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5. 상업과 화폐
  • 3) 화폐의 유통
  • (1) 포화

(1) 포화

 布貨는 가장 오랫동안 주요한 교환수단으로 사용되었던 화폐이다. 직물은 폭이 대체로 일정하므로 升數가 많을수록 고급이다. 승수가 많은 것을 細布, 적은 것을 麤布라 하였다. 升(綜)은 經絲 80縷를 표시하는 단위이다. 포화로는 麻布 五升布(종포)가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다.1355)金柄夏,<李朝前期의 貨幣流通 -布貨流通을 中心으로>(≪慶熙史學≫2, 1970), 29∼32쪽.
崔虎鎭,≪韓國貨幣小史≫(瑞文堂, 1974), 21쪽.
보통 정도의 품질인 5승포는 14세기에는 소은병의 가치를 표시하는 척도로 사용되었다. 종전부터 납세를 통해 규격화된 5승포가 14세기에는 주된 가치척도로서 일반적인 등가물의 위치를 차지한 것이다. 다양한 포 가운데 5승포의 마포만이 포화가 된 것은 납세수단으로 품질이 균일화되었기 때문이다. 5승포가 공인 포화가 된 것을 기반으로 공민왕과 공양왕 때의 화폐개혁론은 은전과 5승포, 저화와 5승포의 겸행론을 주장하였다.1356)須川英德,<高麗末から朝鮮初における貨幣論の展開-專制國家の財政運用と楮貨->(≪朝鮮社會の史的展開と東アジア≫, 武田幸男編, 山川出版社, 1997). 하지만 고려 후기에는 포화의 질이 점점 떨어져 2∼3승의 추포가 대량 유통되었다.1357)金柄夏,<高麗時代의 貨幣流通>(≪慶熙史學≫3, 1972), 30∼31쪽.
崔虎鎭, 앞의 책, 21쪽.

 5승포의 유통이 부진하고 추포 사용이 늘어나자 상품유통이 부진하고 물가가 등귀하는 등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일어났다. 이에 공민왕 6년(1357)부터는 포를 관청에 납부하여 표인한 후 매매할 수 있도록 하고, 은전의 주조와 함께 5승포를 병용하도록 하였다.1358)≪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貨幣 공민왕 5년 9월.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추포 통용은 여전하여 공양왕 3년(1391) 3월 중랑장 房士良은 楮幣를 만들어 화폐로 삼고 추포 사용을 금할 것을 주장하였다.1359)≪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貨幣 공양왕 3년 3월. 그러나 추포는 농민들의 소규모이면서도 항상화·등가화된 교환시장에 적합한 화폐였다. 따라서 추포 사용의 확대는 상업권 속에 영세 농민층이 새로 편입되어 가는 현상으로서 상업유통의 범위가 확대되어 가는 면도 내포하고 있다.1360)宋在璇,<16世紀 綿布의 貨幣機能>(≪邊太燮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三英社, 1985), 427쪽.
李景植,<16世紀 場市의 成立과 그 基盤>(≪韓國史硏究≫57, 1987), 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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