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1. 과학과 기술
  • 5) 그 밖의 산업기술
  • (1) 도량형

(1) 도량형

 한국의 도량형제도는 일찍부터 중국의 제도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고구려는 그들 나름의 자(尺)를 가지고 있어서 일본에서도 그 자가 널리 쓰이고 있었다. 그러한 자는 백제와 신라에서도 쓰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는데, 이것은 삼국시대의 도량형제도가 중국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 나름의 제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에 어떻게 이어졌는지는 확실치 않다.≪고려사≫에는 고려시대의 도량형제도에 대하여 어느 정도까지 정리할 수 있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표준기의 종류나 특징을 알 수 있는 기록은 부피를 재는 그릇에 대한 것뿐이다. 그래서 고려에 길이와 무게를 재는 고려나름의 표준제도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고려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도량형과 관련된 기사 중에서 다음과 같은 것은 길이와 부피·무게를 제도화한 것으로 중요한 자료이다. 즉 길이에 대해서는≪고려사≫食貨志에 “문종 23년(1069) 量田 步數를 정하였다. 밭 1結은 가로×세로를 33步로 한다. 6치(寸)는 1分, 10푼을 1자(尺), 6자를 1보로 한다. 2결은 가로×세로 47보, 3결은 가로×세로 57보 3푼, 4결은 가로×세로 66보, 5결은 가로×세로 73보 8푼, 6결은 가로×세로 80보 8푼, 7결은 가로×세로 87보 4푼, 8결은 가로×세로 90보 7푼, 9결은 가로×세로 99보, 10결은 가로×세로 104보 3푼으로 한다.0425)≪高麗史≫ 권 78, 志 32, 食貨 1, 문종 23년. 밭의 측량과 관련된 이 기사는 고려시대의 1결의 면적을 분명히 하고, 그것을 잴 때 자의 단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1자(尺)가 10푼(分)이고 1푼이 6치로 등분되는 그 당시의 자의 단위를 명시한 중요한 자료이다.

 또 부피를 재는 그릇에 대해서는≪고려사≫형법지에 문종 7년에 관용 말(官斛)의 규격을 정한 기사가 있다. 고려정부는 중앙과 지방의 관용 말의 길이·너비·높이·모서리를 비교하여 결정하되, 쌀을 되는 말은 길이·너비·높이가 각각 1자 2치이며, 피(稷)나 벼(租)를 되는 말은 길이·너비·높이가 각각 1자 4치 5푼이며, 가루나 장을 되는 말은 길이·너비·높이가 각각 1자 3치 9푼이며, 콩·팥을 되는 말은 길이·너비·높이가 각각 1자 9푼씩으로 한다고 했다.0426)≪高麗史≫ 권 84, 志 38, 刑法 1, 문종 7년. 그러니까 이 때 정해진 되로 그릇(量器)은 4종류가 있었는데 그 크기가 모두 달랐다. 고려인들은 되는 곡물에 따라 각각 다른 됫말을 쓴 것이다.

 무게의 단위로 斤을 썼다.≪고려사≫에는 고종 8년(1221) 8월에 몽고사절이 요구한 수공업품의 분량을 기록한 기사에 觔이란 무게의 단위를 쓰고 있다. 이 觔은 斤과 같은 뜻이다.≪고려사≫식화지 충선왕 원년(1309) 2월의 기사 중에 “은 1斤에 소금 64石, 1兩에는 4섬”이라는 기록에서 근과 냥이 쓰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근은 16냥이다.

 도량형은 관에 의하여 관장되었고, 고려는 그것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노력하였다.≪고려사≫에는 그러한 정부의 노력에 관한 기사가 몇 번 기록되어 있다. 그 기사에 의하면, 靖宗 6년(1040) 2월 임자일에는 담당관리에게 명하여 權衡을 정하고 斗量을 바로잡았다고 했다. 이 때 비로소 관에 의해 도량형기 또는 저울과 됫말이 바로잡혀진 듯하다. 또 정종 12년에는 매년 봄·가을 두 차례 공사의 모든 秤斛을 바로잡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1년에 두 차례 관이나 개인이 쓰는 모든 도량형기를 교정하는 일을 정례화하겠다는 것이다. 그러한 노력이 어느 정도 실질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다. 명종 3년(1173)에 李義方의 제청에 의하여 平斗量都監을 설치했다.0427)≪高麗史≫ 권 85, 志 39, 刑法 2, 명종 3년. 도량형을 엄격히 관리하기 위한 기구가 세워지고, 말과 되를 쓰는 경우에 반드시 밀대를 쓰도록 하고 위반하는 자는 섬으로 귀양을 보냈으나, 1년이 못되어 그 이전대로 밀대를 쓰지 않게 되었다고≪고려사≫백관지와 형법지는 전하고 있다. 고려 후기에는 도량형과 관련된 기사가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조선 초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말에는 도량형기들이 상당히 흐트러진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 기준기라 할 만한 정부 공용의 도량형기마저도 제대로 보존된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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