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1. 농장의 성립과 그 구조
  • 2) 농장의 발달과 그 구조
  • (2) 사적 소유지형 농장

(2) 사적 소유지형 농장

 탈점 등으로 인해 형성된 수조지집적형의 농장 이외에 고려 후기의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사회분화 과정에서 파생된 매득·장리·개간 등에 의해 형성되는 농장도 나타나고 있었다.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고려 후기의 정치 사회적 혼란과 수취체제의 문란, 국가에 의한 권농정책의 붕괴 등은 고리대의 성행을 가져왔고0698)白南雲,≪朝鮮封建社會經濟史(上)≫(改造社, 1937), 795∼808쪽.
徐吉洙,<高麗時代의 貸借關係 및 利子에 관한 硏究>(≪國際大學論文集≫9, 1981).
朴鍾進,<高麗前期 義倉制度의 構造와 性格>(≪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1986).
이것이 소농민의 몰락을 촉진하고 있었다. 일반 소농민들의 고리대에 대한 저당물은 그들이 유일하게 소유하고 있었던 토지와 노동력으로 될 수밖에 없었고 이렇게 소농민들로부터 방출된 토지와 노동력이야말로 이 시기 농장의 확대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 당시에는 富戶·富强兩班·權勢之家 등에 의한 고리대가 대단히 성행하고 있었는데 그로 인해 농민들은 소유토지는 물론이요 자식까지 팔고 심지어 자신마저 노비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0699)≪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借貸. 그러므로 부호·부강양반·권세지가 등이 부를 축적하고 토지를 집적하여 농장화할 수 있었던 중요한 수단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러한 고리대를 통한 것이었다.0700)洪榮義,<高麗後期 富戶層의 存在形態>(≪擇窩許善道先生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 一潮閣, 1992).

① 각 처의 富强兩班들이 貧弱百姓에게 고리대를 놓고 갚지 않는다고 하여 古來丁田을 강제로 빼앗아서 이로 인하여 생업을 잃고 더욱 가난해지니 富戶로 하여금 겸병하여 侵割하지 못하도록 하고 그 丁田은 각각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라(≪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借貸 명종 18년 3월 下制).

② 지금 빈한한 무리들이 公賦와 私債 징수의 급박함에 쫓겨 田地와 家舍를 富家에 팔기를 애원하니 부가들은 그 窮急함을 알고 값을 깎아 그것을 삽니다. … 부자는 날이 갈수록 더욱 겸병하고 가난한 자는 송곳 꽂을 만한 땅도 없어 이로 인해 도산합니다(≪成宗實錄≫권 130, 성종 12년 6월 임자).

③ 湍州에 놀면서 보니 산천이 참 아름다워 살 만하고 강을 둘러싼 석벽이 기이하고 절묘합니다. 그 동쪽에는 한 遺墟가 있어 찾아보니 郡氓의 田地였는데 관청의 租稅와 私契가 쌓여서 여러 번 財貨로 禍를 완화하려고 하였으나 팔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내가 듣고서 기뻤으나 살 만한 재물이 없고 또한 경영할 비용도 없었는데 지금 學士 李知命이 나에게는 知己가 되므로 그 힘을 빌어 산곡에 재목을 갖추고자 하여 편지를 드려서 승낙을 얻었습니다. 첫여름이 되기 전에 초당을 지어 가족을 데리고 가서 江田 數頃을 사서 三伏과 臘日에 이바지하려는 것이 저의 계획입니다(林 椿,≪西河集≫권 4, 寄山人悟生書).

 위의 사료 ①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고리대의 대가로 농민들은 부호들에게 古來丁田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다. 사료 ②는 조선초의 사례이기는 하지만 田租와 私債에 몰린 농민들이 부가에 헐값으로 토지 등을 팔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고려 후기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사료 ③에서는 무신란을 피해 長湍으로 피신하였던 林椿이 실제로 그런 형태로 농민들로부터 방출된 토지를 매입하여 농장으로 경영하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한편 13세기 초엽의 것으로 보이는 松廣寺 소장문서인<國師當時大衆及維持費>에 의하면 무신정권의 주요인물들이 송광사에 시납한 토지와 노비 등의 명세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들 대부분이 자신과 전혀 연고가 없는 지역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토지들 중 상당부분이 부곡지역의 토지임을 알 수 있다.0701)朴宗基,<13세기 초엽의 村落과 部曲>(≪韓國史硏究≫33, 1981) 참조.

 부곡지역이 일반 군현에 비해 경제적으로 열악하였음을 염두에 둘 때 고려 후기에 들어와 주군현지역에 비해 부곡지역민의 유리현상은 더 심했을 것이다. 부곡지역과 상황이 유사하였던 속군현민의 유망현상은 12세기초부터 나타나고 있고,0702)≪高麗史節要≫권 7, 예종 원년 4월. 12세기말 靈山部曲에는 戶들이 도망하고 대부분 노인들만이 남아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0703)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6, 古律詩八月十一日早發元興到靈山部曲. 이러한 유망민의 토지는 자연히 권귀나 부호들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고 사유지의 확대는 이와 같이 경제적으로 열악한 지역에서 먼저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長利와 買得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해야할 것이다. 이렇게 소농민층의 몰락으로 방출된 토지가 부호층으로 집중되어 가면서 한편에서는 토지소유권의 질적 발전이 수반되었다.

 그것은 농민층의 몰락이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특히 수조권 분급제의 문란과 연동되어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조지의 田主가 겹쳐 1년의 田租가 5, 6차례가 됨으로 인해 유망하게 되었다거나,0704)≪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신우 14년 7월 典法判書 趙仁沃 等 上䟽·大司憲 趙浚等 上書. 수조지를 집적하여 농장으로 경영하면서 각가에서 보낸 奸猾之奴가 농민들을 侵漁橫斂하여 괴롭히면 자연히 농민들은 토지에서 유리될 수밖에 없었고,0705)≪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신우 14년 7월 版圖判書 黃順常 等 上䟽. 탈점이 극심했던 서해도민의 유이로 인해 주군이 공허해질 정도였다는 것이다.0706)≪高麗史≫권 90, 列傳 3, 宗室 1, 平壤公 基 附 順正大君 璹. 이 경우 농민들은 대개 탈점자나 수조권자에게 헐값으로 토지를 넘겼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렇게 소유권이 확보된 토지는 다시 유망하거나 투탁하는 농민을 받아들여 경영하는 방식이 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수조지가 집적되어 농장화한 후 다시 그 수조지들이 장리와 매득 등에 의해 농장주의 사유지화하게 되어 사실상 토지소유권의 질적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전반적으로 수조지가 축소되면서 사적 소유권도 발전해 나가게 되었고 수조지집적형 농장 가운데는 상당부분이 이러한 형태를 통해 사유지로 변모되었을 것이다.

 한편 개간을 통해서도 농장이 형성되었다. 12세기 이후 광범위하게 전개되는 농민의 유이민화 현상과 더불어 나타나는 토지의 진전화를 막아보고자 국가에서는 이미 진전개발을 장려하고 있었지만,0707)≪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租稅 예종 6년 8월 判. 황무지나 진전개발이 더욱 본격화되는 것은 몽고와의 전쟁이 끝난 이후 복구화 과정에서였다. 그리고 개간에 의한 농장형성이 본격화되는 것도 이 시기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미 지적되고 있지만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 농지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국가에서도 적극 나섰겠지만 전쟁으로 인해 노동력은 물론이요, 거의 모든 노동도구를 함께 상실한 일반농민층에게 그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따라서 자연히 재력을 갖춘 지배층에게 위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다 전시과체제의 붕괴 이후 지배계급에게 제대로 물적 토대를 제공해 줄 수 없었던 조정에서는 황무지에 사패를 발급하여 개간과 더불어 소유권을 인정해 주는 방식을 취하였던 것이다.0708)≪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經理 충렬왕 11년 3월 下旨. 비록 국가의 의도와는 달리 사패를 빙자하여 有主付籍之田까지 탈점하는 현상이 일어나 사회문제화되기는 하였지만 국가가 제왕·재추·호종신료·궁원·사사 등에 사패를 내린 목적은 閑田개간을 위한 ‘務農重穀之意’에 있었다.

 원래 사급전은 유공자에게 지급되어 사급된 토지의 수조권만이 인정된 것이었으나0709)姜晋哲,<高麗의 權力型 農莊에 대하여>(앞 의 책 , 1989), 188∼189쪽.
≪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功蔭田柴 신우 6년 6월.
이 시기에 있어 사패는 일종의 개간허가서인 동시에 개간지의 소유허가서였다. 그러므로 당연히 개간 후에는 소유권이 인정되었을 뿐 아니라 수조권까지 소지하게 되어 합법적으로 전조가 면제되었다.0710)박경안,<高麗後期의 陳田開墾과 私田>(≪學林≫7, 延世大, 1985).
李景植, 앞의 책.
개간지는 원래 경작지였지만 전쟁으로 황폐화된 곳이 주 대상이었을 것이나 개간이 진전되면서 점차 경작이 불가능했던 지역도 경작지로서 농장화되어 나갔을 것이다.

 고려 후기의 농업생산력 발전에 있어 특기할 만한 것은 12세기 이후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수리관계 사료이다. 그 가운데 특징적인 것은 바로 연해안 저습지와 간척지 개발을 위한 河渠공사와 防川·防潮堤 수축이었다.0711)魏恩淑,<12세기 농업기술의 발전>(≪釜大史學≫12, 1988), 83∼95쪽. 그런데 현재 남아 있는 사례들은 주로 국가권력의 대행자였던 지방수령들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것으로써 그 목적은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백성들을 도와주거나, 水禍를 없애거나 또는 유망한 백성을 안집하기 위한 것 등과 같이 소농민 안정이나 재정을 충실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발 자체가 농경지를 확대하는 것이었고 정부주도의 그러한 사업이야말로 당시 농민들의 농업생산력 발전에 대한 욕구에 부응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다 환경적응력이 강한 占城稻와 같은 신종자의 보급도 농경지를 확대하는데 한몫을 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0712)魏恩淑, 위의 글, 95∼101쪽.

 그런데 이렇게 연해안 저습지나 간척지 개발의 기술이 축적되었지만 국가가 소농민을 위한 권농책의 일환으로 이에 대한 지속적인 정책을 펼 수 없을 경우 자연히 정치권력과 재력을 겸비한 호강자에 의해 그러한 지역들이 개발되었기 때문에 결국 그 지역은 그들의 소유지로서 농장화되었다.

坡州西郊는 황폐하여 사람이 살지 않았는데 政堂 安牧이 처음으로 개간하여 넓게 田畝를 만들고 크게 집을 짓고 살았다. … 그의 손자인 瑗에 이르러 極盛하니 내외에 점거한 토지가 수만 경에 이르고 노비가 백여 호였다(成 俔,≪慵齋叢話≫권 3).

 安牧은 安珦의 손자로 과거에 합격하여 충숙왕 때 判典校寺事를 거쳐 密直副使를 지내고 공민왕연간에는 順興君에 봉해졌다.0713)≪高麗史≫권 105, 列傳 18, 安珦 附 牧. 안목의 증조부인 孚는 興州의 아전으로 醫業으로 과거에 올라 벼슬이 밀직부사에 이르렀고 그 뒤 조부인 珦, 부친인 于器 및 자신까지 계속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관인의 가문을 형성하였다. 그가 처음으로 개간했다고 하는 파주서교는 임진강 하류의 저습지대로서 사람이 살지 않았던 완전한 황무지였던 것을 관인으로서의 권력과 부를 기반으로 개간하여 농장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파주서교의 개간은 농경지가 연해안 저습지나 간척지로 확대되어 나가는 추세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러한 농장은 수조지집적형의 농장과는 달리 완전히 소유권을 획득하였으므로 여말의 사전혁파와는 전혀 무관하게≪慵齋叢話≫가 저작되던 조선 초기에도 계속해서 확대되어 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개간으로 이루어진 농장은 비단 연해안 저습지나 간척지 개발을 통해서만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2세기 이후 수리사업의 또 하나의 특징은 대규모 제언의 축조보다는 군현단위의 소규모시설로 이행되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0714)菅野修一,<李朝初期農業水利の發展>(≪朝鮮學報≫119·120, 1986).
魏恩淑, 앞의 글(1988), 92∼95쪽.
조선초의 경상도지방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수리관계 기록을 가장 많이 남기고 있는≪경상도속찬지리지≫에는 주군현이었던 지역은 물론이요 특히 속현이나 향·부곡과 같은 지역에도 많은 수리시설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주군현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되었던 임내지역이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를 거치면서 많은 개발이 이루어졌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특히 14세기에서 15세기를 거치는 동안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강안의 수량이 풍부한 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犬牙相入地가 형성되고 있었다. 이러한 견아상입지와 제언의 설치가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이것은 수량이 풍부한 지역을 중심으로 개간이 확대되어 나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0715)朴宗基,<14∼15세기 越境地에 대한 재검토>(≪韓國史硏究≫36, 1982) 참조.

 대개의 제언들이 지방의 수령이 중심이 되어 권농책의 일환으로 설치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0716)고려말 원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어느 정도 본격적인 개혁이 거론될 때인 공민왕연간에는 백문보에 의한 水車도입 건의가 있었을 뿐 아니라 농업생산력 발전을 위해 지방수령을 중심으로 한 수리사업의 활성화를 촉구하는 논의가 나오고 있다(≪高麗史≫권 114, 列傳 27, 全以道). 더러는 재력을 갖춘 지방의 유력자에 의해 사적으로 축조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5朝를 섬겼고 세번이나 首相을 하였으며 鉅富였다. 일찍이 관에 고하고 漆原으로 돌아갔는데 그 해 크게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 먹었다. 家財를 흩어 이를 구제하고 빈민에게 빌려주고 받은 契券을 모두 불살랐다. 때마침 가뭄이 오래 계속되었는데 桓의 토지에서 물이 솟아 다른 사람의 토지에까지 물을 대어 크게 풍년이 들었다. 慶尙道 사람들이 칭송하여 마지 않았다(≪高麗史≫권 114, 列傳 27, 尹桓).

 윤환의 가문은 조부인 尹秀 때부터 흥기하기 시작하였다. 윤수는 원종 때 親從將軍으로 있다가 원으로 도망하여 당시 禿魯花로서 원에 있던 충렬왕과 인연을 맺고 귀국하여서는 충렬왕의 측근세력이 되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다. 그의 아들 尹吉甫도 원에서 충선왕의 총애를 받아 中郞將, 大護軍의 벼슬을 지냈고, 고려에 와서는 合浦鎭邊使를 지냈다.0717)≪高麗史≫권 124, 列傳 37, 嬖幸 2, 尹秀. 윤환은 거부라는 명칭답게 富平府·金浦縣·守安縣·童城縣 등에도 조업전을 가지고 있었다.0718)李 穡,≪牧隱文藁≫권 6, 報法寺記. 그는 은퇴한 뒤 향리인 칠원으로 낙향하였던 것 같은데 위의 사료는 낙향 후의 향리에서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그는 비록 기근 때에 빈민에게서 받은 契券을 태워 없애기는 하였지만 당시의 지방의 부호층들이 일반적으로 행하고 있던 고리대를 통해 부를 축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부호층이 고리대를 통해 빈약한 백성들의 丁田을 탈점하고0719)≪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借貸 명종 18년 3월 下制. 그것이 농민몰락과 농장형성의 한 요인이 되고 있음은 이미 지적되고 있는 바이다.

 그런데 위의 사료에서 주목되는 것은 그의 토지에서 물이 솟아 다른 사람의 토지에까지 혜택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것은 윤환이 사적으로 개발한 수리시설이 아닐까 한다. 즉 윤환은 향리인 칠원에서 고리대를 통한 부의 집적은 물론이요, 사적인 수리시설의 개발과 그것을 통한 토지의 개발을 통해 농장을 형성 운영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미 지적되었지만 고려 후기 이래 정치적 혼란과 전쟁으로 인해 중앙관인층과 동정직자의 귀향추세가 강화되어 향촌사회에는 재지품관세력이 대두하였다.0720)朴恩卿,<高麗後期 地方品官勢力에 대한 硏究>(≪韓國史硏究≫44, 1984). 물론 이들이 향촌사회에서 반드시 긍정적인 역할만을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의 등장은 지방사회의 성장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재력과 학식을 겸비한 이들은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었던 지방사회를 개발하는 데 중요한 견인차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군현제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견해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주군현과 향·소·부곡·속현 등의 임내지역의 차이는 대체로 그 지역의 농업생산력의 우열, 경지의 광협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었지 않았나 하는 견해가 있다.0721)李樹健,<古文書를 통해서 본 朝鮮朝社會史의 一硏究>(≪韓國史學≫9,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7).
金東洙,<高麗 中, 後期의 監務파견>(≪全南史學≫3, 1989).

 칠원은 김해부의 속현으로 공양왕 때에 비로소 감무가 설치되었던 지역이다.0722)≪新增東國輿地勝覽≫권 32, 慶尙道 漆原縣. 칠원은 산간지역으로 조선 초기의 기록에 의거하여도 다른 경상도지역에 비해 척박할 뿐 아니라 수전의 비중이 낮은 것을 보면,0723)≪世宗實錄地理志≫권 150, 慶尙道 漆原縣. 속현으로서 그다지 개발되지 못했던 곳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러므로 윤환과 같은 재력과 권력을 갖춘 사람이 낙향하면서 이 지역은 개발되고 그것이 배경이 되어 생산력을 갖추면서 주현화되어 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새로운 농장의 개발을 시도하는 입장에서도 이미 개발이 완료되었을 뿐 아니라 토착세력의 힘이 강고했던 주군현보다도 상대적으로 개발의 여지가 많이 남아 있고 토착주민의 힘도 미약했던 지역이 개발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반드시 개간의 형태였다고는 볼 수 없지만 13세기경의 부곡지역의 토지의 대부분이 권귀들에 의해 사유화되어 나가고 있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였을 것이다.0724)朴宗基, 앞의 글(1981).

 특히 사적으로 수리시설을 축조할 수 있을 정도의 역량을 갖추고 있던 이들은 수리안정화가 보장되지 않으면 하기 힘들었던 移秧法과 같은 농법도 자신의 농장경영에 도입하여 생산성 향상을 도모하였을 것이다.

 고려 후기에는 지역에 따라서는 이앙법이 꽤 일반화되었던 것 같다.0725)魏恩淑,<高麗時代의 農業技術과 生産力硏究>(≪國史館論叢≫17, 1990), 19∼20쪽. 이앙법은 단지 종자의 절약이라는 면에서만 아니라 노동력 절감은 물론이요 직파법에 비해 단위면적당 생산성이 높았기 때문에 수리문제만 해결된다면 선진농법으로서 농민이 선호하는 것이 당연했고 앞에서 보았던 윤환의 경우와 같이 사적으로 수리시설을 축조할 수 있었던 부호들은 당연히 자신의 농업경영에 적용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지방사회의 유력자였던 품관층이나 사료에 새로이 보이는 부호들은 고려 후기의 농업기술의 개발 즉 수리사업의 확충, 우세한 축력소유을 이용한 牛馬廐肥糞과 같은 시비법이나0726)이에 대해서는 魏恩淑, 앞의 글(1988), 102∼108쪽 참조. 이앙법 등의 기술발전을 이용하여 생산력 발전을 통한 소유지의 확대를 도모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선진농법을 이용하여 재지사족층에 의한 미개발지역이었던 임내지역의 개발과 농장화는 더욱 활발히 추진되었다.0727)李樹健, 앞의 글, 49∼58쪽 참조.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속군현에 대한 감무파견과 주읍으로의 성장, 그리고 향·소·부곡 등의 부곡제지역의 소멸과 직촌화현상 등 지방제도 변동의 가장 큰 배경이 되었던 것이 농업생산력 발전으로 인한 지방사회의 균형적 발전에 있었다는 것은 이미 지적되고 있는 바이다.0728)李樹健,<朝鮮初期 郡縣制整備와 地方統治體制>(≪韓國中世社會史硏究≫, 一潮閣, 1984).
李泰鎭,<高麗末·朝鮮初의 社會變化>(≪韓國社會史硏究≫, 지식산업사, 1986).

 이러한 생산력 발전을 이용하여 개간을 통해서 형성된 농장은 물론 탈점과 같은 권력을 통한 수조지집적형의 농장에 비해서는 전반적으로 규모도 적었을 것이고0729)물론 安牧의 농장과 같이 수만 경에 이르는 것도 있었지만, 李承休의 삼척현의 두타산 귀동의 토지처럼 2頃에 불과한 소규모 토지도 있었다. 계곡 옆의 2경의 토지는 원래는 外家所傳의 柴地였는데 아마도 그가 은거하면서 농경지로 개발한 것이 아닐까 한다(李承休,≪動安居士集≫雜著 1, 葆光亭記). 고려 후기 농장의 전체 비율면에서 보아도 아직은 그리 큰 부분을 차지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개간이나 매득·장리 등으로 형성된 농장은 소유권에 입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말의 사전혁파 대상에서 제외되어 조선 전기에까지 이어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러한 형태의 농장이 출현했다는 것 자체가 고려 후기의 사적 소유권의 발전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소유권에 입각한 농장이야말로 중세에 있어서 사적 대토지소유의 형태가 수조권에 기초한 형태에서 소유권에 기초한 형태로 이행해가는 발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적 소유지형 농장의 경영형태는 어떠하였을까. 현재의 연구에 의하면 농장의 유형별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농장노동력을 노비로 보거나0730)林英正, 앞의 글. 혹은 양인전호로 보는 것이0731)宋炳基, 앞의 글.
姜晋哲, 앞의 책(1989).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당시의 소농민경영의 존재형태를 염두하지 않고 막연한 추측으로 일관한 경향이 크다.

 그런데 농장노동력을 양인전호가 일반적이었음을 주장하는 근거로써 많이 이용되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사료가 있다.0732)旗田巍,<高麗朝に於ける寺院經濟>(≪史學雜誌≫43­5, 1932), 589쪽.
宋炳基, 위의 글, 34쪽.
姜晋哲,<韓國土地制度史(上)>(≪韓國文化史大系≫2,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65), 1363∼1364쪽.

① 州縣事審官이 부당하게 은닉한 人民土田을 거두어 들였는데 民이 2,360호, 奴婢가 137구, 田이 19,798결, 賜田이 1,227결, 位田이 315결이었다(≪高麗史≫권 34, 世家 34, 충숙왕 6년 9월 정해).

② 事審官을 설치한 것은 본래 人民의 宗主로 삼아 流品을 甄別하고 賦役을 균평히 하고 풍속을 바르게 하고자 함이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고 公田을 廣占하고 民戶을 많이 은닉하여 만약 조금이라도 差役하거나 예에 따라 祿轉을 거두면 향리 중에 上京한 자를 감히 私門에서 決杖하고 구리를 거두며 녹전을 환수하며 威福을 마음대로 하여 鄕邑에는 해가 되고 나라에는 보탬이 되는 것이 없어 이미 다 혁파하였다. 그 은닉한 바 田戶를 추쇄하여 복구하라(≪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事審官 충숙왕 5년 5월 下敎).

 위의 사료 ②와 같이 충숙왕 5년 5월에 사심관이 은닉한 田과 戶를 추쇄하여 복구시키라고 하교하였는데 그 결과가 사료 ①이다. 은닉한 민호가 2,360호, 노비가 137구였는데, 바로 은닉한 노비의 수에 비해 일반 민호가 월등이 많다는 사실이 농장노동력에 양인전호가 대부분이었다는 주된 근거였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토지의 탈점은 수조지의 탈점일 경우 그 토지의 실질적 소유자이자 경작자였던 민에 대한 탈점을 수반하고 있었고 수조지집적형의 농장일 경우 경작자로부터 조·용·조를 수취하는 형태로 운영이 되고 있었다. 고려 후기의 농장은 개간이나 매득 등에 의해 형성된 것과 같이 소유권에 기반한 형태의 농장보다 수조지집적형 농장의 비율이 월등했으리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은닉된 민호가 노비보다 많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은닉된 민호를 바로 소작전호에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고려 후기의 사료에서는 민에 대한 탈점 못지 않게 ‘壓良爲賤’·‘認民爲隷’ 등의 강제적인 방법으로 노비를 만들거나 타인의 노비를 점탈하여 그로 인한 소송관련 사료들이 빈번하게 보인다.

 貞和宮主의 형인 桐華寺 주지는 양인을 노비로 삼아 그 자손이 천수백 호에 이르고 있고,0733)≪高麗史≫권 91, 列傳 4, 宗室 2, 江陽公 滋 附 丹陽府院大君 珛. 李英柱는 충렬왕의 폐행으로 많은 田民을 탈점하였으며 심지어 公州人 大文의 족당 100여 명을 압량하여 노비로 삼았다.0734)≪高麗史≫권 123, 列傳 36, 嬖幸 1, 李英柱. 충렬왕의 폐행이었던 全英甫도 160명의 양인을 압량하여 노비로 삼았으며,0735)≪高麗史≫권 124, 列傳 37, 嬖幸 2, 全英甫. 多仁縣 伐里驛의 역리로 충숙왕의 폐행이었던 申靑도 권력을 이용하여 田民을 탈점하고 多仁縣吏였던 黃仁贊의 노비를 빼앗았을 뿐 아니라 金化郡吏였던 文世·益守 등 50여 명을 압량하여 노비로 삼았다.0736)≪高麗史≫권 124, 列傳 37, 嬖幸 2, 申靑.

 이와는 달리 타인의 노비를 권력을 이용해 빼앗는 경우도 많았다. 李仁任·林堅味·廉興邦 등의 권신은 토지탈점은 물론이요 타인의 노비를 탈점한 것이 천백에 이르고 있다고 하며,0737)≪高麗史≫권 126, 列傳 39, 姦臣 2, 林堅味. 廣平公 譓가 郎將 王涓으로부터 빼앗은 노비를 齊國大長公主가 또 다시 빼앗았는데 그 수가 무려 300구나 되었다고 한다.0738)≪高麗史≫권 89, 列傳 2, 后妃 2, 齊國大長公主. 金倫은 辨正都監副使가 되어 巨室이 鄕民의 노비 100구를 빼앗으려고 하는 것을 심사하여 판별해 주었으며,0739)≪高麗史≫권 110, 列傳 23, 金倫. 郎將 金弘秀와 張良庇 사이에 노비를 둘러싼 소송이 벌어지고 장양비가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얻기 위하여 崔世延에게 노비를 뇌물로 바쳤다. 최세연 또한 권세를 이용하여 내시 朴樞의 노비를 탈점하였다.0740)≪高麗史≫권 122, 列傳 35, 宦者 崔世延.

 이러한 형태 외에 앞에서 열거한 수취체제의 문란으로 살길이 막막한 농민들은 스스로 권세가에 투탁함으로써 농민층 몰락을 가속화하였다. 즉 부역의 괴로움을 이기지 못한 대부분의 농민이 몰락하여 부유한 집이나 권세있는 집에 투탁하거나 工商이나 승려가 되고 公私寺院의 노비가 되었다고 하고 있다.0741)鄭道傳,≪朝鮮經國典≫上, 治典 版籍.

 이와 같이 주로 권귀들에 의한 ‘압량위천’이나 타인의 노비를 탈점하는 현상, 또는 농민의 노비로의 자발적인 투탁 등이 이 시기에 집중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은 분명 농장의 발달이라는 현상과 맞물려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많은 인구의 노비화를 요구하는 사회적 필요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창출된 노비인구는 대체로 권귀나 부호들에 의해 경영되는 농장의 경작노동력으로 충당되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권귀들이 많은 노비를 소유하고 있음은 여러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다.

 고려의 종친·거실이 노비를 많이 소유했는데 많을 경우는 천여 구에 이르렀다고 하며,0742)≪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8월 기사. 고려말의 최고권력자의 한사람이었던 이인임도 전국에 전원과 노비가 널려 있었으며,0743)≪高麗史≫권 126, 列傳 39, 姦臣 2, 李仁任. 최씨정권의 마지막 권력자였던 최의와 만종의 노비와 전장이 경상·전라도에 두루 퍼져 있었다.0744)≪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附 竩.

 그런데 권귀들은 물론이요 그렇지 않은 향리나 향민으로 표현된 존재들도 상당수의 노비를 소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多仁縣吏 黃仁贊이 17구의 노비를 탈점당하고0745)≪高麗史≫권 124, 列傳 37, 嬖幸 2, 申靑. 향민이 소유한 노비 100구가 거실의 탈점대상이 되고 있는데0746)≪高麗史≫권 110, 列傳 23, 金倫. 아마도 이들은 지방의 부호였을 것이라고 생각되며 그들이 소유한 노비도 당연히 그들 소유의 토지경작에 동원된 노동력이었을 것이다.

 고려 후기 지배계급이 토지경영의 상당부분을 노비노동력에 의존하고 있음은 李穡의 경우에 잘 나타난다.0747)이 부분에 대해서는 洪承基,<奴婢의 社會經濟的 역할과 지위의 변화>(≪高麗 貴族社會와 奴婢≫, 一潮閣, 1983) 참조. 이색의 시문집인≪牧隱詩藁≫에는 그의 전장과 노비 등에 대해 많은 자료를 전하고 있다. 거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색이 소유한 토지가 沔州·伊川·廣州村·德水縣·長湍·柳浦·赤提村·韓山 등에 분산되어 있었으며 개경에는 과수원으로 西隣園이 있었고, 驪興에는 사급전이 있었다는 사실이다.0748)洪承基, 위의 책, 202∼218쪽 참조. 그런데 그의 소유지에는 면주의 老奴·蒼頭, 유포의 莊頭 朴莊, 적제촌의 農奴, 광주촌의 蒼頭·赤脚·老奴 등의 노비들이 거주하면서 토지를 경작하여 그 수확물을 주인인 이색에게 갖다 바치고 있다. 그리고 과수원인 것으로 보이는 서린원에도 노비들이 거주하면서 과수와 채소를 재배하여 주가에 공급하고 있었다. 반면 사전이 있었던 여흥에는 이색이 자신의 노비를 보내어 직접 답험하고 경작농민으로부터 수조하고 있었다.0749)李 穡,≪牧隱詩藁≫권 21, 驪興田·권 12, 得料色僉錄公緘撥賜土田·將遣家奴踏驗新田·권 27, 賜田收租人將行坐吟一首·권 28, 賜田勸耕有感. 그러므로 이색은 사급전을 제외한 나머지 소유토지에서의 경영은 주로 노비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영은 농장거주 외거노비에 일임하고 이색은 수확물의 일부를 규정된 액수만큼 수취하는 방식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0750)洪承基, 앞의 책, 265쪽에서는 경작노비로부터 1/2의 생산물지대를 수취하였을 것이라고 보았으나 직접적인 경영형태를 반영한 자료가 별로 보이지 않는 현재로서는 추측에 불과한 듯하다.

 고려 후기의 농장의 경영형태를 직접적으로 전해주는 자료는 매우 드물다. 그 중에서 安牧의 파주농장 사료는 사족층이 개간을 통한 농장개발과 100여 호나 되는 노비를 통한 경영형태를 유추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이다. 특히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토지분재기로 보이는<太祖賜給芳雨土地文書>는 드물게 동북지방의 대토지경영형태를 유추할 수 있는 자료이다.0751)李榮薰,<太祖賜給芳雨土地文書考>(≪古文書硏究≫1, 韓國古文書學會, 1991). 이 문서는 1392년 8월에 태조가 장자인 鎭安君 芳雨에게 자신의 출신지였던 朔方道의 咸州·高州에 소재한 토지를 許與할 때 작성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이 지역의 토지는 奴屬에 의해서 作介경작이 이루어지고 耕作과 陳損에 따라 삭방도의 관례대로 稅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고주의 ‘田七日耕 畓七石落只’, 함주의 ‘田一朔二十五日耕 畓二十石落只’ 라는 광대한 규모의 토지의 사방사표가 주로 산천을 경계로 하고 있는데, 四標의 이같은 형태는 경계내에 다른 사람의 토지가 혼재하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으로0752)旗田巍,<新羅·高麗の田券>(≪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法政大學出版局, 1972), 196∼200쪽. 여말선초의 양계지역 대토지소유의 존재형태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작개’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있으나,0753)作介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가 있다.
李榮薰, 앞의 글(1991).
김건태,<16世紀 在地士族의 農莊經營에 대하여>(≪成大史林≫7, 1992).
―――,<16세기 양반가의 ‘작개제’>(≪역사와 현실≫9, 1993).
安承俊,<1554년 在京士族의 農業經營文書>(≪季刊 書誌學報≫8, 1992).
고문서자료를 이용한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작개’라는 말은 노비보유자층이 노비에게 전답을 분급하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책임하에 경작케 하는 영농방법을 지칭하는 용어이고, ‘作介制’는 노비보유자가 노비에게 作介地와 私耕地를 짝지어 나누어 주고 노비는 이것을 가족노동력에 의거하여 경작하는 농장 경영방식이었으며, 노비보유자는 작개지 수확물의 반이 넘는 양에서 전량까지를 임의적으로 수취하고 노비들은 사경지의 수확물을 차지하였다고 한다.0754)김건태, 위의 글(1993) 참조.

 물론 작개제는 시대에 따라 약간씩 모습을 달리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고려말의 대토지경영을 살피는 데 많은 시사를 준다. 아마도 고려 후기의 대토지경영에서도 위와 같은 형태의 노비노동을 이용한 경영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지 않나 한다. 즉 이색이나 이성계의 경우처럼 부재지주의 토지경영은 주로 자신들의 노비에게 경영을 일임하고 생산물을 수취하는 형태를 취하였으며 농장에는 특히 이색의 柳浦농장의 莊頭 朴莊에서 볼 수 있듯이 경영을 책임진 장두가 존재하여 주인을 대신하여 관리를 맡았던 것으로 생각된다.0755)이외에도 太祖 이성계의 神懿王后나 康妃의 田莊에도 幹事奴僕이 상주하여 관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부재지주의 대부분이 이러한 형태로 경영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太祖實錄≫권 1, 總書 신우 14년).

 반면 지주가 직영할 경우에도 주로 노비노동력에 의거하여 경영을 했을 것이다. 李承休의 경우 三陟의 頭陀山 龜洞에 외가로부터 상속받은 가전이 있었는데 난리를 피해 이곳에 내려와 ‘躬耕奉母’했다고 한다.0756)李承休,≪動安居士集≫行錄 1, 病課詩 幷序. 그런데 그의 노비 가운데는 죽거나 병든 자도 있어 이승휴가 직접 간호를 하고 있기도 하였다. 가산을 잃고 삼척으로 내려왔다고는 하지만 꽤 여러 명의 노비와 함께 거주한 것으로 보아 몸소 농사를 지었다고는 하지만 그가 직접 경작하였다기보다는 농사에 대한 감독과 지휘는 그가 하고, 경작은 거느리고 있던 솔거노비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와 같이 재지지주로서 직영을 할 경우에도 주로 노비노동에 의존했다고 보인다. 이 때의 노비는 소경영을 하던 작개제하의 노비와는 달리 노동도구로서 경영의 주체가 아닌 객체에 불과한 존재였다. 그리고 경영의 보조로써 많은 일손을 필요로 하였던 제초나 수확기에는 傭作人을 동원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고려 후기에 들어와서 나타나는 노비인구의 증가는 고려 전기의 사적 대토지소유의 형태가 주로 수조권적 지배에 의존하고 있음에 비해, 후기에는 소유권적 지배로 이행되어 가는 시대적 배경에서 나타난 것이다. 고려 후기의 노비는 전기 이래 원래의 노비신분이 세습된 자들도 있지만 이 시기의 갑작스런 증가분은 대부분이 몰락농민층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노비인구의 증가는 당시 소농민경영의 불안정성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당시 노비의 존재형태는 물론 불안정성이 내포되어 있기는 하나 戶를 구성하면서 스스로 노동력을 재생산할 수 있었음은 물론이요, 생산수단인 토지와 노동도구와 결합되어 있었으며 주가로부터 독립하여 있던 외거노비의 경우에는, 平亮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0757)≪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18년 5월. 독립경영을 통해 부를 축적할 수도 있을 정도로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말 노비의 존재형태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서 ‘국보 131호’에 실린 고려말 호적이 있다.0758)이 문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연구가 있다.
崔弘基,≪韓國戶籍制度史硏究≫(서울大 出版部, 1973).
崔在錫,<高麗後期 家族의 類型과 構成>(≪韓國學報≫3, 1976).
許興植,<國寶戶籍으로 본 高麗末의 社會構造>(≪韓國史硏究≫16, 1977).
金世潤,<高麗後期의 外居奴婢>(≪韓國學報≫18, 1980).
洪承基, 앞의 책.
이 문서에는 제1폭의 공양왕 2년(1390) 和寧府 동면 덕흥부 노비호적과 제3폭의 공양왕 3년 개성부 노비호적이 들어있다.0759)許興植, 위의 글에서는 1폭을 제외한 호적을 개성부의 호적일 것으로 추측하였다. 그런데 화령부의 노비들은 가족구성이 대체로 견실함에 비해 개성부의 노비는 대단히 불안정하여 양자간에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0760)洪承基, 앞의 책, 225∼251쪽. 이것은 개성부의 노비들이 주가와 근접하여 있었기 때문에 주가의 자의에 의해 破家될 위험성이 많았음에 비해 주가와 떨어져 있었던 화령부의 노비들은 상대적으로 독립성을 영위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화령부의 노비야말로 대체로 부재지주의 농장경영의 노동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로써 이 시기 대토지경영은 동원된 노비의 존재형태에 있어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많은 경우 조선 전기의 작개제에서 볼 수 있듯이 기본적으로 가족노동에 의거한 소농민경영형태로 경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은 노비가 호를 구성하지도 못하고 생산수단인 토지와 노동도구와도 분리되어 다만 하나의 노동도구로서만 존재했을 시기와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0761)高慶錫,<三國 및 統一新羅期의 奴婢에 대한 고찰>(≪韓國史論≫28, 서울大, 1992).
통일신라기까지의 노비도 그 자체가 호를 구성하고 소경영을 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으며 여전히 主家의 보조노동력으로 노동도구로써만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시기에도 양인소작인을 통한 병작반수제의 농장경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① 토지제도가 무너지면서 豪强者가 남의 토지를 겸병하여 부자는 밭두둑이 잇닿을 만큼 토지가 많아지고 가난한 사람은 송곳 꽂을 땅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부자의 토지를 借耕하여 일년내내 부지런히 고생하여도 식량은 오히려 부족하였고 부자는 편안히 앉아서 손수 농사를 짓지 않고 傭田人을 부려도 그 소출의 태반을 먹었다. … 그러나 힘이 약한 사람은 또 세력이 강하고 힘이 센 사람을 따라가서 그의 토지를 빌어 경작하여 그 소출을 반으로 나누었으니 이것은 경작하는 사람은 하나인데 먹는 사람은 둘이 되는 셈이다(鄭道傳,≪朝鮮經國典≫上, 治典 經理).

② 富强人은 토지를 많이 집적하여 이미 一家의 경작지를 충족하고 또 貧民에게 竝耕시켜 이익을 취하니 不均之患이 있다. 홀아비·과부·고아·자손이 없는 노인 등 스스로 경작할 수 없는 사람을 제외하고 富强者가 竝耕하고 있는 田畓은 所耕窮民에게 지급하여 생활할 수 있게 하라(≪太宗實錄≫권 29, 태종 15년 6월 경인).

 위의 사료는 고려말 力多者와 勢强者는 많은 토지를 개간하거나 점탈하고 빈약농민들은 그 토지를 차경하여 소출을 분반하는 병작제가 하나의 폐단으로 지적되고 있었음을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조선초에도 병작제는 鰥寡孤獨으로 스스로 경작하기 어려운 자 외에는 금지대상이 되고 있으며, 병작은 대체로 토지가 많은 富强人들이 자경지를 우선 확보하고 난 후에 그 나머지를 병작지로 대여하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것으로 당시의 대토지소유자들의 농업경영의 중심은 자경부분에 있었으며 병작은 자경의 한계규모를 초과하는 범위내에서 발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0762)李榮薰,<朝鮮封建論의 批判的 檢討>(≪한국자본주의 성격논쟁≫, 大旺社, 1988), 134쪽.

 세조대에도 선진농업지대였던 경기도와 삼남지방에서도 호협지가들이 양전을 광점하여 교대로 진황시키고 어쩌다 병작을 시키거나,0763)≪世祖實錄≫권 9, 세조 3년 10월 임자. 심지어 토지를 광점하고 휴한시킬지언정 병작하지 않으려는 지주도 있을 정도였다.0764)≪世祖實錄≫권 9, 세조 4년 정월 병자. 그러므로 고려 후기 이후 조선초에도 병작제가 존재하기는 하나 아직 보편적인 관행으로까지 성장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0765)金泰永,<朝鮮前期 小農民經營의 추이>(≪朝鮮前期土地制度史硏究≫, 知識産業社, 1983) 참조. 병작제가 보편적인 생산관계로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소농민경영의 안정이 확보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시기의 소농민경영은 아직까지 자립재생산이 확립된 단계는 아니었다.0766)고려 후기 소농민경영의 성격에 대해서는 魏恩淑, 앞의 글(1993) 참조.

 고려 후기의 기본 농업노동 단위는 ‘2牛 3人’이었고, 5인의 단혼소가족이 자립재생산이 가능한 토지규모는 1결이었다. 그러므로 단혼소가족의 소농민이 비록 1결의 토지와 3인의 가족노동력을 보유하였다고 하더라도 農牛의 경우 부유한 자가 겨우 1, 2마리를 소유하고, 가난한 농민은 대부분 뇌경에 의존하거나 빌려서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어서0767)≪高麗史≫권 27, 世家 27, 원종 12년 3월. 2마리의 소를 갖춘다는 것은 사실상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빈농의 경우 토지를 차경하여 병작한다 하더라도 농업경영은 주가에 거의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빈번한 자연재해와 수탈, 여기에다 국가의 구휼정책의 붕괴는0768)朴鍾進, 앞의 글(1986).
―――,<高麗末의 濟用財와 그 性格>(≪蔚山史學≫2, 1988).
종자곡마저도 주가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그것은 대개의 빈민들이 한 해에 몇 畝를 경작하여 그 수확의 절반을 조세로 지출하기 때문에 해를 넘기지 못하고 식량이 떨어져 다음해 농사철이 되면 富戶의 곡식을 꾸어다 종자와 식량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나,0769)≪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借貸 공민왕 11년 密直提學 白文寶 上箚子. 金俊농장에서와 같이 농장관리인들이 농장민을 대상으로 稻種 1斗를 주고 추수기에 米 1碩을 거두기를 예사로 하였다고 하는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0770)≪高麗史≫권 130, 列傳 43, 叛逆 4, 金俊. 그러므로 비록 병작을 한다하더라도 농업경영은 주가의 경영에의 의존과 간여가 심했을 것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16세기의 사료이지만 생산수단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영세빈농에게 병작을 주는 것은 토지를 버리는 것과 같다는 지주층의 인식은0771)李 滉,≪陶山全書≫권 4, 內篇 答寯. 지주층으로 하여금 직영을 고집하게 되었던 것이고 자연히 이 시기의 병작제의 확대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병작제가 일반화되는 조선 후기와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이라고 해야겠다. 그렇지만 고려 후기의 농업기술과 생산력수준은 소농민경영의 자립재생산의 전단계에는 도달했던 것 같고 부분적으로 병작제가 출현할 수 있는 역사적 조건이 마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고려 후기 농장의 경영형태는 수조지집적형의 농장일 경우는 주로 경작농민으로부터 조·용·조 3세를 수취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반면에 개간·매득 등에 의해 성립된 사적 소유지형 농장은 주로 노비노동력에 의한 경영이 일반적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 초기에도 이어져 최소한 16세기까지 양반사족층의 농장경영은 주로 노비에 의존하고 있었으며0772)金鴻植,≪朝鮮時代 封建社會의 基本法則≫(博英社, 1981).
李鎬澈,≪朝鮮前期農業經濟史≫(한길사, 1986).
李樹健, 앞의 글(1987).
李榮薰,<古文書를 통해 본 朝鮮時代 奴婢의 經濟的 性格>(≪韓國史學≫9, 1987).
―――,<朝鮮社會 率居·外居奴婢區分再考>(≪韓國近代經濟史硏究의 成果≫, 螢雪出版社, 1989).
김건태, 앞의 글(1991).
수조권분급제의 소멸과 사적 소유권의 발달이라는 역사적 추세와 나란히하여 노동력으로서의 노비인구는 16세기까지 계속 증가추세에 있어 전체 인구에 대한 비율이 40∼50%에 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0773)≪成宗實錄≫권 91, 성종 9년 4월 기해.
成 俔,≪慵齋叢話≫권 9.
이외에 광해군 원년(1609)의 울산부 호적대장에서 인구통계가 가능한 6개면의 것을 정리해 보면 양인 이상이 51.4%, 천인이 48.6%인데 그 가운데 公賤이 12.9%, 私賤이 35.7%였다고 한다(李樹健, 위의 글, 72쪽).

 이 시기(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에 있어서의 농장에서의 경영형태가 노비신분의 노동력에 의거하고 있는 현상은 동시대의 중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 같다. 이러한 노비의 증가현상은 원간섭기에 정치적 문제가 되어 원조정에서 노비혁파문제를 제기할 정도였는데 고려측에서는 고려 태조의 유훈임을 내세워 국왕은 물론이요, 신하들도 본국의 ‘舊俗’임을 내세워 전 지배계급이 일치하여 노비혁파를 반대하였다.0774)≪高麗史≫권 108, 列傳 21, 金之淑 및 권 110, 列傳 23, 崔有渰. 반대이유는 원의 정치적 간섭에 대한 제동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노비혁파가 당시 지배계급의 경제적 토대에 상당한 타격을 줄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0775)고려 노비제의 이러한 특수성은≪高麗史≫의 편찬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미 밝혀진 바 있지만≪고려사≫는≪元史≫의 편찬체제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형법지의 노비항은≪원사≫의 형법지에는 없는 것으로 조선조에서≪고려사≫를 편찬할 때 끼워 넣은 것이다. 이는 중국에서는 그다지 필요치 않았던 노비제에 대한 고려의 강고한 필요성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鄭容淑,<≪高麗史≫刑法志 奴婢項의 檢討>,≪韓國史硏究≫46, 1984 참조).

 다시 말해 고려 후기 사적 대토지소유인 농장의 성격은 국가로부터 수조권을 위임받는 형식, 즉 국가권력에 의해 수조지농민에 대한 경제외적 강제를 통한 잉여생산물인 지대(조·용·조)를 수탈하는 방식에서 노비신분이라는 경작농민에 대한 직접적인 신분적 예속과 강제를 통해 잉여생산물을 수탈하는 방식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두 유형의 농장 가운데 수조지집적형 농장은 고려말 사전혁파를 통해 소멸되고 사적 소유지형 농장은 조선 전기의 농장으로 계승되었다.

<魏恩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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