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2. 농민·천민의 봉기
  • 1) 농민·천민봉기의 배경
  • (3) 대토지겸병의 확대

(3) 대토지겸병의 확대

 무신란 이후에 광범위하게 발생했던 농민항쟁의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가권세가의 토지겸병으로 인한 농촌사회의 파탄에 있음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려시대 토지제도의 근간은 田柴科體制였다. 전시과 제도는 문무백관을 비롯한 국가의 공직자에 대하여 그들이 공직에 복무하는 대가로서 그 지위 에 따라 일정한 토지를 나누어 주는 제도였다. 전시과 제도에 의하면 전국 의 토지는 公田·私田으로 구분되었는데 공전은 주로 國用·祿俸의 재원이 되는 토지로서 民田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고 公廨田·屯田·內莊田 등 도 이에 포함되었으며, 사전은 주로 궁원·사원의 사유지와 양반·직역자에 지급된 分給收租地 등으로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관리들은 국가에 대한 복무의 대가로 수조지를 분급받았고, 정부의 각 기관들 역시 토지를 배정받아 재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백성들은 자기의 소유지인 민전의 자가경영을 통하여 생활의 토대를 마련하는 한편, 조세를 납부하여 녹봉과 국용 및 군수 등을 지탱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 중기에 이르러 권세가의 탈점으로 인하여 재래의 자영농민의 토지지배에 큰 변동이 생겨, 토지겸병이 성행하고 농민의 佃戶化가 진행되니 전시과체제는 그 기반이 동요하여 마침내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토지탈점에 관한 기사는 이미 12세기 초인 예종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본격적인 토지겸병은 귀족사회의 동요가 시작된 인종대에 심화되어 무신정권이 성립하면서 더욱 확대되었다. 이같은 대토지겸병이 성행하게 된 이 유는 전시과체제의 모순이 표면화된 데다 농업기술의 발달에 따라 생산력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전시과체제의 제도적인 모순점으로는 양반관료에 지급할 분급수조지가 항례적으로 부족하였다는 사실과 또 분급수조지 제도는 이념적으로 토지국유제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功蔭田柴나 賜田같은 실질적으로 사유지와 다름이 없는 토지의 존재가 용인되고 있었다는 점이 다.092) 姜晋哲,<田柴科體制의 崩壞>(≪高麗土地制度史硏究≫, 高麗大出版部, 1981), 313쪽. 따라서 토지분급 질서가 무너지니 수조권에 입각한 전시과체제는 흔들리게 되고 소유권을 강화시킨 토지겸병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12세기 농업기술의 발달은 수리시설의 발전, 施肥法의 발달, 그리고 새로운 종자의 보급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데, 이에 따라 歲易農法이 不易常耕 農法으로 전환되었다.093) 농업 생산력의 향상에 대해서는 金容燮은 고려 말, 조선 초에 1結의 단위면적이 축소 재조정되는 사실을 고려 후·말기 이래의 농업기술 발달의 결과로 이해하는 견해를 발표하였으며, 李泰鎭은≪農事直說≫의 연구를 통해 대몽항쟁기를 농업기술 발달의 전환기로 파악하였다. 이를 토대로 魏恩淑씨는 이보다 조금 앞선 시기인 12세기부터 농업기술이 발달하였음을 다각도로 검토하였다. 이와 관련해서는 아래의 글들이 참고된다.
金容燮,<高麗時期의 量田制>(≪東方學志≫16, 1975).
李泰鎭,<14·15세기 農業技術의 발달과 新興士族>(≪韓國社會史硏究≫, 知識産業社, 1986).
魏恩淑,<12세기 농업기술의 발전>(≪釜大史學≫12, 1988).
李齊賢의≪益齋亂藁≫에 의하면 경종 때에는 “압록강이남 지방은 모두 산이므로 田地로서 해마다 심을 수 있는 비옥한 땅이 없다”094)≪高麗史節要≫권 2, 경종 6년 7월 李齊賢 贊.
이외에≪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經理 문종 8년 3월의 기사 내용에서도 고려 전기에는 歲易田이 일반적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 하여 고려 전기에는 休耕田이 일반적인 현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려 전기에는 수조법이 同積異稅制로 量田尺도 단일척이었으므로, 농산물의 소출을 기준으로 마련한 면적의 단위인 結負制가 실제의 면적을 표시하는 頃畝法과 일치하였다. 그런데 고려 중기부터 말기에 이르는 어느 시기부터는 결의 실적이 頃面積의 몇 분의 1로 축소되어 隨等異尺制라는 새로운 양전법이 채택되었다. 이같은 변화는 일반적으로 耕地가 휴한농법의 단계를 지양하여 常耕田化하고 다시 그 상경화한 토지가 비척도에 따라 소출액에 차등이 있었다는 사실의 전제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농경의 발전은 단시일 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만큼 농업기술의 발달에 의해 상경화가 고려 중기부터 서서히 진행되었다고 생각한다.

 농업기술의 발달은 농민층에 현저한 빈부의 차이를 가져와 계층분화를 촉진시킴으로써 많은 몰락농민을 탄생시켰다. 또한 현실적으로 토지가 많은 부를 창출하게 되니 권세가의 토지지배 의욕을 한층 자극시켜 農莊이 형성되게 되었다. 고려시대에서 토지탈점으로 인한 대토지겸병의 구체적인 사례로 나타나는 최초의 인물은 인종대의 이자겸이다. 그러나 이 때는 아직 보편화된 것은 아니었고 토지 탈점이 심화된 것은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정중부·이의민 그리고 최충헌 등 무신집정자들은 노골적으로 토지 침탈을 감행하였으니 다음은 그 예를 든 것이다.

① 廉信若의 토지가 峰城에 있었는데 정중부가 이를 빼앗았다가 후에 돌려보냈다. 신약이 奴를 보내어 수확하게 했는데 중부의 家奴가 중도에서 기다려 이를 탈취하려 하여 서로 싸웠다. 중부가 신약의 노비를 街衢獄에 가두어 죽이고 重房을 시켜 신약을 탄핵하였다(≪高麗史≫권 99, 列傳 12, 廉信若).

② (義旼이) 백성들이 사는 집을 많이 점령해서 큰 집을 짓고 남의 토지를 빼앗아 그 탐학을 마음대로 하니 中外가 震恐하였다(≪高麗史≫권 128, 列傳 41, 叛逆 3, 李義旼).

③ 최충헌이 죽으니 怡는 그가 모은 금·은 등의 진기한 보물을 왕에게 바쳤다. 이듬해에 또 충헌이 점탈했던 공상의 田民을 각기 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附 怡).

 무신집정자들의 토지겸병은 국가의 기강을 더욱 무너지게 하여 대토지소유자들의 상호 쟁탈까지 일어나고 있었다. 사료 ①에서 정중부는 判大府事로 재직하고 있던 염신약의 토지도 빼앗았다고 하니, 무력한 백성들의 민전 침탈은 일상적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는 토지겸병을 방지하여 백성과 국가의 재산을 보호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렸던 최충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명종대의「賢宰相」으로 칭송을 받았던 문극겸조차도 토지를 넓히는데 주력하였다고 한다.095)≪高麗史≫권 99, 列傳 12, 文克謙.

 귄세가의 토지겸병을 위한 수단은 이의민의 경우처럼 함부로 탈점하기도 했지만 가장 일상적인 경우는 수조권을 통해서였다고 생각된다. 즉 科田主는 생산량이 증가한 것을 기화로 점차 규정 이상의 액수를 거둬들여 수조권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그러한 수취과정에서 농민이 조세를 내지 못할 경우에 그 토지의 소유권을 탈취하는 것이었다. 이외에도 권세가들은 황무지 등 陳田 개간이나 柴地의 전토화를 통한 토지소유권의 확보, 그리고 長利·寄進 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여 토지겸병을 확대하였다. 이들 토지 탈점은 명종 18년(1188)에 반포했던 왕의 조서에 잘 나타나 있다.

① 모든 州縣에는 각기 서울과 지방에 양반·군인의 家田과 永業田이 있는데 이에 간사한 吏民이 권세있는 자들에게 의탁하고자 하여 거짓으로 閑地라 칭하고는 권세가의 이름으로 등기하였다. 또 권세가 역시 이를 자신의 가전이라 주장하면서 公牒을 요구하여 취득하려고 즉시 사환을 보내어 편지를 써서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그 주의 관원들은 간청을 이기지 못하여 사람을 파견하여 田租를 징수하므로 한 토지에서 받는 조세가 두세 차례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백성들이 고통을 견디기 어렵고 어디에 가서 호소할 곳도 없게 되었다. …이 使喚을 잡아 칼을 씌워 서울에 알리고 登記한 吏民은 끝까지 추궁하여 그 죄를 다스리도록 하라(≪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紫科 명종 18년 3월).

② 각처의 부강한 양반이 빈약한 백성이 빌린 것을 갚지 못하면 옛부터 내려오던 丁田을 빼앗으므로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더욱 가난해졌다. 富戶는 겸병과 침할을 하지 말 것이며 빼앗은 토지는 각기 그 본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하라(≪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借貸 명종 18년 3월).

③ 서울 사람으로서 향읍에 농장을 크게 벌여놓고 폐해를 끼치는 자는 농장을 몰수하고 법으로써 서울로 돌려 보내도록 하라. 道門의 승려가 여러 곳의 農舍에서 함부로 貢戶라 하며 양인을 부리고 또 거친 종이와 직물을 강제로 빈민에게 주어 그 이익을 얻으니 이를 다 금지하라(≪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禁令 명종 18년 3월).

 위의 사료 ①은 양반의 가전과 군인전마저 권세가의 겸병의 대상이었음 을 보여준다. 특히 군인전은 직역의 대가로 받은 수조지로서, 이것의 침탈은 토지분급제에 기초한 정권의 지배 질서를 동요시킬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096) 박종기,<농민항쟁과 대외관계>(≪한국사≫6, 한길사, 1994). 그리하여 농민들은 원래의 소유주인 군인과 권세가 두 곳에 조세를 수탈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각 지방의 토호들도 토지를 겸병했으며 승려들까지 대지주로서 백성을 괴롭혔으니 결국 농민들은 유망하거나 봉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정부의 대책은 극히 미약하였다. 즉 정부는 토지침탈에 대해 겸병의 주체자인 권세가는 놔 두고 사환과 이민에게만 죄를 물었으며, 사료 ②의 부호들에게는 주인에게 돌려주게끔 하는 제도적 장치도 없이 무조건 돌려주라는 지시만 내리고 있다. 즉 대토지 소유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권 세가들의 이익을 크게 침탈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사실 정부로서도 대토지 소유의 확대는 국가의 재정에 치명적이므로 방지하려는 의지는 있었지만, 정책 시행자가 대토지겸병을 자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제대로 시행될 수가 없었다. 또한 승려들도 권세가와 더불어 농장을 설치하여 농민을 수탈하고 강제로 매매의 차익을 획득하였으므로 사원 또한 농민들의 타도의 대상이 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요컨대 12세기 이래 농업 생산력의 증가로 인해 토지를 통한 일정한 수익이 보장되니 중앙 집권체제의 문란을 틈타 권세가들의 토지겸병은 더욱 확 대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초기에는 陳田·山田 등의 개간을 통해 농경지를 확대했으나 나중에는 군현의 민전, 나아가서는 양계지방의 국유지인 둔전까지도 사유화하였다.097)≪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屯田 공민왕 5년 6월. 권세가의 토지겸병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각해져서, 명종 26년에 최충헌이 올린 封事에서도 “관직에 있는 자가 貪鄙하여 公私田을 빼앗아 점유하니, 일가의 비옥한 토지가 주·군에 걸치게 되었다”라고 한탄하고 있다. 지배층은 토지겸병과 탈점을 통하여 농장을 확대시켜 나갔다. 이들은 조세를 내지 않음으로써 국가와 대립하였으며 각종 수탈과 고리대 운영을 통하여 농민층을 몰락시켰다.

 그리하여 고려 후기는 농업기술의 발전으로 농민경제가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농민층의 성장이 가시화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배층의 농장 확대와 국가의 수취력 강화로 인해 농민에게 돌아가야 할 잉여생산물에 대한 권익 이 송두리채 수탈당하고 있었다. 이제 고려사회는 많은 비중을 점하고 있던 국가 대 농민의 예속관계에서 지주 대 전호관계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특히 국가는 많은 농민들이 대토지 소유자의 전호로 바뀌어 조세·공부·역역을 납부하지 않아 재정이 고갈되니, 남아있는 농민들을 더욱 수탈하여 이를 보충하려고 하였다. 이같은 여건을 타개하기 위해 그들은 11세기까지는 유리 와 도망 등 소극적인 방법으로 저항하였으나, 12세기 후반기에 무신정권이 들어서서 내부의 갈등으로 중앙 집권체제가 악화되자 같은 수탈당하는 계층으로서의 공감대가 형성된 농민·전호는 연합하여 농민봉기와 같은 적극적 인 항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