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1. 농장의 성립과 그 구조
  • 4) 사전·농장의 혁파

4) 사전·농장의 혁파

 전시과체제가 붕괴되어 사전이 조업전화하고 탈점·겸병되어 농장이 발달하면서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야기하자 고려정부는 국가의 유지와 존속을 위해 이를 시정하기 위한 대책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농장의 발달은 토지집중과 인구집중을 동반하였으므로, 그에 대한 대책도 토지와 인구의 두 측면에서 마련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田民辨整事業이다. 고려 후기에 전민변정을 위한 기구가 설치된 것만해도 사료상 확인되는 것은 16차례나 된다.0814)고려 후기 전민변정도감의 설치현황은 姜順吉,<忠肅王代의 察理辨違都監에 대하여>(≪湖南文化硏究≫15, 全南大, 1985), 18쪽<표 1>참조. 원종대부터 공양왕대에 이르기까지 충정왕대를 제외하고 고려 후기의 모든 왕대에 설치되었다는 것은 당시에 전민변정이 얼마나 절실한 사회문제였는지를 반증해 준다.

 전민변정을 위한 기구인 都監을 설치하여 처음으로 전민변정사업이 시행된 것은 무신집정기로서 金俊의 몰락 직후였다. 원종 10년(1269) 2월에 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고0815)≪高麗史節要≫권 18, 원종 10년 2월. 궁원·사원·양반·군인·한인의 세전토지로서 권신에게 빼앗겼던 것을 추변하여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병량전에 소속시켰다. 이 시기의 ‘田民辨正’은 民戶의 計點과 貢賦의 更定으로, 원종 12년의 녹과전 설치와 더불어 강화도에서의 출륙준비 작업의 일환이었으나,0816)閔賢九,<高麗의 祿科田>(≪歷史學報≫53·54, 1972). 주인이 아닌 자에게 지급되는 등 원성이 자자하였다고 하는 것을 보면0817)≪高麗史≫권 27, 世家 27, 원종 14년 12월 경신.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지배세력의 변천에 따라 새로운 권력자로 등장한 제왕·총신들이 무신집권자들이 탈점하였던 토지를 그들이 제거된 후 다투어 나누어 가지는 등 다시 토지를 탈점하였고, 또 오랜 전쟁으로 황폐된 토지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0818)朴鍾進,<忠宣王代의 財政改革策과 그 性格>(≪韓國史論≫9, 서울大, 1983), 59쪽.

 충렬왕 때에도 14년(1288)과 27년 두 차례에 걸쳐 전민변정도감이 설치되었으나0819)≪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諸司都監各色 田民辨整都監. 이 시기에는 한층 더 농장이 발달하면서 전민변정사업은 별다른 성과를 거둔 것 같지는 않다. 충렬왕은 왕권강화를 자신의 측근세력의 육성을 통해 실현하고 있었기 때문에0820)이에 대해서는 金光哲,<高麗 忠烈王代 政治勢力의 動向-忠烈王初期 政治勢力의 變化를 中心으로->(≪論文集≫7­1, 昌原大, 1985) 및 李益柱,<高麗 忠烈王代의 政治狀況과 政治勢力의 性格>(≪韓國史論≫18, 서울大, 1988) 참조. 이 시기 토지탈점의 장본인이었던 측근세력인 怯怜口·內僚들의 土地廣占에 대한 대간의 간쟁을 묵살하거나,0821)≪高麗史≫권 28, 世家 28, 충렬왕 3년 2월 기사. 측근세력에게 경제적 기반으로 지급한 경기의 사급전을 녹과전에 충당하는 것을 반대하는 등0822)≪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충렬왕 5년 2월. 국왕 자신이 토지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국왕 자신이 왕실재정 확보를 위해 內房庫라는 御庫를 두고 토지탈점과 과렴을 했던0823)≪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科斂 충렬왕 15년 3월. 당사자였기 때문이었다.

 충렬왕대의 대표적인 개혁안이라 부를 수 있는 洪子藩의 ‘便民十八事’도 그러한 것을 반영하여 일반민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고 생활의 안정을 꾀하기 위한 방안들이 제시되었으나 당시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하고 대단히 미온적인 것을 볼 수 있다.0824)盧鏞弼,<洪子藩의「便民十八事」에 대한 硏究>(≪歷史學報≫102, 1984).
金光哲,<洪子藩硏究>(≪慶南史學≫1, 1984).

 그런데 충선왕대에 들어와서는 그런대로 주목할 만한 전민변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충선왕은 즉위교서의 발표를 통해 정치·경제·사회·종교 등의 時弊에 대한 개혁을 시도하였다. 즉위교서에서는 폐단을 일으키는 인물들을 ‘世家’·‘勢家’·‘自利爲先者’·‘豪猾之徒’·‘有勢力’·‘權勢’·‘勢要之家’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그들은 원의 세력을 배경으로 受賜와 탈점을 통해 功臣田, 경기 8현전, 선왕이 제정한 內外田丁 등을 차지하였으며 그들 농장의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양인을 천인으로 만들거나, 부역을 꺼리는 유민을 초집하거나 심지어 공노비까지 탈점하였다. 또한 그들 농장은 官租를 물지않아 국가재정을 약화시키고 있는 존재로 파악되고 있다. 물론 사패를 빙자하여 농장을 확대하고 있던 것은 개인만이 아니라 寺院·齋醮·諸處 등도 지목되고는 있지만 전국적으로 공·사전을 막론하고 크게 폐단을 일으킨 것은 바로 그들이었다.

 충선왕은 권세가들에 의해 장악되어 인사행정의 문란을 가져왔던 政房을 폐지하고 한림원과 승지방을 계승한 詞林院을 설치하여 전주권의 장악을 통한 왕권의 강화를 시도하였다. 또한 사림원에는 개혁의지가 있었던 崔旵·朴全之·吳漢卿·李瑱·李承休·權永 등의 신진관료를 등용하여 개혁을 추진하였다.0825)李起男,<충선왕의 改革과 詞林院의 設置>(≪歷史學報≫52, 1971). 충선왕은 8개월 만에 퇴위하였기 때문에 개혁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으나, 복위 후나 충숙왕에게 전위한 후에도 지속적으로 개혁을 시도하였다.

 충숙왕에게 전위한 충선왕은 충숙왕 원년(1314) 정월에 田民計定使를 불러 당시의 토지와 호구를 참조하여 공부를 다시 정하도록 하였다. 그 후 2월에 蔡洪哲을 五道巡訪計定使로, 韓仲熙를 副使로, 崔得枰을 判官으로 삼아 甲寅柱案이 만들어졌다. 갑인주안은 전민계정사가 파악한 전결과 호구를 근거로 세액을 산출하여 만든 田案이었다. 이전의 양안은 陳荒 등의 요인으로 陳·起 구분이 모호해졌을 뿐만 아니라 토지의 비옥도의 불균형이 드러나게 되고 점진적인 생산력의 발전으로 인해 실제 면적과도 차이가 있었다. 또 토지와 민에 대한 국가적 파악을 허구화시키고 있었으며 탈점·모수사패 등 갖가지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었다. 이 때의 전국적인 양전과 호구조사를 바탕으로 세액이 조정되었는데, 이는 원종 10년(1269) 호구만을 중심으로 개정된 공부의 불합리함을 극복하고자 한 것임과 동시에 은닉된 호구와 전결을 국가적 수취체제 아래 귀속시킴으로써 국가재정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0826)朴京安,<甲寅柱案考>(≪東方學志≫66, 1990) 참조.

 그런데 이 때의 ‘量田制賦’는 충숙왕 원년에 단기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충선왕 복위 후 시작되어 그의 入元기간에도 계속 추진된 것이 이 때에와서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0827)朴鍾進, 앞의 글(1983), 76쪽.
朴京安, 위의 글, 102∼115쪽.
즉 충선왕은 토지제도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해 단순히 탈점된 토지를 환수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양전을 통해 무너진 전법을 바로잡아 토지쟁송을 근절하고 부세를 공평히 하여 부세제도의 모순을 타파하고 재정을 확충하려고 하였던 것이다.0828)朴京安, 위의 글 참조.

 갑인주안의 본래 목적은 古制의 회복, 즉 전시과체제로의 복귀였으나 이미 많은 수조지들이 조업전화한 현실을 부정하여 국초 이래의 수조권 분급제를 재확립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의 토지제도와 부세체계의 문란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다. 또한 국내에 자기기반을 가지고 있지 못한 충선왕으로서는 원에서의 정치적 위치를 바탕으로 강력한 개혁정치를 할 수 있었으나 자신의 정치적 배후세력이었던 元 武宗과 仁宗의 死去로 세력을 잃게 되자 개혁정치는 중단되고 말았다. 원에 의지한 개혁이었기에 부원배의 책동에 저지되었고, 개혁추진세력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0829)朴鍾進, 앞의 글(1983), 98∼101쪽. 결국 충선왕의 田民計點을 통한 개혁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충숙왕대의 察理辨違都監은 동왕 5년에 두 차례, 동왕 8년에 한 차례 설치되었다.0830)姜順吉,<忠肅王代의 察理辨違都監에 대하여>(≪湖南文化硏究≫15, 1985). 첫번째는 동왕 5년 6월에 除弊事目所를 찰리변위도감으로 고치면서였다. 이 변위도감은 호세가가 점거하고 있던 전민을 대대적으로 색출하여 본주인에게 돌려줌으로써 많은 사람들로부터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전민변정에 불만을 가진 호세가가 당시 元都에 있던 충선왕에게 고소함으로써 이 변위도감은 혁파되고 말았다. 이전에는 개혁에 앞장섰던 충선왕은 자신의 정치적 이해에 따라 탈점자들을 옹호하였던 것이다. 그러다 바로 다음달인 동년 7월에 다시 설치되었으나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동년 11월에 혁파되고 말았다. 또 다시 설치된 것은 동왕 8년(1321) 3월이었다. 이 때에 다시 설치된 것은 충숙왕 7년(1320) 12월에 있었던 충선왕의 유배로 충숙왕이 부왕의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충숙왕은 그 동안 불만을 느껴온 충선왕의 종신들이 장악한 전주권의 문란과 동왕 5년에 실패로 끝났던 호세가가 점거한 전민의 변정에 대해서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충숙왕은 동왕 8년 정월에 입조하라는 詔書를 받고 入元하였고, 원에 도착하자 瀋王 暠의 참소로 국왕인을 빼앗기고 말았다. 따라서 찰리변위도감의 復置에 앞장섰던 충숙왕의 부재로 변위도감의 활동은 마비상태에 들어가고 곧 혁파된 것으로 보인다.

 충숙왕은 4년여에 걸친 원에서의 억류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12년에도 31개 항목에 이르는 교서를 반포하여 사회 각 분야의 폐단을 지적하고 대책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정치 및 사회기강의 확립, 토지점탈의 방지, 수취방식의 보완에 중점을 두고 있는 충숙왕 12년의 개혁안은 모순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것이 아니었고 제도의 운영과정에서 겉으로 드러난 폐단을 보완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특히 원간섭기라는 권력구조상 개혁추진세력의 미약도 개혁안이 제대로 성과를 거둘 수 없는 원인이 되고 있었다.0831)金光哲,<高麗 충숙왕 12년의 改革案과 그 性格>(≪考古歷史學志≫5·6, 東亞大博物館, 1990).

 충목왕대에는 整治都監을 설치하여 전민변정을 추진하고 있었다.0832)閔賢九,<整治都監의 設置經緯>(≪論文集≫11, 國民大, 1976).
―――,<整治都監의 성격>(≪東方學志≫23·24, 延世大, 1977).
충혜왕의 실정과 연이은 충혜왕의 拘執, 流配로 고려의 국가적 체모도 크게 손상되었을 뿐 아니라 사회경제적인 문란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그러므로 정치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충혜왕이 잡혀갈 때 田民推刷都監이 세워지고,0833)≪高麗史節要≫권 25, 충혜왕 후4년 11월. 충목왕 즉위초에도 전민변정사업이 시행되었지만0834)≪高麗史≫권 37, 世家 37, 충혜왕 즉위년 윤2월 병인.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가운데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런 과정에서 충목왕 3년(1347) 元帝의 명령에 의해서 설치된 정치도감은 토지탈점과 압량위천, 고리대 등 농장의 폐단과 노비·수조관계의 문제를 가장 큰 개선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각 도에 整治官을 파견하여 存撫按廉使를 겸하게 하고 量田을 시행하였으며 토지탈점자를 찾아서 징벌하였다. 그 과정에서 奇皇后의 일족인 奇三萬이 옥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정치관이 정동행성이문소에 투옥됨으로써 정치도감의 활동은 두달 만에 사실상 중단되었다.

 정치관들은 권문세족도 있었으나 대체로 한미한 집안출신들로 과거를 통해 관계에 진출한 신진세력이 중심이었고 유교적 소양을 바탕으로 상당한 식견과 소신을 가진 공정한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가 여러 가지 형태로 뒤의 공민왕대의 개혁정치와 연계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정치도감의 활동도 사실상 토지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원제의 명령에 의해 설치되었다는 기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던 정치도감의 개혁은 결국 원의 개입과 부원세력의 책동으로 좌절되었다.

 그 후 충정왕대를 거치면서 사정은 더욱 악화되어 통치체제는 와해되고 국가재정은 허갈된 위에 왜구의 침입이 새로운 위협으로 대두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일반 백성들의 생활은 곤란의 도를 더해 갔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원종 이후 충목왕대에 이르기까지 토지제도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꾸준한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그 때마다 근본적인 해결을 보지 못하고 실패한 것은 무엇보다 원간섭과 원간섭기라는 비정상적인 정치권력구조 속에서 대토지를 집적하고 있던 권력층의 강력한 저항이 있었고, 그것에 대항할 수 있는 개혁주도세력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원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전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공민왕대는 개혁을 통해 당면의 과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고려라는 국가체제의 유지와 국왕의 지위 확립조차도 힘든 상태였다. 공민왕은 즉위초 정치·경제·사회 다방면에 대한 개혁을 시도하였는데, 특히 경제면에서는 당시의 가장 절박한 문제였던 토지탈점과 ‘認民爲隷’ 등의 불법 부정을 해결하기 위해 공민왕 원년(1352)에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였다. 왕은 機務의 親執을 거듭 밝히고 모든 決訟의 결과를 5일마다 보고하고록 하고, 이어서 원로대신을 書筵官에 임명하여 권세가에게 빼앗긴 전택과 노비에 대한 송사를 審治하게 하였다.

 또한 전민변정도감에서는, 유력자인 印承旦이 畿縣의 공전을 탈점한 것을 가려내고 여러 해에 걸쳐 포탈한 租를 추징하기도 하였다. 노비의 경우 변정 판결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부당하게 仍執하는 사람에게는 죄를 물어 품질에 따라서는 決杖流配시키기까지 한다는 처벌규정이 마련되었다. 이러한 전민변정도감 사업은 당시의 대표적인 권문세족이자 대토지소유자였던 인승단·金永煦 등의 강한 반발을 받았고, 특히 趙日新의 난으로 부원세력이 강화되면서 일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공민왕대는 이미 원이 쇠퇴하고 있었기 때문에 곧 공민왕은 자신의 지지세력을 결집하여 부원배를 고립화시켰다. 마침내 공민왕 5년 奇氏 일족을 비롯한 부원배를 전격적으로 제거시키고, 征東行省理問所를 혁파하고, 군대를 발진시켜 압록강 서쪽과 雙城지역을 공격케 함으로써 본격적인 반원적 개혁정치의 막을 올렸다.0835)閔賢九,<高麗 공민왕의 反元的 改革政治에 대한 一考察>(≪震檀學報≫68, 1989). 이어 공민왕 5년 6월 내정개혁방안을 발표하였는데 그 중에서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그 동안 원간섭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던 여러 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개혁을 시도하고 있었다. 권세가가 겸병한 서북면 土田을 檢括하여 군수에 충당하거나, 賊臣之黨이 탈점한 山林澤梁을 환수하여 繕工寺·司宰寺의 재정으로 충당하도록 조처를 취하고 있는 점 등은 충선·충목왕의 재정확보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국가재정의 확보를 꾀한 것이다.

 그러나 공민왕 5년의 내정개혁도 공민왕을 중심으로 한 측근세력에 의해 추진되었기 때문에 측근세력이 권세가로 존재하는 한 그 내정개혁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측근세력은 공민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막대한 경제적 부를 축적하였으므로 공민왕 5년의 개혁정치는 다만 친원세력과 원의 정치적 영향력 배제로 인한 그들의 정치·경제적 기반을 국가재정으로 환수하고 일반민의 피해를 줄이는 데 그 의미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0836)洪榮義,<恭愍王 初期 改革政治와 政治勢力의 推移(上)>(≪史學硏究≫42, 1990).

 그렇지만 공민왕 6년 이후 왜구는 더욱 큰 규모로 침입해 오고, 8년에는 홍건적이 침입해 오자 사정은 달라졌다. 대륙정세의 파동에 말려든 고려는 또 다시 원의 간섭을 허용하여 그나마 한계가 있기는 하였으나 개혁을 주도하였던 세력의 입지는 좁아졌다. 대신 홍건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전쟁수행에 전력을 기울이는 과정에서 보수무장세력이 대두하였다. 홍건적을 격퇴하고 興王寺亂이 평정된 뒤 공민왕 12년에 있었던 공신들에 대한 대대적인 포상은 앞서 여러 차례 전민변정사업을 통해 토지제도의 문란을 시정하려는 노력을 거의 수포로 돌아가게 하였다. 공신들에게 사여된 26,350결의 토지와 2,635구의 노비는 그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사회경제적 기반을 더욱 굳혀 농장이 확대되는 획기적 계기가 되었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정치권력을 재확대하였다.

 그러나 공민왕 13년(1364)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원의 쇠망으로 정치적 간섭이 배제되고, 왜구의 침입도 조금씩 줄어들면서 공민왕은 새로운 정치적 변혁을 시도할 수 있었다. 공민왕 14년 5월 辛旽의 대두가 그것이었다. 공민왕은 신돈의 등용을 통해 간접적으로 왕권을 강화하여 개혁정치에 장애가 되었던 무장세력을 제거하였을 뿐 아니라, 공민왕 15년에는 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여 신돈을 판사로 삼고 토지탈점에 의한 토지제도의 문란과 유역인구의 감소에 의한 국가재정을 만회하고자 하였다. 전민변정사업의 결과 권귀들은 탈점한 전민을 本主에게 돌려주었으며 賤隷로서 양인이 된 자들은 신돈을 매우 稱賞하였다는 것을 보아 전민추정은 매우 광범위하게 이루어졌고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던 것 같다.

 하지만 이 개혁은 전국적 규모로 확대 실시되지 못하였고, 또한 공민왕 20년 신돈의 몰락으로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커다란 사회적 변화로 제기된 전민의 혼란을 근본적으로 처결하지는 못하였다. 특히 그것은 李仁任·李春富 등 추정사업의 대상자에 해당되는 인물에 의해 이 사업이 주도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배세력의 전면개편이 불가능한 토대 위에서 개혁의 성공이란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0837)閔賢九,<辛旽의 執權과 그 政治的 性格(上·下)>(≪歷史學報≫38 및 40, 1968).

 더구나 신돈제거 후 혼란한 국내 정치를 바로잡아 이완된 민심을 수습하고 통치체제를 회복하기 위하여 공민왕 20년 12월에 다시 개혁교서를 반포하였다. 그러나 제시된 민심수습책은 農桑장려, 부세면제, 고리대 근절, 양천의 구분에 의한 호구조사와 상평창제의 복구와 같은 각종 진휼책과 의료시책 등으로 토지관련 조항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대부분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대책만 나열되어 있어 이전의 전민변정사업에 비해서는 훨씬 약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신돈의 개혁을 부정하는 세력에 의해 추진된 것으로 공민왕대에 있었던 개혁 중에서 가장 비개혁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0838)白仁鎬,<공민왕 20년의 改革과 그 性格>(≪考古歷史學志≫7, 1991).
김기덕,<14세기 후반 개혁정치의 내용과 그 성격-공민왕대 개혁안의 분석을 중심으로->(≪14세기 고려의 정치와 사회≫, 민음사, 1994).

 우왕대에도 두 차례에 걸친 전민변정사업이 행해졌다. 우왕 7년(1381) 4월에 전민변위도감이 설치되고,0839)≪高麗史節要≫권 31, 신우 7년 4월. 14년 정월에 전민변정도감을 두었다.0840)≪高麗史節要≫권 33, 신우 14년 정월. 어린 우왕을 옹립시키면서 권력을 장악한 이인임·염흥방·임견미 등의 토지탈점은 농장의 발달을 촉진시켜 토지제도의 문란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게다가 우왕대 왜구의 침입은 가장 극성하였으므로 이로 인하여 사회경제적 모순은 가중되었다. 전민변정도감의 설치는 이러한 상황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우왕 7년의 경우에는 이렇다할 실적이 없었던 것 같고, 우왕 14년의 것은 최영 등에 의해 이인임 등을 전격 숙청하면서 단행된 것으로 이인임·임견미·염흥방 등이 탈점한 토지와 노비를 환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불법적으로 탈점된 토지와 노비가 본주인에게 돌아가고 그들의 재산이 몰수되었지만 토지제도의 문란은 이들의 토지를 환수하는 것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지배계급의 전면적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이와 같은 전민변정사업의 한계는 명백한 것이었다.

 그리고 전민변정사업도 당시의 사회경제적 혼란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대책이 되지는 못하고 소극적인 개선책에 불과했다. 당시의 토지제도 문란, 즉 사전문제는 고려의 수조권분급제가 가진 모순을 나타낸 것으로 수조권이 직역을 매개로 세습되어 조업전화되고 또한 정치적 혼란기를 틈타 비정상적으로 비대화해지면서 민전과 경작자 농민을 잠식하여 일어난 것이었다.0841)李景植,<高麗末期의 私田問題>(≪朝鮮前期土地制度硏究≫, 一潮閣, 1986). 그런데 전민변정사업은 다만 수조지 점유분쟁을 법률적으로 처리하는 데 불과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자체에 이미 한계를 내포하고 있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전민변정사업이 흐지부지하게 끝나자 고려정부의 전제문란에 대한 수습능력은 완전히 한계를 드러내었다. 여기에 외적의 침입, 원명교체에 따른 불안한 북방정세는 군량의 확보를 심각한 문제로 대두시켰다. 정부는 諸私田에서 公收를 하거나 수시로 과렴을 통해 임시충당을 하기도 하였고, 지배층 내부에서는 사급전·구분전·사원전 등의 사전을 국가로 귀속시켜 그 전조를 군수에 충당하자거나, 갑인양전 이후 새로 加耕된 公私의 田地를 전쟁이 종식될 때까지 모두 군수로 하자는 방안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여러 시책의 실시나 논의는 지배층 모두가 전쟁수행이라는 비상시기에 처하여 공통된 위기감에서 나온 것이다.

 결국 우왕 14년(1388) 5월에 이성계가 威化島回軍을 단행하여 신진사대부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전제문제에 마침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위화도회군과 동시에 우왕이 축출되고 다음달인 6월에 어린 창왕이 뒤를 이으면서 본격적인 개혁작업이 시작되었다.

 창왕은 敎旨를 통해 선대에 사원에 시납한 왕실 직속의 장·처전을 회수하여 다시 料物庫에 소속시킬 것과, 양계지역의 토지 가운데서 사전으로 濫執되어 있는 것도 추쇄한다는 조처와 더불어 私田捄弊의 방안을 도평의사사와 사헌부·판도사가 의논하여 보고할 것을 명하였다.0842)≪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신우 14년 6월. 이에 응하여 같은 해 7월에 개혁파의 한사람인 大司憲 趙浚의 제1차 상서가 올려졌다. 그의 개혁안은 사전개혁 논의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그의 뒤를 이어서 李行·黃順常·趙仁沃 등이 계속 상소하여 개혁을 강력하게 촉구하고 나섰다.

 조준의 상서를 계기로 사전혁파를 둘러싼 논쟁이 조정에서 본격화되었는데 그 입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0843)李景植,<高麗末의 私田捄弊策과 科田法>(≪東方學志≫42, 1984 ; 앞의 책) 참조. 하나는 현존하는 사전은 그대로 두고 단지 거기서 야기되는 폐단만 제거하자는 안이었고, 다른 하나는 현재의 사전을 일거에 폐지하여 버리자는 안이었다. 전자가 사전개선론이라면 후자는 사전개혁론인 셈이다. 고려말 정계는 이 둘의 입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양자는 사전문제의 소재와 원인을 파악하는 데 있어 근본적인 시각에 차이가 있었다. 개선론은 사전은 祖宗의 田法으로 하등 불법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의 所耕田에 여러 명의 점유주가 있다는 것을 문제로 보고 있었다. 현재의 점유사전이 조종의 법이라함은 전시과의 제분급전이 사실상 수전자의 가계를 위해 전수되는 토지라는 곧 世祿으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전문제에 대한 대책으로 文契를 검토하여 전주를 가려내어 사전점유의 귀속관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즉 ‘1田 1主의 원칙’을 확립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고려정부가 그 동안 수시로 시도해온 전민변정사업과 궤도를 함께하는 방책이다. 權近·李穡 등의 견해가 그러하였다. 개선론측의 방안에 입각하여 사전문제가 처리된다면 수조지의 점유나 집적에 기초를 둔 대토지점유자들의 경제적 처지에는 큰 변동이 없게 된다. 이런 점에서 수조지의 확대에 의거하여 대토지를 점유하고 경영하면서 이 위에서 번성하고 있는 세력들의 이해관계를 옹호하고 반영하는 안이었다.

 반면 개혁론측은 사전폐해의 근원을 국가에 의한 사전의 授收가 중지된 채 사적으로 세전되어 가산화한, 곧 조업전으로 변한 사실에 두고 있다. 조종의 전법을 개선론측과는 달리 국가권력에 의한 토지의 수수로 설명하고 있다. 즉 전시과의 제분급전이 관에 의해 반급되고 관에 의해 회수되는 國田으로서의 측면이 내세워지고 있었다. 그들은 겸병한 사전을 혁파하여 수조지를 재분배할 것과, 특히 직역담당자를 대상으로 토지를 지급하는 원칙을 확립하고 현재 국역담당자가 아닌 자가 토지를 받는 상태를 개혁하되 토지의 점유는 본인 1대에 한하고 사사로이 수수하는 행위를 금지하자는 것이었다. 이 방안에 의하면 소위 권문세족으로 사전의 겸병자는 물론이고 정상적으로 사전을 소지하고 있는 이들도 결정적 타격을 안겨주는 결과를 가져온다. 현 사전의 부정은 수조지의 확대와 집적에 근거하여 운영되는 농장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소유권에 의한 토지소유나 그 집적에 기초하여 경영되는 농장만이 존속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私田未受得者들이나 현 수조권자들에 의해 침해를 받고 있었을 지주층들의 이해득실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양자의 공통된 입장은 직접생산자층인 농민에 대한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는 것이다.0844)과전법이 농민의 경제생활 안정이라는 측면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대책이었음은 姜晋哲,<高麗末期의 私田改革과 그 成果>(≪震檀學報≫66, 1988)에서도 언급되었다. 수조권하의 전객농민에 대한 수취나 지배에 있어서 양측 모두 별다른 구폐방안이 없었다. 개선론측은 물론 개혁론측도 지배층이나 그 통치기구에 급전하는 토지분급제를 배격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고, 이 제도 아래에서 농민층을 지배하고 수취하는 전주전객제를 부정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른 점은 토지분급제의 경리내용에 차이가 있었다.

 개혁론측의 구상은 될 수 있으면 사전을 축소하고 경기에 집중시켜 공전을 확대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전주전객제에 의한 국가자체의 농민지배의 폭을 확장시켜야 한다는 의도였다. 개선론측은 전주전객제의 모순이 심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수조권자인 전주로서의 위치를 그대로 유지하여 나가려는 데서 수조율의 준수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주의 양식과 이에 의한 전객보호를 통해 전주와 전객간의 조화, 질서를 회복하고 여기서 사회안정과 나아가서는 고려국가의 회생을 구상하였다.

 개혁론이 실현될 경우 기왕의 사전수조지는 대폭 축소되고 현재의 점유자들 중 경제적으로 탈락되는 층이 다수 생겨나면서 토지와 농민의 상당수가 국가의 직접적인 지배영역내에 일단 흡수되게 된다. 이러한 변동과 함께 새로 수조지를 절급받은 수전자들이나 외방의 양반·토호 지주들은 강화된 국가권력의 직접적인 실체로서 자신들의 신분적·경제적 지배력을 구축하고 구사하게 된다. 그 방향은 수조권의 양적·질적 제약이 강화되어 가는 추세 속에서 소유권의 상대적 안정이 보장되고 농업생산력의 발달도 촉진됨에 병행하여 이에 입각한 토지와 농민지배의 소유관계를 추진해 나가는 길이었다. 이러한 단계에 본격적으로 접어들게 되면 국가의 전주전객제에 의거한 토지와 농민에 대한 지배수취관계는 불원간 이완되고 약화될 수밖에 없게 된다.

 한편 농민들로서는 공전전객의 경우 전주가 국가인 까닭에 전조부담 1/10세율을 보장받을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증대되고, 사전전객의 경우도 전주권 자체에 대한 제약이 강화되므로 종전보다 부담이 감소되는 경향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는 일층 강력한 권력체, 곧 국가를 전주로 삼게된다는 대가를 지불하면서 얻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나마 국가의 이 정도의 보장도 미구에 지주제의 확대로 의미를 잃게 되고, 전객농민들은 갈수록 몰락하여 전호농민으로 변전되어갈 운명에 처하였다. 소유권의 성장과 안정이 가져올 필연적인 전망이었다.

 개선론대로 처리된다면 사전 전주에 의한 전객지배의 광범위한 존속으로 소유권의 성장이 저지되고 이로 인하여 농민처지의 향상이나 지주층의 활동에는 한계가 있게 된다. 그러나 전객농민의 자기위치의 신장은 궁극적으로 양반국가의 법제적 보호에 의해서가 아니라 직접수취자인 전주측과의 부단한 항쟁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지배력이 약화된 현재의 고려국가보다 직접적인 지배력은 강하여도 개별화되어 있는 사전주와의 관계에 서있는 편이 유리할 수도 있었다. 실제 농민들은 생산력증대와 전주에 대한 항쟁을 장기간 지속해 옴으로써 전주전객제를 파탄시켜 오고 있었다.

 특히 개혁론측의 주장에는 농민층의 이러한 동태가 유력한 뒷받침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개혁론측의 방안은 이들 농민층이 제항쟁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성장방향을 그대로 허용하지 않았다. 소유권에 대한 조정이 없는 까닭이다. 개혁론은 지주층의 안전과 성장을 배려하고 있는 셈이다.

 양론 모두 토지분급제와 전주전객제를 승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 지반에 서있으면서도 각각의 방안이 가져올 전망에는 이와 같은 차이가 있었다. 사전혁파의 可否가 都堂에서 토의되었을 때 시중인 李穡을 비롯하여 李琳·禹玄寶·邊安烈·權近 등이 반대하고 鄭道傳·尹紹宗 등은 찬성하였으나 鄭夢周는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다시 백관 53인에게 논의시켰을 때 찬성하는 측이 18, 19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반대자는 모두 巨室子弟였다고 한다.0845)≪高麗史≫권 118, 列傳 31, 趙浚. 사전문제의 처리방식, 수습방향의 차이에서 오는 정치·경제상의 이해상반이 절실하였음을 단적으로 전해 주고 있다.

 양자의 토지문제에 대한 입장의 차이는 그들의 철학적 기반의 차이에서도 연유하고 있었다. 개선론자의 대표격인 이색의 학문적 특색은 궁리나 도문학보다는 존덕성과 거경과 같은 인간내면의 문제를 중시하였던 초기 주자성리학의 흐름을 계승하고 있었으며, 불교의 사회경제적 폐단은 비판하였지만 그 사회적 기능은 인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적 특질은 그의 현실정치의 이해관계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색은 특히 君臣-父子-長幼의 명분을 중시한≪春秋≫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고려왕조의 명분질서를 바르게 하고 윤리도덕이 확립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것을 위한 방법으로 고려지배질서의 전반적인 체계나 구조적 문제를 파악하여 접근하기보다는 인간 개개인의 윤리도덕의 회복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그는 여말의 경제변동과 신분질서의 혼란을 포함한 사회모순의 수습목표를 기존질서의 회복에 두었고, 사회모순을 해결하는 방법도 체제적인 문제보다는 개별적인 문제, 사회전체보다는 인간 개개인에 중점을 두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도 불법적인 토지탈점에는 부정적인 입장이었지만 사전의 혁파에 반대한 것은 고려의 조종지법인 과전체제의 기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개선하고자 하는 것으로 그것은 그가 가지고 있던 학문적 경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0846)都賢喆,<牧隱 李穡의 政治思想硏究>(≪韓國思想史學≫3, 韓國思想史學會, 1990) 참조.

 이에 비해 개혁론의 대표자인 정도전은≪춘추≫를 중시하는 이색과는 달리≪周禮≫를 중시하여 고려지배체제의 전반적인 개혁의 차원에서 현실모순을 이해하고 해결하고자 했다.0847)李泰鎭,<朋黨政治 성립의 역사적 배경>(≪朝鮮儒敎社會史論≫, 지식산업사, 1989). 그는 의식이 족해야 염치를 알고, 창고가 가득차야 예의가 일어나며, 항산이 있어야 항심이 생긴다는 恒産論을 제기하였다. 그는 향촌지주·향리 등의 민에 대한 중간수탈을 배제하고 국왕이 직접 인민을 파악하고 지배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지배체제를 확립하려고 하였다. 또한 고려의 정치제도, 경제제도의 개혁과 아울러 척불론을 주장하였고, ‘천심은 민심’이라는 위민사상을 바탕으로 여론에 따라 왕조를 바꿀 수 있다는 역성혁명론을 제기하였다.0848)江原謙,<三峰鄭道傳の改革思想>(≪朝鮮史硏究會論文集≫9, 1972).
韓永愚,≪鄭道傳思想의 硏究≫(서울大 出版部, 1983).

 개선론측과 개혁론측의 대립은 결국 정치적으로 종결지어질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우왕 14년(창왕 즉위 ; 1388) 8월, 사전혁파 논의가 표면화된 다음달, 도평의사사에서 사전혁파안에 대한 의정이 있었고0849)≪高麗史≫권 137, 列傳 50, 신우 14년 8월. 6도에 양전사업이 착수되었다.0850)≪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經理 신우 14년 8월. 양전을 위해 각 도의 장관직제인 按察使制를 品秩이 높고 권한이 강화된 都觀察黜陟使制로 바꾸어 관찰사를 축으로하여 집행되었다. 이 때 안찰사제를 양부의 대신으로 임명하는 도관찰출척사제로 바꾼 것은 고려 지방제도의 큰 변천을 의미하는 바, 그것은 이제 道內 대소의 軍·官·民을 모두 척벌하는 대권을 가진 상급 행정기관의 신설이었다는 것이다.0851)邊太燮,<高麗按察使考>(≪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1971). 그러한 지방 행정제도의 개편이 양전에 즈음하여 단행되었다는 사실은 곧 어떠한 勢家의 소유지에 대해서도 무차별한 개혁을 단행하기 위한 대권의 수여와 직접 관련된 제도의 개편이었다. 이 당시 도관찰출척사에 임명된 인물들은 대체로 개혁파에 동조하거나 최소한 반대하지 않는 자들이었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0852)金泰永,<科田法의 성립과 그 성격>(≪朝鮮前期土地制度史硏究≫, 知識産業社, 1983), 53∼54쪽.

 그리하여 양전사업은 강력하게 추진되어 다음해(1389) 일단 완료되었다. 이것이 과전법 시행의 바탕이 된 ‘己巳量田’이다. 양전의 거행은 개혁론측의 승리를 뜻하는 첫단계였다. 사전혁파와 관련하여 이 양전이 갖는 최대의 특징은 作丁방식의 새로운 변경, 이른바 ‘字丁制’의 선택이었다. 이 양전은 작정을 千字文 순으로 하여 ‘不係人姓名’함으로써 장차 분급수조지가 조업전으로 모칭될 수 있는 여지를 삭제하였다.

 그리고 양전시행과 함께 잠정조처로서 사전의 전조를 3년간 公收하자는 의견을 내세웠는데0853)≪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 신우 14년 7월 大司憲 趙浚等 上書. 개선론측의 반발이 거세었음에도 결국 이를 관철시키고 있다. 이것은 사전점유자들의 수조권에 대해 사실상 행사중지를 기도한 것이었다.

 또한 사대부 사전의 경기내 지급원칙에 대해서도 개선론측의 반발이 있었으나, 개혁론의 급전구상은 경기내의 토지는 사대부에게 재급전함을 원칙으로 하고 실제 혁파는 외방의 사전을 대상으로 한다는 기본방침 위에서 세워지고 있었다.0854)≪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신창 원년 8월. 9월에는 급전도감의 주재하에 과전 즉 새로운 관급수조지의 지급에 따른 수전대상자를 선정, 파악하는 작업이 착수되었다.0855)≪高麗史≫권 137, 列傳 50, 신우 14년 9월. 11월에는 金佇事件을 계기로 전제개혁에 미온적인 창왕과 반대세력을 정계에서 재차 축출하고 공양왕을 즉위시켰다.0856)≪高麗史≫권 137, 列傳 50, 신창 원년 11월 및 권 45, 世家 45, 공양왕 원년 11월.

 공양왕 2년(1390) 정월 급전도감에서는 과전수급 대상자들에게 과전지급 문서인 전적을 반급하여 주었다.0857)≪高麗史≫권 45, 世家 45, 공양왕 2년 정월. 사실상 과전이 지급된 것이다. 같은 해 9월에는 구래의 공사전적을 모두 소각하여0858)≪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공양왕 2년 9월. 기존의 사전점유와 그 관계는 영구히 소멸되었다. 11월 지방의 관원·향리·역리·진척·원주에 지급할 전지수와 豊儲倉·廣興倉에 수납되어야 할 조세의 수가 작정되었다.0859)≪高麗史≫권 45, 世家 45, 공양왕 2년 11월. 이리하여 사전전조의 공수가 개시된 지 만 3년이 되는 공양왕 3년 5월, 마침내 과전지급에 대한 기본법규가 반포됨으로써 科田法이 성립되었다.0860)≪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공양왕 3년 5월.

<魏恩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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