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Ⅰ. 사상계의 변화
  • 1. 불교사상의 변화와 동향
  • 7) 대장도감과 고려대장경판
  • (3) 고려대장경의 판각

가. 고려대장경의 조조동기와 판각시기

 고종 19년(1232)에는 몽고의 침입으로 인하여 서울을 강화도로 옮겨 대몽항전을 시작하였으며 符仁寺에 보관중인 현종 때의 대장경(初雕大藏經)이 모두 불타버리게 되었다. 이 때에 일어난 두 가지 사건, 즉 초조대장경이 불에 타서 없어진 것과 서울을 옮겨 장기간 대몽항전에 들어가게 된 것이 대장경 雕造동기와 배경이 되는 것이다.

 고려대장경의 조조동기는≪高麗史≫와 李奎報가 지은<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 나타난 바와 같이0192)≪高麗史≫ 권 24, 世家 24, 고종 38년 9월 임오.
李奎報,≪東國李相國集≫ 전집 권 25, 記·牓文·雜著 大藏刻板君臣祈告文.
초조대장경이 몽고병에 의해 불에 타서 없어졌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대장경조조는 국가적 사업이었으나 당시 최고 권력자인 崔瑀에 의해서 주도되고 이룩되었다. 즉 최우가 몽고군에게 방치된 백성들의 불만을 호국이라는 종교적 신앙심으로 전환시키고, 당시 최씨정권에 대해 저항하였던 華嚴宗을 비롯한 敎宗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라는 정치적인 의도를 배제할 수 없다. 당시 대장경은 고려시대 백성들의 정신적 지주였으므로 대장경 조성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불교신앙에 의한 문화민족이라는 일체감을 조성하고 대몽항쟁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었다.

 고려대장경의 판각시기에 관하여 살필 수 있는 자료로는 우선≪고려사≫를 들 수 있다. 이에 의하면 고종 38년 9월 임오에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성의 서문 밖에 있는 大藏經板堂으로 가서 行香하였는데 현종 때의 판본이 임진년 몽고침입 때 불타버려 왕과 군신이 다시 발원하여 도감을 세우고 16년에 걸려 마쳤다는 것이다. 이 기록에서 보면 고종 38년을 기점으로 16년 전인 고종 23년에 판각을 시작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고종 24년에 작성한<대장각판군신기고문>의 “이미 담당官司를 설치하여 그 일을 시작하게 하였다”는 기록과 또≪東國李相國集≫의 말미에 나오는 “지금 分司大藏都監에서 대장경을 모두 새겼음을 고한 여가에 칙명을 받들어 이 문집을 판각하게 되었다. …辛亥歲(1251) 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雕造”라는 기록이0193) 李奎報,≪東國李相國集≫ 附錄, 跋尾. 있다. 그리하여 그 동안 학계에서는 고려대장경의 판각기간을 고종 23년에서 고종 38년까지의 16년으로 보아왔다.0194) 造成年代에 대해서 妻木直良,<高麗大藏經雕板年代に就て>(≪新佛敎≫11­5, 1910), 483∼487쪽에서 주장된 이후 고려대장경판에서 대한 연구에서는 모두 그대로 따르고 있다.
≪高麗大藏經硏究資料集≫ Ⅰ·Ⅱ 참조.

 그러나 위의≪고려사≫ 기록은 대장경의 판각을 모두 마친데 대한 경축의식을 행한 내용이므로 판각기간 산출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실제로 대장경판 판각은 이미 고종 35년에 모두 마쳤는데 경축의식이 늦어졌기 때문이다. 경축의식이 늦어진 것은 당시 대장경 판각을 모두 마치고 난 뒤 대장경 판각을 담당했던 分司南海大藏都監에서 판각한0195) 朴相國,<大藏都監의 板刻性格과 禪源寺問題>(≪伽山李智冠스님華甲紀念論叢 韓國佛敎文化思想史≫上, 1992). 대장경판을 강화의 대장경판당으로 운반해야 했고, 또한 무엇보다 대장경 판각을 지원했던 당시 최고 권력자인 최우(이)가 고종 36년에 죽게 되고 그의 아들 崔沆이 집권하는 정치적인 과도기였기 때문일 것이다.0196)≪高麗史≫ 권 23, 世家 23, 고종 36년 11월 임신 및 권 24, 世家 24, 고종 37년 12월 병오. 이러한 판각기간의 잘못된 추정은 전래된 역사자료의 결핍 탓으로 돌려진다. 그러나 현존판이나 판본의 권말에는 “丁酉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등으로 간행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 간기를 조사해 보면 대장경판의 판각기간을 정확히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의<표 2>에 의하면 대장경판은 고종 24년에 2종 115권을 판각한 것을 시작으로 고종 35년에 경순 1,403<대장목록>1종을 마지막으로 하여 모두 12년이 걸려 1,496종 6,568권을 완료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대장경 판각에 앞서 우선 대장경판을 새길 목재를 구하여 운반하고 일정한 크기로 잘라 바닷물에 담가 결을 삭이고 충분히 건조시켜 판각용으로 다듬어야 한다. 그리고 전국에서 경판판각에 경험이 있는 刻手와0197) 朴相國, 앞의 글, 판각에 참여한 刻手가 4백∼5백명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板下本을 쓸 필사자를 모집하여 일정한 체제로 통일하기 위한 훈련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또한 守其 등이 중심이 되어 송본·거란본·국내전래본과 내용을 대교했기 때문에 1∼2년의 준비기간으로는 어림없는 국가적 사업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대장경 판각은 고종 35년에 모두 완료되었고≪고려사≫ 기록에 16년이란 기간이 걸려 판각했다고 하였으므로 이를 역산하면 고종 20년부터 대장경 조성사업이 시작된 것으로 보게 된다. 그렇다면 고종 20∼23년의 판각을 위한 사전 준비기간을 거쳐, 고종 24∼35년 12년 동안 판각을 모두 마치고 고종 38년에 경축의식을 치르게 된 것이다.

판 각 연 도 판각종·권수 판 각 연 도 판각종·권수
정유년(1237) 2종 115권 계묘년(1243) 466종 1,313권
무술년(1238) 42종 509권 갑진년(1244) 281종 1,734권
기해년(1239) 103종 306권 을사년(1245) 280종 769권
경자년(1240) 74종 292권 병오년(1246) 169종 448권
신축년(1241) 107종 298권 정미년(1247) 32종 99권
임인년(1242) 176종 381권 무신년(1248) 1종 1권
간기 없는 것 78종 301권 1,811종 6,566권0198) 여기서 種數는 권별 간기에 의한 연도별 분류이기 때문에 1∼4년에 걸쳐 판각된 판은 1∼4종으로 계산된 숫자이다. 그리고 권수에 있어서는 6,566권으로 집계되나 연도별 분류에서의 착오로 아직 2권의 행방을 확인하지 못했다.
실제로 구성된 대장경 총계 : 1,496종 6,568권0199) 학계에서는 대장경판의 종·권수에 대해서 여러 가지 異說이 있었다. 최근에 동국대학교에서 발간한 고려대장경 영인본으로 인해 정확한 숫자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經順 번호인 1,142, 1,143과 1,225, 1,226을 2종으로 봐야 하는데 4종으로 각각 분리하였다. 여기서 종수 계산은 아무리 짧은 경전이라도 한권으로 독립시켰으면 1종으로 취급하여야 하고, 이와 반대로 분량이 많아도 권으로 독립시키지 않고 1권에 여러 종류의 경전을 수록한 것은 독립된 경전의 종수로 취급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대장도감의 원래의 편집의도를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朴相國, 앞의 글).

<표 2>간기를 통해 본 대장경판 판각연도별 분류표

 고종 19년에 초조대장경판이 소실되고, 더구나 강화로 수도를 옮기면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도 곧바로 대장경판의 조성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고종 20년에 시작하여 고종 35년까지 16년간에 걸쳐 조성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0200) 朴相國, 앞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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