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2. 농민·천민의 봉기
  • 2) 무신정권 성립기의 농민·천민봉기
  • (5) 운문·초전민의 봉기

가. 명종 14년 이후 각지의 소요

 명종 14년(1184), 李義旼이 정권을 잡은 이후에도 농민봉기는 계속되었다. 무신집권기에 들어서서 더욱 심각해진 중앙정치의 혼란은 이의방·정중부·경대승에 이어 이의민이 등장한 이후에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명종 16년에 校尉 張彦夫 등 8명이 모반을 계획하다가 붙잡혔는데 그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정권을 잡은 자들은 비루하고 욕심이 많아 銀을 매우 좋아하여 벼슬자리를 팔아먹으며 불법한 행동을 많이 한다. 이러한 사람들의 목을 잘라 그 입에다 은을 물려가지고 朝野에 널리 보임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은을 탐내다가 죽은 것을 알게 하려고 하였다(≪高麗史節要≫권 13, 명종 16년 정월).

 교위는 6위에서 정9품의 최하급 군인장교로서 일반 병사에 준하는 낮은 대우를 받은 직책이었다. 하급군인들은 무신의 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만큼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들의 처우가 나아질 것을 기대하였는데 권세가들이 자신의 이익에만 급급하여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모반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지방뿐 아니라 개경 내부에서도 반란의 기운이 싹트고 있음을 보여준다. 무신집정자의 탐학은 지방관의 가렴주구를 방치하게 만들어 같은 해 7월 晋州와 安東에서도 농민봉기가 모의되었다.

진주수령 金光允과 안동수령 李光實은 모두 욕심이 많아 가혹하게 재물을 긁어 모았으므로 백성들이 견디지 못하여 반역을 모의하였다(≪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16년 7월 정유).

 이 계획은 정부가 두 수령을 贓罪로 유배시키고 주민들의 반란모의는 문책하지 않았던 까닭에 그대로 가라앉았다. 이와 비슷한 사건은 그 후에도 계속 일어나 이듬해 6월에는 가혹한 감찰로 吏民의 재산을 약탈하며 뇌물을 많이 받은 慶尙州道按察使 崔嚴威가 탄핵을 받았고, 동왕 20년에는 충주목사 鄭元獬가 백성에 대한 수탈이 심하여 충주민의 고소로 관직을 파하고 고향으로 돌려보낸 사건이 있었다. 또한 명종 17년 9월 초에는 서북지방의 順州 歸化所에 안치된 賊 수백 명이 흩어져 돌아다니면서 약탈을 감행하였다가 병마사에 의해 잡힌 기록이 보인다. 귀화소에 안치된 적이 고려에 침입했다가 포로로 잡힌 이민족인지 서북지방에서 봉기했던 농민들인지 그 실상은 알 수가 없으나, 국가는 이들을 일정한 지역에 예속시켜 관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이의민 정권기에 일어난 가장 대규모의 농민항쟁은 명종 23년의 金沙彌와 孝心으로 대표되는 雲門·草田民의 봉기였다. 이미 명종 20년부터 경주를 중심으로 경상도지역에 빈발했던 소요는 정부의 회유책이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므로 중앙에서 군대를 파견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항쟁이 계속되다가 23년에는 경상도전역이 반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들이 봉기하게 된 원인을 경상도 지역에 한정시켜 살펴보겠다.

 경상도 지역은 墾田結數에 비해 인구가 많아 농민들의 생활은 상당히 어려웠다고 보여진다. 그러면 여기에서 경상도와 다른 지역간의 경제적 조건을 파악하기 위하여 각 지방의 간전결수와 인구수를 살펴보자.161)≪世宗實錄地理志≫색인(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5), 323·375쪽 참조.

지방 地理志
墾田結數
1戶當 結數 1口當 結數 실제 각 고을
統計結數
京畿道
忠淸道
慶尙道
全羅道
黃海道
江原道
平安道
咸吉道
200,347
236,300
301,147
277,588
104,772
65,916
308,751
130,413
20,882
24,170
42,227
24,073
23,511
11,084
41,167
14,739
50,352
100,790
173,759
94,248
71,897
29,009
105,444
66,978
9.59(9.30)
9.78(9.77)
7.13(6.19)
11.53(11.0)
4.46(9.52)
5.95(5.95)
7.50(7.57)
8.85(8.85)
3.98(3.86)
2.34(2.34)
1.73(1.50)
2.95(2.80)
1.46(3.11)
2.27(2.27)
2.93(2.96)
1.95(1.95)
(194,270)
(236,114)
(261,438)
(264,268)
(233,880)
(75,908)
(311,770)
(130,406)
1,625,234 201,853 692,477 8.05(8.10) 2.35(2.46) (1,688,054)

<표 1>

*( )는 실제 각 고을 결수에 대한 통계.

 위의<표 1>에 의하면 호당 평균 간전결수가 많은 지역의 차례는 전라도·충청도·경기도의 순이며, 적은 도의 순서는 강원도·경상도이다. 1인당 간전결수는 경기도·전라도·평안도의 순서로 많으며 적은 도는 경상도·함길도의 차례였다. 함길도와 강원도는 원래 산이 많으며 토지가 척박하여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기에 미흡한 지역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이곳을 제외하고 비교해 보면 경상도가 평안도에 이어 두번째로 넓은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인구는 경상도가 다른 지역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조밀하였다.

 따라서 경상도 지역이 결당 인구밀도가 가장 높아 소규모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작농이나 전호가 많았으리라고 짐작된다. 이에 농민들은 생산기술을 발전시켜 단위면적당 생산량을 높임으로써 그들의 생활을 개선시키고자 하였는데 이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명종 19년부터 25년까지의 잇따른 흉년,162) 李貞信,<雲門·草田民의 蜂起>(앞의 책), 156∼157쪽. 지방관의 탐학, 높은 인구밀도는 그들의 노력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으며, 또한 지역적으로 중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조세를 운반하는 과정에서 소요되는 경비도 과중한 형편이었다.163)≪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租稅 공민왕 11년.

 이같은 상황에서 이의민은 명종 14년(1184)에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자 그의 친족들이 중심이 되어 경주 영역내에 농장을 만들었다고 짐작된다. 그의 토지겸병은 명종 19년부터 해마다 계속되는 천재지변과 더불어 농민을 압박하여 경주민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다. 한편 지방관은 각 지역에 할당된 조 세를 충당하기 위해 농장에 소속되지 않은 소농들에게 세금을 과중하게 부과시켰다. 이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소극적인 조세저항운동으로써 유랑민이 되었다가 이들이 하나의 세력으로 뭉쳐 중앙정부에 대항할 역량이 확보되니 급기야는 농민봉기로 발전해 가게 되었다.

 명종 23년의 김사미와 효심으로 대표되는 농민봉기 이전에 이미 명종 20년부터 경주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이들의 봉기 원인은 일반적인 민란처럼 권세가의 토지겸병으로 인한 유민의 증가와 지방관의 가혹한 수탈에 견디지 못하여 일어나게 된 것으로, 치밀한 계획하에 봉기했다기보다는 우발적으로 발발하게 되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그들이 일단 봉기하자 같은 처지에서 신음하던 주변 농민들의 적극적인 가담에 힘입어 경주전역으로 확산되었다.164)≪高麗史節要≫권 13, 명종 20년 정월.

 경주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정부는 여느 민란에서도 늘 그렇게 했던 것처럼 강·온 양면책을 구사하였다. 즉 사자를 보내어 농업과 양잠을 권장하여 경주민의 마음을 달래어 정부에 대한 적개심을 누그러뜨리려고 애씀과 동시에 안찰사로 하여금 반민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경주민의 반란은 더욱 확산될 뿐 조금도 진정되지 않아, 안찰사가 거느린 군대는 치열한 전투 끝에 참혹한 패배를 당하였다. 이같은 패배는 안찰사가 거느린 군대인 주현군의 대다수가 농민들이었으므로 적극적인 토벌의사가 없었음에도 기인한다고 보겠다. 경주민이 정부의 설득에 동요하지 않고 더욱 강경해진 이유는, 농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중앙에서 사자를 보내면서도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지방관에 대한 문책이나 수탈에 대한 방지책이 없었다는 것도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에 국왕은 조서를 내려 탐욕스러운 지방관의 출척을 다짐하였으나,165)≪高麗史節要≫권 13, 명종 20년 9월. 지방 수령의 탐학은 중앙과 연계되는 구조적 모순에서 기인하는 것이므로 제대로 시행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정부는 이번에는 중앙군을 보내어 반민을 진압하려고 애썼으나 제대로 성공시키지 못하였다.

 경주지역의 소요는 당시 집정자였던 이의민의 정치적 기반을 뒤흔들 수 있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의민은 경대승이 집권한 기간 동안 경주에 은둔하면서 자신의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닦았다. 그 결과 경대승이 죽은 후에 바로 중앙에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상경한 이후에도 이곳을 계속 그의 토착적 기반으로 삼고자 했다는 것은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경주에서 농민들이 봉기했다는 사실은 피지배층의 그에 대한 반감도 일조를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농민들은 경주가 본향이며 신분적으로는 그들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낮은 이의민이 정권을 장악하자 크게 충격을 받고 고무되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들도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든지 정치적 실력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과 더불어 그의 피지배층을 위한 적절한 시책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배층의 백성들에 대한 수탈은 이전에 비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토착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토지겸병을 자행하자 그들도 힘만 있으면 이의민처럼 될 수 있겠다는 자각과 더불어, 농민봉기의 불길이 번져나가게 되었다.

 이같은 피지배층의 봉기에 토호들은 아무 대책도 없이 자신에게 화가 미치지 않기만 바라고 있었다. 그들은 분노한 농민들의 기세가 두려워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었겠지만, 한편으로는 이의민 정권에 뚜렷한 애착을 갖고 있지 못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경주는 옛신라의 수도로서 다른 어느 곳보다도 자부심이 강한 지역이었다. 그 후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가 통일을 이룩하자 6두품 계열의 경주 지식층이 중앙에 진출하여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무신들이 정권을 전담하면서 그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정치권에서 소외되어 귀향할 수밖에 없었다. 경주 지배층의 무신들에 대한 거부감은 자신들의 이해와도 관련되는 뿌리깊은 것이었다. 더욱이 명종 3년에 金甫當이 난을 일으켰을 때, 이전의 국왕이었던 의종을 무자비하게 살해한 점도 이의민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여 토호들이 농민봉기에 소극적으로 대처하게 만들었다.

 ≪慶州先生案≫에 의하면, 정부는 명종 20년(1190) 봄에 농민봉기의 진압에 실패한 周惟氐를 대신하여 玄德秀를 안찰사로 파견하였다.166)<道先生案>(≪慶州先生案≫, 亞細亞文化社, 1980), 20쪽. 현덕수는 조위총이 봉기하자 서북 지역의 대다수 성이 모두 호응하여 일어났을 때, 끝까지 그에게 굽히지 않음으로써 정부가 이 난을 진압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정부는 농민군과 대치한 경험이 풍부한 현덕수를 경주에 보내어 탐욕스런 지방관을 출척하고 백성들을 위무하게 하여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큰 성과를 거둔 것 같지는 않다. 현덕수가 延州에서 성취한 전공은 그의 능력보다는 토착적 기반에 근거한 바가 컸기 때문이었다. 이 점은 그로부터 불과 네 달 후인 같은 해 12월에 중앙에서 다시 군대를 파견해야만 했던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후 농민군의 행방은 사료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은 정부군에 의해 패하여 죽거나 당하거나 뿔뿔이 흩어졌으며 일부 농민들만 계속 저항하기 위해 운문산에 숨어든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근거지를 방어하는 소극적인 대응을 할 뿐, 전멸을 당할 우려가 있는 적극적인 대항을 회피함으로써 농민봉기는 소강상태에 접어들게 되었다.

 농민군이 와해되자 중앙에서 파견된 정부군도 곧 돌아갔다. 당시의 집정자였던 이의민으로서는 그의 본향을 대상으로 벌이는 대대적인 토벌작전은 바라지 않았다. 이들을 체포하여 처벌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민심만 악화될 뿐 아무런 소득이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반민들의 움직임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인 명종 23년 2월부터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 때는 단순하고 우발적인 봉기에서 벗어나 보다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계획하여 주변의 반민들과 연합하는 대규모의 부대로 발전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