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Ⅰ. 사상계의 변화
  • 3. 풍수·도참사상 및 민속종교
  • 2) 민속종교
  • (4) 무격배척과 금압

(4) 무격배척과 금압

 그러나 고려시대는 무교에 대한 열광적 신앙으로 일관한 것은 아니었으니, 무교에 대한 배척과 금압이 시작된 것도 바로 고려 후기부터였다.

 무교를 배척한 사실이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인종 9년(1131)인데, 이 때 日官들은 무풍과 음사의 성행이 우려되는 지경이므로 무격을 멀리 쫓아내야 한다고 왕에게 건의하였다. 그러나 일관의 건의는 제대로 실천에 옮겨지지 못했는데, 그것은 무격이 재물을 모아 권력자에게 뇌물을 바치고 사태를 무마했기 때문이었다.0392)≪高麗史≫권 16, 世家 16, 인종 9년 8월 병자. 일관은 司天臺와 太史局에 소속되어 천문 지리 등을 담당하는 관원인데, 이들이 천문현상을 이해하는 틀은 유교적 天人感應說이었다. 따라서 일관의 무격배척은 유교적 입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으며,0393) 崔錫榮,<巫와 日官의 갈등에 대한 역사적 고찰>(≪比較民俗學≫13, 1996), 620∼628쪽.
고려시대 日官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로는 다음의 글이 있다.
金昌賢,<高麗時代 日官에 관한 一考察>(≪史學硏究≫ 45, 1992).
때문에 충선왕 즉위년에도 무격축출을 주장했던 것이다.0394)≪高麗史≫권 32, 世家 32, 충선왕 즉위년 4월 갑자.

 이렇듯 국가적 차원에서 무격을 배척하자는 논의는 인종 때 바로 실현되지 못했지만, 일부 지방관들이 자신의 관할구역에서 개인적으로 무격을 배척한 것은 의종 때부터 확인된다. 의종 때 咸有一이 바로 그런 인물인데, 그는 무격을 몹시 싫어하여 橋路都監을 관장하면서 개경의 무격을 모두 교외로 쫓아내었고 민속종교의 神祠들을 많이 없애버렸다.0395)≪高麗史≫권 99, 列傳 12, 咸有一. 이와 함께 무격을 배척하는 것이 점차 지식인의 미덕으로 여겨지게 되고, 죽은 사람을 기리는 墓碑나 墓誌, 또는 전기에서 이 점이 특필되기도 하였다.0396) 金龍善 編,<咸有一墓誌>(≪高麗墓誌銘集成≫, 翰林大 出版部, 1993), 250쪽.
李奎報,≪東國李相國集≫전집 권 35, 碑銘·墓誌, 曹溪山第二世故斷俗寺住持修禪社主贈諡眞覺國師碑銘幷序.
李齊賢,≪益齋亂藁≫권 7, 碑銘, 卞韓國夫人柳氏墓誌銘幷序.

 그래서 마침내 무격에 대한 배척이 지방관 차원이 아니라 국가차원에서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것은 무격을 개경 밖으로 축출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국가의 명에 의한 무격축출이 언제부터 실시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록상으로는 명종∼고종 때 활약한 이규보의<노무편>에 처음 보이는 사실이며, 이 때는 대신들이 합의하고 왕이 재가함으로써 실행에 옮겨진 것이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조치는 이후에도 여러 번 되풀이되었는데, 고종 때는 崔沆에 의해서 실시된 바 있으며,0397)≪高麗史≫권 129, 列傳 42, 崔忠獻 附 沆. 충숙왕 후8년(1339)에는 監察司에서 各部는 개경에 거주하고 있는 무격을 모두 추쇄하여 성밖으로 축출하라는 방을 내건 적도 있었다.0398)≪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禁令.

 고려시대에 있어 무격을 배척하고 무교를 금압하는 방법은 직접적인 것과 간접적인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직접적 방법으로는 무격을 도성 밖으로 몰아내어 활동영역을 한정하는 것과 무격에게 부정적 요소가 드러나면 처벌하는 것이 있다. 이 중에서 전자의 방법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방관들에 의해 개인적으로 실시되다가, 무신집권기로 오면서 국가적 차원에서 무격을 금압하는 방법을 채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후자의 방법, 즉 무격 처벌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사례가 전해지는데, 명종 때 玄德秀는 安南都護副使로 있으면서 관할구역에 무격의 출입을 금지하는 한편, 여장을 하고 다니면서 풍속을 어지럽힌 男巫를 처벌했다.0399)≪高麗史≫권 99, 列傳 12, 玄德秀. 충렬왕 때 安珦은 상주판관으로 있으면서 공창무 3인을 처벌했고,0400)≪高麗史≫권 105, 列傳 18, 安珦. 역시 충렬왕 때 沈言昜은 공주부사로 있으면서 금성산 신당무를 처벌했다.0401)≪高麗史≫권 106, 列傳 19, 沈言昜. 또 공민왕 때에도 柳濯과 李云牧이 제석천이라 자칭하면서 사람들을 현혹하던 무녀를 처벌한 사실이 있었다.0402)≪高麗史≫권 111, 列傳 24, 柳濯 및 권 114, 列傳 27, 李承老 附 云牧.

 간접적 방법이란 무격배척과 무교금압에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무격의 활동을 위축시키는 것인데, 여기에는 무격에게 경제적 부담을 지우거나 그 밖의 의무를 부과하는 것 등이 있다. 국가에서 무격에게 경제적 부담을 지우는 예로는 충혜왕 후 4년(1343) 閔渙이 惡少輩를 각 도에 파견하여 무격과 匠人들에게 業中貢布稅를 거두게 했다든지,0403)≪高麗史≫권 124, 列傳 37, 閔渙. 우왕 13년(1387) 명나라에 보낼 말을 무격들로부터도 징발했던 적이0404)≪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科斂. 있다. 또 그 밖의 부담을 지게 한 예로는 충렬왕 25년(1299) 개경무녀 가운데 가무에 능한 자를 뽑아 왕실가무단이라 할 수 있는 男粧에 소속시킨 사실,0405)≪高麗史≫권 125, 列傳 38, 吳潛 및 권 71, 志 25, 樂 2. 공양왕 때 典儀寺에서 맹인과 무격의 자식들을 악공에 충원한 사실,0406)≪高麗史≫권 119, 列傳 32, 鄭道傳. 충혜왕 후4년 규중의 미녀를 잘 아는 것은 무격만 하지 못하다는 嬖倖들의 말을 듣고 왕이 악소배들을 보내어 盲巫들을 침학한 사실0407)≪高麗史≫권 36, 世家 36, 충혜왕 후4년 8월 무신. 등이 있다. 또 충목왕 때 좌정승을 지낸 韓宗愈는 젊은 시절 무격이 가무하는 곳이 있으면 친구들과 짜고 음식을 빼앗아 취하도록 먹고서 楊花歌를 부르며 놀았다고 하는데,0408) 成 俔,≪慵齋叢話≫권 3(≪大東野乘≫ 所收). 이러한 행위도 무격들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아직 巫稅 등 무격이 국가에 대해 져야 할 부담이 제도화되지 못했고, 이것의 정비는 조선시대에 와서야 이루어진다.

 한편 위화도회군 이후, 급진개혁파 신진사류들이 집권세력으로 등장해서는 강도 높은 무교 배척론을 전개하였다. 예컨대 공양왕 3년(1391)에는 鄭道傳과 金貂가 왕에게 올린 상소를 통하여 무교금압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0409)≪高麗史≫권 119, 列傳 32, 鄭道傳 및 권 117, 列傳 30, 李詹. 비슷한 시기에 金子粹도 상소를 올려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였다.0410)≪高麗史≫권 120, 列傳 33, 金子粹. 이에 의하면 급진개혁파들은 무교금압을 이유로 ① 과도한 무교의례 비용으로 말미암은 국가와 민의 경제력의 피폐, ② 유교윤리와 배치되어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무교배척을 정책에 반영하여, 금령으로 명문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이들은 공양왕 3년 사전을 혁파하고 과전법을 시행할 때 僧尼·娼妓·盲人 등과 더불어 무격을 給田대상에서 제외하였다.0411)≪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결국 급진파 신진사류들의 주장은 성리학을 지도이념으로 채택한 새로운 왕조건설을 위한 정지작업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고려왕조의 무교금압이나 무격배척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첫째, 도성내에서의 무격의 활동을 금할 뿐, 밖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별다른 제약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고려왕조가 무격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지 않았음을 시사하지만, 한편으로는 무교정책이 그만큼 불완전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무격들은 국가의 단속이 느슨해지면 신도들을 찾아 개경으로 돌아왔고, 때문에 국가의 무격축출령이 거듭될 수밖에 없었다.

 둘째, 국가적 차원에서 무격에 대한 처벌기준이 마련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같은 무격이라도 어떤 지방관은 믿고 따랐는가 하면, 안향이나 심양의 경우처럼 처벌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고려왕조의 무교정책은 일관성이 부족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徐永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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