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Ⅰ. 사상계의 변화
  • 1. 불교사상의 변화와 동향
  • 4) 백련사의 성립과 전개
  • (3) 백련사 결사운동의 전개와 추이

(3) 백련사 결사운동의 전개와 추이

 앞에서 백련사 결사운동의 성립과정과 사회적 기반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러면 이들 결사운동이 전개된 추이와 그 역사적인 의미를 검토하기로 한다. 13세기 전후 불교계는 신앙결사운동이 전개되었으며 특히 그 주도세력의 출신성분이 그 이전과는 달리 대부분 지방사회의 향리층이나 독서층이라는 점이 주목된다.0137) 蔡尙植,<13세기 信仰結社의 성립과 사상적 경향>(앞의 책, 1991), 22∼30쪽. 이는 당시 사회변동에 발맞추어 불교계도 전환의 분위기에 접어들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하겠다.

 가령 요세의 경우, 합천의 호장 출신의 자제인데, 이는 이전의 문벌귀족이나 왕족 출신이 불교계의 주도세력으로 부각되던 단계와는 달리 지방사회의 향리층과 독서층의 자제들이 불교계의 중추세력으로 등장하였음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요세를 계승한 다음 세대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주목되는 인물들은 2세인 천인(1205∼1248)과 4세인 천책(1206∼?)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면 먼저 천인에0138) 天因에 대한 기록은 소략한 편이다. 그의 저술로는≪靜明國師詩集≫(3권)과≪靜明國師後集≫(1권) 등이 있다. 전자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서문만 남아 있으며 후자는 그 일부만 전할 뿐이다.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천인은 속성이 박씨이며 燕山 출신이다. 그는 고종 8년(1221, 17세)에 進士科(國子監試)에 합격하여 成均館에 들어갔다가 그 해 겨울 考藝試에 제일로 뽑히였으나 그 뒤 禮部試를 포기하고, 고종 15년에는 同舍生 許迪, 前進士 申克貞과 더불어 요세에게 입문하였다는0139) 蔡尙植, 앞의 책, 85∼86쪽. 사실로 보아 요세와 마찬가지로 지방사회의 토호층이거나 독서층 출신임을 알 수 있다.

 천인은 요세에게서 삭발한 뒤 송광산 수선사의 혜심에게서 조계선에 대한 요령을 체득하고서 만덕산으로 돌아와 스승의 명에 의하여≪법화경≫에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고종 19년 여름에 만덕산에 보현도량이 개설되자 이 곳에 2년 동안 머물다가 다시 智異山·毗瑟山 등지로 은둔하여 수행에 힘썼다. 몇 년 후 다시 만덕산으로 돌아와 요세에게서 천태교관을 전수받았으며, 요세가 이미 늙어 주법의 자리를 물려주려 하자 몸을 숨겨 上洛(尙州) 功德山으로 피하였다. 이 때가 고종 30년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공덕산에는 東白蓮社가 결성되고 있었다. 이는 백련사 결사가 확산되었다는 의미를 갖는 것인데, 崔滋가 고종 28년 상주목사로 있으면서 창건한 米麵社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천책이 찬한<遊四佛山記>에0140) 天頙,≪湖山錄≫ 권 하. 이 때의 사정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그 뒤 천인은 고종 32년 요세를 계승하기 위하여 四佛山(공덕산)에서 만덕산으로 돌아와 제2세 주법을 맡게 되었다. 이 때 천인은 스승의 은혜를 거절하기 어려워 入院함을 밝히고 있다.0141)≪東文選≫ 권 111, 疏 初入院祝聖壽齋疏文(天因). 천인은 백련사 주법을 맡은 지 2년 만인 고종 34년 겨울에 胡寇를 피하기 위해 莞島 象王山 法華社로 들어갔다. 이 때 천인은 법화사에서 가벼운 질병을 앓았는데, 이 사실을 전해 들은 고종은 서신과 함께 약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 뒤 그는 고종 35년 7월 7일 주법의 자리를 圓脘에게 물려주면서 사후에 검소하게 다비할 것을 경계하고 있는데0142)≪東文選≫ 권 83, 序 靜明國師詩集序. 이는 결사의 주법자로서 보여준 당연한 태도이며, 한편으로 몽고의 침략을 겪고 있는 당시의 어려운 사정을 감안한 것인지도 모른다. 원완에게 주법을 물려준 뒤 만덕산 남쪽에 있는 龍穴菴에서 담담히 지내다가 그 해 8월 4일에 崔滋·鄭參政과 그의 제자인 天吉에게 글을 남기고0143) 위와 같음. 입적하였다.

 천인의 저술로 현전하는 것은≪靜明國師後集≫과 몇 편의 시문·소 등인데 이를 통해 단편적이나마 그의 불교관을 살펴본다. 요세의 불교사상을 계승한 천인은 그의 스승과 비슷한 사상적 편력을 경험했다고 할 수 있다. 보현도량 개창 전에는 선을 수행할 정도로 다양한 불교경험을 하기도 했으나 보현도량 개창 후에는 법화사상을 기본으로 한 정토관이 그의 불교관의 중심이었다.≪정명국사후집≫의<自序>에서 극락세계인 정토에 다 함께 나아가 불력을 친히 잇고 큰 지혜를 성취하여 중생을 널리 제도하고 열반의 기쁨을 얻기 위하여 彌陀讚偈와≪법화경≫28품의 각 품에 대한 찬게를 짓는다고 한 것은 그의 불교관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彌陀讚>에서도 마음이 바로 佛土임을 강조하고 마음을 밝히는 가장 빠른 길은 법화신앙에 의거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법화사상을 가장 일목요연하게 표현한 것은≪후집≫의<摠讚>에≪법화경≫은 諸法實相을 體로, 平等佛慧를 妙宗(用)으로 하였으며 二乘·三乘(聲聞·緣覺·菩薩乘)을 一乘으로 融攝하고 있음을 밝힌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천인은 법화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정토신앙까지도 강조하는 사상체계를 표방하였는데 이는 바로 요세를 계승한 것이라 하겠다.

 한편 천인이 수선사의 2세인 혜심으로부터 月南寺에서 수선의 요령을 체득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초기에는 그의 스승처럼 간화선의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추측되지만 백련사의 사상적인 성격상 止觀에 의한 천태종의 禪觀이 주된 사상적 기반이라 생각된다. 다만 천인이 평생을≪法華經≫·≪圓覺經≫·≪楞嚴經≫과 지자의 법화 3부를 널리 독송하고 수선의 여가에 게송을 불렀다는 것은0144)≪東文選≫ 권 6, 七言古詩 致遠菴主以詩見示仍以請予紀山中故事次韻答之(天因). 원각·능엄경이 수선사에서도 널리 읽혔던 사실과 관련하여 앞으로 검토해 볼 문제이다. 그렇지만 보현도량의 설치 후에는 분명히 정토신앙적 사상체계를 강조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천인이 접촉한 인물에 대해 살펴보자. 이에 대한 자료가 없는 형편이지만 누구보다도 사불산에 미면사를 개창할 때 주축이 되었던 최자를 들 수 있다. 천인은 최자보다 나이는 십수 세 적지만 본래 천인이 유학에서 출발한 인물이라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삭발하기 전부터 이미 양자간에는 친밀한 교류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 같다. 최씨정권 아래에서 문사로 활약한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하나인 최자는 보현도량의 개창과 관련하여 최씨정권이 백련사에 관심을 갖게 하는 매개역할을 했는지도 모른다.

 다음은 천책에0145) 천책의 저술은≪海東傳弘錄≫과 시문집으로≪湖山錄≫이 있다.≪湖山錄≫은≪室薄錄≫,≪文集≫(2권) 등으로 표현된 것이 있으나 모두≪湖山錄≫을 지칭하는 것 같다.
≪禪門寶藏錄≫을 천책의 저술로 학계에서 널리 인정하고 있으나, 이를 천책의 저술로 보지 않는 견해도 있다(蔡尙植, 앞의 책, 89∼90쪽).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천책도 천인과 동일한 출신 성격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천책은 바로 천인과 함께 요세에게 입문한 전 진사 신극정인데,0146) 蔡尙植, 앞의 책, 91∼92쪽. 그는 고려의 삼한공신 申厭達의 11세손이며 모계는 慶州 金氏로 상주 관내의 山陽縣(현 문경)에서 출생했다. 이로 보아 그는 이 지역의 토호세력이자 독서층 출신으로 추측된다. 그는 국자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그 뒤 예부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이어 관로에 나아갈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나 포기하고 고종 15년 23세 때에 요세의 제자로 입문한 인물이다.0147)≪東文選≫ 권 14, 七言律詩 次韻答中書舍人金祿延(眞靜). 그가 삭발한 동기는 丹桂主人인 淸河相國이0148) 淸河相國을≪萬德寺志≫ 편찬자가 崔滋라고 주를 붙였으나, 천책의 科擧合格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의 座主였던 崔宗梓가 아닌가 한다(許興植,<眞靜國師의 生涯와 時代認識>,≪東方學志≫ 35, 1983 ;≪高麗佛敎史硏究≫, 一潮閣, 1986). 金字蓮經을 베껴 쓰게 한 것이 계기라고0149) 天頙,≪湖山錄≫권 하, 答芸臺亞監閔昊書. 스스로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유학에 바탕한 인물들이 1220년대에 백련사의 요세에게 입문하여 승려가 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사상구조의 단면을 시사하는 것이다. 심지어 이들이 과거에 합격한 인물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최우정권에 의해 대거 발탁될 수 있는 정치적 상황을 미루어 볼 때, 단순히 개인적인 성향에 의해 승려가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현상은 문벌체제하에서 귀족적·보수적인, 또 무신체제하에서 부용적 성격을 지닌 유학에 대한 회의와 당시 혼란한 사회에 대한 좌절감이 작용한 것은 아닌가 한다. 역설적으로 이들 유학자들이 백련사 등의 결사운동에 참여하게 된 이면에는 사상적으로 당시의 유학의 분위기에서 해결할 수 없는 사상체계를 백련사계통에서 표방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 뒤 천책은 입사 후 고종 19년(1232) 보현도량을 개창할 때<起始疏>를 찬했으며, 고종 23년에는 요세의 명에 의해<백련결사문>을 지었는데0150)≪萬德寺志≫권 2, 眞靜國師寄金承制書. 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몇 구절이≪釋迦如來行蹟頌≫에 인용되어 있다. 그 후 천책은 고종 31년 8월에 미면사, 즉 동백련의 제1세 주법이 되었는데 이는 미면사를 개창한 최자가 上洛守로 있으면서 이 지역 출신인 천책을 초청하였던 것이다. 천책이 동백련에 주법한 기간은 얼마나 되는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백련사 3세 주법으로 원완이 고종 35년에 등장하고, 그 다음 주법을 천책이 맡았던 것으로 미루어 백련사 주법으로 가기 전까지는 동백련에 있었던 것 같다. 천책이 백련사의 4세였다는 기록은 ‘白蓮社第四世眞淨國師’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으며,0151) 雲黙,≪釋迦如來行蹟頌≫, 跋文. 그가 백련사에서 주법한 시기는 대략 13세기 중반 이후로 짐작된다.

 백련사에서 주법할 당시인 원종 3년(1262)에 천책은<法華隨品讚>을 짓기도 하고 원종 6년에는 林桂一에게 시를 보내기도 하였다.0152)≪萬德寺志≫, 年表. 그가 임계일에게 시를 보낸 것은 다음해 가을에 임계일이 蓮社詩를 보낸 것과0153)≪東文選≫ 권 14, 七言律詩 丙寅秋仲一日 謁平章慶源公因語…因和成一篇 遙寄呈大尊宿丈下. 관련하여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즉 임계일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관직자들과 천책은 많은 교류를 하였는데, 이를 통해 천책이 주법할 당시 백련사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천책이 교류한 인물을 다음의 세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임계일을 중심한 中書省(藥省)의 諸郞들인 중앙관직자를 들 수 있다. 이들은 林桂一·李藏用·柳璥·鄭興(본명 可臣)·金祿延·郭汝弼 등인데 이장용·유경은 각각 정당문학과 평장사의 최고관직자들이며 그 밖에는 중서성의 左拾遺·中書舍人·起居郞 및 同文院錄事 등 4∼5품의 중앙관직자들이었다.0154) 蔡尙植, 앞의 책, 94∼95쪽.

 당시 유경 등이 崔竩를 제거하고 이어 강화도정부가 원종 즉위년(1259) 몽고에 항복했으며 그 뒤 金俊이 敎定別監이 된 정치적 상황으로 볼 때, 이들과의 교류를 단순하게만 생각할 수 없게 한다. 백련사에서 보현도량을 설치한 것이 대몽항쟁의 일환이었을 가능성을 감안할 때 몽고에 항복한 이후에는 백련사의 성격이 변질되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임계일이라는 인물이 밝혀져야겠지만 대체로 이들이 최씨집정기에서 원의 간섭 초기까지 고려사회를 이끌어간 핵심적 문신관료층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시 정세에 대해 이들이 고민한 내용을 부분적으로 이 연사시에 표현한 것은 아닌가 한다.

 둘째, 천책이 백련사에 주법할 당시 가까이 있던 지방수령들을 들 수 있다. 시를 통해 朗州(현 영암)太守 金㥠(?∼1284)라든지,0155)≪東文選≫ 권 14, 七言律詩 次韻答朗州太守金㥠所寄(2首, 眞靜). 珍島縣令 于勉0156)≪萬德寺志≫ 권 3, 呈龍穴大尊宿丈室. 등과의 교류를 들 수 있다.

 셋째, 천책이 입사 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유학자들과의 교류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성균관 시절의 동사생, 또는 예부시에 함께 합격한 인물들로 추정되는데 李潁(?∼1277), 金坵(1211∼1278) 및 閔昊 등을 들 수 있다.

 이상에서 천책과 교류한 인물들을 대략 세 가지 부류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이들과의 교류를 단순하게 파악할 것이 아니라 연사시를 교류한 시기가 원종 7년 전후라는 점과, 당시 고려사회가 무신집권 막바지에서 대몽항쟁의 열기가 식어 차츰 몽고에 복속되어 가던 시기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들 시편들은 당시 지식인들로서 관직에 나간 자들의 고민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이들과의 교류 이후의 천책에 대한 기록이 거의 보이지 않는 점으로 보아 천책은 몽고간섭기로 접어들면서 잠적한 것 같으며, 그를 계승한 손제자인 雲黙의 활동상과 사상체계를 통해서 그의 행적을 짐작할 뿐이다.

 그러면 천책의 불교관이 어떠한가 살펴보자. 천책이 금자연경을 썼던 사실이 있었음을 미루어 볼 때 그의 불교관은 법화사상에서 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천책의 법화사상을 알려주는 자료는<萬德寺法華道場疏>와<萬德寺蓮經法席疏>를 들 수 있다.0157)≪萬德寺志≫ 권 3. 천책은 삼승(方便)을 일승(實相)으로 회통한다는 법화경의 중심되는 이론체계에 입각하여 一念이라 하여 염불을 강조하기도 하고 실천문으로 修懺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이러한 불교관은 그가 원종 9년에 완성한0158) 許興植, 앞의 책, 850쪽.≪海東傳弘錄≫이 법화신앙의 영험담을 통해 정토관을 표방한 저술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0159) 이에 관한 것은 다음의 글들이 참고된다.
許興植, 위의 책, 850∼854쪽.
梁銀容,<高麗 了圓撰 法華靈驗傳의 硏究>(≪金三龍華甲紀念 韓國文化와 圓佛敎思想≫, 1985).

 이러한 천책의 불교관은 요세를 계승한 것이었으며, 특히 요세가 지자 이후 쇠퇴한 천태종을 만덕사에서 보현도량을 개창함으로써 다시 일으켰음을 밝히고0160)≪萬德寺志≫ 권 3, 萬德寺法華道場疏. 있는 것은 주목된다. 요세가 개창한 백련사를 다분히 우월시하는 분위기, 다시 말하면 義天이 개창한 천태종에 대해 그들이 정통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백련사는 요세 이후 천인·천책에 의해 계승되었으나 원의 간섭기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퇴조하게 된다. 충렬왕 10년(1284)에 충렬왕과 齊國大長公主의 원찰인 妙蓮寺가 개경에 건립되고부터 백련사의 사상적 전통은 변질하게 된다.0161) 蔡尙植,<妙蓮寺의 창건과 그 성격>(앞의 책), 181∼197쪽. 백련사 출신인 景宜와 無畏가 묘련사에 참여한 이후 백련사의 본래적인 성격은 변질·해체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묘련사를 뒤에 원 간섭기의 대표적 권문세가로 부각된 趙仁規가문이 무려 4대에 걸쳐 4명의 승려를 배출함으로써 장악하였으며, 나아가 조씨가는 묘련사뿐 아니라 차츰 천태종 교권까지도 좌우하였다. 이같은 현상은 고려사회가 13세기 말 이후 해체되어 가는 정치·사회상을 반영한 것이며, 자각·반성운동으로 일어난 결사운동이 계승되지 못한 채 불교의 사회적 기능이 축소되어 가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백련사의 사상적 전통은 14세기 중반에 활약한 운묵에 의해 계승되었을 뿐 이후의 전모는 알 수 없다.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신앙결사가 우리 역사상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존속한 시기는 13세기 전후에 걸친 몇 십 년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주도한 인물들은 수선사계통의 지눌·혜심과 백련사계통의 요세·천인·천책 등이었다. 12세기 이래로 지방의 토호층과 독서층, 일반 민들이 보수적 문벌귀족체제에서 유리되면서 한편으로는 성장기반을 서서히 구축해 가던 잠재적인 에네르기가 궁극에는 사회변혁의 동력으로 작용하게 되는 13세기 전후에, 실천적 결사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결사운동이 남기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는 선에서 맺고자 한다.

 첫째는 사회계층적 측면에서 볼 때 보수적인 소수의 문벌귀족체제에 의해 장악되고 있던 불교계의 제반 모순을 지방의 토호층과 독서층들이 자각·비판하고 이에 대한 개혁을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신앙결사를 주도한 몇몇 이름난 승려의 노력도 중시해야겠지만 이보다 사회구조적 측면의 변화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는 소수의 독점에서 상대적으로 다수에 의한 공유체제로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13세기 고려사회가 처해 있던 대내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나기도 했으며, 아울러 30여 년간에 걸친 이민족과의 항전을 치러낼 수 있는 저력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사상사적 측면에서 볼 때 결사운동을 주도한 지도자들이 표방하고 있는 이념적 지표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수행과 교화의 어느 한 쪽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어느 한쪽에만 기울어지기 쉬운 현실을 감안할 때 중요한 교훈을 던져주는 것이다. 수행은 선사상이든 천태사상이든 출가인들의 본분이지만, 교화는 자기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풀어나갈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므로 실천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 양자는 관념적 차원에서 머물 것이 아니라 수레의 양바퀴처럼 함께 하면서 실천의 장에 우뚝 서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모습을 결사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셋째는 신앙결사를 운동적 차원에서 인식하다 보면 철학면(교리면)의 발전은 경시하기 쉬운데, 당시 수선사와 백련사를 주도한 인물들의 불교철학은 최고의 수준이었다는 사실이다. 단적으로 13세기 전반에 수선사가 간행한 禪籍을 보면 단순히 중국의 저술을 그대로 재간행한 것이 아니라 종합하여 재정리한 것이 의외로 많음을 알 수 있다. 또 백련사도 천태·법화계통의 불서를 節要하고 쉽게 이해하도록 정리한 기록이 보인다. 특히 당시 신앙결사에서 절요를 시도한 것은 불교철학을 다수가 쉽게 공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신앙적 의도가 작용한 것이지만, 이러한 시도는 철학면에서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여야 가능한 것이다. 신앙결사 단계에 구축한 이러한 철학면의 발전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불교철학의 自己化단계에 이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또한 13세기에 몽고와의 항전을 치르면서도 대장경을 주조할 수 있는 사상적 맥락과도 통하는 것이다. 당시 대장경의 주조는 무엇보다도 철학면에서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야만 가능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당시 13세기 동아시아의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가장 선진성을 지닌 불교사상을 표방한 인물들이 바로 知訥과 了世를 비롯한 결사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이라는 사실이다.

<蔡尙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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