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1. 과학과 기술
  • 3) 인쇄술과 제지기술
  • (2) 청동활자 인쇄술의 발명

(2) 청동활자 인쇄술의 발명

 인쇄술은 사람이 한자 한자 손으로 써서 책을 만들던 일을 기계적인 방법으로 규격화된 것을 여러 벌 만들 수 있게 한 혁신적인 기술이다. 그리고 인쇄술은 목판에 의한 고정된 인쇄방법으로부터 목활자에 의한 움직이는 형태, 즉 활판으로 발전하여 보다 능률적이고 다양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되었다. 이 목활자는 중국인에 의해서 11세기에 발명되었다. 그런데 그 목활자를 금속공예에서 경험적으로 얻은 높은 기술 성과를 도입·응용하여 보다 견고하고 완전한 인쇄를 가능케 한 금속활자로 발전시킨 것은 한국인이었다.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술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몇 가지 기술적인 노하우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질기고 깨끗한 얇은 종이와 인쇄에 적당한 먹의 제조, 활자의 주조기술 등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12세기의 고려에는 그러한 기술이 축적되어 있었다. 고려는 11세기 후반부터 많은 종이를 중국에 수출했다. 그것은 질이 좋은 종이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리고 고려의 종이는 수출을 위한 대량 생산에서 그 품질이 더욱 향상되었다. 먹도 그러했다. 고려의 숯먹(松煙墨)은 중국에서 호평을 받았다. 이것은 유성먹으로 그 품질이 인정되고 있었는데, 고려의 먹 제조기술자들은 여러 가지 먹의 제조에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고려는 인종 4년(1126)과 의종 24년(1170)의 두 차례에 걸친 궁궐의 화재로 수만 권의 장서를 불태우는 비극을 겪었다. 그런데다가 중국에서는 그 무렵 송과 금의 끊임없는 전쟁이 계속되어, 송으로부터의 서적수입도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었다. 결국 고려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기술로 필요한 서적을 인쇄하는 길밖에 없었는데, 적은 부수를 여러 종류 인쇄해야 할 경우, 목판인쇄는 많은 경비와 시간이 소요되는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더욱이 고려에는 목판이나 목활자를 만드는데 알맞은 단단한 나무가 적은 편이었다.

 그런데 고려에는 그 무렵에 청동이 많이 생산되고 있었다. 그리고 고려의 금속장인들은 신라 이후의 금속세공기술과 청동주조기술의 전통을 계승하여 鼓鑄法으로 훌륭한 청동범종에 명문을 주자해 낸 전통과 기술을 축적하고 있었다. 이런 기술적 바탕을 가진 고려의 장인들이 목판이나 목활자 대신에 청동으로 활자를 부어만드는 일은 매우 자연스러운 기술적 착상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목활자에서 청동활자로의 이행이 별 어려움 없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커다란 기술혁신이었고, 새로운 발명이었다.0419) 全相運,<韓國靑銅活字 印刷術 發明의 技術史的 背景>(≪硏究論文集≫ 3, 성신여대, 1970).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에 이르는 사이, 고려에서는 마침내 청동활자 인쇄기술이 발명되었다. 고려는 이 역사적인 기술혁신으로 목판과 목활자인쇄에서 드러난 어려움을 빨리 해결할 수 있었다. 고종 26년(1239)에 간행된 것으로 기록된≪南明泉和尙頌證道歌≫가 그 전에 출판된 주자본을 그대로 뒤집어 새긴 책이며, 고종 21년 무렵에 간행된 것으로 전해지는≪詳定古今禮≫28부도 주자로 찍은 것이라는 기록은 이 시기의 청동활자인쇄를 알 수 있는 보기가 된다. 이 인본들은 지금 남아 있지 않으나 여기서 말하는 주자 즉 금속활자는 청동제활자임이 확실하다. 이 때에 부어만든 청동활자는 증도가의 중각판본으로 볼 때, 그 크기와 모양이 정연하여 비교적 정교하게 다듬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활자의 조판은 활자들을 괘선에 따라 식자하고 그 틈새를 밀랍으로 메워 고정시키는 방법이었다.

 청동활자에 의한 인쇄기술은 13세기 이후 거의 200년 동안 기술적 개량이 별로 없는 채로 그 맥이 이어졌다. 청동활자에 의한 인쇄가 활발하게 전개된 것 같지는 않으나, 중앙관서에서 관장하던 청동활자인쇄가 차츰 퍼져서 사찰에서까지 청동활자를 만들어 쓰게 되었다. 우왕 3년(1377) 7월의 간기가 있는≪佛祖直指心體要節≫하권 1책은 그 좋은 보기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청주목 興德寺에서 주자로 찍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그것이 청동활자로 인쇄되었음을 확인케 하고 있다.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 금속활자본은, 활자의 주조와 조판기술이 아직도 초기단계에 머무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고려의 중앙관서에서 인쇄한 것이 아니라 지방의 한 사찰에서 간행한 것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 태종 2년(1402)에 癸未字 인본에서 나타나는 기술상의 미숙함은, 그 사이의 기술적 개량이 별로 없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고려의 청동활자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별로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남한과 북한에서 고려의 청동활자라고 보고되고 있는 사례 둘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크기 1.2×1.1×0.7㎝의 㠅자이다. 고려의 한 왕릉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이 청동활자는 그 모양이 조선시대의 청동활자와 다르고 그 만듦새가 기술적으로 미숙한 단계인 점으로 보아 고려활자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하나, 북한에서 보고된 것은 개성 만월대 神鳳門터로부터 서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청동활자이다. 높이가 8㎜이고 글자가 새겨진 면이 10×10㎜인 이 활자는 아마도 ‘전’이라는 자로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주성분은 구리·주석·납이고, 규소·철·알루미늄 등이 섞여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활자의 모양이 어떤지는 보고되어 있지 않다. 이 청동활자들이 고려의 것이 확실하다면, 초기의 금속활자 주조기술을 가늠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그 후 공양왕 4년(1392) 정월에 고려는 書籍院을 설치하여, 주자인쇄업무를 관장하는 令과 丞의 관직을 두었다.0420)≪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諸司都監各色 書籍店.
≪高麗史節要≫권 35, 공양왕 4년 정월.
그러나 청동활자 인쇄기술의 발전에 커다란 계기가 되었을 이 전담관서의 출현은 그 기능이 시작되기도 전에 고려의 멸망으로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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