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1. 몽고 침입에 대한 항쟁
  • 2) 몽고의 고려 침입
  • (4) 여·몽전쟁의 장기화

가. 몽고의 4차 침입

 고종 25년부터 32년까지 여·몽 양국은 사신의 교환을 통한 부단한 신경전을 전개하였다. 몽고가 사신의 파견을 통하여 고려에 요구해 온 사항은 이전의 경우처럼 국왕의 친조, 강도로부터의 출륙, 그리고 민가의 호수를 파악, 보고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몽고가 가장 우선적으로 강력히 요구해 온 것이 국왕의 친조였는데, 이에 대하여 고려는 현종의 8대손인 왕족 新安公 佺을 파견하거나, 신안공의 종형 永寧公 綧을 왕자라 하여 보내는 것으로 그 요구를 대신하였을 뿐이었다. 고종 25년 12월 첫 사신이 파견된 이래 26년, 27년의 두 해는 비교적 활발하게 사신 교환이 진행되었다. 즉 고려는 2년 동안 5회, 몽고는 4회라는 평균 2회 이상의 사신 교환이 있었으며, 그 규모도 고종 26년의 경우 몽고 137명, 고려 148명이라는 대규모 사신단을 교환하였다. 고려에서 그나마 몽고의 요구에 부응, 신안공·영녕공 등 왕족을 파견한 것도 바로 이 때의 일이다. 그러나 고종 28년 이후 양국의 외교관계는 오히려 침체되며 차츰 의례적 경향을 보여줌으로써 외교적 교섭이 일정한 한계에 와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몽고의 고려에 대한 4차 침략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몽고 정종 즉위 이듬해인 고종 34년(1247)의 일이다. 그러나 이들 4차 침략군의 선발대는 이미 그 전년 고종 33년 말에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같은 몽고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대하여 이듬해 봄 강도정부는 삼남지방에 진무사를 파견, 침략에 대비하였다.

 몽고 원수 阿母侃이 군대를 이끌고 고려에 본격적으로 침입한 것은 고종 34년 7월의 일이었다. 아모간의 몽고군은 종래와 같이 부몽분자 홍복원을 대동, 먼저 청천강 상류의 熙州(熙川)·平虜城 등지를 공략하고 남진하여 7월에는 개경 및 강화 연안인 鹽州(延安)에까지 육박, 주둔함으로써 강도정부를 위협하였다.

 ≪輿地圖書≫에서는 황해도 瑞興縣의 大峴山城이「宋 淳祐 7年」즉 고종 34년 적군에게 함락되었던 사실을 전하고 있는데, 이로써 생각하면 당시 아모간은 遂安에서 염주에 이르는 도중 인근 고려의 군현민이 입보한 대현산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남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모간의 몽고군이 철수하는 것은 이듬해 초의 일이었던 것 같다. 이들은 7월 이후 당분간 염주에 주둔하여 부근 일대를 구략하면서 강도정부를 위협하였다고 생각되지만, 이후 몽고군의 진로와 행방이 어떠하였는지 당시의 기록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대신 무신정권기 天台僧 靜明國師 天因의 행적 등에서 약간의 암시를 발견할 수 있다.

 곧 천인은 고종 34년“겨울에 胡賊을 피하여 象王山 法華社에 들어 갔다”259)≪東文選≫권 83, 序 萬德山白蓮社靜明國師詩集序.는 것이다. 아모간의 몽고군이 침입하자, 천인은 康津으로부터 일시 남해안의 莞島로 거처를 옮겼던 것인데, 전라도 남해안에서의 이러한 해도입보는 당시 몽고군이 전라도 방면으로 남진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경기 일대를 구략하던 고종 34년 아모간이 이끄는 몽고군은 대략 8월 이후 충청도를 거쳐 전라도 방면으로 남하, 그 곳의 여러 성을 공격하면서 남부지역에까지 이르렀다고 보여진다.260)≪高麗大藏經≫권 45의<南明泉和尙頌證道歌事實>에는 고종 34년에 몽고군이 경상도에까지 이른 듯한 자료가 보이지만, 자료의 文面만을 가지고는 확정하기 어렵다. 이들은 해를 넘긴 이듬해 초에 고려의 사신 파견 및 원 황제 정종의 죽음을 계기로 비로소 고려에서 철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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