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4. 홍건적과 왜구
  • 2) 왜구
  • (1) 왜구의 성격과 규모

(1) 왜구의 성격과 규모

 왜구의 침입은 고려 말 내우 외환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고려의 큰 환난 중의 하나였다. 따라서 고려는 북방의 외적과의 투쟁을 계속하면서 한편으로는 국력을 기울여 남방의 왜구와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 이중의 부담을 지니고 있었다. 그 결과 민심은 더욱 어지러워졌으며 이러한 일들은 고려왕조의 종말을 가속화시켰다.

 왜구는≪高麗史≫에, 倭寇·倭賊·倭奴·海賊·海盜 또는 단순하게 賊·寇·賊船·作寇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들 각 명칭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왜구란 왜가 바다를 통하여 寇賊행위를 한다는 의미로 쓰여지고 있으며, 적어도 충렬왕 4년(1278) 이전부터 왜구라는 말이 숙어로써 사용되고 있었다.592)≪高麗史≫권 28, 世家 28, 충렬왕 4년 7월 무술. 왕이 元에 合逋鎭戌軍을 머무르게 하여 倭寇에 대비하기를 청하였다.

 왜구가 발생하게 된 원인은 당시 일본이 南北朝의 爭亂期였던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곧 정권이 양분되어 중앙통치권이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는 57년이란 긴 기간 동안 사회적 불안은 증대되었다. 또 혼란기를 맞이하여 武士들은 쟁란에 편승하여 소유 영지를 확대시키고자 획책하였다. 이러한 사회정세 속에서 농지를 잃은 농민과, 전쟁에 동원되었으나 보상을 받지 못해 경제적으로 무력해진 하급무사, 그리고 여기에 토지가 적었을 뿐 아니라 그것도 비옥하지 못해 기근을 면키 어려웠던 對馬·壹岐·松逋 3島지방의 열악한 입지조건과 아울러 謙倉 中期 이후 변경지방까지 침투해 왔던 상품 화폐경제의 압박 등의 여러 조건들이 일본의 서쪽 연안 일대의 중소영주층과 영세농어민을 자극하여 해적이 되게끔 하였고593) 佐佐木銀彌,<海外貿易と國內經濟>(≪講座日本史≫3, 東京大出版部, 1970), 164쪽. 바로 이들이 고려의 연안에 침입하였던 것이다.

 왜구의 근거지는 특히 幕府의 통제력이 약한 변방이었지만, 확실한 지역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이견들이 있다.594) 신석호,<여말 선초의 왜구와 그 대책>(≪국사상의 제문제≫3, 국사편찬위원회, 1959), 111쪽에서는 對馬·壹岐·松逋에 博多나 赤間關(下關)을 추가하여 말하였다. 그런데≪高麗史≫권 113, 列傳 26, 鄭地條에서는 對馬·壹岐를 왜구의 근거지라 하였으며,≪高麗史節要≫권 30, 신우 4년 7월조에 의하면, 鄭夢周가 日本으로부터 돌아올 때에 日本九州節度使 源了俊이 三島 倭寇의 침략을 금했다고 한다. 또한≪定宗實錄≫권 1, 정종 원년 5월조에서도 三島를 倭寇의 근거지로 보고 있다. 대체적으로 3도를 왜구의 근거지로 보는 견해가 많으나, 3도의 소재지에 관한 기록이 없어서 분명히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일반적으로 대마·일기·송포를 지칭한다고 생각되어 왔는데, 근래에는 송포 대신 구체적으로 平戶島를 넣어 대마·일기·평호라는 주장도 있다.595) 金柄夏,≪李朝前期對日貿易硏究≫(韓國硏究院, 1969), 9쪽. 그러나 근거지로서 꼭 3도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왜냐하면 3도가 왜구들의 중심지일 뿐, 우리 나라와 가까운 北九州의 섬들과 연안 지역은 모두가 그들의 근거지이기 때문이다. 조선 세종 때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朴端生은 “대마도에서 兵庫까지 이르는 도중에서 적의 수와 왕래의 通路를 조사한 바 대마·일기·內外大島·志賀·平戶 등은 赤間關 以西에 있어서의 적의 본거지요, 四州 以北 竈戶·社島 等處는 赤間關 以東의 적의 본거지이다”596)≪世宗實錄≫권 46, 세종 11년 12월 을해.라고 보고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왜구의 근거지는 한두 곳이 아니라 우리 나라와 가까운 북구주의 섬들과 연안지역 대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왜구의 규모에 대하여≪고려사≫의 기록에 나타난 선박의 수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표 1>과 같다.

  시 기 선 박 규 모 위 치
1
2
3
4
5
6
7
8
9
충정왕 2년(1350) 6월
공민왕 7년(1358)
공민왕 12년(1363) 4월
공민왕 13년(1364) 3월
공민왕 23년(1374) 4월
우왕 2년(1376) 7월
우왕 3년(1377) 6월
우왕 3년(1377) 10월
우왕 10년(1384) 5월
20척
400여 척
213척
200여 척
350척
20척
200여 척
40여 척
27여 척
合浦에 침입
五入浦 침구
喬桐에 정박
葛島(順天地方)에 정박
合浦에 침입
전라도 元帥營 침구
제주도 침공
東萊縣에 침구
陽州에 들어와 3일간 정박

<표 1>왜구의 선박수

 위의<표 1>에서 볼 때 많은 때는 400여 척이라 하고 적은 때는 20척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배의 척수에 관해서만 표시되어 있고, 탑승원에 관해서는 고찰하기 어렵다. 왜구가 사용한 선박의 크기는 보통 70톤 정도였다.597) 竹越與三郎,≪倭寇記≫(白揚社, 1938), 29쪽. 그리고 탑승원에 대한 당시의 기록은 찾기 어려우나 한 가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조선 중종 7년(1512) 조선과 대마도 사이에 맺어진 壬申約條이다. 이것에 의하면 각 배의 선원수를 大船 40명·中船 30명·小船 20명으로 정하고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선박의 탑승원을 가장 적은 20명으로 보더라도 매회 상당한 수의 왜구가 침입한 것을 추산할 수 있을 뿐더러 쌀 4만여 석을 약탈하여 갈 수 있을 정도이면598)≪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9년 윤5월 신해. 그 선단의 규모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침입한 왜구의 인원수에 대하여 살펴보면 공민왕 13년(1387) 5월에 왜적 3,000을 진해현에서 대파한 기록이 보이며 우왕 5년(1379) 5월에는 騎 700·步 2,000의 침구가 있었고, 도적이 많으면 千百으로 떼를 짓고, 적으면 什伍로 隊를 지어 다닌다고 하였다.599)≪高麗史≫권 112, 列傳 25, 偰遜 附 長壽. 이러한 규모로 미루어 볼 때 왜구는 단순한 해적의 오합지졸이 아니고 배후에는 유력한 土豪가 있어 직접 조종하였다고 할 수 있다. 즉 대표적인 조종자는 대마도주 宗氏와 壹岐島主 志佐氏·西部日本의 巨酋 周防의 大內氏·九州豊後 大友氏 등을 들 수 있다.

 왜구들은 침입하면 약탈, 살인, 방화를 일삼아 연해의 조창에 불을 지르거나 도적질을 하고, 또는 漕船을 불지르고, 두어 살짜리 어린애들의 머리를 깎고 배를 갈라 쌀·술 따위와 함께 하늘에 제물로 바쳤으며600)≪太祖實錄≫권 1, 總書. 침입할 때마다 부녀를 포로로 해서 밤에는 주색을 그치지 않았다.601) 竹越與三郎, 앞의 책, 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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