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5. 상업과 화폐
  • 3) 화폐의 유통
  • (3) 쇄은과 은전

(3) 쇄은과 은전

 충숙왕 15년(1328)에 資贍司에서는 은병 주조 때 구리의 盜鑄로 인해 ‘銀少銅多’한 저질의 은병이 통용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심한 도주는 개인뿐 아니라 국가에 의해서도 행해지고 있었다. 질 나쁜 은병이 유통되고 은의 심한 대외유출로 국가가 보유한 은이 부족했기 때문에 은병을 새로 주조할 수도 없게 되자 이의 대안으로 碎銀을 만들어 유통시켰다.1372)權仁赫, 앞의 글, 86∼87쪽.
안병우, 앞의 글, 145쪽.
쇄은은 은병 한 개 무게의 은괴로서, 절단하여 사용할 수 있는 화폐였다. 일정한 중량과 순도를 가진 쇄은은 천칭의 저울추와 같은 기능을 하다가 점차 일반적인 칭량화폐로 통용되었다. 농장이나 상업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한 부호층은 은을 축적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사로이 쇄은을 사용하였다.

 쇄은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충렬왕 13년(1287) 쇄은에 구리를 합주하는 것을 금한 사실에서 이미 충렬왕 무렵에는 널리 유통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쇄은은 은병의 보조화폐였으나 은병을 대신하여 주도적 화폐가 되었기 때문에 따라서 국가의 화폐관리 기능을 크게 약화시켰다.1373)李能植, 앞의 글, 147∼152쪽.
權仁赫, 위의 글, 86∼87쪽.
안병우, 위의 글, 145쪽.

 쇄은에도 구리를 합주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충렬왕 13년 4월에 쇄은과 구리의 합주를 금하는 법령을 내렸지만 효과가 없었다. 공민왕 5년(1356) 9월 화폐개혁을 하려고 각종 화폐의 득실을 논할 때, 쇄은을 정식화폐로 채용하자는 논의까지 대두된 것으로 보아, 쇄은이 은병을 대신하여 널리 유통되었음을 알 수 있다.1374)≪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貨幣 충렬왕 13년 4월·공민왕 5년 9월.
李能植, 위의 글, 151∼152쪽.
金柄夏, 앞의 글(1972), 34쪽.
崔虎鎭, 앞의 책, 33쪽.
공민왕 5년 9월 간관의 말에 의하면, 이 무렵 쇄은을 다시 화폐로 사용하자는 논의가 대두되었는데 쇄은은 각인되지 않아 화폐로 적당하지 않으므로 표인한 은전을 만들어 사용하기로 하였다. 은전은 은병이나 布가 조악하여 거래에 혼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안정된 가치를 가진 매개물의 필요에 따라 발행되었다. 開元(당의 연호)과 崇寧(송의 연호)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은전이 발굴된 적이 있다. 이 은전은 공민왕 5년에 은전 발행이 논의되었을 당시의 것이라고 보여진다. 중국화폐를 모사하여 만든 것 같으나1375)≪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貨幣 공민왕 5년 9월.
金柄夏, 위의 글, 34∼35쪽.
崔虎鎭, 위의 책, 33쪽.
井上正夫, 앞의 글, 208쪽.
널리 유통되지는 않은 듯하다. 그렇지만 소은병 절반 가치의 은전을 주조한 것은 은화 유통이 점차 일반민의 수요에 따라가게 된 것을 반영하는 현상으로 보인다.1376)홍희유,≪조선상업사-고대·중세-≫(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89), 95쪽.

 은병·쇄은 등의 은화는 화폐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은화는 유통구조에서는 물론 토지·주택 등 부동산 매매에 사용되었으며, 특히 원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결제수단으로 널리 유통되었다.1377)홍희유, 위의 책, 96∼97쪽.
田炳武, 앞의 글(1992).
은병이나 쇄은 등이 널리 유통되자 수요가 증가하여 盜鑄현상이 나타났다. 은병 도주에 대한 대책은 숙종 이후 예종·충렬왕·충숙왕·충혜왕·공민왕대에 계속 제기되었으나 이를 금지시켜 물가를 안정시키지는 못하였다.1378)田炳武, 위의 글, 246쪽.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