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5. 상업과 화폐
  • 1) 국내상업
  • (1) 도시상업

(1) 도시상업

 도시상업의 중심은 개경의 시전이었다. 개경의 시전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예종 7년(1112) 9월 京市樓 북쪽 行廊 65칸, 명종 7년(1177) 10월 시전 38칸이 불탔다는 기록으로 보아, 시전의 건물 규모가 꽤 컸음을 알 수 있다.1226)≪高麗史≫권 53, 志 7, 五行 1, 예종 7년 9월 을축·명종 7년 10월 임신.
홍희유,≪조선상업사-고대·중세-≫(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89), 70쪽.
고려 후기에 시전의 규모가 크게 늘어난 것은 희종대인 13세기 초이다. 희종 4년(1208) 7월 광화문에서 십자가에 이르는 도로 좌우에 大市 장랑 1,008楹을 개축하였다.1227)≪高麗史≫권 21, 世家 21, 희종 4년 7월 정미. 기둥을 뜻하는 ‘영’이 장랑 길이인 ‘칸’의 의미로도 사용되었으므로,1228)北村秀人,<高麗時代の京市の基礎的考察-位置·形態を中心に->(≪人文硏究≫42­ 4, 大阪市立大, 1990), 40쪽. 시전을 1,008칸이란 대규모로 확장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종 11년(1270)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수도를 옮긴 후 30여 년이 지나 개경 시전을 다시 정비하였다. 충렬왕 33년(1307)에는 시가 양쪽의 장랑 200칸을 다시 만들기로 하였다.1229)≪高麗史≫권 32, 世家 32, 충렬왕 33년 6월 병오.
홍희유, 앞의 책, 98쪽.
이 공사는 건의가 있은 지 1여 년 후인 충선왕 즉위년(1308) 8월에 완성되었다.1230)≪高麗史≫권 33, 世家 33, 충선왕 즉위년 8월 을미. 시전 증축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우왕 3년(1377)에는 새로 시전의 동랑을 지었다.1231)≪高麗史≫권 133, 列傳 46, 신우 3년 5월. 이처럼 13세기초 1,000여 칸으로 개축된 이후 시전의 증개축은 계속되었다. 시전의 지속적인 증개축은 도시상업 발달을 반영하는 현상인 동시에 도시상업 발달을 촉진시키는 상승작용을 하였다.

 13세기 이후 이처럼 시전의 증개축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시기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희종 때의 시전 개축은 특히 최씨무신정권의 경제기반 확대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점이 주목된다. 崔忠獻은 정권수립 과정부터 京市와 밀접한 연계를 가지면서 이를 적극 이용하였다. 최충헌의 私邸는 시전 거리에 있었는데 정권을 장악하면서 경시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였다. 그런 움직임의 하나가 희종 4년 경시 장랑의 전면적 개축이었다. 양반의 坊里役이 이 공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정도로 시전 개축은 대규모적인 공사였다. 수만 명이나 되는 방대한 私兵을 기반으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재원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경시를 적극 이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1232)北村秀人,<崔氏政權の成立と京市>(≪人文硏究≫44­12, 1992), 28∼34쪽.
田炳武,<高麗時代 銀流通과 銀所>(≪韓國史硏究≫78, 1992), 82쪽.

 시전이 최씨정권의 재정확보책의 일환으로 적극 이용된 것은 시전의 상업적 효용성이 그만큼 높았기 때문이다. 시전을 중심으로 한 도시상업의 발달은 12세기 이후 수리시설 발달, 신종자 보급, 시비술 발달, 새로운 토지개간 등 농업생산력 발달을 중심으로 한 사회 전반적인 발전의 결과였다.1233)魏恩淑,<高麗時代 農業技術과 生産力 硏究>(≪國史館論叢≫17, 1990).
안병우,<고려후기 농업생산력의 발달과 농장>(≪14세기 고려의 정치와 사회≫, 민음사, 1994).
도시상업의 발달은 개경의 인구집중과도 관련이 있었다. 12세기 이후 농민층분화의 심화로 몰락농민이 증가하였는데 몰락농민 가운데 농업에 흡수되지 못한 소위 ‘유수무뢰배’는 상업·수공업이나, 도둑질과 약탈, 소·말의 밀도살 등을 하면서 생활하였다.1234)채웅석,<고려 중·후기 ‘무뢰(無賴)’와 ‘호협(豪俠)’의 행태와 그 성격>(≪역사와 현실≫8, 1992), 237∼240쪽. 도시의 인구증가는 농민층분화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고려 후기에는 鄕藥醫術의 발달 등에 의해 인구가 전반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였다.1235)李泰鎭,<高麗後期의 인구증가 要因 生成과 鄕藥醫術 발달>(≪韓國史論≫19, 서울大, 1988).

 도시 인구증가의 결과 13세기 전반 개경의 호수는 10만 호에 이른다고 할 정도였다.1236)≪高麗史≫권 102, 列傳 15, 兪升旦.
≪高麗史節要≫권 16, 고종 19년 6월.
10만 호는 다소 과장된 수치라고 생각되지만 13세기 당시 개경의 번화함을 충분히 상정해 볼 수 있다.1237)北村秀人, 앞의 글(1990), 33쪽. 도시의 인구증가는 상품수요를 증대시켜 도시상업을 발달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도시상업의 발달에 대하여 李仁老는 개경에는 만물이 모여들어 물건을 쉽게 구하므로 文房四寶 등 값진 물건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묘사하였다.1238)李仁老,≪破閑集≫上. 이처럼 고려 후기에는 각 관청에서도 필요한 물건을 시전에서 구입해 쓰고 있었으며1239)≪高麗史節要≫권 21, 충렬왕 22년 2월. 지방의 공물이나 각종 상품이 개경에 모여들었기 때문에 구할 수 없는 물건이 없을 정도로 도시상업은 활발하였다.

 도시상업의 발달은 경시를 관장하는 京市署의 직제 변화에도 반영되고 있었다. 경시서는 경시의 물가 감시, 가격 공정, 쌀 매매의 감독과 가격 공정, 상평창 쌀의 매매 등 경시 전체의 상업활동을 감독하고 있었다.1240)北村秀人, 앞의 글(1990), 48쪽. 경시서 직제는 문종전시과(1076)에 의하면, 令(정7품, 11科) 1명, 丞(정8품, 14과) 2명과 吏屬인 史 3명, 記官 2명으로 구성되었다. 충렬왕 24년(1298)에는 령이 權參으로 승진하고, 충렬왕 34년(1308)에는 승이 3명으로 증가하는 등 직제가 점차 확대·강화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도시상업의 발달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13세기말∼14세기초 직제가 다시 강화·개편된 시점이 충선왕의 1·2차 개혁과 일치하는 점이 주목된다.1241)金東哲,<고려말의 流通構造와 상인>(≪釜大史學≫9, 1985), 225∼226쪽.
白南雲,≪朝鮮封建社會經濟史(上)≫(改造社, 1937 ; 하일식 옮김, 백남운전집 3, 이론과 실천, 1993, 325쪽).

 충선왕은 즉위교서에서 각 관청의 필요한 물건을 조달할 때 시전에 대한 수탈이 심하므로 이를 시정하고 반드시 대금을 지급하라고 하였다.1242)≪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職制 충렬왕 24년 정월. 복위교서에서는 迎送·國贐·宴禮 때 각 관청에서 文契를 허위로 발급하여 시전을 수탈하는 폐단이 많으므로 이를 시정하라고 하였다.1243)≪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借貸 충렬왕 34년 11월. 두 차례의 시전 보호책은 도시상업의 발달에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불법 유통을 금지하고 도시상업의 원활한 발달을 위해, 감독관청인 경시서의 직제를 개편·강화한 것이다. 시전이 관청이나 권세가들의 수탈 대상이 된 배경에는 그에 상응하는 도시상업의 발달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1244)金東哲, 앞의 글, 226쪽.

 충선왕의 개혁정책 중 도시상업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점은 충선왕 원년(1309)에 실시된 소금전매제이다. 12세기 이후 鹽所가 점차 붕괴되어 궁원·사원을 비롯한 권세가들이 염분을 탈점하여 국가의 염세 수입이 감소하자, 국가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징세제 대신 전매제를 실시하였다. 개경에 4개의 鹽鋪를 두어 소금의 화매를 실시하고 民部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였다. 고려 전기에도 관영상공업을 통해 국가가 생산과 유통을 직접 관장하여 이익을 취하였으나 전매제는 실시하지 않았다. 국가가 직접 생산·유통과정을 장악하는 전매제 실시는 고려 후기 상업의 특징적인 모습의 하나이다. 그러나 전매제는 소금 공급의 부족, 관리의 부정, 권세가·상인 등의 사염의 제조와 유통의 성행 등에 의해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고 유명무실하게 되었다.1245)權寧國,<14세기 榷鹽制의 成立과 運用>(≪韓國史論≫13, 서울大, 1985).

 개경의 도시상업이 사원·관청·권세가 등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던 실태는 충목왕 원년(1345) 李穀이 쓴<長安寺重興碑>에 나타난 장안사의 경우를 통해 잘 알 수 있다.1246)李 穀,≪稼亭集≫권 6, 金剛山長安寺重興碑.
周藤吉之,<高麗朝の京邸·京主人とその諸關係>(≪朝鮮學報≫111, 1984), 15쪽.
강원도 장안사는 전라도 咸悅·仁義·扶寧, 경기도 幸州, 황해도 白州·平州, 경기도 安山 등지에 1,050결의 토지를 가진 대농장주로서 通州 林道縣에 鹽盆도 1곳 가지고 있었다. 도시상업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개경에 京邸 1구를 가지고 있고, 시전 30칸을 타인에게 세주고 있는 점이다. 경저는 중앙과 지방의 연락기관으로 경저에는 京邸主人(京主人)이 있었다. 경주인은 경저를 경영하면서 지방의 모든 일을 알선하였다. 고려시대 경주인은 명종 8년(1178) 조성된 金堤郡 金山寺 향로의 명문에 처음 나타난다.1247)李光麟,<京主人硏究>(≪人文科學≫7, 延世大, 1962), 238∼242쪽. 경주인은 고려 후기에는 공물대납업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공물대납은 중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원간섭기 이후 일반화되었다.1248)권영국,<14세기 전반 개혁정치의 내용과 그 성격>(≪14세기 고려의 정치와 사회≫), 430∼431쪽.
한편 안병우는 의종 원년(1147) 양계 지방의 군자를 운반하는 과정에서 부세대납이 처음 나타났다고 하였다(안병우,<고려시대 수공업과 상업>,≪한국사≫6, 한길사, 1994, 132쪽).
대납제는 부세수취 과정에서 발생한 편법이었다. 그러나 대납제는 수공업과 유통경제의 발달을 전제로 하여야 가능한 것이었다. 대납제는 공물을 수집·비축할 수 있을 정도로 생산·유통구조가 성장하고, 대납상인의 자본축적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1249)姜晉哲,<韓國學硏究 半世紀 中世史>(≪震檀學報≫57, 1984), 42쪽. 고려 후기에는 공물대납업의 발달로 관청관리, 謀利之徒, 貨殖之徒, 郡人住京者(京主人) 등이 대납업자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공물을 선납하고 민으로부터 몇 배의 이식을 취하였다. 고려 후기에는 새로운 상인층으로 공물대납 상인이 출현하였다. 공물대납제의 기반은 개경의 도시상업과 각 지방과 연결되는 유통구조 속에서 이루어졌다. 공물대납제의 발생은 생산·유통구조의 발전 위에서 이루어진 산물이며 동시에 생산·유통구조의 발달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였다.1250)金東哲, 앞의 글, 208∼212쪽. 그러나 공물대납은 지방관이나 중앙관청의 관리와 결탁하여 농민들을 중간수탈하는 기반 위에서 이루어진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1251)朴鍾進,<高麗末의 濟用財와 그 性格>(≪蔚山史學≫2, 1988), 6∼11쪽.

 경저는 장안사만 아니라 다른 사원들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1252)周藤吉之, 앞의 글, 15쪽. 장안사가 시전 30칸을 세준 양상은 다른 사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따라서 사원은 지방상업뿐만 아니라 도시상업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도시상업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사원이나 권력가뿐만 아니었다. 왕실도 도시상업에 적극 개입하여 경제기반을 확대시켜 나갔다. 충혜왕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충혜왕은 義成倉·德泉庫(倉)·寶興庫에서 포 48,000필을 내어 시전에 점포를 차렸다. 이들 창고는 모두 왕의 사적 재정기관이었다. 충혜왕이 이렇게 많은 포를 내어 시전에 점포를 차린 것은 도시상업의 발달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충혜왕은 측근상인들에게 상업을 시키고 반대급부로 무반직 벼슬을 주었다. 銀川翁主는 원래 단양대군의 婢였으며, 상인인 아버지 林信과 함께 사기그릇을 팔았다. 충혜왕의 총애를 입어 옹주로 책봉되자 사람들은 ‘沙器翁主’라고 불렀다. 이 사실은 충혜왕이 임신으로 대표되는 상인세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일례라 하겠다. 충혜왕은 왕실전용 마굿간 확충을 위해 민가 100채를 헐어 부지를 넓히고 부속관사도 새롭게 세우는 등 말에 대한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것은 국내외적 상업활동을 뒷받침할 운송수단인 말을 확보·관리하려는 조치의 일환이었다.1253)충혜왕의 상업활동은 전병무,<고려 충혜왕의 상업활동과 재정정책>(≪역사와 현실≫10, 1993), 234∼238쪽을 참고하였다. 충혜왕은 복위 후에는 즉위할 때와는 달리, 사적 경제기반의 확충을 위해 노력하였다. 국내상업과 원과의 무역을 통해 재원을 확보하는 한편 보흥고·內廐 등의 기관을 설치하여 자신의 경제기반으로 삼았다.1254)박종진,<고려후기 재정 운영의 변화>(≪14세기 고려의 정치와 사회≫), 257쪽.

 한편 고려시대 시전건물은 개경의 광화문에서 십자가에 이르는 南大街의 길 양쪽에 건물을 지어 일정한 간격으로 칸을 나눈 구조였다. 시전건물은 본래 국가가 지어서 상인에게 세를 받고 빌려주는 형태였다.1255)강만길,≪한국 상업의 역사≫(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5), 28쪽. 그러나 장안사의 경우처럼 시전건물은 상당수가 사원이나 권력가들에 의해 독점되어 있었으므로, 상인들은 이들로부터 건물을 임대하여 쓰기도 하였을 것이다.

 시전은 어용상업으로서 국가의 보호 아래 일정한 특권과 특혜를 누렸다. 시전상인은 市廛行廊稅를 납부하지만, 시전건물에서 영업하는 자체가 특권이었다. 시전상인은 조세와 공물로 받은 물자를 불하받거나 위탁 판매하여 이익을 보는 특혜도 받았다. 재난을 당하였을 때 도움을 받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시전상인은 이러한 특권·특혜와 함께 국가의 필요 물품을 제때에 구입하여 납부하거나 국가의 강압적 요구에 응해야 하는 의무도 져야 했다. 그리고 관청·관원들로부터 물건값을 받지 못하는 등 적지 않은 중간수탈을 당하기도 하였다.1256)홍희유, 앞의 책, 72쪽.

 고려시대 시전이 어떻게 조직·운영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 각 시전이 어떤 물건을 팔았으며, 조선시대 시전처럼 상품별로 시전 명칭이 불려졌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이것은 동업자 조직과 직결되는 문제이나 분명하지 않다. 조선시대 시전의 禁亂廛權과 같은 것을 가졌는지도 분명하지 않다.1257)강만길, 앞의 책, 28∼29쪽.
한편, 박상호는 동업조합화가 이미 이루어졌으며, 조선시대 육의전과 같은 특권적인 시전상업이 이루어졌다고 하였으며(朴祥鎬,<高麗時期의 國內商業>, 建國大 碩士學位論文, 1988, 31∼32쪽·43쪽), 안병우도 업종별 전문화 추세에 따라 단일 상품을 파는 시전이 생겨났다고 보았다(안병우, 앞의 글, 1994b, 131쪽).

 고려시대 시전의 실체에 대해서는 조선 태종 10년(1410)에 사헌부가 올린 上書 내용이 매우 시사적이다. 工匠이 店肆가 없으면 생업에 전념할 수 없으므로 舊京에 있을 때(舊京之時)에 布帛·毛革·器皿 등은 점사를 나누어 판매하고(分店大市), 소·말도 일정한 장소에서 매매했으며 그 밖의 미곡류는 각자의 거처에서 판매하였는데, 천도한 이후 운종가에 잡처하면서 남녀 구별이 없이 상고가 섞여 있으므로 경시서에 명하여 구경의 제도에 따르도록 건의하였다.1258)≪太宗實錄≫권 19, 태종 10년 정월 을미.

 이 상서 내용 중 특히 ‘구경지시’에 布帛·毛革·器皿·官服·鞋靴·鞭勒 등을 ‘分店大市’했다고 한 것이 주목된다. 이것은 시전 구성이 업종별로 나누어져 있었다는 것이므로 고려말 개경의 시전은 업종별로 구성되었다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1259)田川孝三,≪李朝貢納制の硏究≫(東洋文庫, 1964), 550쪽.
朴祥鎬, 앞의 글, 31쪽.
박상호는 이 기사와 관련하여 충혜왕 후5년(1344)의 馬市의 존재(≪高麗史≫권 89, 列傳 2, 后妃 2, 曹國長公主)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마시의 존재를 업종별 시전의 지표로 삼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한편 홍희유는 고려시대 시전의 명칭이 조선 초기와 꼭 같았는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그와 유사한 명칭을 가진 품목별 시전이 존재한 것만은 명백하다고 하였다(홍희유, 앞의 책, 71쪽).
한편 ‘구경지시’를 고려말이 아닌 조선 건국 후 한양으로 천도하기 이전인 1392년 정월∼1394년 10월 사이로 보고 이 때 개경 시전을 중심으로 한 도시유통구조에 중요한 개편이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1260)金東哲, 앞의 글, 229∼230쪽.

 이 기사와 관련하여 태조 3년(1394) 정월 경시서에서 각 시전은 시전의 명칭과 그 이름 밑에 판매하는 물건을 그린 간판을 각 장소에 걸어서 서로 구별되도록 할 것을 청한 것이 주목된다.1261)≪太祖實錄≫권 5, 태조 3년 정월 무오. 이러한 간판을 걸어서 서로 구별되도록 하게 한 구체적인 내용은 분명하지 않으나 고려말의 개경 시전이 업종별로 구분되어 있었다면 태조 3년에 경시서에서 이런 조처를 취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1262)金東哲, 앞의 글, 228∼232쪽 참조.

 고려시대 시전이 설령 업종별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조선시대와는 일정한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와는 달리 고려시대에는 국가에서 직접 경영하는 관영상공업이 있었기 때문이다.1263)홍희유, 앞의 책, 71쪽. 조선시대 ‘一物一廛’의 시전과 유사한 ‘分店大市’의 형태가 14세기말에 개경의 시전에서 등장하고 있다. 도시상업에서의 이러한 새로운 변화는 고려 후기 이후의 상품경제 발달의 산물이었다.1264)金東哲, 앞의 글, 232쪽.

 수도 개경에는 시전상업과 함께 도시주민을 대상으로 한 장시가 발달하였다. 장시의 발달은 도시의 인구증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 규모는 영세하지만 일반 주민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는 점에서 도시상업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장시가 발달함에 따라 점차 도성 밖으로 확대되었다. 禮成江 하구의 後西江·碧瀾渡·錢浦 등지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벽란도는 조세와 공물의 통행처일 뿐 아니라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로 크게 발달하여 벽란도와 개경 사이에는 새로운 상업지구가 형성되었다.1265)홍희유, 앞의 책, 76∼78쪽.
안병우, 앞의 글(1994b), 131∼132쪽.
도시의 인구증가와 장시의 발달은 도시 근교 농촌의 미나리·생강·채소 등 상업작물의 재배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1266)朴祥鎬, 앞의 글, 20∼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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