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Ⅰ. 사상계의 변화
  • 2. 성리학의 전래와 수용
  • 1) 신유학의 전래와 고려 사상계의 동향
  • (1) 송대 신유학의 성립과 고려 유학계의 대응

(1) 송대 신유학의 성립과 고려 유학계의 대응

 중국사상사에서 宋學은 漢學에 대응하는 의미로서 사용되고 있다. 漢唐의 訓詁·注疏學에 대한 송대 朱子學이라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자학은 엄밀히 말하여 송학 중의 한 학파로 출발하여 이후 송학을 대표하는 사상계의 지배적 위치를 점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주자학이 형성·확립되는 데에는 다양한 학술과 사상, 심지어는 배척의 대상이 되었던 도교와 불교의 일부 내용까지 수용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주자학의 선구는 흔히 당대의 韓愈와 李翶에서 찾는다. 그러나 주자학의 형성에 그들이 끼친 공헌은 주로 도교와 불교의 배척 및 인성론에 국한되어 있다. 실제로 그들은 훈고학에 치중함으로써 유교에 새로운 사상적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은 하지 못했고, 따라서 유교는 그 사상성에서 도교와 불교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근본적으로 유교의 내용을 일신하여 도교와 불교에 정면 도전을 선언한 것은 북송의 諸儒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유와 이고가 불교에 대한 유교의 우위 확립을 위해 문제를 제기한 이래 당말·오대를 거치며 오랫동안 순치되어 온 유교의 사상적 변화는 송의 仁宗 慶曆연간(1041∼1048)에 이르러 비로소 새로운 징후를 나타내었다. 이러한 조류를 유도한 것은 范仲淹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유학자들이었다. 범중엄·胡瑗·孫復·歐陽修 등으로 대표되는 ‘正學’운동은 한·당의 훈고·주소학에 대한 비판과 전대의 사상계를 지배해 온 도교와 불교에 대한 배척을 주된 기치로 내걸고 있었다.0225) 李範鶴,<宋代 朱子學의 成立과 發展>(≪講座 中國史≫ Ⅲ, 지식산업사, 1989), 195∼197쪽.

 이렇듯 북송에서 이른바 ‘乾淳之盛’이라고 불려지는 眞宗(998∼1022)·仁宗(1023∼1063)시대에 범중엄·구양수·司馬光·王安石 등과 같은 명재상들에 의해 시작된 유교부흥책, 곧 ‘정학’운동에 힘입어, 흔히 송학으로 불려지고 있는 道學-구체적으로 말하면 ‘濂洛關의 학’-이 호남성 염계사람 周敦頤(濂溪, 1017∼1073), 하남성의 낙양사람 程顥(明道, 1032∼1085)와 그의 아우 程頤(伊川, 1033∼1107), 섬서성의 관중사람인 張載(橫渠, 1020∼1077) 등을 대표로 새로운 학풍으로 발흥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 중국에서는 이른바 ‘澶淵의 盟’(1004)으로 宋遼和約이 성립되어 이후 100여 년 동안 두 나라는 평화적인 관계가 지속되었고 고려 역시 3차에 걸친 거란과의 전쟁을 치르고 국교를 정상화시킨 이후였다. 이와 같은 동아시아의 평화적 분위기와 함께 여·송간에도 긴밀한 우호관계가 재개되어 잦은 사신 왕래가 행해지고 있던 때였다. 따라서 고려와 북송간에 사상적인 면에서의 접촉과 영향을 고려할 때, 당시 고려 사상계 일각에서 일어났을 신유학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가능하리라고 본다.

 이러한 사실과 관련하여 고려 중기 유학의 새로운 흐름은 문종대 崔冲(984∼1068)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재상의 지위에까지 올랐다가 만년에 은퇴하여 사학을 세웠으니 이른바 ‘九齋學堂’이었다. 여기서 9재라는 것은 樂聖·大中·誠明·敬業·造道·率性·進德·大和·待聘 등을 일컫는 것으로서,0226)≪高麗史≫권 95, 列傳 8, 崔冲. 유교철학의 중요한 여러 개념들을 진학의 차례로 삼아 9단계로 나눴다. 여기서 사용했던 교과가 주로 九經이었다는 것은0227) 위와 같음. 북송에서 신유학 발흥의 단초 또한 1001년에 진종이 각 주현학교에 9경을 반포하면서부터 열리게 되었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흥미롭거니와,0228) 黃公偉,≪宋明淸理學體系論史≫(幼獅文化事業公司, 1969), 30쪽. 더욱이 성명·솔성 등의 9재의 호칭은 “천명을 성이라 하고, 솔성을 도라 하며, 수도를 교라 한다”0229) “天命之謂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中庸≫제1장).는≪中庸≫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당시 신유학의 이해와 관련하여 주목된다.

 이렇게 맹아적 단계에서 자체적으로 성장하고 있던 신유학의 흐름은 먼저 송에서 염락관으로 완숙한 경지에 이르게 되었고, 고려에서도 송과의 잦은 사신 왕래를 통해 그와 같은 신유학의 사조에 좀더 민감히 대응하게 된다. 특히 예종 10년(1115)에 金端과 適 등 5인이 송나라 태학에 입학했을 당시는 송에서 신유학이 대세를 이루면서 二程의 문인들이 활동하고 있던 시기였으며, 고려에서도 궁중에 淸讌閣을 설치하고≪중용≫을 강설하는 등 심성화의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었다. 당시 새로운 경전 해석을 시도하였던≪論語新義≫의 저자인 金仁存은<淸讌閣記>에서 당시 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周公·孔子·孟軻·揚雄 이래의 고금문서들을 모아놓고 날마다 老師·宿儒와 더불어 선왕의 도를 토론하고 부연하며 천명하면서, 조용하게 수양도 하며 휴식도 하고 거닐기도 하므로 한낱 전각 안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도 三綱五常之敎와 性命道德之理가 사방에 충일하였다(≪高麗史≫권 96, 列傳 9, 金仁存).0230) 일찍이 尹南漢,<儒學의 性格>(≪한국사≫6-고려:귀족사회의 문화-, 국사편찬위원회, 1975)에서도 이 문장에 주목하면서 고려 중기 유학의 수준을 송 유학과의 평행선상에서 파악하고 있다.

 여기에서 표현되고 있는 ‘理’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先秦의 문헌에는 잘 나타나지 않으며, 장재나 二程에게서 쓰여지다가 朱熹에 이르러 생성론 혹은 존재론 속에 정착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0231) 山井湧外 編,≪氣の思想≫(東京大出版會, 1978), 360∼361쪽. 김인존의 ‘성명도덕지리’에서의 존재론적 개념으로서의 ‘理’의 표현은 실로 고려 중기 유학계의 신유학 이해의 도를 짐작하게 한다. 그뿐 아니라 김인존과 거의 같은 시대에 살았던 殷純臣이 “성상께서 誠으로부터 明하신 까닭에 오직 슬기로워 성인이 되신 것입니다”0232)≪東文選≫권 36, 表箋 刱立國學後學官謝上表.라고 하여,≪중용≫의「自誠明」을 성인의 덕으로 본 것은 후대 주희의 주석과 같은 논리이다.0233)≪中庸≫(成均館大 大東文化硏究院 影印), 814쪽 朱子註 참조. 이처럼 예종대에 이르면 신유학의 철학적 측면, 즉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점차 그 깊이를 더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 유학계에서 이처럼 새로운 유학의 흐름에 깊이 있게 대응하면서 자체 유학의 차원을 높이려 할 때 당시 송에서 진행되고 있던 새로운 유학의 경향성을 예의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과 같은≪宋史≫의 기록은 이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마침 고려에 사신 간 사람이 있었는데 고려국왕이 그 사신에게 ‘龜山先生은 어디에 계신가’라고 묻자 사신이 돌아와서 그것을 宋 황제에게 보고했다. 그래서 황제는 구산을 불러 秘書郞으로 삼고 다시 著作郞으로 승진시켰다(≪宋史≫권 428, 列傳 187, 楊時).

 이≪송사≫의 기록은≪宋元學案≫중의<龜山學案>條의 기록과 일치하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고려 국왕은 다름 아닌 인종이다. 다시 말하여 인종 원년(1123)에 송의 國信使 路允迪과 傅墨卿이 사신으로 왔을 당시의 일화이다.0234)≪高麗史節要≫ 권 9, 인종 원년 6월. 이 기록에서 말하고 있는 龜山 楊時(1053∼1135)는 중국 사상사에 있어서 2程 특히 정이천의 학을 羅豫章 나아가 李侗을 통해 주희에게 전함으로써 그의 학풍이 일약 성리학의 주류가 되게 한 인물이다.0235) 近藤一成,<道學派の形成と福建>(≪中國前近代史硏究≫, 雄山閣, 1980), 157∼158쪽. 이렇게 후대 주자성리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양시였지만 그의 나이 71세에 이르도록 조정에 알려지지 않았고, 따라서 사신들도 몰랐던 것을 고려 국왕 인종이 크게 관심을 나타내면서부터 비로소 송에서도 인정받게 됐다는 사실은, 중국에서의 새로운 유학의 경향성을 주시하면서 그 이해의 폭을 넓혀 가고 있던 고려 중기 유학계의 동향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송말까지 고려는 주자성리학보다 王安石의 유학이 유행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왕안석은 북송의 개혁정치가로서 잘 알려져 있지만, 고려 중기 새로운 유학부흥운동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다. 그의 학파와 정파는 舊法黨의 제지로 여러 차례 몰리기도 하였으나 그들의 큰 영향은 남송 초에까지 미쳤다. 더욱이 그의 이른바≪三經新義≫는 과거시험에서 새로운 권위를 가지고 등장하여 한대의 전통적 주소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였다. 이제 과거시험에서는 오로지 왕안석의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만을 사용하여야 등용될 수 있을 정도로 그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0236) 陶希聖,≪中國政治思想史≫ 4책, 66쪽. 이즈음 고려에도 왕안석의≪삼경신의≫가 송으로부터 유입되었고,0237) 金庠基,≪東方史論叢≫(서울大 出版部, 1974), 163쪽. 뒤에 나오지만 예종·인종연간 학제와 과거제의 개혁은 왕안석 학풍의 영향이었다. 특히 예종 때에 김단과 함께 송나라 태학에 입학했던 권적은, “한이부가 처음 古學을 부르짖음에 당나라의 문물이 찬연하고 왕승상이 퇴폐한 풍조를 크게 변화시킴에 송나라의 儒術이 일어났으니, 천년을 망라했고 일시를 밝혔습니다”0238)≪東文選≫권 45, 表箋 入宋船次上朴學士啓.고 하여, 왕안석의 새로운 개혁운동에 따라 쇠락해 가던 유학이 다시 혁신되었음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왕안석의 이러한 업적은 곧 당대 후반기에 고문부흥을 제창하여 유교 혁신운동의 기치를 내걸었던 한유와 같은 맥락으로 인식되고 있다.

 고려 인종대에 국왕을 비롯한 사대부들 사이에서 중국의 새로운 유학의 흐름에 대해 당시 중국의 관인층에 못지 않은 이해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북송대 신유학의 흐름을 남송의 주자성리학으로 이어지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던 양시에 대한 앞서의 일화에서 능히 헤아려 볼 수 있다. 또한 인종 14년의 지추밀원사 金富儀의 죽음 뒤에 나오는 다음의 기록은 이런 사실을 좀더 뒷받침해 주고 있다.

처음에 왕(인종)께서 동궁에 계셨을 때 의(富儀)는 뽑혀서 부속이 되었는데 문학으로써 특별히 두터운 사랑을 받았고 왕께서 즉위하심에 미쳐 그를 발탁해서 한림학사를 제수했다. 왕께서 일찍이 변방의 일을 그에게 물은 적이 있었는데 그는 대답해서 말하기를, “송의 신종이 文彦博·王安石과 더불어 변방의 일을 의논하고 있었는데 언박이 ‘반드시 먼저 스스로를 다스려야 되지 가까운 곳을 소홀히 다루면서 먼 곳을 신중히 다루어서는 안됩니다’라고 하자 안석이 ‘언박의 말이 진실로 옳습니다. 만약 능히 스스로를 다스리게 되면 70리로써도 王天下할 수가 있는 것이니 지금 만리의 천하를 소유하고서도 남을 두려워 하는 것은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三韓의 땅이 어찌 다만 70리일 뿐이겠습니까. 그런데도 남을 두려워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 잘못이 스스로를 먼저 다스리지 못한 데 있을 뿐입니다 …”라고 했다(≪高麗史節要≫권 10, 인종 14년 10월).

 여기에 인용된 문언박과 왕안석은 모두 범중엄의 사상을 계승하여 정계에 진출하여 새로운 유학운동을 크게 펼친 학자들로서,0239) 楠本正繼,≪宋明時代儒學思想の硏究≫(廣池學園事業部, 1962), 15∼16쪽 참조. 김부의가 그들과 신종과의 일화를 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당시 고려 유학계가 중국에서의 신유학의 형성과 전개에 얼마만큼 밀착되었나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밀착 속에서 김부의의 “하늘이 만물을 덮고 땅이 만물을 싣는데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에 동물·식물이 각각 그 성명을 완수하게 된다”0240)≪東文選≫권 35, 表箋 謝不收復保州表.는 생성론 혹은 존재론적 인식이 행해지게 되는 것이고, 예종·인종대 새로운 유학을 지향하는 학제 및 과거제의 개혁과 함께 유교사상을 존재론적으로 발전시킨≪중용≫이 자주 강론되었던 것이다. 특히 인종 6년 남송에 사신으로 가서 송의 파천을 위문한 적이 있는 尹彦頤0241)≪高麗史節要≫권 9, 인종 6년 8월.가≪周易≫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易解≫를 지어 세상에 전했던 것은 주목할 만하다.0242)≪高麗史≫ 권 96, 列傳 9, 尹瓘 附 彦頤. 왜냐하면≪주역≫은≪중용≫과 더불어 당시 신유학자들이 공통으로 중시했을 뿐만 아니라 송대 신유학의 형성 자체에 큰 동인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0243) 黃公偉, 앞의 책, 54쪽.
楠本正繼, 앞의 책, 17쪽.
실제 송대에 새로운 유학의 흐름을 주도했던 학자들은 한당유학 이래의 철학의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서, 천도에 의지하여 말할 경우에는≪역경≫에서 그것을 취하고, 심성을 논할 경우에는 주로≪중용≫에서 그것을 취하여, 天道性命의 근원으로부터 말미암아 심성의 고유한 가치를 발현시키려고 노력했던 것이다.0244) 黃公偉, 위의 책, 7쪽.

 이상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고려 중기 유학계는 북송에서의 신유학의 형성과 전개에 병행하여 그와의 교호작용 속에서 독자적인 자기 발전을 모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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