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Ⅰ. 사상계의 변화
  • 2. 성리학의 전래와 수용
  • 3) 불교와의 관계
  • (2) 불교배척운동과 새로운 유불관계의 형성

(2) 불교배척운동과 새로운 유불관계의 형성

 불교가 여전히 현실을 지배하고 있던 고려 후기사회에 있어서 성리학의 영향은 의외로 크고 광범한 것이었다. 유학이 그 古代性을 해소하는 전기를 맞게 된 것이나 기존 유불관계의 현저한 변화는 성리학이 가져온 직접적인 영향의 일부이다. 그러나 여기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는 결코 단순하지가 않다. 가령 유불관계의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성리학자들의 불교배척운동만 하더라도, 그 과정을 통해 고려사회에는 괄목할 만한 사회적 변동이 함께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충렬왕대에 安珦에 의해서 처음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 원대의 성리학은 종래의 유학과는 그 성격이 크게 달랐던 만큼 유불관계의 변화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성리학의 새로운 이론으로 무장한 유학자들이, 그 동안 유학에 대한 우위와 현실주도적 위치를 독점해 온 불교와 더불어 계속 예전과 동일한 내용과 방법으로 유불일치와 융합을 지향해 가리라고는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성리학 전래 초기부터 불교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그것이 점차 성장하면서 보다 강경한 불교배척운동으로 옮겨가고 있음은 이를 사실로 뒷받침해 준다. 유불관계의 큰 변화를 예고하는 유학자들의 이같은 불교비판과 그 이후의 배불운동에 대해서는 먼저 성리학이 전래, 수용되는 고려사회의 사상적·사회적 배경에서부터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예종·인종대를 거쳐 오면서 經學風에서 점차 詞章風으로 변이된 고려유학은 이어 약 100년 동안 무신정치가 계속되는 사이에 더욱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이 무렵의 유학은 불교의 신앙결사를 주도한 禪僧들의 사상과 융합·조화되어 유불일치적 조류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유불관계의 새로운 경향이기도 했던 이러한 사상조류가 후일 성리학의 전래와 수용에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으리라는 점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성리학 수용의 사상적 배경이 이와 같다면 다시 그 사회적 배경으로는 불교계의 현실적 폐해상을 들 수 있다. 불교의 폐해는 원나라 간섭기에 들어와 급격히 두드러진다. 그 동안 순수불교운동으로서 전개되어 온 신앙결사의 정신은 원의 帝室과 연결된 왕실의 절대적 지원 및 附元勢力化한 권문세가와의 결합으로 점차 왜곡되면서 변질되었으며,0306) 高翊晋,<白蓮社의 思想傳統과 天頙의 著述問題>(≪佛敎學報≫ 16, 1979), 143∼149쪽. 이에 따라 불교는 종파간의 대립과 갈등이 더욱 심해지고 사회경제적으로도 많은 폐해를 일으키고 있었다.0307) 韓㳓劤,<麗末鮮初의 佛敎政策>(≪서울대학교 논문집≫ 6, 1957), 4∼8쪽.
許興植,<僧政의 紊亂과 宗派間의 葛藤>(≪高麗佛敎史硏究≫, 一潮閣, 1986) 참조.
여기서 특히 무신집권기의 질곡을 거친 유학자들로서는 새로운 사상 및 사회지도이념의 필요성을 절감했을 것이다. 원에서 유행하던 성리학이 고려에 도입되는 데에는 儒者들의 이와 같은 절박한 현실인식이 크게 작용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성리학 전래의 사상적·사회적 배경에 비추어 이후 불교에 대한 성리학의 대응방향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다. 특히 새로 전해진 성리학은 주자학 중에서도 우주론적 이기론보다 居敬을 위주로 하는 실천적 학풍이었음을0308) 文喆永, 앞의 글, 8·114쪽. 감안할 때, 그것은 불교의 실천윤리 및 현실폐해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표면화할 것임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최초로 성리학을 받아들인 안향은 국자감의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성리학을 설명하고 가르쳤다.

성인의 도는 현실생활 속에서 윤리를 실천하는 이외의 것이 아니다. 자식된 자 효도하고, 신하된 자 충성하고, 예로써 집안을 다스리고, 신의로써 벗을 사귀고, 자기 자신을 敬으로써 닦고, 일을 함에 반드시 정성으로 할 따름이다. 그런데 저 불교는 어떠한가. 부모를 버리고 집을 나가서 윤리를 파괴하니 이는 夷狄의 무리인 것이다(安珦,≪晦軒集≫, 諭國子諸生文).

 그는 특히 주자가≪小學≫에서 강조한 忠·孝·禮·信·誠 등의 실천덕목에 비추어 불교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와 같이 유교적 사회윤리관에 입각한 이런 종류의 불교비판은 대부분의 성리학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공통된 경향이다. 비교적 성리학 전래 초기에 원에서 그것을 배우고 돌아온 崔瀣가 親愛를 끊고 출가하는 불교의 인간관계의 윤리를 비판한 것이라든지,0309) 崔 瀣,<送盤龍如大師序>(≪東文選≫ 84). 후일 ‘東方理學의 祖’라고 불리우는 鄭夢周가 일상적인 생활윤리를 대상으로 불교를 비판한 것0310)≪高麗史≫권 117, 列傳 30, 鄭夢周. 등도 모두 같은 맥락에서인 것이다.

 한편 불교의 비윤리적이라는 문제에 이어 그 사회·경제적인 폐해가 비판의 대상이 되리라는 것도 당연히 예측되는 바였다. 유교주의적 관료에 의해 불교의 현실폐해가 비판적으로 거론된 경우는 이미 고려 전기에도 없지 않다. 성종 원년(982)에 최승로가 왕에게 올린 時務28條 가운데 상당부분을 불교의 폐해에 관해 논하고 있음이 그 좋은 예이다.0311)≪高麗史節要≫ 권 2, 성종 원년 6월. 崔承老의 현존하는 時務22개조 가운데 불교와 관련된 조목이 9개조나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대체로 관료의 입장에서 是正을 필요로 하는 時弊에 대한 건의일 뿐, 儒者로서 불교에 대한 다소 주관적인 견해 외에 排佛意識은 거의 담고 있지 않다. 그러나 성리학 전래 이후의 불교비판은 빈도수나 강경함에 있어서 그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하여 강도 높은 불교비판은 이내 排佛論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점차 과격한 불교배척운동으로 전개되어 갔지만, 이러한 현상이 성리학의 성장발전과 비례하여 진행되고 있던 것도 주목되는 일이다.

 성리학의 전래 초기에도 불교의 현실적 폐해에 대한 유학자들의 지적이 있기는 했지만0312) 崔瀣는<送僧禪智遊金剛山序>(≪東文選≫ 권 84)에서 불교계의 사치와 비리 등 주로 현실적 폐단에 대해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것이 좀더 구체적으로 대두되는 것은 고려 말의 공민왕대부터이다. 신흥사대부계층0313) 신흥사대부의 개념 및 성격에 대해서는, 李源明,<性理學 收容의 背景에 관한 一考察-高麗後期의 社會變化를 中心으로->(≪서울여대 논문집≫ 16, 1987), 69·80·84쪽의 註 참조. 즉 성리학을 갖춘 신진관료들이 불교의 폐해와 그에 대한 대책을 공식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하였는데, 李穡(1328∼1396)은 그 선구적 역할을 담당한 인사였다.

 공민왕 원년(1351) 원나라로부터 돌아온 이색은 왕에게 올린 상소를 통해, 五敎兩宗의 무수한 사찰과 승도가 이익을 추구하는 비루한 집단이 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그러한 폐해의 교정을 위해 度牒制의 확립과 양민의 감소방지 및 濫寺의 억제 등을 건의하였다.0314)≪高麗史≫권 115, 列傳 28, 李穡. 그러나 비록 이색이 불교의 폐해와 교정책을 말하고는 있지만 그 논조는 매우 온건한 편이었다. 더욱이 부처를 큰 성인으로 인정하고 불교에 대해서도 깊은 조예를 보여주고 있어, 그는 성리학을 현실윤리의 기본으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종교적 측면에서는 여전히 불교를 수용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실제로 그는 대장경을 찍어내고 南神寺에 白蓮會를 베푸는 등 신불자로서의 면모0315) 위와 같음.
安啓賢,<李穡의 佛敎觀>(≪趙明基博士華甲紀念佛敎史學論叢≫, 1965).
또한 뚜렷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색은 불교윤리나 사상문제로서가 아니라 理國的 측면에서 불교의 폐해를 교정케 하려는 것이었음이 분명한데, 흥미로운 것은 이같은 뜻을 담은 상소문이 그의 표현대로 ‘萬死를 무릅쓰고’ 올려졌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로서는 불교에 대한 과격한 비판이나 배격이 허용될 분위기가 아니었으며 아직은 배불적 신흥사대부계층이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음을 반증해 주는 것이라고도 하겠다.

 그러나 여말로 갈수록 성리학이 점차 발전하고 이를 수용한 신진관료층이 정치세력화함에 따라 불교에 대한 비판과 배격의 양상은 크게 바뀌고 있었다. 불교비판은 곧 배불론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마침내 과격한 불교배척운동으로 전개되어 간 것이다. 이색의 제자인 정몽주가 특히 윤리·사상적 입장에서 확고한 배불론을 제기하고0316) 鄭夢周에 대해 다음의 글은 온건한 排佛論者로 보는 입장이다.
李相佰,<儒佛兩敎交代의 機緣에 대한 一硏究>(≪朝鮮文化史硏究論攷≫, 乙酉文化社, 1947), 36∼42쪽.
文暻鉉,<麗末 性理學派의 形成>(≪韓國의 哲學≫ 9, 慶北大, 1980), 141쪽.
한편 다음의 글은 鄭夢周를 철저한 배불론자로 보는 입장이다.
尹瑢均,<朱子學の傳來とその影響に就いて>(≪尹文學士遺稿≫, 朝鮮印刷株式會社, 1933), 45∼55쪽.
金忠烈, 앞의 책, 199∼200쪽.
이상과 같이 양분되나 그는 배불이념이 확고한데 반해 그 행동화에는 온건한 태도를 취했다고 보여지는데, 이는 그의 보수적 정치노선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鄭道傳을 필두로 趙仁沃·尹紹宗·趙浚·金子粹·金貂 등 당시 조정의 신진세력 거의 대부분이 불교에 대한 강경한 비판과 배격에 나서고 있음이 그것이다. 신진관료들에 의한 이같은 배불의 움직임은 곧 유불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색의 경우가 보여주듯이 비교적 전래 초기의 성리학자들이 유불 이원론적인 정신세계의 구조에 어떤 갈등도 없었으며 단지 불교의 폐해만을 문제로 삼았던 것과는 달리, 이들은 불교윤리 및 사상의 비판을 통해 배불의 입장을 확고히 하고 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들이 불교의 현실폐해문제와 관련하여 과격한 불교배척운동을 전개해 가고 있음은 성리학 전래 초기와는 분명히 다른 유불관계의 새로운 변화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여말의 배불운동이 단순히 사회·윤리적 차원이나 불교의 현실폐해 그 자체문제로서만이 아니라 정치적 상황과 결부되어 그것이 더욱 과격해졌다는 점이다.0317) 李相佰, 위의 책, 39∼40쪽. 다시 말하면 새로운 정치세력을 형성한 성리학자집단의 신진관료들이 수구적인 권문세족들과 대립하는 가운데 불교의 현실폐해문제가 하나의 중요한 정치적 쟁점으로 되어 배불운동이 더욱 과열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곧 여말의 배불운동이 성리학자들에 의해 주도되고는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사상적·학문적 문제가 주된 원인이 아닌, 정치사회적인 성격이 더 짙은 것임을 말해준다. 그런 관점에서 불교의 사회경제적 현실폐해에 대한 시정책이 요청되고 있을 즈음에 성리학이 전해져 그 사상이 불교를 배격하는 이론상의 뒷받침이 되기는 했지만, 성리학 자체가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0318) 韓㳓劤, 앞의 글, 78쪽.

 그러나 어쨌든 배불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성리학을 수용한 여말의 신진관료들이었다. 이들은 舊臣들을 포함한 기존세력이 가치이상과 신앙으로서 또는 사회경제적인 막강한 세력으로서 존재해온 불교를 배격함으로써, 사회변혁과 질서의 재편성을 추구하는 한편 당시의 현실적인 경제수요의 문제 등을 해결코자 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불교비판은 자칫 그 정당성과 논리성을 일탈하기 쉬웠다. 이러한 경향은 배불주의적 성리학의 제1인자로 인정되고 있는 정도전의 불교비판을 통해서도 그 실태를 엿볼 수 있다.

 정도전은 순수한 학자적 입장에서 불교를 비판하기보다는 급격하게 부상된 신진관료층에 앞장서서 사회정치혁명의 한 수단으로써 불교를 비판하고 있다. 때문에 그는 한편으로 불교가 지닌 철학·윤리상의 긍정적 면을 인정하면서도, 불교의 단점을 과장하고 불교의 교리를 지나치게 자기 주관대로 비판하여 그것을 전적으로 거부·배격하는 방향으로 나갔던 것이다.0319) 韓永愚,≪鄭道傳思想의 硏究≫(서울大 出版部, 1981), 54쪽. 성리학자로서 또는 사회정치적 혁명주도자로서의 정도전의 비중을 고려할 때, 그의 이같은 배불태도가 당시 여타의 신진관료는 물론 그를 추종하는 젊은 유생들에게까지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 또한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공양왕 3년(1391)에 朴礎를 비롯한 성균관 생원 15인이 공동으로 올린 장문의 상소는 그것을 말해준다. 배불운동의 절정을 이룰 만큼 극렬한 내용을 서슴없이 개진하고 있는 이들 소장층 배불세력들은 이론적으로 불교의 존재 그 자체를 완전히 배격하는 한편 현실적으로도 철저한 破佛을 주장한 것이다.0320)≪高麗史節要≫ 권 35, 공양왕 3년 6월.
≪高麗史≫ 권 120, 列傳 33, 金子粹.
여말의 배불운동에 있어서 이들 소장세력의 등장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들의 극단적인 배불이론과 그 성격은 이후 불교배척운동의 향방뿐만 아니라 성리학과 불교와의 沒交涉的 관계를 그대로 예측해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한편 이같은 배불운동과는 별도로 불교적 전통사회에 끼친 성리학적 영향의 일단으로서 고려사회 禮制의 변화문제도 주목할 만하다. 다양한 불교의례의 성행이 고려불교의 한 특징을 이루고 있는 데서도 짐작되듯이 성리학 전래 이후까지도 고려사회의 예제 특히 喪葬祭禮는 거의 불교법식에 의해 준행되고 있었다. 그렇던 것이 성리학의 확산과 함께 점차 예제개혁이 시도되고 있는 것이다. 朱子家禮를 수용하여 왕족·대부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불교의 茶毘(화장법) 대신에 家廟를 세우도록 힘써 장려했던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교적 예제의 시행은 의도한 바대로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다.0321) 여말의 禮制변화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고할 수 있다.
稻葉岩吉,<麗末鮮初における家禮傳來及び其意義>(≪靑丘學叢≫ 23, 1936).
池斗煥,<朝鮮初期 朱子家禮의 理解過程-國喪儀禮를 中心으로->(≪韓國史論≫ 8, 서울大 國史學科, 1982).
朱雄英,<家廟의 設立背景과 그 機能-麗末鮮初의 社會變化를 중심으로->(≪歷史學論文集≫ 7, 1985).
전통적인 의례는 민중의 뿌리깊은 정서를 반영하는 만큼 불교의 의례에서 성리학적 예제로의 변화는 좀더 긴 시일의 경과를 요하는 문제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성리학자들에 의해 배불운동이 전개되어 온 사실과 함께 간략하게나마 예제개혁의 문제까지도 언급해 보았거니와, 여기서 새삼 관심이 쏠리는 문제는 이에 대한 불교측의 대응이 어떠했던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하리 만큼 거의 전무한 편이다. 예외없이 불교를 독실히 믿었던 여말의 왕들과 일부 舊臣들에게서 배불세력들에 대한 반발과 약간의 호불적 발언이 보일 뿐, 특히 불교교단의 승려들에게서는 사상적으로나 실제면에서 어떤 대응의 흔적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미약하게나마 유교를 비판하고 불교를 옹호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마침내 성리학이 불교를 제치고 국가의 지도이념이자 사상계의 주도적인 학문으로서 자리를 잡아가던 조선왕조 초기에 들어서서의 일이다.

 승려들의 몇몇 저술 및 사상을0322) 無學의 제자인 己和의<顯正論>, 작자미상(혹은 己和)의<儒釋質疑論>, 그리고 명종대 普雨의 一正說 주장(≪虛應堂集≫所收) 등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통해서 나타나는 불교측의 이같은 대응은 유교를 비판하고는 있지만, 그 논리는 다분히 유화적이며 역시 유불상통과 일치로 귀결되고 있다. 그러나 이 때의 유불일치사상은 일찍이 수선사의 혜심이 말하고 있는 그것과는 성격면에서 상당히 대조가 된다. 즉 혜심이 불교 위주의 유불일치와 융합을 제시했던 것과는 달리, 이제 그것은 불교를 공격하는 위치에 선 성리학에 대한 방어적이며 타협적인 유불융합의 사상인 것이다.0323) 韓鍾萬,<麗末鮮初의 排佛·護佛思想>(≪崇山朴吉眞博士華甲紀念 韓國佛敎思想史≫, 圓光大 出版局, 1975), 749쪽.

 비록 배불이 정치적으로 강행되었던 새 왕조 조선에서의 불교에 대한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같은 불교측의 대응은 성리학 전래 이후의 새로운 경향인 것만은 사실이다. 이는 곧 성리학에 의해 견제되고 있는 불교의 위치와 함께 유불관계의 새로운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李逢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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