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2. 농민·천민의 봉기
  • 3) 무신정권 확립기의 농민·천민봉기
  • (3) 경주민의 항쟁

가. 명주·경주·금주에서의 농민봉기 양상

 경주지역의 농민항쟁은 이의민정권 때부터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즉 명종 20년(1190)의 경주, 동왕 23년의 운문·초전민의 봉기에 이어 신종 2년에는 경주·명주를 중심으로 다시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여기에서는 최충헌집권 이후 경주지역 농민항쟁의192) 경주민의 항쟁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들이 참조된다.
金晧東,<高麗 武臣政權下에서 慶州民의 動態와 新羅復興運動>(≪民族文化論叢≫2·3, 1982).
李貞信, 앞의 책.
성격을 살펴보자.

 최충헌집권 이후 신종 2년에 처음 농민들이 봉기한 곳은 溟州에서였다. 그들은 三陟·蔚珍 두 현을 함락시켰고,193)≪高麗史節要≫권 14, 신종 2년 2월. 이어서 東京에서 일어난 농민군과 힘을 합쳐 義城 등 주변의 주현을 침략하였다.194)≪高麗史≫권 57, 志 11, 地理 2, 安東府 義城縣. 그들이 반란을 일으킨 원인은 여느 민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토지소유관계의 모순으로 인한 농민의 궁핍함과 지배층의 탐학이었을 것이다. 명종 18년 3월의 조서에서 파악할 수 있듯이 당시 고려사회의 당면한 과제가 대토지겸병으로 인한 유이민의 증가였다. 최충헌 역시 정권을 유지하고 농민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는 대토지소유의 억제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봉사10조에서 이를 거론하였다. 그러나 봉사의 후속 조치로서, 신종대에 그가 이같은 정책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최충헌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백성이 아닌 자신의 힘에 의존하기 위해 스스로 대토지소유자가 되었으며 사병을 양성하였다. 결국 최충헌의 의도는 봉사10조를 통해 지배층의 재편성을 기도했다고 보여진다. 필요없는 관리를 축출해야 한다는 명분하에 정치적인 세력을 강화하였고, 대토지소유자를 근절해야 한다고 하여 이의민 族人이 소유했던 토지를 빼앗아 그나 그에게 동조하는 慶州吏에게 분배하여 경제적인 재편성을 이룩하려 했으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이의민의 사후에 자신의 토지를 되찾기를 희망했던 농민들은 정부의 기만책에 분노가 더욱 커지게 되었다 요컨대 농민봉기는 토지소유로 인한 모순이 해결되지 않는 한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런데 난이 일어난 지 불과 두 달이 되지 못하여 반민들은 항복하였다. 이유는 宋公綽의 설득이 주효하여 항복했다고 한다.195)≪高麗史節要≫권 14, 신종 2년 3월. 그런데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워서 일으켰으며, 난의 규모가 점차 확산되고 있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이들이 너무 쉽게 굴복한 느낌이 든다. 더구나 송공작은 왕의 명을 받아 명주의 반민들을 회유하였는데, 울진·동경 반민들의 우두머리까지 와서 항복했다고 한다. 이들이 반란을 포기했던 이유는 농민들의 절박한 토지소유관계 모순의 해결보다는 金順 등 반민 지도부에 대해 일정한 권익을 보장한 정부의 설득이 주효했을 것이다.196) 慶州 金氏는 옛 신라의 왕족으로서 고려시대에는 경주 토호였다. 따라서 金順 등은 농민들의 목적과는 달리 무신정권 성립 이전 문신들의 경주에서의 기득권 회복과 함께, 운문·초전민의 봉기 이후 경상도지역의 재편성으로 약화된 경주 지역세의 회복이 더 큰 목적이었으리라 생각된다(李貞信, 앞의 책, 200쪽). 그러나 반민 지도부의 항복 결정은 그들을 믿고 봉기했던 농민군에게 큰 배신감을 느끼게 하여 항복을 권유하는 정부나 반민 지도층의 의사를 따르지 않고 운문산과 태백산으로 들어가서 항쟁을 계속하였다. 태백산에 관해서는 신종 6년(1203) 8월에 정부군의 토벌로 太白山賊魁 阿之를 붙잡은 기록이 보인다.197)≪高麗史節要≫권 14, 신종 6년 8월. 아마 늦어도 신종 2년부터 이곳이 반민들의 근거지가 되었으리라 추측된다.

 운문산에 들어간 농민들은 주변의 농민들을 포섭할 뿐만 아니라 노예들까지도 호응하도록 부추겼다. 당시 운문산은 명종 23년(1193)의 운문·초전민의 봉기 이래로, 피지배층의 입장에서는 정부의 가렴주구 등이 미치지 못하는 안락한 근거지로 인식되어진 것 같다. 그리하여 운문산의 농민군은 명종 24년 이후에는 그리 활발하게 싸우지는 못하였지만, 사회적으로 수탈당하는 계층에서 흘러 들어오는 사람들에 의해 점차 인구가 늘어나고 전력도 강화되고 있었다. 이 속에는 노예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신종 3년 5월에는 밀성관노 50여 명이 관가의 은기를 훔쳐 운문산의 반민에게 합류했다는 기록도 보인다.198)≪高麗史節要≫권 14, 신종 3년 5월.

 또한 신종 3년 8월에는 경상도 金州(金海)에서 호족과 대립하고 있는 주민들이 보인다. 즉 금주의 雜族人들이 모의하여 무리를 지어 난을 일으켜 호족들을 죽이니 호족이 성밖으로 피신하였다고 한다. 副使 李迪儒가 활을 쏘아 저지시키려 하자, 그들이 항의하기를,“우리들은 포악하고 탐오한 자를 제거하여 고을을 깨끗이 하고자 하는데 무슨 이유로 우리를 쏘는가”하였다. 이에 적유가 외적으로 잘못 알았다고 거짓으로 사과하고, 성밖의 호족과 비밀리에 모의하여 이들을 협격하여 죽였다고 한다.199)≪高麗史節要≫권 14, 신종 3년 8월. 이 봉기는 금주의 잡족인이 토호인 호족의 수탈에 저항하여 일으킨 것으로, 이들의 항의에 의하면 호족과의 갈등만을 강조하고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과는 별다른 적대감을 나타내고 있지 않다. 또한 앞서 진주의 정방의처럼 주현에 대한 중앙통제력의 약화에 편승해서 토호들이 발호하여 농민 수탈을 강화함에 따라 발생했던 소요임을 알 수 있다.

 김순이 항복함에 따라 경주의 소요는 일단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 때 경주에서는 각 토호들 사이에서 주도권 다툼이 일어났으니, 대표적인 것이 이의민 세력과 최충헌을 배경으로 하여 새롭게 등장한 관료세력이었다.

慶州副留守 房應喬를 파면하고 郎中 魏敦謙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처음 최충헌이 이의민의 친족을 처단할 때 慶州別將 崔茂가 경주 관리의 명을 받들어 이의민의 친족인 思敬 등 여러 사람을 잡아서 형벌을 내렸다. 이에 사경의 친족인 伯瑜·直才 등이 원망하며 응교에게 호소하기를,‘茂가 난을 일으키려고 합니다’하였다. 방응교가 이 말을 믿고 그를 가두었더니 백유·직재가 밤에 옥에 들어가서 최무를 죽였다. 그런데 응교가 함부로 살해한 죄는 묻지 않고 도리어 무의 族人인 用雄·大義 등을 잡아 죽이려고 하니 州人이 분노하고 원망하였다. 얼마 후에 용웅·대의가 백유·직재를 죽이니 용웅 또한 다른 사람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이에 대의 등이 주의 무뢰배를 모아 횡포한 짓을 함부로 하였는데 응교 또한 제어하지 못하였다(≪高麗史≫권 21, 世家 21, 신종 3년 12월).

 신종 초의 경주는 완전히 무법천지였다. 최충헌은 그가 쿠데타를 일으킨 명종 26년(1196)에 이미 이의민의 삼족을 처단했다. 이의민의 족인을 죽일 때 앞장섰던 인물은 경주 최씨인 별장 최무였다. 이처럼 이의민이 제거됨으로써 경주 이씨의 세력이 약화된 데 비해 고려 전기부터 명문귀족이었던 최씨의 지위가 강화되었다. 최무가 이의민의 족인을 죽인 것은 최충헌의 명령에 의해서라고 판단되는데 이로써 경주 최씨는 최충헌과 일정한 연계를 가지게 되었다. 이제 이의민의 세력은 약화되어서 나머지 친족들을 방면하더라도 경주는 별다른 동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최충헌은 회유책의 일환으로써 그가 집권한 지 5년만인 신종 3년(1200)에 이의민의 남은 족인들을 풀어주었다. 그러나 경주에서 정치적 주도권 외에 경제적 기반을 보유하고 있던 이의민의 족인들은 자신의 세력권에 최충헌을 배경으로 한 새로운 관료세력의 정치적·경제적인 침투가 강화되자, 서로 견제하여 드디어는 유혈사태까지 초래하게 되었다.

 이같은 의민파와 충헌파의 대립은 현재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자가 최충헌이었으므로 당연히 충헌파의 우세로 속단할 수 있지만 이의민 족인들의 세력 또한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최충헌은 경주 토호들의 주도권 쟁탈전에만 매달릴 겨를이 없었으니 그것은 진주에서의 분란 때문이었다.

 최충헌정권의 취약성을 간파한 이의민 족인들은 앞서 경대승정권기에 경주를 그들의 영역권 내에 두었듯이 이번에도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배후세력이었던 이의민이 존재하지 않는 지금, 장기적으로는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의민파인 伯瑜·直才가 죽임을 당하고, 최충헌과 연결되고 있던 최무의 족인인 대의가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 틈을 타서 정부는 이의민파이거나 그들에게 호의적이었던 경주부 유수 방응교를 파면하고 위돈겸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경주지역의 주도권 쟁탈전은 이의민파의 패배로 끝나게 되었다.

 김순 등과 같이 무신정권의 성립 이전에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던 토호들은 이의민이 살해되고, 의민파의 세력이 제거됨에 따라서 그들이 다시 경주를 장악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었다. 그런데 사태는 엉뚱하게 변질되었다. 이의민세력이 제거됨에 따라 최충헌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관리들이 경주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일찍이 최충헌이 김순에게 경주의 지배권을 이전의 문신토호들에게 돌려주기로 했던 약속은 무위로 돌아가 버리게 되었다. 이에 경주 김씨를 중심으로 한 옛문신 귀족들은 무신정권하에서 그들의 영화를 되찾기가 어려움을 간파하고 옛신라의 부흥을 꿈꾸게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신종대의 신라부흥운동은 경주의 토호들이 주도하여 일으킨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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