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3. 고려 말의 정국과 원·명 관계
  • 1) 원의 쇠퇴와 공민왕의 반원정책

1) 원의 쇠퇴와 공민왕의 반원정책

 공민왕은 충숙왕과 明德太后 洪氏 사이에 태어난 충혜왕의 동생으로 일찍이 江陵大君에 봉해졌다. 이어 충혜왕 후2년(1341) 원나라에 들어가서 숙위했으며, 충목왕 즉위년(1344)에는 江陵府院大君으로 책봉되었다. 충목왕이 어린 나이로 죽자 그를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원나라는 일단 충혜왕의 아들인 충정왕으로 襲位케 하였다. 20세 때인 충정왕 원년(1349)에 원에서 魏王의 딸 魯國公主와 결혼하고, 2년 후 원나라가 간신과 외척의 전횡으로 국정을 문란케 한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그 뒤를 잇게 하자 노국공주와 함께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공민왕이 즉위한 14세기 후반은 국내·외적으로 복잡한 시기였다. 총명하고 기예발랄한 공민왕은 즉위하자마자 中興政治를 표방하고 나섰다. 즉 원년 정월에 剃頭辮髮의 몽고풍을 고치고428)≪高麗史節要≫권 26, 공민왕 원년 정월. 다음달 상순에는 권문세가의 권부로 변해버린 政房을 혁파하였으며,429)≪高麗史≫권 38, 世家 38, 공민왕 원년 2월 을해. 2년 11월에는 田民辨整都監의 田民別監을 여러 도에 파견하여 잘못 처리된 공·사의 토지를 조사하여 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430)≪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經理 공민왕 2년 11월.

 그러나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처음 趙日新·奇轍 등과 같은 권신의 발호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런데 조일신이 이 해 10월 난을 일으켰다가 곧 처형되고, 5년 5월 기철일당 역시 숙청됨으로써 반원적 개혁정치는 다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따라서 공민왕 5년은 고려로서는 대내·외적으로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대내적으로는 원의 奇皇后에 의지하여 권력을 마음대로 부리던 부원세력인 기철·權謙·盧 일당을 숙청함으로써 정방을 재혁파하여 관제복고의 터전을 마련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배원정책을 써서 征東行中書省理問所 혁파, 元年號 사용의 정지, 압록강 서쪽의 땅과 雙城摠管府를 공략하여 잃었던 땅을 회복하는 등으로 자주정신을 고취시켰다.

 기철 일당을 숙청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세력은「誅奇鐵功臣」431)≪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8년 6월 정해.으로 알려져 있는 외척과「燕邸隨從功臣」이다. 외척세력은 외4촌형 洪彦博(명덕태후의 조카)을 비롯한 慶千興(慶復興의 초명, 왕의 외사촌 매부의 아들)·金元命(명덕태후의 모친은 그의 대고모) 등으로서 명덕태후를 매개로 왕과 혈연관계가 맺어져 있었다. 연저수종공신은 공민왕이 왕자로 원에 숙위할 때 시종한 공신으로서 조일신의 난 때 여러 사람이 제거되었지만 그 밖에는 별다른 변동없이 왕의 측근세력으로 성장하였는데 그 중 핵심인물은 과거에 급제한 李淑과 金得培였다. 이들은 李齊賢을 주축으로 한 尹澤·白文寶 등의 儒者계열과 같이 親王勢力을 형성하여 공민왕의 즉위 초부터 개혁정치에 참여하여 왔다. 그러나 이에 반해 유자계열은 거사에는 참여하지 않고 그 다음 단계에 이르러 국정을 총괄하고 개혁안을 成案하는 일을 전담하였다.432)閔賢九,<辛旽의 執權과 그 政治的 性格(上)>(≪歷史學報≫38, 1968), 51∼53쪽.

 그러면 공민왕의 배원적 개혁정치는 어떤 역사적 배경 위에서 추진될 수 있었을까. 원은 14세기에 접어들면서 제위계승과 귀족간의 내부갈등이 심화됨에 따라 동요와 쇠퇴의 징조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 더욱이 마지막 황제인 順帝는 淫樂遊宴에 빠져 재정을 낭비하고 민생을 도탄에 빠트리니, 이틈을 타서 漢族의 반란세력이 사방에서 벌떼처럼 일어나 그 수는 무려 百餘에 달하게 되었다. 그 중 규모가 가장 큰 세력으로는 충목왕 4년(1348) 臺州(浙江省)에서 方國珍이 군대를 일으키고, 공민왕 즉위년(1351) 永平(河北省 正定府)에서는 韓山童·韓咬兒·劉福通 등의 홍건적이 일어나 세력을 키워 갔으며, 동왕 2년 濠州(安徽省 鳳陽府 臨淮縣)에서는 郭子興이 일어났다. 한편 이듬해에는 張士誠이 高郵(江蘇省 楊州府 高郵州)를 함락시키고 세력을 떨치니, 원 말 중국대륙은 갑자기 군웅할거의 무대가 되었다.

 이들 한족의 반란세력에 대하여 원은 처음부터 토벌군을 파견하여 그 진압에 힘썼는데, 그 중 공민왕 3년 9월에 丞相 脫脫이 고우의 장사성을 토벌하기 위하여 조직된 南征軍은 그 규모가 가장 큰 것이었으며 이 때 고려는 원의 강요에 이기지 못하여 결국 助征軍을 파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동왕 원년 2월에 원은 재원고려인 崔濡를 고려에 보내어 처음으로 조정군 모집의 뜻을 전달했으나 당시에는 재원고려인의 반대에 부딪혀 성사하지 못하였다. 그 후 동왕 3년 6월에 탈탈은 사신으로 왔다가 귀국하는 蔡河中을 통해 고려에 재차 조정군 파견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433)≪高麗史≫권 38, 世家 38, 공민왕 3년 6월 신묘.

 이어 元使 哈刺那海 등이 뒤따라 와서 柳濯·廉悌臣·權謙·元顥·羅英傑·印瑭·金鏞·李權·康允忠·鄭世雲·黃裳·崔瑩·崔雲起·李芳實·安祐 및 西京水軍 300명을 징집하여 모으고, 또 용맹한 군사도 모집하여 이 해 8월 10일까지 연경에 집합하여 장사성을 토벌케 하였다. 그런데 열전에도 보이는 것처럼, 채하중이 조정군 파견에 관여하게 된 것은 대표적인 간신의 한 사람으로서 공을 세워 다시 정승이 되려면 먼저 원의 환심을 사서 본국의 정적인 유탁·염제신 등을 助征將帥로 천거하여 국외에 내보내야 되었기 때문에 탈탈을 설득하여 음모를 꾸민 것이다.

 즉위한 지 얼마 안되어 아직 왕권을 굳히지 못한 공민왕은 승상 탈탈의 권세를 두려워하여 부득이 그의 요청을 받아 들였다. 그리하여 조정군 2천 명을 모집하여 유탁·염제신 등 40여 명의 장수로 하여금 인솔케 하여 급히 연경으로 떠나게 하였다. 장상 40인 중에는 물론 앞서 이름이 나온 유탁·염제신을 비롯하여 인당·정세운·최영·이방실·안우 등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당대의 명망있는 장상으로서 왕의 신임을 받고 있던 자들이다. 高麗從征軍은 연경에 이르러 재원고려인 중에서 2만 1천 명을 더 모집하여 총인원 2만 3천 인으로서 脫脫南征軍 8백만 군의 선봉이 되어 고우의 공략에 참가하였다.434)≪高麗史≫권 38, 世家 38, 공민왕 3년 11월 정해.

 남정군은 처음에 연전연승하여 적의 세력을 크게 꺾었고, 매번 싸움에 고려군의 활약은 눈부신 바 있었으며 이권·崔源 등 6인의 장수는 전사까지 했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탈탈은 참소를 입어 관직에서 물러나 淮安에 안치되고 泰不花가 대신 오게 되었다. 이로 인해 남정군의 사기가 크게 꺾이고, 적세는 다시 왕성해져 고우를 공략하려던 계획은 실패에 돌아갔으며 그 후 고려군도 결국 헛되이 철수하고 말았다.

 고려종정군은 비록 규모는 크지 못했으나 장상은 모두 공민왕이 신임하고 있던 유력한 신하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실지로 체험한 것은 귀국하자 곧 왕에게 보고되었을 것이다. 고우공략의 실패는 원이 쇠퇴하여 가고 있는 징후로서 고려 장상들의 눈에 비쳤을 것이고, 당시 원나라 각지에 번지고 있던 내란의 실정을 목격한 그들은 왕에게 원이 쇠퇴해가고 있는 모습을 여러모로 생생하게 보고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그들의 보고는 공민왕의 대원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 틀림없다. 비록 원의 후원을 얻어 충정왕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공민왕이었으나 일찍부터 원의 굴레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중흥정치를 펴려고 때를 기다리고 있던 그에게 있어서 장상들의 귀국보고는 큰 용기를 주었다. 이에 공민왕은 그들이 귀국하고 1년이 지난 동왕 5년 드디어 부원배 기철일당을 숙청함으로써 반원정책의 첫 깃발을 들었다.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관련하여 지나쳐 버릴 수 없는 것은 강남지방에 할거하고 있던 군웅과의 빈번한 교빙이다. 남방군웅과의 해상교통은 평화적 통상무역이었으나, 이들이 모두 한인이라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고려는 그들의 내빙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이를 통하여 원의 실정을 정탐할 수 있는 디딤돌을 마련할 수 있었다. 또 그들과의 다원적 외교관계를 통하여 외압을 해소하려는 고차원적 의미를 갖고 있어서 더욱 주목된다.

 남방의 군웅 가운데 가장 먼저 고려와 교빙한 세력은 장사성이다. 그는 공민왕 6년 7월 처음 來獻을 시작으로435)≪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6년 7월 2일 을해. 그런데 이 기록에는 江浙省丞相이라고만 하여 성명은 빠져 있다. 그러나 전후 여러 기록과 맞추어 보면 張士誠이 확실하다. 동왕 14년 4월까지 전후 8년간 13회에436)≪高麗史≫世家를 보면 12회인 것 같기도 하지만, 10년 7월 임자일에 遣使할 때 千戶 傅德이 내빙하고, 6일 후인 무오일에 또 趙伯淵不花가 내빙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연달아 온 것이기는 하나 이를 별개의 遣使로 보아 1회를 더 가산하여 13회로 하였다. 걸쳐 사절을 보내왔다. 江浙行省丞相의 직함을 갖고 장사성이 동왕 7년 7월에 두 번째 내빙할 때 보낸 書狀에“요사이 中夏에 여러 가지 일이 구구하여 生民이 도탄에 빠짐을 참지 못하여 드디어 淮水 동쪽에서 분기하여 다행히 全吳의 땅을 보존하였으나, 西寇가 흉악함을 함부로 하여 백성을 殘虐하니 비록 뜻을 소탕에 두지마는 이를 바로 알진 못하도다”437)≪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7년 7월 갑신.고 한 것은 내란으로 혼란에 빠져 허덕이고 있던 원의 실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그 동안 고려가 장사성에게 보낸 사절로 확실한 것은 공민왕 9년 3월과 13년 5월 등 전후 두 차례에 걸쳐 있었다. 그가 동왕 14년 4월 마지막으로 내왕할 때에는 吳王이라 칭할 만큼 강성해지기도 했으나, 동왕 16년 9월에 吳國公 朱元璋(후에 명 태조)에게 격퇴되어 멸망하고 말았다.

 장사성 다음으로 사절을 많이 보낸 사람은 明州司徒 방국진이었다. 그는 공민왕 7년 5월부터438)≪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7년 5월 경자. 14년 10월까지 전후 7년간 5차례 사절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방국진도 공민왕 16년 12월에 주원장의 吳國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이 밖에 江浙海島防禦萬戶 丁文彬이 3회(7년 7월·8년 4월·8년 7월), 江浙省 李右丞이 1회(9년 7월), 淮南省右丞 王晟이 1회(10년 3월), 淮南 朱平章이 1회(13년 4월)에 걸쳐 교빙하였으며, 이우승에게는 동왕 9년 7월에 1차 보빙사를 보낸 기록이≪高麗史≫에 보인다.

 이와 같이 공민왕은 반원정책의 일환으로 강남에서 일어난 군웅과 자주 교빙하였으나, 중국대륙에 아직 원을 누를 만한 강대한 세력이 나타나지 못한 데다가 비록 원이 강남의 한인반란세력을 토멸할 수 없으리만치 쇠잔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무시할 수 없는 老大國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반원정책을 일관하여 강력하게 밀고 나가지는 못했다. 원 역시 공민왕의 반원정책을 보고 사신을 보내어 압력을 가하고 한편으로는 회유책을 쓰기도 했다.

 즉 원은 공민왕 5년 6월에 高麗節日使 金龜年을 遼陽省에 가두고 80만 병사를 발하여 토벌할 것이라고 성언하니, 서북면병마사 인당이 군대를 보강하여 대비하기를 청하였다.439)≪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5년 6월 을해. 이에 조정에서는 만일을 염려하여 判書雲觀事 陳永緖를 남경에 보내어 천도할 곳을 살펴보게 하는 한편 忠勇 4衛를 두어 대비하기도 하였다.

 한편, 원에서는 이 해 7월에 中書省斷事官 撒迪罕 등을 파견하여 고려의 군사행동을 힐난하며 靖國民安의 길을 열어 이전처럼 화호를 돈독히 하자는 반협박, 반회유의 내용의 국서를 전해 왔다.440)≪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5년 7월 정유.

 이러한 원의 협박과 회유에 불안을 느낀 공민왕은 11일 뒤인 7월 말에 앞서 압록강을 넘어 婆娑府 등 3站을 공파한 일이 있는 인당을 처형하였다. 더욱이 기철일당을 주살한 것은 겨를이 없어 미처 아뢰지 못한 것과 인당이 강을 넘어 劫掠한 것은 본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그 죄인을 考覈하여 국법을 바르게 하였다는 변호의 답서를 몽고사신 살적한을 통해 전하였다. 인당과 같은 군공이 큰 명장에게 渡江罪를 물어 참한 것은 정말 참기 어려운 고통이 따랐겠지만, 비록 당시 원의 국력이 쇠퇴해 가던 때이기는 했으나 대군을 동원하여 침공하겠다는 원의 위협을 일단 무마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단안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에 원은 같은 해 10월 다시 살적한 등을 보내어 고려가 이미 지나간 일인데도 죄를 뉘우쳐 진정함으로 이에 관용을 내려 허물을 용서한다는 내용의 회신을 보내왔다.

 따라서 고려는 원이 일단 노여움을 푼 것으로 간주하고 곧바로 정당문학 李仁復을 원에 보내어 기철 등의 모역을 창황한 나머지 사전에 보고하지 못한 것을 다시 사죄하고 征東行中書省理問所와 萬戶府·鎭撫司 등은 폐단이 너무 많으니 혁파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또, 雙城·三撤은 본래 우리의 경역인데 역신 기철 등이 그 추장과 교결하고 있던 바 그들이 주살된 후 남은 무리들이 많이 그 곳으로 달아났기 때문에 수색하였으나 쌍성이 도리어 군사를 일으켜 역족을 돕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출병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옛 영토를 돌려주어 쌍성·삼철 이북 땅에 關防을 세우게 하여 줄 것과 여진족들이 泥城 등지의 산곡에 있으므로 禁約을 세워 함부로 들어와 침해하지 못하게 해줄 것을 청하였다. 이와 아울러 고려정부는 연경에서 본국의 불량분자와 어울려 訛言을 퍼뜨리며 인심을 현혹케 하고 있는 塔思帖木兒(충선왕의 아들 덕흥군)를 본국으로 송환해 줄 것도 요구하였다.

 이와 같이 사절과 국서를 교환하여 고려가 일단 저자세외교를 펴게 되자 두 나라의 관계는 다시 정상을 회복하는 기미를 보이게 됨으로써 반원정책은 일단 후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압록강 서쪽과 영흥 이북의 땅을 확실히 회수하게 됨으로써 고려는 실리를 얻은 선에서 결말이 난 셈이다.

 그러나 반원정책의 천명과 더불어 힘차게 출발한 중흥정책은 동왕 8년 12월과 10년 10월 紅頭賊의 두 차례에 걸친 침공으로 인해 송두리채 무너지고 말았다. 제1차의 침구는 平章 毛居敬이 4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옴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들은 서경을 함락시키는 등 한때 세력을 크게 떨쳤으나 안우·이방실 등이 咸從에서 싸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적병 2만 급을 참하고 僞元帥 沈刺·黃志善을 포로로 잡게 되자 그들은 압록강을 건너 도주하고 말았다.441)≪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9년 2월 계유.

 이렇듯 1차 침공 때에는 적이 서북면을 넘지 못하고 우리 장수들의 전공으로 다행히 물리칠 수 있었으나, 2차 침공 때에는 僞平章 潘城·沙劉·關先生·朱元帥 등이 10여 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왔다. 그리하여 이 해 11월 하순 결국 개경이 함락되고 말았다. 공민왕은 할 수 없이 福州(安東)로 피난하였으나 홍건족이 개경에 머물고 있던 50여 일간의 잔학행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참혹하였다.442)≪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10년 11월 신미.

 개경에서 뿐 아니라 그들이 지나온 개경 이북의 성읍과 전야의 피해도 대단히 심각하였는데, 이에 고려에서는 군대를 다시 정비하여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삼고 안우·이방실·최영 등의 여러 장수로 하여금 20만 군을 인솔하게 하여 다음해 정월 4면으로 개경에 진격하여 적을 대파하고 관선생·사유 등을 잡아 죽였다. 그러자 적세는 크게 꺾여 破頭潘은 나머지 무리를 거느리고 허겁지겁 압록강을 넘어 달아나 버렸다.443)≪高麗史≫권 40, 世家 40, 공민왕 11년 정월 갑자.

 홍건적이 침공했을 때 고려가 원에 원군을 요청하였는지는 직접적인 자료가 보이지 않아 알 수 없다. 다만 제1차 홍건적의 침공을 격퇴하고 1개월이 지난 9년 3월에 호부상서 朱思忠을 원에 보내어 적의 평정을 보고하려고 遼陽까지 갔다가 길이 막혀 그냥 돌아온 일이 있고, 또 이보다 4개월 뒤인 같은 해 7월의 기록에는“益山君 李公遂·戶部尙書 朱思忠·宦者 方都赤을 원에 보내어 적의 형세를 살피게 하였더니 湯站에 이르러 길이 막혀 돌아와 압록강을 건넜다. 왕이 대노하여 비록 죽더라도 돌아와서는 안된다 하고 다시 보냈으나 瀋陽에 도착한 지 수개월이 지났지만 역시 더 가지 못하고 돌아왔다”444)≪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9년 7월 신미.고 한 사실이 보인다.

 이공수 등이 무슨 사명을 띠고 원에 가게 되었는지는 역시 구체적인 자료가 없어서 알 수 없다. 처음 탕참까지 이르렀으나 길이 막혀 돌아왔다가 왕의 엄명으로 이번에는 심양에까지 이르러 수개월 머무르며 더 가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원의 수도에까지 가서 홍건적의 침공과 이를 격퇴시킨 사실을 보고하려고 했던 것은 이보다 앞선 9년 3월의 사행을 통하여 짐작이 가지만 그 이상의 것은 알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그러나 다음해 9월에 다시 길이 열려 호부상서 주사충을 다시 원에 파견하였는데 이 때의 表文을 통하여 앞서의 이공수 등의 사행목적도 유추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그 내용 중에“다만 聖朝의 보호만을 믿고 있었는데 뜻밖에 강포한 도적의 침노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諸侯國의 책임을 오로지 하여 다행히 王(帝)가 미워한 적을 막아 물리쳤다”445)≪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10년 9월 경신. 하고, 이제 길이 열려 사신을 먼 곳에 보내어 양국의 관계를 새롭게 하게 되니 한량없이 기쁘게 생각한다고 끝을 맺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위 자료를 통하여 고려가 홍건적의 침입을 원에 보고하기 위하여 다시 주사충을 파견한 것은 확인할 수 있으며, 원에 제후국으로서의 충성을 표시함으로써 홍건적의 재침에 대비하여 원조를 요청하였을 가능성도 엿볼 수 있다. 이를 간접적으로 입증하는 자료는 같은 달 정동성을 복치한 것으로서446)≪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10년 9월 계유. 그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또 같은 일자로 원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한교아 등이 반란을 꾸미어 사방에서 군사가 일어난 것에 대하여 사령을 반포하기도 하였다.

 당시 정동행성을 복치하게 된 것은 비록 원에 다시 굴복하는 쓰라림이 따랐을지는 모르지만, 홍건적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이를 통하여 원과의 관계는 완전히 복구할 필요를 느끼고 취한 정치적 포석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고려사≫에는 보이지 않지만 정동행성의 복설과 동시에 원의 연호를 다시 사용하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447) 고려가 처음 원의 연호사용을 정지한 것은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표명한 5년 5월이지만, 그 후 제1차 紅頭賊의 침공을 계기로 征東行省을 복치함으로써 원과의 관계를 완전히 복구하였으나 그 연호를 다시 사용한 기록은 보이지 않다가, 명이 흥기하여 燕京을 공략한 후 18년 4월 임진일에 사신 偰斯를 파견해 오자 동년 5월에 원의 연호를 또 정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려는 5년 5월 이후 언젠가 원의 연호를 다시 사용하게 된 것은 분명하나 그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전술한 바와 같이 10년 9월에 주사충이 表文을 바칠 때 제후국의 임무를 다할 것을 천명하고 정동행성을 복치한 것을 보면, 이 때부터 원의 연호를 다시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가장 큰 것으로 보여진다.

 공민왕이 제2차 홍건적의 침입으로 복주로 피난갔다가 난이 평정된 후 개경에 돌아온 것은 동왕 12년 2월 중순으로 남천한 지 1년 3개월만의 일이다. 이 달 興王寺에 도착하여 다음날 백관으로부터 환도의 賀禮를 받고 이곳을 임시 御宮으로 정하여 머물러 있던 중 윤3월 초하루 寵臣 金鏞이 반란을 일으켜 큰 시련을 당하게 되니 이른바 ‘興王寺의 變’이 일어난 것이다. 김용은≪고려사≫열전에“성품이 음흉하고 능청스러웠으며 간사함과 시기함이 있었다”448)≪高麗史≫권 131, 列傳 44, 叛逆 5, 金鏞.고 설명되어 있는 것처럼, 음흉하고 간사하여 일찍이 공민왕이 왕자로서 원에 숙위하고 있을 때 시종한 공로가 있으나 왕의 총애를 믿고 많은 비행을 저질렀던 자이다. 평소에 정세운과 더불어 은총을 다투었는데, 정세운이 안우·김득배·이방실과 같이 紅賊을 평정하여 큰 공을 세우게 되자, 이를 시기한 김용은 왕지를 고쳐 비밀히 안우 등을 시켜 정세운을 죽이게 하고, 다시 그 擅殺의 죄를 물어 안우·김득배·이방실 등을 차례로 죽임으로써 여러 명장을 잃는 비극을 낳게 하였다.449) 金鏞의 4元帥殺害事件은 후술하는 바와 같이 興王寺의 變과 연결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제2차 紅巾賊의 난이 평정된 후 환도까지에는 1년 3개월이라는 많은 시일을 소비한 것도 이 사건 이후 불안하였던 고려의 정치정세 때문에 야기된 것으로 보여진다(閔賢九, 앞의 글, 60쪽). 이 점은 安祐 등이 김용에게 살해된 직후에 내린 敎書에서도 그 일단을 찾아 볼 수 있다(≪高麗史≫권 40, 世家 40, 공민왕 11년 3월 정미).

 그리하여 김용은 드디어 공민왕 12년(1363) 윤3월에 일당 50여 인을 풀어 몰래 행궁을 침범케 하여 宦者 安都赤·僉議評理 王梓·判典校寺 金漢龍을 죽이고 우정승 홍언박을 집에서 살해하는 한편, 공민왕을 시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위급을 접한 밀직사 최영, 부사 우제, 지도첨의 안우경, 上護軍 金長壽 등이 경성으로부터 군대를 거느리고 달려와 난을 평정하였는데,450)≪高麗史≫권 40, 世家 40, 공민왕 12년 윤3월 신미. 김용은 반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혐의를 벗으려고 온갖 잔꾀를 부렸으나 결국은 密城郡에 유배되었다가 이 해 4월 복주되었다.

 김용은 일찍이 왕이 왕자로서 원에 숙위할 때 시종한 공로가 있어 즉위 후 벼슬을 높여주고 行省員外郎까지 된 공민왕의 총신이다. 그러나 공민왕 폐위사건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을 때 덕흥군에 의해 판삼사사의 직함에 假署되고 있음을 보아,451)≪高麗史≫권 131, 列傳 44, 叛逆 5, 崔濡. 附元輩로서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불만을 가졌던 자로 보인다. 그런데 마침 홍적의 침공을 계기로 원의 간섭이 다시 강화되고, 또 정세운 등 4원수를 제거한 여세를 몰아 崔濡의 廢王謀議에 대응하려고 공민왕을 시해하려 했던 것 같다.

 공민왕 폐위의 음모가 고려에 처음 알려지게 된 것은 공민왕이 복주에서 환도 도중 淸州에 머물러 있을 때이다. 왕은 소식을 듣고 조신 중에 딴 마음을 품은 자가 있을까 의심하여 이부상서 洪師範을 西北面體覆使로 삼아 그 진위를 살피게 하였다.452)≪高麗史≫권 40, 世家 40, 공민왕 11년 12월 계유. 이어 20일 뒤에는 찬성사 柳仁雨를 聖節使의 명목으로 원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홍건적의 난 이후 고려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서 일찍이 원에 들어와 있던 충선왕의 아들 덕흥군 탐사첩목아를 왕으로 세워 공민왕을 폐하려고 한 때문이다.

 반원운동의 주역인 공민왕을 원이 혐오한 것은 당연히 있을만한 일이며, 특히 기철의 주살로 인한 기황후의 복수심에서 나온 것임은 쉽게 이해된다. 덕흥군이 이 사건과 관련된 이유로는 전술한 바와 같이 공민왕 5년 10월에 이인복이 반원정책을 변명하기 위하여 원에 갔을 때 덕흥군이 본국의 불량배와 어울려 와언을 퍼뜨리고 있다고 하며 그의 송환을 요구한 사실 때문이다. 덕흥군이 이 때 어떤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생각컨대 기철 일당의 숙청이나 반원정책과 관련된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원은 이를 묵살하고 말았지만, 그 후 덕흥군은 홍건적의 난으로 인한 고려의 국력 쇠약과 저자세외교로 원의 간섭이 다시 강화되자, 본국의 불평분자 최유와 한짝이 되어 不逞한 무리를 동원하여 기왕후를 설득, 순제의 詔命으로 공민왕을 폐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했던 것이다.453)≪高麗史≫권 91, 列傳 4, 宗室 2, 德興君塔思帖木兒.

 공민왕 폐위사건이 공식적으로 표면화된 것은 동왕 12년 5월의 일이었다. 이 때 공민왕은 元使 李家奴가 遞位詔書를 가지고 온다는 말을 듣고 우제를 접반사로 삼아 사신의 동정을 살피는 한편 그들의 입국을 저지시키려고 하였다.454)≪高麗史≫권 40, 世家 40, 공민왕 12년 5월 정해. 우제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원사는 이 해 7월 드디어 開京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왕은 나가지 않고 백관으로 하여금 兵衛를 성대히 하여 맞이하도록 했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왕은 심기가 몹시 불편하여 사신을 직접 만나지 않고 군대의 위력을 과시하는 한편, 百官·耆老가 폐립의 부당함을 中書省에 호소하는 글을 4일 뒤에 귀국하는 이가노에게 기탁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공민왕 폐위사건의 구상을 구체적으로 알고 대책을 강구하게 된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환도 도중 청주에서 원이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려고 한다는 소문을 듣고 3개월이 지난 12년 3월이다. 이 사실을 확실히 밝혀주고 있는 자료는≪高麗史節要≫에 보인다. 즉 동왕 12년 3월에 찬성사 이공수 등을 원에 파견하여 陳情表를 올리게 하였는데, 표문은≪고려사절요≫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그의 入元 및 그와 기황후의 관계, 기철숙청에 대한 기황후와의 대화, 김용과 최유·덕흥군의 동정 및 옹립에 관한 것 등이 자세하게 적혀 있다. 그가 서경에 이르러 太祖原廟를 배알하며“우리 임금을 복위시키지 못하면 신은 죽어도 돌아오지 않겠다”455)≪高麗史節要≫권 27, 공민왕 12년 3월.
≪高麗史≫권 112, 列傳 25, 李公遂.
고 서약한 것을 보면, 이공수의 사행목적은 고려가 원에서 폐립사건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이를 무마하기 위하여 그를 사신으로 파견하였음이 확실하다.

 이공수는 기황후의 外從兄이었기 때문에 기철일당의 숙청은 그들의 횡포가 막심하여 할 수 없이 취한 처사로서 즉 왕의 죄가 아니라는 것과 공이 큰 임금을 폐하려고 하는 것은 다른 날 반드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기황후의 뜻을 바꾸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기황후의 노여움이 워낙 강하여 이공수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가고 덕흥군을 받들고 귀국하라는 순제의 명령에 질병을 칭탁하여 들지 않고 대응해 10월 사건이 수습될 때까지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된다.

 한편≪고려사≫세가에도 12년 3월에 찬성사 이공수를 원에 파견해 진정표를 진정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표문의 내용을 보면 최유와 덕흥군에 관한 말은 없고 홍건적의 평정을 치하하는 기사가 주로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또≪고려사≫세가에는 그 후 1개월이 지난 같은 해 4월 密直商議 洪淳 등을 원에 보내어 백관·기로의 글을 御史臺·中書省·詹事院에 보내어 비로소 讒言의 허구와 폐립의 부당성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456)≪高麗史節要≫권 27, 공민왕 12년 4월조에도 洪淳 등을 원에 보내어 백관·기로의 書를 御史臺·中書省·詹事院에 바쳤다고 하였으나 다만 御史臺의 것만 간단히 싣고 있는데, 도로가 개통된 후에 보낸 여러 사신을 留置하고 돌려 보내지 않는다는 것과 朝廷內의 讒言때문에 小邦이 소외되고 있다는 것만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이≪고려사절요≫와≪고려사≫두 자료는 시기와 내용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崔濡傳에 보이는 것처럼, 공민왕폐위사건은 홍건적의 침공으로 고려가 막심한 타격을 받아 국력이 크게 약화된 기회를 이용하여 부원배 최유가 김용이 안우 등 여러 장수들을 죽이고 내응할 것을 믿고 불령한 무리와 더불어 덕흥군을 업고 기황후의 원한을 부추김으로써 사건이 구체화되었고, 원은 일거에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세우려고 획책한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고려는 원 사신 이가노가 정식으로 체위조서를 갖고 오기 전에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이공수·홍순 등을 차례로 원에 파견하여 사건을 무마하려 한 것이다.

 공민왕폐위사건의 경위는≪고려사≫열전 덕흥군전에“기철을 誅함에 미쳐서 황후가 공민왕을 원망하니 마침 본국인 최유가 원에 있으면서 불령한 무리들과 더불어 황후를 설득하여 공민왕을 무고하여 이를 폐하고 탑사첩목아를 세워 왕을 삼고 奇三寶奴로 元子 삼기를 모의하여 무릇 고려인으로 원에 있는 자에게 다 거짓관작을 내리고, 또 청하여 遼陽省兵 만 명을 징발하여 압록강을 건너 隨州의 撻川에 이르렀다가 아군에게 패한 바 되었으니 이 말은 濡의 傳에 있다”는 기사에 잘 설명되어 있다. 덕흥군을 둘러싼 원나라 조정의 음모가 구체화되어 도로가 개통된 후에 보낸 사신을 원이 억류하여 돌려 보내지 않고 있는 데다가 동왕 12년 5월에 원사 이가노가 체위조서를 갖고 온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密直司事 丁贊을 西北面都安撫使로 삼아 군대를 사열하여 南幸에 대비하였으며, 이어서 귀국한 통역관 李得春이 덕흥군과 遼陽兵의 움직임을 보고하니 군신의 의견을 들어 慶千興을 西北面都元帥로 삼아 安州에, 安遇慶을 都指揮使로 삼아 義州에, 李龜壽를 都巡察使로 삼아 麟州에, 李珣을 都體察使로 삼아 泥城에, 洪瑄을 都兵馬使로 삼아 靜州에, 禹磾·朴椿을 都兵馬使로 삼아 江界·禿魯江 등에, 池龍壽를 순무사로 삼아 龍州에 주둔해 서북을 방비하되 모두 도원수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이와 아울러 韓方臣으로 하여금 동북면도지휘사로, 金貴를 도병마사로 삼아 和州에 주둔해 동북을 방비케 하였다.457)≪高麗史≫권 40, 世家 40, 공민왕 12년 5월 임진. 그리고 全普門 등을 남부지방 각도의 都巡問使 또는 兵馬使로 삼아 병사를 조발케 하였다.458)≪高麗史≫권 40, 世家 40, 공민왕 12년 5월 갑오. 또한 동년 11월에는 이인복을 西北面都察軍容使로 삼아 만전을 기하였는데, 다음달 덕흥군이 요동에 둔치고 척후의 기병이 자주 압록강에 보냄으로써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다음해 13년 정월에 드디어 최유가 덕흥군과 함께 원의 군사 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포위하였다. 이에 도지휘사 안우경이 맞아 잘 싸웠으나 도병마사 홍선이 적군에 사로잡혀 패하여 안주로 퇴각하자 최유는 宣州에 입거하였다. 이에 공민왕은 찬성사 최영을 都巡慰使로 삼아 정병을 거느리고 급히 안주에 나아가 여러 군을 지휘케 하였다. 이 때 李成桂도 동북면으로부터 精騎 1천을 거느리고 와서 참전하고 도체찰사 이순, 도병마사 우제·박춘이 군사를 이끌고 와 회합하니 아군의 사기가 다시 일어났다. 이어 고려는 군용을 정비하여 定州까지 행군하였는데 당시 수주의 달천에 주둔하고 있던 원군을 크게 격파하자, 적군은 드디어 둔영을 불사르고 압록강을 건너 달아남으로써459)≪高麗史≫권 40, 世家 40, 공민왕 13년 정월 계미. 이 전쟁은 완전히 고려의 승리로 돌아갔던 것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외세의 침입이 아니었으므로 공민왕은 고려의 독자성뿐만 아니라 왕위를 지키기 위하여 전력을 다해서 싸워야 했다. 특히,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원의 지배와 간섭이 사실상 끝이 나게 되고, 최영·경천흥 등 무장세력이 급격히 정계에 등장함으로써 辛旽의 집권을 재촉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향후 고려정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점이다.

<金成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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