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4. 홍건적과 왜구
  • 1) 홍건적
  • (1) 원의 쇠퇴와 홍건적의 대두

(1) 원의 쇠퇴와 홍건적의 대두

 元은 成宗(1294∼1306) 이후 황족사이에 제위다툼과 권신들의 전횡이 계속되었으며, 건국이래로 전쟁을 일삼아온 결과 재정의 궁핍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보충하고자 각종의 잡세를 부과하였으며 交鈔의 남발로 물가가 앙등하였다. 또한 천재와 기근이 빈번하였고 더구나 통치자인 順帝(1333∼1367)의 무절제한 궁중생활은 재정난을 가속화시켰다.575)≪元史≫권 41, 本紀 41, 順帝 至正 3년 6월 임자. 한편≪元史≫권 51, 志 3下, 五行 2, 稼穡不成條에 의하면 순제가 즉위한 이후 매년 흉년이 들어 길가에는 죽은 사람이 가득하고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또≪新元史≫권 25, 至正 14년 12월 기유조에서도 수도에서조차 혈육지간인 부자끼리도 서로 잡아먹을 지경에 이를 정도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계속되는 어려운 상황들은 蒙古의 통치아래서 차별대우와 압박을 받아오던 漢族에게 자극을 주어 민족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그 결과 중국 각 지방에서 난이 일어났는데, 순제 즉위 초(고려 충숙왕 복위 6년;1337)부터 시작되었다. 朱光卿은 廣東에서 일어나 국호를 大金이라 하였으며, 方國珍은 浙江의 台州에서 일어났고 徐壽輝는 安徽·湖北에서 난을 일으켜 국호를 天完이라 하고 황제를 칭하였다. 江蘇지방에서는 張士誠이 일어나 高郵에 웅거하여 국호를 大周라 하고 誠王이라 칭하였으며, 郭子興은 안휘의 북부에서 일어났는데 그 부하에 朱元璋(뒷날 명 태조)이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河南지방에서 봉기한 무리들이 紅巾賊이었다.

 공민왕 즉위년(1351)에 韓山童·劉福通 등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홍건적의 내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산동은 그의 조부이래로 白蓮敎를 신봉하여 주로 우매한 하층민들을 선동하여“천하가 크게 어지러우므로 彌勒佛이 下生하였다”고 자칭하면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한다며 많은 무리를 끌어 모았다. 그의 부하인 유복통은 한산동을“宋 徽宗의 8世孫으로 중국에 군림할 것이라”고 선전하였다. 뒤에 한산동은 관군에게 잡혔으나 유복통은 군사를 일으켜 紅巾으로써 표식을 하고 각지를 공격하고 다니니, 그의 무리는 거의 10만에 달할 정도였다. 이 무리들을 紅巾賊 또는 紅頭賊 혹은 紅賊이라 하였다. 至正 15년(1355) 2월에 유복통은 毫州(安徽)에 웅거하여 한산동의 아들인 韓林兒를 영입하여 황제를 삼고 국호를 宋이라 하였다. 특히 송 휘종의 후손으로 황제를 삼아 국호를 송이라 함으로써 몽고족에 대한 한족의 적개심을 이용하였고, 몽고족인 원을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하자는 민족주의적 기치를 표방하였던 것이다.

 한편 원 조정에서는 순제 지정 12년(1352)부터 승상 脫脫이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여 각지를 토벌하였다. 특히 지정 14년에 大軍을 동원하여 고우의 장사성을 토벌할 때는 고려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 당시 원이 고려에 대하여 구원병을 요청한 것은 앞서 賀千秋節使로 원에 건너갔던 蔡河中의 건의가 한 원인이 되었는데,576)≪高麗史≫권 125, 列傳 38, 姦臣 1, 蔡河中. 이 요구에 따라 같은 해 7월 柳濯·廉悌臣 등 40여 명의 장수들이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참전하였다.577)≪高麗史節要≫권 26, 공민왕 3년 7월.

 원에 원병으로 참전하였던 고려군은 당시 반란군의 실세와 원의 실정을 더욱 분명히 볼 수 있었고, 귀국한 뒤 이들이 보고한 내용은 고려의 국내외 정책 추진에 많은 자극을 주게 되었다.578) 金昊鍾,<恭愍王의 安東蒙塵에 관한 一硏究>(≪安東文化―人文社會科學―≫1, 1980), 2쪽. 특히 북중국과 요동일대에서 크게 위세를 떨치고 있던 홍건적에 대하여는 고려에 침입할 가능성을 크게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고려는 공민왕 6년에 樞密院直學士 金得培를 西北面都巡問使兼西京尹上萬戶로 임명하고, 前戶部上書 金元鳳을 西北面紅頭軍 및 倭賊防禦指揮兼副萬戶에 임명하여 서북면지방의 방어태세를 강화하였다.579)≪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6년 11월. 당시 홍건적에 대하여 고려조정에서 크게 신경을 쓰고 있던 것은 다음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공민왕 7년 3월에 靜州副使 朱永世와 全羅道萬戶 姜仲祥이 상경하여 왕을 알현하였는데, 왕이 매우 노하여‘서쪽에는 홍두적의 근심이 있고 동쪽에는 왜적의 재화가 있어’백성들이 편안히 살지 못하는데 마음대로 관할지를 떠났다는 이유로 그들을 옥에 가두었다. 또 서울 外城의 수축을 명령하였다.580)≪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7년 3월. 이처럼 근무지를 이탈한 관리를 엄하게 다스리고 성곽을 수축하는 등 홍건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고려조정에서 당시 급변하는 중국의 상황을 직시하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한편 공민왕 8년(1359) 11월에는 홍건적의 반란으로 어수선한 遼東과 瀋陽지방으로부터 2,300여 호가 귀화하여 오자, 고려조정에서는 이들을 서북의 각 군과 현에 나누어 정주시키고 양곡을 주었다. 그리고 고려 사람으로 압록강을 건너가 살고 있던 자들도 병란으로 스스로 돌아왔다.581)≪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8년 11월. 고려에서는 이들을 구제함과 아울러 서북면 일대에 나누어 살게함으로써 홍건적에 대한 방어력의 보강도 함께 꾀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같은 달 무오일에 홍건적 3,000명이 압록강을 건너와 약탈한 뒤 돌아갔는데 도지휘사 김원봉이 이것을 감추고 보고하지 않았으므로 호부시랑 鄭之祥을 파견하여 엄중히 견책한 일이 있다.582) 위와 같음. 이 사건이 홍건적 침입의 시발탄이었던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