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Ⅰ. 사상계의 변화
  • 1. 불교사상의 변화와 동향
  • 3) 수선사의 성립과 전개
  • (3) 원의 간섭과 수선사의 친원불교화

(3) 원의 간섭과 수선사의 친원불교화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원의 간섭(1270∼1356)이 본격화되면서 고려 국가의 제부문에서 심각한 변동이 일어났다. 원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정치체제의 일대 재편은 고려의 독자적인 국가체제를 위협하였으며, 특히 30여 년에 걸친 항몽전쟁 이후 원에 의한 일본원정과 그 준비(1271∼1294)는 삼남지방을 극도로 피폐시켰던 것이다. 이에 더하여 새로운 수탈집단으로 등장한 부원세력은 자의적으로 토지를 탈점하고 부세를 수탈하여 일반민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이에 따라 불교계도 불교교단의 주도권은 물론 불교사상 자체도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冲止가 활동한 시기에 현저하게 나타났다.

 충지(1226∼1293)0098) 冲止의 처음 법명은 法桓이고 自號는 宓庵老人이다. 속명은 珣인데 개명하여 元凱라 하였다. 시호는 圓鑑國師이다. 아버지는 魏紹로 定安(長興) 道艸縣(정안의 屬縣인 遂寧縣)의 土姓이며 戶部員外郞(정6품)을 지냈다. 어머니는 原邦(지역 미상) 출신의 吏部員外郞 宋子沃의 딸이다. 충지의 저술에는≪海東曹溪第六世圓鑑國師歌頌≫(또는 圓鑑國師歌頌이나 圓鑑歌頌, 충렬왕 23년)·≪曹溪宓庵和尙雜著≫가 현존한다. 전자는≪東文選≫·≪東國輿地勝覽≫ 등에 실려 있는 충지의 작품이 추가되어 1920년에≪圓鑑錄≫이라는 題號로 간행되어 전한다. 이 밖에≪曹溪圓鑑國師語錄≫이 있었으나 전하지 않고 다만 蒙菴老人 明友不渴의 서문(충렬왕 23년)만이 남아 있으며,≪圓鑑國師集≫(圓鑑集 또는 宓庵集)이라는 서명이 전하나≪원감가송≫과 同書異名인지 또는≪원감가송≫과≪조계원감국사어록≫을 합편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한편 金曛이 지은<曹溪山第六世贈諡圓鑑國師碑銘>(충숙왕 원년 ; 1314)이 남아 있다. 충지 때의 수선사에 대해서는 朴榮濟,<元 干涉期 初期 佛敎界의 變化-冲止(1226∼1293))의 現實認識과 佛敎思想을 중심으로->(≪14세기 고려의 정치와 사회≫, 민음사, 1994)을 참조하였다.는 사마시에 합격하고 春闈(예부시)에 장원급제한 유학적·문학적 소양을 지닌 관료출신 승려였다. 그는 혜심과 같이 과거출신으로 승과를 거치지 않고 승계를 받아 수선사 사주가 된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일찍이 永嘉書記를 지낸 적이 있으며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한림원에 들어가서는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충지는 세속적인 명예를 떨쳐버리고 29세의 늦은 나이에 선원사 법주로 있는 천영에게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그의 출가 이유는 사마시 출신인 혜심과 같이 무신정권체제하에서 유학의 역할에 한계를 느끼고 詞章學風的 유학에 대해 회의하던 중 불법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수선사의 참신하고 개혁적인 불교사상이 혜심 이후 중앙의 사대부층으로 크게 영향을 주자 이에 수선사계열의 천영에게 출가했다고 보인다. 이와는 다른 이유로 문인적 취향을 지닌 충지가 몽고의 침략으로 인한 참담한 고려의 현실로부터 도피하여 도가적 은둔을 동경해 출가하였던 점도 지적될 수 있다. 이후 충지의 삶은 세속의 급변하는 역사적 현실과 그대로 연관되면서도 이로부터 은둔하려는 이중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충지는 원의 간섭이 시작되자 현실에 그대로 순응하면서 친원의식을 갖게 되었다. 원종 12년 원은 일본원정을 위해 屯田經略司를 설치하는 한편 막대한 양의 군량과 함선 및 군사를 준비하도록 고려에 강요하였다. 이 준비로 고려는 인적·물적 자원을 탕진하였으며 사원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수선사는 면세의 혜택을 받고 있던 사유지에 전세가 부과되어 사세가 궁핍하게 되었다.≪圓鑑錄≫에 의하면 이 때 충지는 정혜사 사주로 있으면서 본사인 수선사를 대신하여 원 황제에게 면세를 간청하는 간절한 표문을 올렸으며, 결국 면세를 받게 되었다. 이에 충지는 원 황제에게 감사의 표문을 올리고 자주 祝聖疏를 지어 그의 수복을 빌고 덕화를 찬양하였다. 그리고 수선사를 원 황제의 제일 원찰로 삼아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충지는 원 황제의 초청을 받아 황실에 들어가 사부의 예를 받았다(충렬왕 원년).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재상직을 추증받기도 하였다. 원 황제와의 관계는 황실의 지원을 받아 사원재정의 안정을 도모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원 세조의 불교정책이 정복지역민에 대한 회유의 성격을 짙게 띠고 있었으며, 회유할 때 상층승려가 적극적으로 가담되었던 점을 미루어 볼 때, 충지를 원에 불러들인 것은 세조의 이러한 정복지 불교정책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세조는 대몽항쟁기에 항몽의식을 고취시킨 고려불교에 대해 일면 보호책을 쓰면서 일면 충성을 강요하였는데, 충지에 대한 태도도 이러한 그의 불교정책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충지는 원에 종속적이고 친원적일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이러한 충지의 친원의식은 수선사가 최씨무신정권기 대몽항쟁 때에 정신적 구심체가 되어 국가의식을 고양시켜 고려의 국가체제 유지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던 입장에서 일변한 것이다. 결국 충지의 친원의식은 고려불교가 원에 종속됨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 다른 측면에서 원의 고려에 대한 간섭을 합리화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충지의 친원의식은 양면적 현실인식으로 이어졌다. 그의 현실인식은 당시 고려사회를 탕진시킨 일본원정에 대한 시각에서 잘 드러난다. 충지는 원정에 동원되어 고통받는 일반민의 열악한 처지를 인식하면서도 그 원정의 주체인 원을 찬양하고 원정을 칭송하는 양면성을 드러내고 있다. 즉 충렬왕 6년에 지은<嶺南艱苦狀二十四韻>과 동왕 9년에 지은<憫農黑羊四月旦日雨中作>에서 일본원정 준비로 인해 고통받는 일반민의 참상을 구체적으로 읊고 있다.0099) 秦星圭,<圓鑑錄을 通해서 본 圓鑑國師 冲止의 國家觀>(≪歷史學報≫ 94·95, 1982) 참조. 충지가 이미 친원의식을 갖고 원과 고려의 체제에 순응하면서 충성을 맹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간접적이나마 원정의 폐단을 고발한 것이며 현실인식의 적극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이 원의 간섭에서 야기되었다는 사실은 침묵한다. 충지는 원을 비판하지 못하고 도리어 원의 황제가 내려주는 큰 은택으로부터 그 참상의 해결책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제2차 일본원정(충렬왕 7년 ; 1281) 전후 작품으로 추정되는 장문의<東征頌>에서는 동정과 원 황제의 교화를 칭송하고 있다. 이같은 충지의 양면적 현실인식은 그의 친원의식에서 나온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원의 간섭이라는 시대적 제약에서 기인한 것이다.

 원의 간섭이라는 시대적 상황으로 충지는 양면적 현실인식을 갖게 되고 수선사의 불교전통과는 다른 변화된 불교사상을 보였다. 먼저 충지에게는 수선사 불교전통을 계승하려는 의식이 있었음이 주목된다. 하지만 지눌이 보인 선교일치사상과 혜심이 선양한 간화선과 유불일치사상에 대해서는 매우 단편적 모습만 보이고 사상적으로 이어지고 진전시키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지눌 이전 고려 중기 선의 전통을 강조하는 점이 특색이다. 그의<慧炤國師祭文>과<定慧入院祝法壽疏>및<定慧入院祝聖夏安居起始疏>에 의하면 정혜사의 창건자로서 혜소국사의 공적을 찬양하고 국사의 선풍이 몽여·혼원을 거쳐 자신에게 전승되었음을 감사하고 있다. 예종대 혜소국사의 선이 고답적이며 귀족적인 경향을 가지고 개인적 수업형태를 중시하는 분위기였는데, 이러한 선의 전통을 강조하고 있는 충지의 불교는 지눌의 결사불교와 비교할 때 확실히 변질된 것이며,0100) 崔柄憲,<修禪結社의 思想史的 意義>(≪普照思想≫ 1, 1987), 17쪽. 이는 그의 삶이 결사이념의 적극적인 실천보다는 은둔적으로 흘렀던 점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충지가 수선사에서 볼 수 없었던 彌陀信仰과0101) 冲止,<彌陀齋疏-李敖尙書行>(≪圓鑑錄≫;≪韓國佛敎全書≫ 6). 觀音信仰을0102) 冲止,<祝大賀消災仁王千手智論四種法席疏>(≪圓鑑錄≫;≪韓國佛敎全書≫6). 보이고 있는 것도 하나의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다. 이는 현실사회와 불교교단의 당면과제와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철학적 노력보다는 단지 현세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공덕신앙적 의식불교 차원에 머물렀음을 보여줄 뿐이다.

 충지불교에서 시대상을 무엇보다도 잘 반영하는 것으로 祝聖을 강조한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충지의 저술에는 원제와 국왕의 수명무궁을 위해 빈번히 실시한 축성자료가 많은 양을 차지한다.0103) 冲止,<祝聖疏>(≪圓鑑錄≫;≪韓國佛敎全書≫6) 등이 있다. 선종교단에서 축성은 청규에 규정되어 있는 의례의 하나인데, 교단이 국가권력에 철저하게 종속되어 국가불교적 성격을 강하게 띠면서 더욱 강조된 것이다. 원래 수선사에는 청규가 있는데 지눌이 지은≪계초심학인문≫이 그것이다.0104)≪誡初心學人文≫은 政敎의 야합을 거부하는 정신 아래서 저술된 淸規이며, 그것은 國王恩 등의 四恩을 우선으로 하여 조직된 護國淸規가 아니라 禪衆의 수행만을 위주로 하여 조직된 護法淸規라고 한다(崔昌植,<普照 定慧結社와 淸規>,≪普照思想≫ 5·6, 1992). 이 청규는 오직 수행자를 위하여 일용규범으로 만들어져 국가나 국왕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일체의 언급이 없다. 이런 전통에서 볼 때 충지의 축성은 수행 중심의 護法淸規에서 벗어난 護國淸規로의 변화라고 하겠다. 이러한 충지의 축성은 바로 원대 선종의 영향으로 보여진다. 원대 선종은 사상적 진전이 없이 완전히 국가의 통제하에 놓이면서 국가불교적 성격을 강하게 표방하였다. 이런 경향이 원의 간섭을 시작으로 고려에 그대로 유입되었던 것이다.

 충지불교의 국가불교적 성격은 그의 친원적 성격과 함께 원을 정점으로 하는 체제불교적 특징을 강하게 띠도록 하였다. 이는 그가 교류한 인물들의 정치적 특성이 친원적이며 원과 고려국왕의 체제에 순응하면서 가세와 정치적 생명을 이어간 관료들이라는 점과 연관시켜 볼 때 더욱 뚜렷해진다. 수선사가 정치세력과 연결되어 타락한 중앙귀족불교를 비판하고 지방에서 지방민의 후원으로 시작한 혁신적인 불교사원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충지의 불교성격은 수선사 창립 당시와는 크게 변모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며, 선사상의 발전에 제약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충지 때의 수선사는 불교교단에서의 주도권을 상실하였다. 비록 원제와 고려국왕 및 여러 정치세력과 교유를 가졌고 이들의 후원을 받았지만 최씨무신정권기에서와 같은 정도는 물론 아니었기에, 사세가 여타 교단에 비해 뒤졌고 불교계에서의 주도적 위치도 유지할 수 없었다. 당시는 선종 가지산문의 일연과 天台宗의 妙蓮寺계열 및 瑜伽業(法相宗)이 원 황실을 중심으로 하는 국왕과 새로 등장하는 정치세력들의 실질적 후원하에 생전에 국존과 국통 및 왕사에 책봉되고 대규모의 종단법회를 주관하면서 불교계를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수선사의 사세는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그나마 인근지역 지방민의 후원도 격감하였다. 일본정벌로 특히 경상·전라 양도가 국가적 賑貸가 실시될 정도로 궁핍한 상황에서 지방사회의 후원을 얻기는 어려웠을 것이며, 최씨집권기에 이루어 놓은 사원전과 보가 제대로 운용될 수도 없었다. 충지의 비가 그의 사후 22년만에 수선사의 사세가 회복되는 제10세 萬恒이 사주로 있을 때 비로소 세워졌고, 충지 이후 제7·8·9세 사주가 누구였는지도 불분명할 정도로 그들의 행적이 소연한 사실도 수선사의 퇴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다가 원 간섭기 중기의 충선왕대 말년 만항 때에 이르러 사세가 회복되고 여말의 공민왕대 수선사 제13세 復丘 때에 다시 대두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0105) 李齊賢,<海東曹溪山修禪社第十世別傳宗主重續祖燈妙明尊者贈諡慧鑑國師碑銘>(≪益齋亂藁≫ 권 7).
李達衷,<王師大曹溪宗師 一邛正令雷音辯海弘眞廣濟都大禪師覺儼尊者贈諡覺眞國師碑銘>(≪東文選≫ 권 118).
이 때 국왕과 가문의 후원으로 특별한 法號를 받고 문인이 1,000여 명에 달할 때도 있었다. 이제는 원 간섭기 초기처럼 원 황실과의 관계보다는 고려왕실과 깊은 관계가 이루어져 불교계 전면에 나서고 있으나, 왕권에 밀착되어 왕권강화에 이용되었으니, 역시 사상의 기반은 지배층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사상적으로 진전된 것은 없었다. 마침내 고려 말에 지눌의 직계법손이 아닌 비수선사계 승려들이 사주가 되어 수선사의 불교전통이 단절되는 상황을 맞기도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불교운동으로 출발한 수선사는 고려 후기의 불교사는 물론 사상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그 결사이념과 불교사상이 정치권력과의 관계에 따라 변화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수선사의 지눌·혜심사상은 고려 후기와 조선시대 불교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중국과 일본에도 전파되었다. 그리고 지눌의 정치한 심성론과 혜심의 유학자 관료와의 교유를 통한 유불일치사상은 여말 주자성리학 수용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던 점은 한국사상사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朴榮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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