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대의 몽고군이 전라도 남부지역에 집결, 압해도 등 연안 해도를 침공하던 거의 같은 시기에 충청도 牙州(아산)의 연안에서도 여·몽간의 수전이 벌어졌다. 곧“忠州道巡問使 韓就가 아주의 섬에 있으면서 선박 9척으로 몽병을 치려 하였는데 몽병이 역습하자, 모두 죽였다”라고281)≪高麗史≫권 24, 世家 24, 고종 43년 4월 경인. 한 것이 그것이다. 아마 당시의 몽고군은 전라도 서쪽과 충청도 북쪽의 연안지역을 거의 동시에 장악, 강도에 이르는 해로(조운로)에 위협을 가하고자 하였던 것 같다. 몽고군의 공세로 충청도에서는 순문사가 아주 연안의 섬에 입보하여 있었고 상호간에 반격과 역습이 교차하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것이다. 아주연안은 평야가 발달한 稅收의 중심지인 데다 강도와 멀지 않은 곳이기 때문에 정부는 이 지역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기록에 고종 43년 6월 초하루 강도정부가 장군 李阡을 파견, 수군 2백여 병력으로 몽고군을 남도에서 막게 하였다는 것인데, 6월 말에는“장군 이천이 몽병과 溫水縣에서 싸워 수십 급을 베고 포로된 남녀 백여 인을 빼앗았다”라고282)≪高麗史≫권 24, 世家 24, 고종 43년 6월 임오. 하여 당시 강도정부가 직접 아주 연안지역 방어를 위하여 진력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전라도 일대에서 몽고군이 해도 침공을 시도할 때 강도정부는 장군 李廣과 宋君斐를 급파하여 이를 견제한 바 있거니와 아산만 지역에서도 연안을 위협하는 몽고군에 대해 수군을 파견하여 반격전을 전개함으로써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몽고군의 해도 침공에 대한 강도정부의 이같은 적극적 대응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는 도서지방이야말로 고려의 최후방어선이며 특히, 고려 섬들에 대한 몽고의 침략은 강도 침공으로 연결될 소지가 있다는 점, 그리고 둘째는 몽고의 연안 위협이 고려의 해상운수 기능에 타격을 주어 이에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강도정부에게 위협적이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강도정부는 몽고의 연안 위협에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갔던 것이다.
몽고군은 고종 43년 9∼10월에 걸쳐 일단 철수하였지만 이듬해 5월 다시 침략해 왔고 이들 몽고군은 동년 6월 아산 일대에 다시 침입하였다. 鄭仁卿이 직산(천안군) 등지에 주둔한 몽고군을 야간 기습·격파한 것은 이 때의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북계지역은 1차 침략 당시 가장 격렬한 싸움이 벌어진 지역이지만 이후 몽고의 연이은 침략으로 방어선이 붕괴, 전투는 오히려 중부 이남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로써 북계 등 변경지역에서는 이후 치열한 싸움이 많지 않았다. 그러한 가운데 고종 44년 태주(평북 태천군)전투, 동 45년 8월 祥原전투, 동 46년 정월 成州 岐岩城전투, 그리고 같은 달 강원 지역의 金剛城 및 寒溪城전투 등이 항몽전쟁의 말기에 북변 지역에서 벌어진 싸움들이다. 태주에서는 몽고군에 의하여 부사 崔濟와 주민들이 다수 피해를 보았으며 서해도의 嘉殊窟·陽波穴 등 자연동굴에 입보하고 있던 주민들은 몽고군의 치밀한 공격으로 말미암아 방호별감, 수령 등과 함께 함락되고 말았다.
동북의 변경지역에서는 趙暉·卓靑 등의 반란이 일어나 몽고에 투항하는 등의 혼란 속에서 몽고군에 의해 동원된 동진의 군사가 금강산 산중의 성에 입보한 사람들을 공격했으나 3천의 별초군이 이들을 물리쳤다. 이 때 설악산의 한계성에서도 방호별감 安洪敏의 지휘하에 야별초군의 도움을 받아 반역민에 의하여 인도된 몽고군을 물리쳤다.
여·몽전쟁의 과정에서 고려는 특히 섬 혹은 산성에의 입보를 주요 방어전략으로 채택, 수세적 입장을 지속하였으나 말기로 갈수록 이러한 전략은 더욱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차라대군 침입 때 해도에서의 전투, 혹은 보다 깊은 산골에서의 전투가 이루어지는 것은 전체적으로 불리하게 전개되어 가는 전세를 입증해 준다. 말기로 갈수록 방호별감의 파견, 야별초의 투입 등 구체적인 대항책이 강화되지만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본토 농민들의 항전에의 참여도 약화 및 민심 이반의 현상을 견제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의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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