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1. 신분제의 동요
  • 2) 양인·천인의 신분이동
  • (1) 양인·천인의 신분상승

(1) 양인·천인의 신분상승

 고려 후기에 양인과 천인의 신분상의 변화가 생겨나게 된 배경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이제 그들의 신분이동의 실제에 접근하여 볼 차례이다. 이와 관련하여 신분이동 가운데 먼저 신분상승에 관한 모습부터 정리하여 보기로 한다. 고려 후기에 양인이나 천인의 신분상승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노비출신으로서 고위관직에 나아간 사람들의 수가 대단히 많았다는 사실일 것이다.013) 원나라 간섭기에 한한 것이기는 하였지만, 필자는 이미 노비출신으로서 정계에 나아간 이들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자세하게 검토한 바가 있다(洪承基,<元의 干涉期에 있어서의 奴婢출신 인물들의 政治的 進出>, ≪高麗貴族社會와 奴婢≫제9장, 一潮閣, 1983). 그리고 같은 책 제7장<崔氏武人政權과 崔氏家의 家奴>및 제8장<武人執權時代의 奴婢叛亂>도 노비출신 인물들의 정치적 활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앞서도 언급하였지만 이의민이나 김준 등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은 국왕이나 집권자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각별한 총애와 비호를 받았다는 점에서 지극히 정치적이었으며, 이 점에서 이러한 사실로써 일반론을 말하기는 어렵다고 하겠다. 또 양인이라 하여도 그 상층부에 속하였던 향리·군인·잡류 등의 신분적 배경을 가진 이들로서 관리가 된 경우는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많다. 특히 향리들의 경우가 그러하였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양인의 상층부에 속하는 이들의 예를 가지고 양인의 신분상승을 이야기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보통 양인의 경우를 알아보고 천인이라고 해도 특별한 정치적 이유에서가 아니면서 신분을 상승시킨 예에 한하여 설명을 이끌어 가고자 한다. 일반 양인이나 천인들의 신분상승에 관한 대략적인 경향은 아래의 여러 기록으로써도 대충 파악할 수 있다고 본다.

① 續命이 상소하여 이르기를… ‘땅(근본)은 臣道인데 이제 상과 벌이 밝지 못하므로 높고 낮은 신하들이 게으르고 해이해져 관직을 비우고 또 軍功으로 말미암아 白丁이 갑자기 卿相에 나아가고 노예가 외람되이 朝班에 처하여 臣道가 혼란하고 이로써 지진을 초래하였습니다. 청컨대 이제부터 상벌을 엄격히 하고 고귀한 국가의 관직을 신중하게 취급하소서’(≪高麗史≫권 111, 列傳 24, 金續命).

② 이 때 여러 해 동안 나라에 전쟁이 계속되어 창고의 저장이 다 말랐고 德興兵이 또 이르름에 공있는 사람을 모두 벼슬로써 상을 주게 되자 (吳)仁澤과 (金)達祥이 먼저 문·무관을 첨설할 것을 건의하고 드디어 銓注를 맡게 되었다. 출정하는 將士가 모두 건너뛰어 벼슬자리에 나아가니 사람들이 즐겨 從軍하였다. 그러나 청탁이 크게 일어나고 뇌물이 공공연히 행하여져 工匠·賤隷도 관직을 받지 않음이 없으니 官爵이 크게 범람하였다(≪高麗史≫권 114, 列傳 27, 吳仁澤).

③ 紹宗이 상소하여 이르기를… ‘예로부터 帝王이 천하의 백성을 4등급으로 나누어 士·農·工·商이라 하였는 바 농·공·상은 각각 그 業을 대대로 하여 웃사람을 모셨습니다. 오직 士는 일함이 없이 학교에 들어가 독서하고 몸을 닦아 집을 바르게 하여 임금을 섬기는데, 백성을 다스리는 道를 다 배운 다음에 벼슬합니다. …신축·계묘년 이래로 나라의 쓰임이 부족하여 官爵으로써 功을 상주는 물건으로 삼으니 소인이 외람되이 軍功을 무릅쓰고 뇌물을 인연하여 차례없이 뛰어서 제수되어 왔습니다. 그 근원이 한번 열리매 오늘에 이르기까지 商賈·工匠·公私奴隷가 모두 얻어 관리가 되었습니다’(≪高麗史≫권 120, 列傳 33, 尹紹宗).

 위의 사료들은 모두 공민왕 때의 사정을 전하고 있지만, 그것들을 통해서 도 고려 후기에 일반 양인과 천인들이 벼슬에 나가는 일이 과거에 비하여 보다 많아지게 되는 경향을 읽기에 부족함이 없다. 벼슬길에 나가는 일은 그 들의 신분상승을 가장 확실하게 보장하여 주는 것이었다. 윤소종은 관직은 본래 사족만이 맡아야 하는 것인데도 농민이나 공장 및 상인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공·사노비들까지 관직에 나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임을 지적하고, 이 현실을 개탄하는 입장을 보였다(③). 그런데 위의 사료들을 두루 보 면 백정(농민)·공장·상인·노예 등이 관직을 얻게 되는 계기가 주로 군공에 의하여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군대에서 공을 세우는 일이나 그러한 공을 세우도록 권장하는 일에서 그들이 관직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 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뇌물이었다. 그들이 재화를 가지고 관직에 접근하였다는 뜻이다.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서도 이러한 사실들을 확인하여 볼 수 있다. 일반 양인과 천인으로서 관직을 받아 신분을 상승시킨 예는 많지만, 여기서는 대표적인 예를 몇 가지만 들어보기로 하겠다.

④ 白任至는 藍浦縣 사람으로 농업에 종사하였다. 처음 驍勇함으로써 뽑혀 서울에 이르러 셋집에 살면서 섶을 팔아 자급하였다. 의종이 선발하여 內巡檢軍에 충당되어 왕의 행차를 호종하였는데 잠시도 儀仗의 곁을 떠나지 않으니 그 공로로 隊正에 보임되었다. 鄭仲夫의 난으로 무인이 뜻을 얻게 되자 드디어 貴顯하게 되었다. 명종조에 여러 번 옮겨 刑部侍郎이 되었다(≪高麗史≫권 100, 列傳 13, 白任至).

⑤ 曺元正은 玉工의 아들이니 어머니와 할머니는 모두 官妓였다. 처음 7품직에 한정되었으나 정중부의 난 때 李義方을 도왔으므로 드디어 郎將·將軍을 지내고 명종 때 工部尙書가 되었다가 樞密院副使에 전임되었다(≪高麗史≫권 128, 列傳 41, 叛逆 2, 曺元正).

⑥ 孫琦는 본래 상인으로 충숙왕의 倖臣이 되었다. 여러 번 옮겨서 大護軍이 되고 시종한 공으로 전토와 노비를 사급받았는데 摠部典書를 거쳐 知密直司事에 승진하였다(≪高麗史≫권 124, 列傳 37, 嬖幸 2, 孫琦).

⑦ 朴球는 蔚州에 속한 部曲人이니 그 선대가 부유한 상인이었으므로 그 유산을 물려받아 부자로 알려졌다. 원종 때에 上將軍이 되었다. … (그는) (金)方慶을 좇아 일본을 쳐서 공이 있었다. 뒤에 同知密直司事로서 合浦에 出鎭하고 贊成事로서 죽었다. 구는 별다른 기능은 없었으나 군공으로써 귀하게 되었다(≪高麗史≫권 104, 列傳 17, 金方慶 附 朴球).

⑧ 李英柱의 아버지는 應公이다. 영주가 처음에 중이 되었다가 뒤에 세속으로 돌아와 양가의 딸에게 장가들어 한 아들을 낳았다. (영주가) 管城縣令이 되었다. 충렬왕이 세자가 됨에 靴工 金淮提의 처가 美色임을 듣고 이를 들였는데 때에 임신한 지 이미 수개월이 지났었다. 딸을 낳으매 궁중에서 기르기를 자기가 낳은 것 같이 하였다. 영주가 그 처를 버리고 이에 장가드니 때에 國壻라 칭하였다. 충렬왕이 즉위함에 미쳐 內園丞으로서 郎將에 건너뛰어 배수되니 궁중에 출입하여 권세가 날로 성하였다. … (충렬왕) 26년에 密直副使로 임명되었다(≪高麗史≫권 123, 列傳 36, 嬖幸 1, 李英柱).

⑨ 池奫은 忠州人이니 그 어머니는 巫女였다. 行伍에서 출세하여 여러 번 종군하면서 공이 있었으므로 공민왕 때에 여러 차례 옮겨 判崇敬府事가 되었다. 우왕 때에 門下贊成事·判版圖司事에 임명되었다(≪高麗史≫권 125, 列傳 38, 姦臣 1, 池奫).

⑩ 平亮을 멀리 떨어진 섬에 유배하였다. 평량은 平章事 金氷寬의 家奴였는데 見州에 거주하면서 농사일을 열심히 하여 치부하였다. 권력의 요직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뇌물을 주어서 천인을 면하고 양인이 되었으며 散員同正을 얻을 수 있었다(≪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18년 5월 병진).

 위의 사례들은 평량의 경우만 빼고는 모두가≪고려사≫의 열전에 당사자 가 입전되어 있다. 같은 사례로서 입전되어 있는 다른 경우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구체적인 예들은 더욱 많다. 여기서는 다만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한다고 판단되는 것에 한하여 검토하고자 한다.

 백임지는 농업에 종사하던 농민이었다. 그는 일반 양인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군인으로 뽑혀 서울로 가서 경군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공로로 장교가 되었으며, 정중부의 난에 참여하여 더욱 출세할 수 있었다(④). 조원정은 옥공의 아들이었으므로 工匠의 신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중부의 난에서 공을 세워 정4품의 장군이 되었고 마침내 정3품의 공부상서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⑤). 손기는 본래 상인이었는데 충숙왕을 시종한 공으로 종2품의 지밀직사사에까지 승진하였다. 그에 앞서서 종3품의 대호군이 되었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도 백임지나 조원정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군인이나 장교로서의 임무를 잘 수행하여 그 공이 인정된 것은 아니었나 싶다(⑥). 박구는 부곡인이면서 동시에 상인이었던 인물인데 정2품의 찬성사까지 되었지만, 기록에도 있듯이 군대에서의 임무가 공로로 인정되어 그렇게까지 출세할 수 있었다(⑦). 지윤은 무녀의 아들로서 찬성사에 이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의 출세도 군공에 힘입어 이루어졌다(⑨).

 이영주는 승려출신으로서 충렬왕의 총애를 받아서 출세하여 정3품의 밀직부사가 되었다. 그가 국왕의 총애를 받게 된 것은 국왕의 뜻을 헤아려 그에 부응하는 일을 잘하였기 때문이라고 믿어진다(⑧). 끝으로 평량은 사노로서 양인이 되고 산원동정의 직도 얻게 되었는데 권세있는 관리에게 뇌물을 주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다(⑩).

 대체로 보면 일반 양인이나 천인이 관리가 되어 신분을 상승시키는 데에 는 군인이나 장교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거나 그 이상 공이 인정되는 일이 중요하였다. 이것은 전문적인 군인들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軍班制의 병 제가 무너진 데다가 밖으로는 외족의 침입이 잦고 안으로는 정변이나 그 밖 의 정치적 변동이 많았기 때문에 군사적인 임무가 전에 없이 중요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아래의 기록을 보자.

병사를 모집하는 데 있어서 응모하는 사람 가운데 私賤을 제외한 나머지 士族과 鄕吏는 관직을 주고 宮司奴隷는 양인이 되게 하거나 錢帛으로써 상을 주는데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게 하였다(≪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공민왕 10년 10월).

 군사적인 임무의 중요성이 워낙 커서 병사가 되는 궁사노예까지도 그가 원하면 양인이 되게 할 정도였다. 이것은 사료 ①∼③에서 읽을 수 있는 당시의 일반적인 경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료 ②에 언급이 있듯이 뇌물도 그들의 신분상승에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보여진다. 여기서 잠시 아래의 기록을 보기로 하자.

개성부 5部와 외방의 州·縣에서 百姓을 양반으로, 천인을 양인으로 戶口를 위조하는 자들은 법에 의거하여 단죄하라(≪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2, 戶口 충숙왕 12년 10월 敎).

 이 기록은 호구를 위조하여 신분을 바꾸는 일이 전국적으로 있었음을 말하여 준다. 그러한 위조에 그것을 바라는 사람이 연루됨은 말할 나위가 없지만 위조행위 자체는 호구를 맡고 있는 관리가 하는 것이다. 호구담당 관리가 위조하는 것은 그것을 원하는 사람이 있어서 하게 마련이지만, 이러한 불법은 대체로 뇌물이 없이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일이다. 평량이 양인이 된 것도 호구를 위조한 결과이겠는데, 그도 담당관리에게 뇌물을 주었던 것이다(⑩). 고려 후기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안정되었다고 볼 수가 없다. 불안정한 사회에서는 관리들도 원칙에 따라서 일을 처리하기가 어렵다. 관리들에 대한 뇌물이 성행하는 상황 속에서 신분적 한계에 있는 이들이 그들의 신분상승을 위하여 뇌물에 의지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기 쉬운 것도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다. 일반 양인이나 천인 가운데는 평량처럼 열심히 일하여 재화를 모은 이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고, 그 가운데는 역시 평량처럼 뇌물을 써서 호구를 위조하여 신분을 올리거나 벼슬을 사는 사람들도 결코 적은 수는 아니었을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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