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Ⅰ. 사상계의 변화
  • 2. 성리학의 전래와 수용
  • 2) 주자성리학의 수용과 특징
  • (2) 성리학 수용과정에서의 특징

(2) 성리학 수용과정에서의 특징

 지금까지 살펴본 고려 후기 성리학 수용과정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발흥기의 북송 신유학과 평행선상에서 접촉을 하고 있던 고려 중기 사상계에서의≪역≫과≪중용≫에 의한「性」혹은「理」에의 접근 경향은 원의 실천적 주자학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도 지속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색의 “도덕이나 문장을 하늘이 어찌 사람에게 주기를 아끼겠는가. 그러므로 천명을 성이라 하고 솔성을 도라 하는 것이다”0280) 李 穡,≪牧隱文藁≫ 권 5, 記 樗亭記.라는≪중용≫에서의「性」·「道」에 대한 인식과 “대개 사람이 이 氣를 받고서 태어남에 乾은 健하고 坤은 順할 뿐이며, 나누어서 말한다면 水火木金土일 뿐이다. 그 陽이 奇가 되고 陰이 耦가 되며 陽이 변하고 陰이 化하는 근원을 구한다면 無極의 眞으로 돌아갈 뿐이다”0281) 李 穡,≪牧隱文藁≫ 권 3, 記 養眞齋記.라는≪역≫을 통한 우주론적 인식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거경에 치우친 원의 실천적 주자학을 보완하면서 고려 말까지 지속되지만, 신흥사대부 각자의 성리학 이해의 심도나 혹은 원의 실천적 주자학의 영향에 따라 그 심도를 달리하게 된다. 정몽주가 단지 주역에 대한 유가의 주석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면, 정도전은「理一而分殊」라는 성리학 특유의 주리론적 세계관을 반영하고자 하였다.0282) 金宗鎭,<麗末 士大夫의 性理學受容과 文學의 樣相>(高麗大 碩士學位論文, 1981), 44∼52쪽 참조. 그런데 정몽주의 저술 중에는 이론적인 배불론이나 이학에 관한 기록이 없는 반면, 정도전이 그의≪佛氏雜辨≫에서 본격적 이기철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심도의 차이와 관계깊다고 생각한다.

 둘째, 남송에서의 주자성리학의 사상체계가 완성되어 제자들에게 전수되고 있을 때 고려유학계는 무신란으로 정상적인 흐름이 차단되고 대신 불교계 쪽에서의 심성화에 따른 유·불융합의 기운이 일어나게 됐는데, 이러한 경향이 원으로부터의 주자성리학 수용에도 원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현은 유가의 중요이념인 인과 의에 대비시킨 불교의 자비·희사를 보여주거니와0283) 李齊賢,≪益齋亂藁≫ 권 5, 金書密敎大藏序. 이곡의 경우, “儒者는 正으로써 修身하여 齊家理國平天下에 이르는 것이고, 佛者는 觀으로서 수행하여 見性成佛에 이르는 것이다”0284) 李 穀,≪稼亭集≫권 3, 記 新作心遠樓記.라고 하여 성리학 중에서도≪대학≫의 네 가지 조목인 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불교의 수행·견성·성불과 같은 차원에서 이해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더 나아가 이색의 다음과 같은 말은 그러한 경향을 한층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내가 말하건대, 우리 儒者가 庖犧氏 이래 지켜서 서로 전한 바는 또한 寂일 뿐이라 하겠다. 나처럼 불초한 사람들조차 감히 이것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太極은 寂의 本이니 一動一靜하여 만물을 化育하고, 인심은 寂의 次이니 一感一應하여 萬善이 유행하게 된다. 이런 까닭에 大學의 강령은 靜定에 있는 것이니 이것을 寂이 아니라 하겠으며, 中庸의 樞紐는 戒懼에 있으니 이것을 寂이 아니라 하겠는가. 戒懼는 敬이요 靜定 또한 敬이다. 敬은 主一無適일 뿐이다(李穡,≪牧隱文藁≫권 6, 記 寂菴記).

 이색은 여기에서 불교의 寂의 개념을 통하여 성리학의 태극으로부터의 생성론 및≪대학≫·≪중용≫에서의 경까지를 포괄하고자 하였다. 불교철학체계의 이러한 원용은 당시 신흥사대부들의 성리학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겠지만,0285) 가령 鄭夢周가≪楞嚴經≫을 즐겨 본 것이라든가(鄭道傳≪三峯集≫권 3, 書 上鄭達可書) 혹은 鄭道傳의≪佛氏雜辨≫에서 구사되고 있는 불교철학의 이해 정도 등에서도 이런 사실을 역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색의 앞의 글에 보이듯이 성리학체계 자체가 불교철학체계 속에 흡수되어 버릴 위험성을 내포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위험성에 대한 인식의 강도에 따라 신흥사대부 속에서도 각각 배불의 태도가 달라지게 되었고 그에 의해 분파가 나뉘어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앞에서의 성리학을 이해하려는 심도의 차이와 결부되어 일어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셋째, 고려 말이라는 사회상황은 형이상학적·사변적 탐구에만 정열을 쏟을 만큼 한가하지가 못했고, 여기에 주자성리학의 실천윤리면을 우선 수용·전파한 원의 대유 노재 및 그 제자들의 영향이 첨가됨으로써 고려 후기에 도입·수용되는 성리학도 자연히 이론적·철학적인 면보다는 실천적·윤리적인 면에 치중하게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것은 궁리 이전에 거경을 통한 수기를 앞세운 것이었다.

내가 생각건대, 옛날에는≪小學≫이 있고≪大學≫이 있었다. 사람이 태어나 8세로부터 15세까지, 그 灑掃應對에서 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하는 데 이르기까지 截然하여 문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람이 학문을 함에 근본이 있었고 학문을 성취함이 쉬었다. 그러나 후세의 學制가 분명치 못하여 절차를 무시하고 등급을 건너뛰면서 마침내 얻는 바가 없게 되었을 뿐이다(李崇仁,≪陶隱文集≫ 권 4, 贈朴生詩序).

 위에서 이숭인은 “小學의 灑掃應對가 학문으로 나아가는 기틀”이라 하여“小學을 神明과 같이 믿고 父母처럼 공경”했던 노재의 태도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넷째로 주목되는 것은, 고려 후기 신유학을 수용한 계층간에 위의 여러 특징에 따라 신흥사대부라는 일정한 공통범주를 견지하면서도 막상 구체적인 取選에 있어서는 다양한 전개를 보인다는 점이다. 애당초 이제현이 萬卷堂에서 교류를 가졌던 원의 문사 중에 허형의 제자는 물론 원대에 朱子學과 陸學의 절충적 태도를 취했던 吳澄(1249∼1333)0286) 黃公偉, 앞의 책, 286∼288쪽.
楠本正繼, 앞의 책, 389∼394쪽.
의 문인인 元明善·虞集 등이 망라되었다는 사실에서 고려 말 사상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노재학풍 이외의 저류로서의 여러 흐름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0287) 이 점과 관련하여, 후일 退溪 李滉이 당시 陽朱陰王的 학자들을 비판하면서 그들을 吳澄의 亞流로 치부하고 있는 것은 주목된다(阿部吉雄,≪日本朱子學と朝鮮≫, 東京大出版會, 1965, 245∼248쪽). 한편 공민왕대에 새로운 서적을 수입할 당시 전래되어 조선조 문물제도의 정비를 위해 활용되고 있는0288) 李泰鎭,<15, 6세기 新儒學 정착의 사회경제적 배경>(≪奎章閣≫5, 서울大, 1981).
―――,<海東繹史의 學術史的 檢討>(≪震檀學報≫53·54, 1982) 참조.
≪玉海≫의 저자인 王應麟 자신이 주자학과 육학 및 중국 전통문물을 복합했던 남송의 절충파인 呂學의 高弟0289) 黃公偉, 앞의 책, 254∼256쪽 및 266∼267쪽.라는 사실 또한 여말 사상계의 다양한 전개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흐름들은 고려 말 원으로부터의 성리학 수용과정에서 하나의 변수로 작용하여 신흥사대부내에서의 계열형성에 한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고려 전기 이래의 田柴科제도가 붕괴되는 상황 속에서,0290)≪高麗史≫ 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신우 14년 7월 大司憲 趙浚等 上書. 주자성리학에서 규정한 지주전호간의 상호관계에 입각한 도덕적 질서의 회복에는 다같이 공감을 하면서도, 현실적 방법론에 있어서는 신흥사대부 내부에서도 자신의 위치에 따라 주자성리학을 이해하는 태도가 달라지게 된다. 여기에서 일반 백성의 생활향상에 똑같이 관심을 보이면서도 전제개혁을 둘러싸고 온건한 개량파와 급진적인 개혁파로 나뉘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이색으로 대표되는 온건개량파가 당시 문란했던 전제를 통탄하고 토지겸병에 반대하면서도 주자학의 지주와 전호와의 상하관계(=分)의 설정에서 고려적 질서의 유지를 꾀하려는 데 집착했던 반면,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급진개혁파는 당시 지주와 전호와의 모순의 확대를 막기 위해 지주와 전호와의 윤리·도덕적 分의 설정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전호(소작농)의 자작농화에 의해 지주·전호간의 기본적 대항관계에 따른 모순의 해결을 시도하게 되었던 것이다.0291) 韓永愚,≪鄭道傳思想의 硏究≫(서울大 出版部, 1973), 167∼175쪽 참조.

 이와 같이 신유학자 내부에서의 지주·전호의 상호관계에 대한 기본입장 및 해결방법의 차이는 조선조로 이어지게 된다. 그것이 후일 주자학에서의 지주·전호관계를 토대로 고안된 일종의 향촌자치제로서의 社倉制와 鄕約 등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낳게 되었던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하겠다.

<文喆永>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