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1. 몽고 침입에 대한 항쟁
  • 1) 몽고족의 흥기와 여·몽관계의 성립
  • (3) 강동성 전투와 여·몽관계의 성립

(3) 강동성 전투와 여·몽관계의 성립

 고종 5년 몽고군의 고려 진입은 몽고로부터 이반한 동진을 복속시킨 이후의 즉흥적인 작전이 아니었다. 이 때 고려에 진입한 몽고의 명분은 고려를 도와 영내에 들어와 있는 거란족을 함께 토벌하겠다는 것이었지만 당시 몽고군은 사전에 짜여진 일정한 계획에 의거해 고려에 입경한 것이며 고려의 내부 사정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컨대 몽고는 금나라로부터 이탈한 동진국을 복속시키고 아울러 금의 배후에 있는 고려와 일정한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차후에 있을 대금 공세를 착실히 준비하였던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몽고의 고려 진입은 동진에 대한 군사작전과 연계를 갖는 것이었으며 금에 대한 정벌을 전제로 그 배후를 차단시키는 전략의 일환이었다고 하겠다. 당시 거란족의 침입에 처한 고려의 상황은 몽고군의 고려 진입에 하나의 좋은 구실을 제공한 셈이다.

 몽고의 돌연한 입경사태에 직면한 고려정부는 경악과 함께 그 진의의 소재를 몰라 크게 당황하였다. 고려정부는 몽고군 진입에 대하여 명확한 지침을 가지지 못하였다. 따라서 몽고군에 대한 대처는 상황을 비교적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고려군의 원수부, 즉 조충과 김취려 등에 의해 임기응변적으로 이루어졌다.

 거란족이 서경 동북의 강동성에 입거하였다가 포위된 것은 고종 5년 12월경이었다. 동진군을 대동한 몽고군은 처음 동북면으로부터 진입, 거란족을 따라 이들이 입거해 있던 강동성으로 직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거란의 수성에 시간이 지연되고 추위와 폭설 등의 기상적 조건까지 겹쳐 고려의 개입을 촉구하게 되었고 이에 고려는 1천 석의 군량 조달에 이어 몽고군의 요청으로 강동성전투에 합세, 연합으로 攻城戰을 전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강동성전투의 주도권은 자연 몽고군이 가지고 전투를 운영하는 식이었고 고려는 몽고의 요구에 응하여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형식이었다.

 강동성전투에서 몽고는 주위에 너비와 깊이가 각 3m가량되는 큰 도랑, 즉 塹隍을 개착하였고, 이로써 적의 탈출 혹은 引兵出擊을 봉쇄하는 방법으로 적을 압박하였다. 이러한 전법은 직접적인 공성전보다는 우회적이면서도 식량 등이 제한된 城守戰에 대한 대응으로는 매우 효과적인 전술의 하나였다. 이 때문에 차후 몽고군의 대고려전에서도 이같은 전투방식이 종종 등장하였다.

 당시 연합군은 몽고의 주도하에 전투 담당지역을 분할하였는데 몽고가 대략 성의 남동지역, 동진이 서북지역, 그리고 고려가 동북지역을 분담하였다고 보여진다. 지도에 의하면 강동성은 특히 동남쪽이 열린 지형으로, 공수전을 전개할 때 일차적인 전투 가능지역이다. 몽고가 동남면을 담당한 이같은 사실은 그들이 작전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던 사실과 연관된다. 이 강동성 포위작전에는 고려측에서 상장군 김취려가 지병마사 韓光衍 등과 함께 출정군의 일부를 거느리고 참전하였는데, 이같은 포위 공세에 몰린 적은 그 우두머리 함사가 목숨을 끊어 항복함으로써, 전란은 종식되었다. 이 때 항복한 적의 관인·군졸·부녀는 모두 5만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고종 6년(1219) 2월 강동성이 함락됨으로써 3년여에 걸친 거란족의 횡행은 종식되었다. 그러나 이후 고려는 대외관계에 있어 보다 심각한 부담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몽고의 합진·찰라는 강동성 함락 후 고려 원수부의 조충·김취려와 더불어 여·몽간의 형제맹약을 체결하고, 이러한 관계에 입각해 추후 몽고는 동진을 경유하여 매년 세공을 고려로부터 거두는 것을 약정하였다.243) 高柄翊,<蒙古·高麗의 兄弟盟約의 性格>(≪白山學報≫6, 1969;≪東亞交涉史의 硏究≫, 一潮閣, 1970). 아울러 蒲里帒完은 몽고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고려조정에 파견되어, 정식으로 화친 맺기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고려 영내에서 철수하였는데, 이 때 몽고군은 동진인 40여 명을 잔류시켜 고려어를 학습케 하면서, 그들이 다시 올 때를 대비케 하였다. 동진인 등 40명이 의주에 머물도록 하는 조처는 몽고의 대고려 장기전략으로서 불안감을 고조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더욱이 그 해 가을에 몽고군이 고려에 다시 올 것이라는 정보도 있었다. 그리하여 정부는 7월 崔正芬 등 8명을 국경지대인 북계 興化道의 여러 성에 파견, 병기 및 군수상황을 점검하고 작은 성은 그 병력과 주민을 큰 성으로 합치는 등 몽고의 재침에 대비하였다.

 고종 6년 여·몽관계 성립 이후 양국의 관계는 공물의 징구를 그 기본 내용으로 하고 있다. 몽고는 이를 위하여 사전 약정에 의거해 10명 전후의 사신단을 동진을 경유시켜 고려에 보내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몽고 사신 著古與의 피살사건 이전인 고종 11년까지 유지되는데 몽고의 歲貢使는 고종 6년부터 11년까지 대개 동진의 사절을 동반하여 매년 고려에 내도하였다. 특히 고종 8년의 경우는 1년에 6회라는 과중한 빈도를 보이고 있는데, 이들에 의한 세공 부담은 고려로서는 적지 않은 압박이 되었던 것 같다. 가령 고종 8년 8월 저고여 일행이 皇太弟의 명령이라 하며 요구한 물품 및 수량은 수달피 1만장·細紬 3천 필·細紵 2천 필·綿子 1만 근·龍團墨 1,000丁·筆 200관·紙 10만 장·紫草 5斛·葒花 50斛·藍筍·朱紅 각 50斛, 雌黃·光木桼·桐油 각 10斛씩이었다.244)≪高麗史≫권 22, 世家 22, 고종 8년 8월 갑자.

 그리고 이와 별도로 몽고 원수 찰라와 포리대완 등에 보낼 물품을 요구하였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물건은 왕 앞일지라도 거리낌없이 내던지는 무례함을 자행하였다. 이 무렵 고려가 몽고 황태제에게 보내는 편지내용은 사정을 가리지 않는 몽고의 혹심한 공물 징구로 인하여 어려움에 처한 고려의 입장을 전하고 있다 즉 고려는 황태제의 요구에 응하지 못하는 품목에 대하여“매번 명령을 내려 끝없이 요구하니 저희가 이를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한정된 산물로 무한한 요구에 응하는 것이 결코 가능하지 못함을 아실 것입니다”라고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이처럼 당시 몽고는 위에 든 품목 이외에도 靑絲·綾走絲 등 고려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건뿐만 아니라 처녀, 각종 기술자와 중국어에 능한 사람들까지 요구하였다.

<尹龍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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