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2. 농민·천민의 봉기
  • 1) 농민·천민봉기의 배경
  • (4) 신분제의 동요

(4) 신분제의 동요

 무신집권기의 광범위한 피지배층의 항쟁에는 단지 농민·천민·노예들만 이 가담했던 것이 아니라 지배층에 가까운 향리·토호 그리고 同正職 소유자들도 상당수가 이에 호응하였다. 무신집권기의 지방관은 일반 백성들뿐 아니라 부유하나 중앙과 연계된 권세가 없는 토호들에 대한 수탈도 병행하였는데, 이것이 西北民의 항쟁이나 慶州와 濟州民의 봉기에서 토호 등 향리층이 광범위하게 가담했던 원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公州 鳴鶴所民의 봉기나 경주민의 항쟁에서는 정치권에서 소외된 관인층인 동정직 소유자들도 이에 동조하고 있다.

 농민·천민들 못지않게 고려사회의 불만계층은 동정직 소유자들이었다.098) 金光洙,<高麗時代의 同正職>(≪歷史敎育≫11·12, 1969). 동정직은 正職에 준하여 설정된 散職으로서 閑職 및 初入仕職의 성격을 띠 고 있으며, 그에 初補되는 자들은 대기하였다가 규정에 따라 實職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관료층이 팽창하여 동정직을 가진 산직자들이 희망하는 실직으로의 진출은 어려워졌다.

 徐兢의≪高麗圖經≫에 의하면 인종조에 時官이 3,000명, 散官同正이 14,000명이었다고 하는데, 이같은 동정직 소유자들 중 특히 문관직을 지닌 사람들은 무신정권 수립 이후 실직으로의 진출이 더욱 어려워졌다고 보여진다. 결국 동정직 소유자들은 지배층인 관인층에 속하면서도 그에 합당한 대우가 선행되지 않았고, 이것에 대한 사회적인 불만이 그들로 하여금 농민·천민들의 봉기에 가담하게 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신정권이 들어섬에 따른 신분제도의 변화로 인한 피지배층의 사회의식의 성장이 항쟁의 또 하나의 요인이었다. 고려사회는 신분제사회로서 양반귀족·중간층·양민·천민의 신분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이러한 신분체제는 예외적인 경우가 없지는 않았으나, 문신귀족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에는 어느 정도 잘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신란으로 문신귀족이 몰락하고 대신 신분이 상대적으로 낮은 무신이 집권함에 따라 종래 엄격했던 신분질서는 동요하게 되었다. 우선 양인에서 출세하여 병부상서(정3품)·지문하성사(종2품)까지 지낸 李英搢·白任至가 있다. 그리고 이의민은 아버지가 소금과 체를 파는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延日縣 玉靈寺의 婢였는데 경대승에 이어 최고의 무신집정자가 되었다. 이 밖에 조원정은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관기로서 賤出이었는데 무신란 후에 추밀원부사(정3품)까지 지냈으며, 石麟도 본래 미천하여 창고 부근에서 쌀을 주워먹으며 살 정도로 가난했으나 점차 승진하여 상장군(정3품)으로서 동서북면병마사까지 지냈다.099)≪高麗史≫권 128, 列傳 41, 叛逆 2, 曹元正 附 石麟.

 이들의 출세는 정치권에서 지배층이 교체됨으로써 가능해진 경우로서 무신정권이라는 정치적 변혁이 이들 양인·천민의 신분을 상승시켜 주었다면, 명종대에 평장사 金永寬의 사노였던 平亮의 예는 경제적 부를 통해 신분을 상승시킨 경우이다. 평량은 見州에 살면서 열심히 농사를 지어 부자가 된 후, 권세가에게 뇌물을 바쳐 양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산원동정이라는 관직까지 얻었다. 또한 그의 아들 禮圭는 隊正이 되어 八關寶判官 朴柔進의 딸 과, 仁茂는 明經學諭 朴禹錫의 딸과 혼인을 맺었다고 한다.

 평량은 외거노비로서 생산물의 반을 지주에게 바쳤으리라 생각되는데, 농업생산성의 향상이 토대가 되어 부자가 되고 불법이기는 하나 신분해방까지 획득한 특이한 예이다. 그러나 사노인 그가 특별한 무공도 없이 경제적 부를 기반으로 산관이기는 하나 관직까지 취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가 신분이 절대적으로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이같은 상황이 신종 때에 萬積을 탄생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만적은 그의 연설문에서 “公卿將相의 씨가 따로 있으랴”하고 부르짖었는데100)≪高麗史節要≫권 14, 신종 원년 5월. 이는 무신정권기 피지배층의 의식구조의 단면을 명확히 드러내주고 있다.

 정치·경제적 변화는 필연적으로 사회의 변혁을 촉구하고 있었다. 봉건사회에서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억압하는 중요한 도구의 하나였던 신분제는 서서히 동요되고 있었다. 피지배층은 신분이란 태어나면서 받아들여야 할 숙명적인 것이 아니라 변화될 수도 있고 또 변화시킬 수도 있는 것임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이제 피지배층은 그들도 힘만 있으면 정권도 장악할 수 있다는 단계로까지 의식이 향상되었다. 그리하여 고려시대 농민·천민의 항쟁은 초기에는 단순히 지방관의 탐학에 대한 항거로 출발했으나, 그들이 항거하는 과정에서 점차 의식의 각성을 가져와 새로운 사회질서를 구축하자는 단계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요컨대 고려사회는 토지소유관계나 군현제, 그리고 신분제 등 정치적·경 제적·사회적 모순이 무신정권의 성립을 계기로 더욱 가속화됨으로써 전국 적인 농민·천민의 항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李貞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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