재경세력가들이 토지를 겸병하고 인구를 집중할 때 이들과 결탁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들은 이것을 기화로 많은 토지를 겸병하였고 양인을 聚集하여 賤隷로 삼기도 하였는 바 이러한 현상은 거의 전국적이었다.0662)≪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禁令 충목왕 원년 5월 整理都監 狀·공민왕 7년 4월 都評議使 上言.

 한편 사심관은 원래 지방호족으로 나말여초 이래의 중앙집권화정책의 일환으로 출신지역에 대한 일정한 연고권, 즉 정치·사회적 통제권 및 관리권을 인정받고 在京官人化한 자들이었다. 특히 이들의 임무중에는 賦役에 대한 관리권이 있었는데 이러한 권한을 토대로 그들은 공전을 점유하고 민호를 은닉하여 公役을 탈취, 차역하거나 祿轉을 私取하였다.0663)李純根,<高麗時代 事審官의 機能과 性格>(≪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1986).
洪承基,<高麗後期 事審官制度의 運用과 鄕吏의 中央進出>(≪東亞硏究≫17, 西江大, 1989).
이들의 재지적 기반은 해당지역의 향리와 결탁할 수 있는 소지가 많아 자연히 향리와도 결탁하여 불법적 탈점을 자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4세기 중엽 공민왕대에 이르러서는 원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토지겸병과 인구집중이라는 현상은 전혀 극복되지 못하였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러한 혼란상을 극복해 보고자 여러 차례에 걸쳐 田民辨整都監사업이 시행되었지만 그 사업 자체가 당시 토지제도의 모순을 전면적으로 개혁하는 것이 아니었고 단순한 미봉책에 그쳤으므로 科田法을 통한 개혁이 이루어지기까지 토지겸병과 인구집중 현상은 계속되었다.

<魏恩淑>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