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1. 몽고 침입에 대한 항쟁
  • 2) 몽고의 고려 침입
  • (3) 몽고의 2·3차 침입

가. 몽고의 2차 침입

 고려정부는 천도를 전후하여 몽고에 대한 적대조치를 한층 노골화하였다. 천도작업이 진행 중이던 고종 19년 7월 초 내시 尹復昌을 북계에 파견, 다루가치의 무장을 해제시키려 하였던 조처는 고려의 이같은 항전의지를 명백히 한 것이었다. 윤복창은 북계의 의주에 이르러 다루가치에 의해 사살되었지만, 당시 이들 북계에 잔류한 몽고세력들과 이에 대항하는 반몽세력 간에 북계지역을 중심으로 심각한 갈등이 전개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다루가치에 대해 노골적으로 적대행위를 보여준 것은 천도를 전후한 시기 고려 정부의 북계지역에 대한 정책에 의거한 것이며, 이에 의하여 고려에 잔류한 몽고세력은 상당한 타격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元史≫에서 고려가 다루가치 72인을 모두 죽였다고 한 것은 어느 정도 이 무렵 잔류 몽고 세력의 곤경을 나타낸 것으로 보여진다.251) 周采赫,<高麗內地의 達魯花赤 置廢에 관한 小考>(≪淸大史林≫1, 淸州大, 1974). 고려의 강화천도와 잔류 몽고세력에 대한 압력이 가중되는 이같은 상황에서 살례탑에 의한 몽고의 두 번째 침입이 개시되었다.

 살례탑의 몽고군은 대략 고종 19년(1232) 8월부터 12월까지 4개월간 고려에 대한 정복전쟁에 종사하게 되는데 이 기간 동안 몽고군의 구체적 동태와 군사행동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려사≫세가의 경우 역시 이 시기의 기록은 거의 공백으로 되어 있고, 대신 주로 몽고측에 보낸 고려의 외교문서 8통을 李奎報의≪東國李相國集≫으로부터 전재하여 그 결락을 보완하고 있는 실정이다.

 몽고는 1차 침입 이후 다루가치의 설치, 附蒙分子의 영합에 힘입어 북계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힘입어 몽고군은 고려의 서북부 지역을 점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살례탑은 본격적인 군사행동을 유보하면서 江都에 사람을 보내어 강도정부의 환도와 그 선행조치로서 국왕과 최우의 몽고 입조 혹은 출륙문제를 요구하였다.

 살례탑의 몽고군이 아직 북계에 주둔하고 있는 동안, 이미 몽고군의 일부는 고려의 내륙 깊숙히 내려와 노략질을 서슴지 않았다. 이 사실은 현종조 거란 침입기에 제작된 소위 符仁寺 소장 대장경판이 고종 19년에 소실되었다고 한 기록에 의해 확인된다. 고종 19년 제2차 침입에 있어 살례탑이 거느린 몽고군 본대는 12월 處仁城에서 살례탑이 죽음으로 경기 이남 지역을 내려가지 못하고 회군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 때 부인사 대장경의 소실 사건은 몽고의 선발부대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며 이것은 살례탑의 남진 이전 이미 일부 부대가 본토에서 가혹한 군사행동을 자행하고 있었던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별동대의 남진 경로와 그 구략 범위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지만 몽고군의 침략상에 대해서는 수년 후인 고종 24년(1237) 팔만대장경의 각판을 알리는 이규보의<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심하도다. 達旦이 환란을 일으킴이여! 그 잔인하고 흉포한 성품은 이미 말로 다할 수 없고, 어리석고 어두움이 짐승보다 더 심하나이다. …이 때문에 저들이 경유하는 곳에는 불상·梵書가 모두 불태워졌고, 符仁寺 소장의 대장경 판목도 또한 불태워져 남아나지 못했던 것입니다(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25).

 현재 대구 팔공산의 부인사 터에는 통일신라 때 제작된 동서 쌍탑의 석탑을 비롯하여 석등·당간지주 등 각종 석제 조형물들과 礎石·長臺石 등의 석재가 남아 있는데, 이들은 모두 심하게 파손되어 있어 침략군에 의해 얼마나 철저히 유린되었는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252) 慶北大博物館,≪符仁寺地表調査報告書≫(1986).

 경상도 일대에서 횡행하던 선발대에 뒤이어 적장 살례탑이 주력부대를 이끌고 남하한 시기는 고종 19년(1232) 10월경의 일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남진 도상의 살례탑의 군대가 11월 廣州에서 고려군과 접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개경을 거쳐 漢陽山城을 함락시킨 후 광주성을 포위 공격했다가 부사 李世華에 의해 지휘된 광주민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한다. 그리고 이어 처인성(龍仁郡 南四面)에 이르러 金允侯와 처인부곡민들에 의해 적장 살례탑이 사살당하고 만다. 이것이 동년 12월 중순의 일이다. 이들 전투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후술하거니와 처인성에서의 참담한 패배로 결정적 타격을 받은 몽고군은 副將 鐵哥의 지휘하에 동년 말 곧 철군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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