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Ⅰ. 사상계의 변화
  • 3. 풍수·도참사상 및 민속종교
  • 2) 민속종교
  • (2) 무고

(2) 무고

 巫蠱란 주술적인 방법으로 상대방의 감정과 정서를 조절한다든지, 남을 해치거나 저주하는 것을 의미한다.0365) 孫家洲,<巫術の盛行と漢代社會>(≪古代文化≫1995-8), 466쪽. 고려 후기에는 궁중의 부녀자를 중심으로 하여 무고사건이 빈번히 발생했는데,0366) 고려 후기 왕실 妃嬪들간의 巫蠱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고가 된다.
金成俊,<高麗後期 元公主出身王妃의 政治的 位置>(≪韓國中世政治法制史硏究≫, 一潮閣, 1985)
金惠苑,<麗元王室通婚의 成立과 特徵>(≪梨大史苑≫24·25, 1989).
이를 연대순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洪福源의 永寧公 저주사건 : 기록에 보이는 최초의 무고사건은 몽고침입 초기에 본국을 배반하고 반역행위를 자행하던 홍복원이 永寧公 綧(현종의 8대손)을 저주한 사건이다. 영녕공은 고종 28년(1241) 몽고에 인질로 가서, 한동안 홍복원의 집에 머물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이가 나빠지자, 홍복원은 고종 45년(1258) 몰래 무격을 시켜 나무인형(木偶人)을 만들어 손을 묶고 머리에 못을 박아 땅에 묻거나 우물에 넣으면서 영녕공을 저주하다가, 마침내 몽고황제에게까지 알려진다. 홍복원은 자식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변명하였으나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0367)≪高麗史≫권 130, 列傳 43, 洪福源.

 ② 貞和宮主의 齊國大長公主 저주사건0368)≪高麗史≫권 26, 世家 26, 충렬왕 2년 12월 병자·권 89, 列傳 2, 貞信府主 및 권 105, 列傳 18, 柳璥. : 貞和宮主(貞信府主)는 종실 司徒 絪의 딸로, 원종 원년(1260)에 세자(후일 충렬왕)와 혼인하였으며, 정비가 될 수 있는 유력한 후보자였다.0369) 정용숙,≪고려시대의 后妃≫(民音社, 1992), 223쪽. 그러나 세자가 원종 15년(1274) 원나라 공주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함에 따라 후궁의 자리로 물러앉게 되었다. 충렬왕 2년(1276) 몽고에서 파견된 達魯花赤[다루가치]의 공관에 익명서가 날아들었는데, 그 내용은 齊安公 淑(현종 9대손이며, 정화궁주의 사위)·金方慶 등 43인이 모반을 꾀한다는 것과, 정화궁주가 왕의 총애를 잃자 무녀로 하여금 제국대장공주를 저주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정화궁주를 비롯하여 제안공·김방경 등을 조사하였으나, 원로대신 柳璥이 제국공주를 설득하여 이 사건은 무마되었다. 그런데 익명서에서 고발된 40여 명 중에는 죽은 지 5년이 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익명서의 내용은 날조된 것이라 하겠으며, 작성자는 고려 정계의 상황에 어두운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할 때 익명서의 작성자는 원 공주의 정화궁주에 대한 투기심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관료층을 대표하는 중신들을 제거하려는 속셈을 가진 원 공주의 私屬인 怯怜口일 가능성이 크다.0370) 金惠苑, 앞의 글, 172쪽.

 ③ 慶昌宮主의 忠烈王 저주사건0371)≪高麗史≫권 28, 世家 28, 충렬왕 3년 7월 임진·8월 정묘·임인·권 88, 列傳 1, 慶昌宮主 및 권 91, 列傳 4, 順安公 琮. : 경창궁주는 원종의 계비이다. 원종은 먼저 金若善(崔怡의 사위)의 딸과 혼인하였지만, 충렬왕을 낳고 죽었기 때문에, 종실녀인 경창궁주를 새로 맞아들였다. 그런데 경창궁주는 자신의 소생인 順安公 琮이 병약하므로, 盲僧 終同에게 度厄의 방법을 물었다. 맹승이란 讀經·祝壽·卜筮 등을 업으로 하는 盲覡이다.0372) 孫晉泰,<盲覡考>(앞의 책), 342∼343쪽. 그래서 맹격이 가르쳐준 대로 齋醮를 거행하여 기도하고 음식을 땅에 묻었다. 이것을 환관인 梁善大·守莊 등이 충렬왕 3년(1277) 경창궁주가 그 아들 순안공과 모의하여 맹승 종동으로 하여금 왕을 저주하고, 또 순안공을 충렬왕비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시켜 왕이 되도록 기도한다고 모함했다. 이에 충렬왕은 대신들에게 명하여 경창궁주와 순안공, 맹승 종동을 국문하게 했다. 그러나 모두 불복하므로 왕이 순안공을 친국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유경 등의 만류로, 경창궁주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순안공과 종동은 섬으로 유배보내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했다. 몇 년 후 경창궁주와 순안공은 사면을 받았지만, 제국대장공주는 죽을 때까지 충렬왕을 만나지도 못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발단이 계모와 이복동생에 대한 충렬왕의 질투심이라 할 수 있다. 충렬왕은 일찍이 어머니를 여위었다. 이에 비해 이복동생 순안공은 부왕으로부터의 총애가 각별하여, 원종이 몽고에 갈 때도 순안공에게 국정을 맡겼으며, 순안공 자신이 몽고에 갔을 때는 세자(충렬왕)보다 더 많은 선물을 받았다.0373)≪高麗史≫권 91, 列傳 4, 順安公 琮. 이러한 사실은 충렬왕으로 하여금 계모와 이복동생을 질투하지 않을 수 없게 했을 것이다. 게다가 순안공은 원종의 총애를 받아 재물과 보화가 부지기수였다고 하는 바, 이로 말미암아 원 공주출신 왕비로부터도 표적이 되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충렬왕 측근세력들이 국왕 부처의 심정을 헤아려, 계모 모자를 제거할 명분을 제시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까지 공고히 하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④ 宮人 無比의 齊國大長公主 저주사건0374)≪高麗史≫권 30, 世家 30, 충렬왕 23년 7월 무자 및 권 122, 列傳 35, 崔世延. : 無比는 泰山郡 출신으로 궁인으로 뽑혀 들어왔으며, 충렬왕의 총애를 받았다. 총애의 정도는 왕이 都羅山으로 사냥을 갈 때면 반드시 따라갔기 때문에「도라산」이란 별명이 생길 정도로 각별하였다. 이에 무비의 일당은 왕의 총애를 믿고 횡포한 짓을 마음대로 하였다.

 그런데 충렬왕 23년 왕비 제국대장공주가 세자(충선왕)의 혼례에 참석하기 위해 원나라로 갔다가 돌아온 지 보름 만에 사망했다. 때문에 원에서 귀국한 세자는 충렬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왕비의 죽음에 대한 진상조사에 나선다. 그래서 무비와 그 일당인 환관 출신의 崔世延·陶成器 등을 가두고 무비가 왕비를 무고한 사실에 대해 국문했던 바, 巫女와 術僧이 모두 자백하였다. 이에 세자는 무비·도성기·최세연 등을 죽이고, 일당 40명을 귀양보냈다.

 충렬왕은 왕권의 안정을 위해 측근세력을 중심으로 정치를 운영했으며, 환관들도 측근세력의 한 구성분자였다.0375) 李益柱,<高麗 忠烈王代의 政治狀況과 政治勢力의 性格>(≪韓國史論≫18, 서울大 國史學科, 1988), 188∼189쪽. 이에 대해 세자는 일찍부터 비판적 태도를 보이면서, 최세연과 도성기 등을 미워했고, 그래서 충렬왕 14년에도 이들을 섬으로 유배보낸 적도 있었다.0376)≪高麗史節要≫권 21, 충렬왕 14년 7월. 따라서 이 사건은 평소 충렬왕의 측근정치에 비판적이던 세자가 무비의 무고를 빌미삼아 부왕의 측근세력을 숙청하는 데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결국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충렬왕은 입지가 크게 약화되었고, 이듬해 정월에는 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어야 했다.

 ⑤ 趙妃의 薊國大長公主 저주사건0377)≪高麗史≫권 32 世家 32, 충선왕 즉위년 5월·6월·권 89, 列傳 2, 薊國大長公主 및 권 105, 列傳 18, 趙仁規. : 조비와 계국대장공주는 모두 충선왕의 비이다. 이들은 모두 충선왕이 세자일 때 혼인했는데, 조비는 趙仁規의 둘째 딸로서 충렬왕 18년에, 계국대장공주는 원나라 晉王 甘麻刺의 딸로서 충렬왕 22년에 각각 충선왕과 혼인했다. 계국공주는 원나라 종실이기 때문에 나중에 혼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제1비의 위치에 있었다. 그렇지만 충선왕과의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고, 결혼 후 2년이 넘도록 자녀의 출산이 없어 심리적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반해 조비는 충선왕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으로, 계국공주는 조비를 투기한 나머지 유모 및 무뢰배들과 상의하여 조모인 원나라 황태후에게 조비가 자기를 저주하여 충선왕의 사랑을 받지 못하도록 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 때가 충선왕 즉위년 5월로, 충선왕이 즉위한 지 4개월이 채 못된 시기였다. 얼마 후 司宰注簿 尹彦周란 사람이 궁문에 익명서를 붙였는데, 그 내용은 조인규의 처가 神巫를 시켜 계국공주를 저주하여 왕으로 하여금 계국공주를 사랑하지 않고 자기 딸만 사랑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계국공주는 이를 기화로 조인규와 그의 일족을 잡아들이는 한편, 충선왕과 대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원나라에 익명서사건을 보고하였다. 이에 원나라에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조인규를 원나라로 압송해 갔으며, 또 조인규의 처를 참혹하게 고문하여 허위자백을 받아 내고, 조비까지 잡아갔다. 그리고 원나라 태후는 蕃僧 5인과 道士 2인을 파견하여 공주에게 내린 저주를 풀게 하는 祓祭를 거행하게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원나라로부터 충선왕의 왕권은 많은 제약을 받았다. 충선왕은 충렬왕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즉위한 직후부터 충렬왕대 측근정치에 의해 발생된 정치·경제·사회 각 부분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일련의 개혁을 단행하였고, 그 가운데 관제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다.0378) 이익주,<충선왕 즉위년(1298) 관제개편의 성격>(≪14세기 고려의 정치와 사회≫, 민음사, 1994) 참조. 그런데 원나라에서는 이 사건 때문에 파견된 사신을 통해 새로운 관제를 거두어들이게 했고, 王府의 珍寶를 소장하는 生成庫를 맡게 하였다.

 그렇다고 할 때 이 사건은 충선왕의 개혁으로 말미암아 기득권을 침해당한 세력들이 일으켰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이 사건이 관제개편과 이에 따른 관리 임명을 단행한 5월에 발생했음으로 미루어, 관제개혁 때문에 정치적 지위를 위협 당한 세력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또 충선왕은 관제개혁 과정에서 조인규의 일족을 중용하였던 점으로 미루어, 그들은 조인규 일족의 성장을 질시하는 입장에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계국공주의 투기심리를 이용하여 계국공주를 자극하고, 원나라 세력을 끌어들임으로써, 기득권을 되찾으려 한 것이 바로 이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결국 충선왕은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물러나고, 충렬왕이 복위한다.

 이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려 후기에는 무격들이 무고 내지 저주에도 동원되었으며, 무고의 구체적 방법은 홍복원사건의 경우로 미루어 상대방을 상징하는 인형을 만들어 위해를 가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무고는 유사한 행위를 하면 유사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類感呪術的(homeopathic magic) 사고에 기초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무고는 정상적 방법으로 상대를 쓰러뜨릴 수 없을 때 은밀히 행해진 술법으로, 특히 원의 공주 출신을 왕비로 맞이하는 원 간섭기의 기형적 왕실구조 속에서 성행하였다. 그리고 비빈들 사이의 문제를 자신들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데 이용하고자 했던 일부 세력에 의해 정치적 사건으로까지 비화되어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巫蠱에 관한 기록이 원 간섭기에 처음 보인다는 점이다. 따라서 무고는 민속종교 현상으로 일찍부터 존재했지만, 원 간섭기에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기록에 남을 수 있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반대로 민속종교의 전통에는 무고가 없었는데, 원 간섭기에 원으로부터 수입되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연구의 부족으로 어느 쪽을 택할지 속단할 수 없지만, 중국에서는 유감주술에 기초한 무고가 漢代에 이미 성행하고 있었음을 생각할 때0379) 孫家洲, 앞의 글, 467∼468쪽. 후자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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