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2. 농민·천민의 봉기
  • 4) 외세침입기의 농민·천민봉기
  • (2) 몽고 1∼3차 침입기의 농민·천민봉기

(2) 몽고 1∼3차 침입기의 농민·천민봉기

 외세의 침입에 의한 통제력의 이완을 틈타 일어났던 농민봉기는 몽고가 침략한 고종 18년(1231)부터 본격화되었다. 몽고의 사신 著古與의 살해를 빙자하여 고려와의 교류를 단절한 몽고는 고려에 군대를 대대적으로 파견하였다. 몽고가 침입했다는 소식을 들은 각지의 반민들은 정부와 연합하여 외적을 물리치고자 하였다. 즉 馬山의225) 馬山은 지금의 京畿道 坡平에 있다(≪新增東國輿地勝覽≫권 11, 坡州牧 驛院條). 초적 괴수 2명은 최우를 찾아와 그들 휘하에 있는 5천여 명의 반민을 대몽고 항전에 투입시키기를 요청하였으며, 광주 冠嶽山 초적 50여 명도 최우의 청으로 정규군인 3군의 하나인 우군에 충원되어 黃州에서 몽고병을 격퇴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초적은 유이농민집단으로서 12세기부터 대정부 항쟁을 주도했던 민란의 주체세력이었다. 그런데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이들은 고려를 구출하기 위하여 일어섰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려사회에서 가장 천시되던 노비들도 몽고를 축출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충주에서는 관노들의 대몽항전이 민란으로 바뀌어지게 되었다. 즉 충주지방에 몽고군이 침입하자 충주판관 庾洪翼·충주부사 于宗柱와 兩班別抄들은 모두 다 성을 버리고 달아나는데 오직 奴軍·雜類만이 남아서 몽고군을 물리쳤던 것이다. 몽고가 물러간 후, 부사 우종주 등이 돌아와서 관가와 사가의 은그릇을 점검하였는데 노군은 몽고군이 약탈해 갔다고 하였다. 그러나 호장 光立 등 5∼6명이 이 말을 믿지 않고 노군의 우두머리를 죽이려 하였으므로 충주관노들이 봉기하였다. 그들은“몽고군사가 오면 다 달아나 숨어버리고 성은 지키지 않다가 이제는 몽고군이 약탈한 것까지 우리에게 죄를 덮어 씌우려 하니 우리가 어찌 먼저 도모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면서 토호 등 평소에 가혹하게 수탈하던 지배층을 살해하였다.226)≪高麗史節要≫권 16, 고종 19년 정월.

 충주노비의 난은 최우가 注書 朴文秀·前封御 金公鼎을 安撫別監으로 파견하여 회유하게 하고, 노군도령인 令史 池光守를 교위에, 승려 牛本을 충주 大院寺 주지로 각각 임명하여 이들을 진정시켰다. 이들의 난이 이렇게 쉽게 진정될 수 있었던 까닭은 봉기했던 농민들 자신이 관리들의 부당한 책임전가와 생명 위협에 반발하여 충동적으로 일으킨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란 지휘자에 대한 직책 수여 등으로 일단 안정되었으나, 최씨정권의 강화천도 직후인 같은 해 8월에 재봉기하게 되었다.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된 과정은 나타나지 않는다. 추측컨대 1차 봉기 이후 충주 지배층의 보복에 직면했을 것이며, 또한 정부가 강화천도를 감행하여 적극적인 대몽항쟁을 수행할 의지를 보이지 않은 데 분개하여 일어났던 것 같다. 2차 봉기의 주모자 대원사 주지인 우본은 대원사의 승도와 관노를 규합하여 난을 일으켰으나 휘하 노군의 배반으로 우본이 살해됨으로써 난이 진압되었다.227)≪高麗史節要≫권 16, 고종 19년 9월.

 몽고의 1차 침입 후 최우는 강화천도를 감행하였다. 최우에 의하여 독단적으로 결정된 강화천도는 최씨정권이 적극적인 대몽항쟁을 전개하여 그들을 격퇴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몽고의 침입과 농민항쟁을 피하여 자신의 권익과 정권의 안위만을 집착한 결과에서 나타난 자구책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개경민으로서는 생활기반을 잃게 되어 경제생활에 큰 위협이 초래되는 문제이므로, 백성들의 동요는 심각했다. 고종 19년 7월 6일 왕이 개경을 출발하면서 개경민의 이주도 함께 진행되었는데, 이즈음 어사대의 皂隷인 李通이 난을 일으켰다.

어사대의 조예 李通이 경기지방의 草賊과 城中의 노예를 불러모아 반란을 일으켜 留守 兵馬使를 쫓아 내었다. 그리고 三軍을 즈직, 여러 절로 글을 보내 승도를 불러 모았으며 공사의 錢穀을 약탈하였다(≪高麗史節要≫권 16, 고종 19년 7월).

 외세 침입에 따른 백성들의 고난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자신들의 안위만을 위하여 강화도로 떠나는 국왕과 문무관료들에게 배반감을 느낀 개경민은 어사대의 조예 이통을 중심으로 봉기하였다. 이들은 양반이 버리고 간 개경을 수호하기 위하여 경기도지방의 초적 및 승도와 연합하여 삼군을 조직하였다. 개경민의 봉기는 앞서 대몽전 초기 마산초적 등 유이민들의 우호적인 대정부 관계와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강화도 천도를 계기로 민중들에게 반몽에 반정부의 감정이 더해지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여진다.

 외래의 침략자보다 이들 반민을 더 무서워한 정부는 이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천도 직후의 혼란 속에서도 급히 3군을 편성, 파견하였다. 강도에서 3군이 편성되자 개경의 留守軍을 축출시켰던 농민군은 정부군이 상륙하는 즉시 昇天府(지금의 豊德)의 동쪽 교외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였다. 이통이 이끄는 반민이 퇴각하여 미처 개경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정부의 견룡행수 別將 李甫와 鄭福綏가 이끄는 선봉 야별초 부대가 기습전을 벌여 개경성을 먼저 점령함에 따라 이통의 군대는 무너지고 말았다.

 강화천도 직후 몽고는 다시 침입했다가 처인성에서 몽고의 대장 撒禮塔이 전사하자 그 해 12월에 철수하였다. 몽고가 물러간 후 이번에는 龍門倉에서 반란이 일어났다.228)≪高麗史≫권 103, 列傳 16, 李子晟. 용문창은 예성강에 가까운 개경의 서쪽 근교에 위치하고 있으며 병량의 비축과 공급을 맡은 창름이었다.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에도 용문창이 그 기능을 유지하여 많은 미곡을 비축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천도한 지 아직 1년이 지나지 않았으므로 양식을 어느 정도는 보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난의 주모자는 居卜과 往心인데, 구체적으로 봉기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이들이 용문창을 노린 것으로 보아, 고종 19년 8월부터 12월까지의 계속된 전란으로 인해 수확을 거두지 못하여 기근에 시달린 주민들이 양식을 확보하기 위해 봉기한 것으로 판단된다.

 용문창의 반민이 봉기한 지 한 달도 되지 못하여 이번에는 慶州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경주는 일찍이 명종·신종대에도 농민항쟁이 조직적으로 전개되어 고려정부가 두려워하던 곳이었다.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강도정부는 즉시 李子晟을 보내어 이들을 진압시키기에 노력하였다.

이자성이 군사를 거느리고 밤낮으로 빨리 달려서 永州城에 웅거하여 적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적은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정해진 날에 모이기를 요구하였는데, 여러 고을이 망설이고 있던 중 자성이 영주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안정하였다. 적은 자성군이 먼 곳으로부터 급히 왔으므로 그 피로함을 타서 이를 치고자 하여 영주의 남쪽 교외에 집결하였다(≪高麗史≫권 103, 列傳 16, 李子晟).

 경주민 崔山·李儒 등을 중심으로 일으킨 농민봉기는 신종년간 농민항쟁의 연장으로 보인다. 이자성은 경상도 농민들이 연합세력을 형성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밤낮으로 말을 달려 영주성에 도착하였는데, 당시 반민의 수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229)≪東文選≫권 26, 麻制, 除宰臣朴文成李子晟宋恂任景肅 敎書. 이 기록이 다소 과장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관군이 주둔하고 있는 영주까지 진출하여 선공을 도모하는 것으로 보아 그 세력이 자못 강성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규모의 반민이 운집하여 관군과 대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직력이 취약한 이들의 약점을 간파한 이자성의 기습전에 의해 역습을 당하여 패배하였다. 경주에서의 봉기는 대몽전과, 앞서 일어났던 이통, 충주 관노, 용문창의 반민 등 여러 차례 민란을 수습한 바 있는 노련한 이자성의 전술에 의해 경상도 전역에 확산되지 못하고 진압되었다.

 이 때는 몽고의 2차 침입이 끝났던 시기로서, 이들의 봉기는 외세를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대정부 항쟁이었다. 강화천도를 계기로 정부가 효율적으로 반란을 진압하지 못하는 것을 기화로 최산·이유 등 경주지역 토호세력과 농민군이 힘을 합하여 일으킨 반란으로 보인다. 최충헌정권 이래로 경주가 중앙에 의해 철저하게 견제당하여 주변의 안동이나 상주에 비해 지역세가 약화되고, 또한 몽고 침입 이후 강도정부가 국가재정을 남도의 농민에 의존하고 있었던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같은 시기 이번에는 서경에서 畢賢甫와 洪福源 등이 宣諭使 대장군 鄭毅와 朴祿全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230)≪高麗史節要≫권 16, 고종 20년 6월. 이들의 반란은 앞서 고종 19년 8월에 고려에 주재하는 몽고의 다루가치〔達魯花赤〕를 모살코자 한 고려정부의 대몽 강경조처에 대해 서경민이 몽고에 보복당할까 두려워 반발하던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것이다. 고려정부는 강화도로 천도한 후 다루가치를 통한 몽고의 간접적인 간섭으로부터의 통치권 회복을 기도하여 이같이 시도한 것이었다. 그들은“만일 그렇게 한다면 우리 서경이 平州(지금의 평산)처럼 몽고 군사에게 전멸을 당할 것이다”라고 하며 서경순무사 대장군 閔曦를 잡아 가둔 적이 있었다.231)≪高麗史節要≫권 16, 고종 19년 8월. 평주는 고종 18년 11월 몽고의 1차 침입 때 몽고의 첩자를 가두었다가 몽고의 공략을 당해 주민은 물론 개나 닭 한 마리조차도 남기지 않고 모두 도륙당했던 곳이었다. 최우는 서경에 가병 3,000명을 보내어 이들을 진압시킨 후, 몽고로 도망간 홍복원을 제외한 반란의 주모자를 모두 잡아 죽이고 나머지 백성들은 다 귀양보내어 서경을 폐허로 만들었다.232)≪高麗史≫권 23, 世家 23, 고종 20년 12월. 이 반란은 필현보·홍복원 등 반역자들이 몽고에 항복하여 서경에서의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지만, 다수의 서경민이 호응한 까닭은 강화도로 천도하여 자신의 안위만을 구하려는 개경 지배층에 대한 반감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후일 서경민이 몽고에 투항하여 서경 이북에 동녕부가 설치된 사실은 이같은 최우의 가혹한 진압이 초래한 바도 있다고 볼 수 있다.

 몽고의 3차 침입은 고종 22년∼26년(1235∼1239)까지 지속되었다. 이번 침략에서 몽고는 전술을 바꾸어 전번처럼 강도의 정부와 교섭을 시도하지 않고 그저 고려의 전국토를 유린하였다. 이 때 일어난 민란이 고종 24년 봄에 발생했던 李延年의 난이다.

그 때 草賊 李延年 형제가 原栗(전남 담양 동15리)·潭陽 등 여러 고을의 무뢰배들을 규합하여 海陽(光州) 등 여러 고을을 함락시켰다. 적은 金慶孫이 나주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주성을 포위하였는데, 적의 기세가 대단히 왕성하였다. …이연년이 그의 도당에게 말하기를,‘지휘자는 龜州 싸움에서 성공한 장수이다. 인망이 대단히 높아 내가 이 사람을 꼭 생포하여 都統으로 삼을 예정이니 활을 쏘지말라’고 하였다. 혹시 그가 流矢에 부상당할까 염려하여 활을 일체 쓰지말고 짧은 칼로 공격하라고 지시하였다(≪高麗史≫권 103, 列傳 16, 金慶孫).

 이연년을 비롯한 전라도의 초적은 원율·담양 등을 근거지로 하여 오랜 기간 동안 활약하면서 점차 그 수가 증가하여 고종 24년에는 광주·나주를 침공할 정도로 큰 세력을 이루었던 것 같다. 반민들은 주로 유이민들인데, 이들이 나타나면 관리들이 숨거나 음식을 대접할 정도까지 되었다고 하니233) 李齊賢,≪櫟翁稗說≫前集 권 2. 이는 여러 차례 중앙정부의 토벌책이 실패한 까닭이었다. 정부의 진압작전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이들의 세력은 더욱 강성해져 이연년은 스스로「百濟都 元帥」로 칭하였다.234)≪高麗史≫권 99, 列傳 12, 崔惟淸 附 璘條에는“時原栗人李延年 自稱百賊都元帥”라 하여 百濟를 百賊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정부가 이들을 낮추어 일부러 百賊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이 때는 몽고군의 발길이 처음으로 전라도까지 미치고 있어서 민심이 크게 동요되던 시기였다. 이연년은 수 차례의 승리와 우세한 병력을 믿고 김경손과의 싸움에 지나치게 안일하게 대처하였다. 전라도지휘사에 새로 임명된 김경손은 일찍이 몽고의 1차 침입 때 靜州分道將軍으로 龜州城에서 적을 물리친 경험이 있는 용장이었다. 이연년은 외적방어에 큰 공을 세운 김경손을 사로잡아 그의 휘하에 두기 위하여 지나치게 김경손의 안위를 염려하다가 오히려 그가 잡혀 죽임을 당함으로써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 틈을 타서 관군이 반격을 가해 오니 농민군은 지휘자의 죽음에 사기가 저하되어 우왕좌왕하다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무너져 난은 끝나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김경손을 생포하여 도통으로 삼으려 했던 것으로 보아 단순한 대정부 항쟁이라기보다는 당시 전라도를 침입하기 시작한 몽고군을 방비하려 했던 의도도 보인다. 이연년이 자칭〔백제도원수〕로 일컬은 것은 백제를 부흥시키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보다는 전라도 주민들에게 호응받기 위한 계책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 고려정부는 천도를 계기로 백성의 신뢰를 상실했으므로 백제를 내세운 민심수습이 더욱 필요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이연년은 농민들의 대몽항쟁의 열기를 보고 일정한 영역을 확보하여 굳게 방어한다면 전라도 지역만큼은 몽고의 발길에 짓밟히지 않을 수 있으리라 판단했던 것 같다. 이연년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민의 항쟁은 민중의 의사를 대변하여 외세를 방어하고자 하였으나, 반란의 파급을 두려워한 정부의 토벌군에 의해 패배함으로써 끝나 버리고 말았다.

 이연년 등 전라도민의 봉기를 끝으로 농민항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몽고의 침입으로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는 농민들은 외세침입은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면서 농민수탈에는 유능한 지배층을 경원시하면서 점차 고려 정부에 대해 반감이 쌓여갔다. 이같은 여건이 고종 40년(1253) 이후에 이르게 되자 백성들은 고려정부에 대한 불만을 오히려 외세 즉 몽고에 항복하는 형태로 저항하게끔 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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