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2. 문자와 언어
  • 1) 문자

1) 문자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이전인 고려시대의 문자는 12세기 후반 이후에도 여전히 한자를 빌어 우리말을 적는 광범위한 한자차용표기체계와 정통한문이 있었을 뿐이다. 즉 借名·鄕札·吏讀·口訣의 네 가지 借字가 한문과 병행하여 사용되었다. 그러나 한문에 능숙한 지식인이 늘어나면서 점차로 차자표기보다는 외국어나 다름없는 한문이 더 큰 세력을 떨치게 되었고 차자표기는 제한된 범위에서만 사용하게 되었다. 네 가지 차자표기 가운데서 향찰에 의한 향가제작이 제일 먼저 그 맥이 끊어졌다. 이것은 시가부문의 변천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지만 표기체계 자체의 번거로움도 향가의 제작을 기피하게 하였을 것이다. 차명은 원래 고유명사 표기에 쓰이던 것이었으나 고려에 오면 물건의 이름을 표기하는 방식에까지 확대되어 鄕藥名을 표기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13세기 중엽에 大藏都監에서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鄕藥救急方≫에는 147종의 향약명에 대한 차명표기가 실려 있다.

 ≪향약구급방≫에 실린 향약명 가운데 차명표기의 실례를 몇 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借 名 表 記 漢 字 表 記 朝鮮朝의 한글표기
鷄 矣 碧 叱
影 亇 伊 汝 乙 伊
道 羅 次
熊 月 背
沙 蔘 矣 角
鷄 冠
蠷 蝦
桔 梗
落 蹄
鹿 角
  벼 슬
그 르 메 너 흐 리
도 랏
곰  
사   

 그리고 관공서의 공문으로도 쓰이고 金石文으로도 널리 쓰이는 이두문은 실용적 필요성 때문에 더욱 활발하게 사용되었으며, 이런 이두의 통용은 조선조 말까지도 면면히 이어 내려왔다. 또한 구결도 그 전과 다름없이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다만 고려 전기에는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는 구결자료가 없으므로 언급할 수 없었지만 12세기 후반 이후에 해당하는 고려 후기에는 釋讀口訣자료와 順讀口訣자료가 남아 있기 때문에 여기서 자세히 다루어 보고자 한다.

 원래 구결은 중국에서 받아들인 불교와 유교의 한문경전을 우리말로 바꾸는 번역술의 표기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0437) ‘구결’을 ‘口授傳訣’의 준말로 보아 번역의 秘法을 傳授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려는 견해가 있다. 통용되는 의미는 ‘吐’라 하며 한문해석에 필요한 보조기능의 입겿이다.
南豊鉉·沈在箕,<舊譯仁王經의 口訣硏究>(1)(≪東洋學≫6, 檀國大 東洋學硏究所, 1976).
삼국시대 이래 한문원전이 우리 조상들에게 해독되었을 때 그 해독의 결과는 우리말로 번역된 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번역된 글의 실체가 없기 때문에 薛聰의 경서풀이방법, 즉 明經術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석독구결이 적힌≪舊譯仁王經≫이 발견된 후에 석독구결의 참모습이 밝혀졌다.

 먼저≪仁王經≫이 어떤 불경인가를 간단히 살펴보겠다.≪인왕경≫ 신앙이 우리 나라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6세기 또는 7세기경으로 소급된다.≪인왕경≫은 부처님의 나라 佛國土와 현세의 국토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하는 호국사상을 담고 있는 불경이다. 신라 진흥왕 12년(551)에 고구려에서 신라에 귀화한 惠亮法師가 百座講會를 열었다고 하는데 그 때에 인왕경을 강설했으리라 추측된다. 그 뒤 진평왕 30년(613)에는 圓光法師에 의해≪인왕경≫이 강설되는 百高座講會가 열렸다고 하는 기록이 보인다. 그 무렵 圓測(613∼696)도≪仁王經疏≫를 지었다. 고려에 들어오면 百高座仁王道場을 90여 회에 걸쳐 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종 3년(1022)에는 內殿에 승려들을 모아 놓고≪인왕경≫을 강론하였고, 공양왕 2년(1390)에는 仁王佛을 별전에 안치하고 아침 저녁으로 예배하였다. 요컨대≪인왕경≫은 그 경전이 가르치고 강조하는 호국신앙으로 말미암아 외세에 시달리던 고려가 민족적 자주성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동안, 그러한 노력에 힘을 주는 정신적 기반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인왕경≫이 1973년 12월에 忠淸南道 瑞山郡 雲山面 胎封里에 있는 文殊寺의 金銅如來坐像의 腹藏遺物로 발견되었다. 그것은≪구역인왕경≫상권의 목판본 경판 다섯 장에 불과한 것이었는데, 여기에 종래에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던 한자의 약자와 부호가 한문 원문의 좌우에 붓으로 써넣어져 있었다.0438) 가로 56㎝, 세로 31㎝의 淡黃色 韓楮紙에 匡廓 크기는 52.5㎝×22.5㎝ 목판이 인쇄되었다.≪舊譯仁王經≫권 상의 2, 3, 11, 14, 15의 5장으로 1행 17자 25행이 1장에 적혀 있다. 여기에 口訣만 손으로 써 넣었다. 이것이 신라시대 설총이 후생들에게 가르쳤던 경서풀이 곧 한문해석법과 통하는 것이요, 후대의 구결과 직결되는 원초적 구결의 모습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함께 발견된 다른 유품 가운데 연대가 가장 이른 것이 숙종 2년(1097)이요, 가장 늦은 것이 충목왕 2년(1346)인데,≪구역인왕경≫은 복장할 당시에 이미 꽤 오래된 것을 사용하였으므로 상한연대인 숙종 2년보다 앞선 시기에 간행된 것일 수도 있다. 적어도 고려 후기가 시작되는 12세기 중엽에는 그 경문 안에 적힌 구결이 기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0439) 南豊鉉,<舊譯仁王經 釋讀口訣의 年代>(≪東洋學≫15, 檀國大 東洋學硏究所, 1985) 참조.

 그런데 여기에 적힌 구결은 한문의 문장구조와 우리말의 문장구조상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표기 원칙을 세우고 있다.

 첫째, 어순의 차이 즉 우리말 순서대로 읽게 하기 위하여 구결을 한문 원문의 오른쪽과 왼쪽에 나누어 적는다.

 둘째, 왼쪽에 구결을 적음으로써 읽기를 보류했던 부분으로 연결시켜 주는 부호로서 “”(점)을 찍었다.

 그러므로 오른쪽의 구결을 따라 읽어 가다가 “”이 나오면 왼쪽 구결이 있는 곳으로 거슬러 올라가 읽으면 자연스럽게 우리말로 바뀌게 되어 있다. 좌우로 구결을 갈라 쓰는 일과 거슬러 올라가 읽으라는 “”을 찍는 방법으로 한문의 통사구조를 우리말 통사구조로 바꾸게 하는 지극히 간편하고도 요령있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풀어 읽는 구결이기 때문에 이것을 釋讀口訣이라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현재까지 석독구결 자료로 완벽한 것은≪구역인왕경≫외에≪大方廣佛華嚴經≫·≪瑜伽師地論≫·≪合部金光明經≫ 등이 세상에 알려져 있다. 이러한 釋讀(풀어읽기)의 방법은 오늘날에도 일본에서 한문을 읽는 방법으로 통용되는 것인데, 우리 나라에서도 일찍이 고려시대에 그러한 한문해독방법이 있었음을 이≪구역인왕경≫의 석독구결자료가 발견되어 입증할 수 있었다(아래 인용원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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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을 해독하면 다음과 같이 순서가 조정된다.

大衆歡喜丷各各量無神通現ㅌ

地及ハ虛空ノ大衆而住丷ㅌハ

 원문에는 量과 神通 다음에 “”이 있고 現과 無에는 왼쪽에 구결이 붙어있다. 이것을 석독구결의 읽기방법에 따라 고쳐 놓은 것이 위의 글인데 이것을 고려시대 사람들은 자연스런 우리말로 바꾸어 읽었을 것이다. 현대어로 읽으면 다음과 같다.

큰 무리는 환희하여 제각기 헤아릴 수 없는 신통(력)을 나타내었으니

(그리하여) 땅과 및 허공에 큰 무리가 머물게 되었다.

 이와 같은 석독구결은 均如가 남긴 불경의 記釋에도 간간히 나타나고 있어서 석독구결의 전통은 10세기 중반까지도 소급할 수 있는 것인데,0440) 南豊鉉,<釋讀口訣의 起源에 대하여>(≪국어국문학≫100, 1988) 참조. 중요한 점은 한문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우리말 토를 한자로 표기할 때에 처음에는 완전한 한자를 충실하게 사용하였을 것이지만 조만간 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한자의 일부 획만을 이용하는 略體口訣을 개발하였다는 사실이다. 한문으로 된 원전의 행간에 학습자가 알아보기 쉽도록 간략하게 약체를 발전시킨 것은 한자를 이용하여 새롭고 간편한 문자를 하나 더 만들었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 약체구결자 가운데에는 글자모양에 있어서 일본의 가다가나(片假名) 문자와 흡사한 것이 많다. 한자의 일부 획을 이용하다 보면 같은 형태의 글자를 얻게 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만일에 신라시대에도 이러한 약체구결문자가 확인된다면 그것과 일본의 가나문자와의 관련성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그 가능성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한문을 학습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 한문을 우리말로 해석하여야만 그 뜻을 완전하게 파악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석독구결이 개발되었다는 것은 한문 원문을 거의 완벽하게 우리말로 옮길 수 있도록 되었으며 동시에 그것을 구결로 표기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에 대체로 약체구결문자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으므로, 거듭 강조하거니와 이 약체구결자는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이전에 통용되었던 우리 문자의 하나가 되는 셈이다. 물론 이 약체구결자는 문자로서는 많은 약점을 지니고 있다. 학풍이나 학습자의 취향에 따라 서로 다른 글자로 동일한 음을 표기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음절말 자음만을 나타내고, 어떤 것은 완전한 하나의 음절을 나타내기도 하여 정연한 체계를 세울 수 없다는 점이 모두 구결문자의 약점들이다. 훈민정음의 창제는 이러한 구결의 관점에서 보면, 구결문자의 불완전성을 깨끗하게 극복한 민족문화사상의 쾌거라고 보아야 한다.

 다시≪구역인왕경≫의 구결로 돌아와 살펴보면 여기에 나타난 약체구결자는 50여 개에 이른다(도판 참조). 그것들의 原字, 추정되는 대표음, 하나의 훈을 차용하였는가, 음을 차용하였는가, 또 그 略體는 원자의 초서체로부터 온 것인가, 해서체로부터 온 것인가, 또 그 약체가 필순으로 보아서 원자의 앞부분인가, 뒷부분인가, 또는 글자 전부를 그대로 이용하였는가, 일부분인가(대부분 일부분이다) 등에 대하여서는 아직 완전한 결론에 이르지는 못하였으나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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口訣字 代表音 本 字 字 形 字 音 舊譯
仁王經
大方廣
佛華嚴
經疏
大方廣
佛華嚴
經卷14
金光明
經 卷3
釋華嚴
敎分記
瑜伽師
地論
卷20
全字 音假        
ㄱ/기 省劃 音假  
全字 音假  
省劃 訓假  
省劃 音假  
省劃 音假  
省劃 訓假  
긋/ 全字 訓假          
긔/희 省劃 訓假  
/ 全字 訓假        
省劃 音假  
全字 音假          
省劃 音假  
省劃 音假    
省劃 訓假  
省劃 訓假  
省劃 訓假  
全字 音假        
全字 音假  
全字 訓假          
全字 音假  
全字 音假  
省劃 音假  
全字 音假          
省劃 音假  
全字 訓假        
全字 訓假    
省劃 訓假  
全字 訓假          
省劃 音假  
省劃 音假  
全字 訓假  
省劃 音假          
省劃 音假    
省劃 音假          
省劃 音假  
省劃 音假  
全字 音假          
全字 音假        
全字 訓假  
全字 音假      
省劃 訓假  
省劃 音假  
省劃 訓假          
全字 訓假        
省劃 音假  
省劃 音假      
省劃 音假      
全字 訓假  
省劃 音假  
省劃 音假          
省劃 音假      
省劃 訓假      
全字 音假          
全字 訓假  
省劃 音假          
  오/호 省劃 音假    
省劃 訓假  
/의 省劃 音假  
자히 全字 訓讀          
全字 訓假          
省劃 音假  
全字 音假
省劃 音假  
全字 音假          
省劃 音假  
省劃 訓假  
? ? ? ?    
? ? ? ?          
? ? ? ?          
? ? ? ?          
? ? ? ?          
全字 音假        
? ? ?    

 이 구결토를 유형별로 나누면 格助詞와 用言의 活用語尾 및 接尾辭 등으로 갈라볼 수 있는데, 실제의 문맥에서 우리말로 바꾸었을 때 학습자가 편하게 읽는 것이 주목적이었기 때문에 생략과 탈락이 심하게 드러난다.≪구역인왕경≫의 경우에, 토의 총계는 314개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한문을 우리말로 풀이하고자 할 때에 얼마나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표기하려고 하였으며, 또 그것이 가능하였던가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유감스러운 것은 이≪구역인왕경≫의 구결자료와 시기상 연계되는 다른 자료가 충분치 않아 좀더 완벽한 해독을 위해서는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다.≪구역인왕경≫의 구결토 일부를 예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0441) ( )의 숫자는 앞의 것이 張이고 뒤의 것이 行이다(곧 2:8은 二張 八行이다). 그리고 제일 처음 나오는 것 하나만을 예로 들었다.

(1) (2:8) (2) (2:1) (3) 丷ㅌ丷丆(14:16) (4) 丷(14:12) (5) 丷丆丷(14:14) (6) (15:3) (7) 丷ハ(11:22) (8) 丿(14:5) (9) 丿丷リ(3:20) (10) (3:18) (11) 丷(11:2) (12) (3:18) (13) ㅌハ(3:14) (14) (2:1) (15) 丷尸丿のこ(15:5) (16) (2:14) (17) リ(14:13) (18) リ(2:1) (19) リ丷丷こ(5:15) (20) こ(2:4) (21) 丿リム(2:5) (22) (11:1) (23) 丷の丷く(3:17) (24) (2:3) (25) 丿丷く(15:8 欄外) (26)  (11:20) (27)  ハ(2:3) (28) (2:9) (29) 丷(11:9) (30) (15:8) (31) 丷 (11:23) (32) (2:3) (33) ハ(2:5) (34) (2:13) (35) (3:19) (36) 丷(3:24) (37) 丷丷リ丷ㅌハ(2: ) (38) ハ(11:11) (39) ㅌハ(2:6) (40) ㅌ丷(11:19) (41) (2:13) (42) (15:19) (43) (14:8) (44) (3:22) (45) (2:21) (46) 尸丷(15:9) (47) (2:7) (48) 丷(11:25) (49) (15:6) (50) (2:9) (51) 丷巴ハ(2:23) (52) (3:3) (53) リリ(15:4) (54) (3:17) (55) こ(3:17) (56) 丷(15:21) (57) 丷(3:24) (58) (15:7) (59) (2:13) (60) 這(2:5)

 ≪구역인왕경≫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석독구결은 점차 쇠퇴하는 대신에 順讀口訣이 발달하였다. 한문 원문을 훼손시키지 않은 채 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은, 구결토를 오른쪽과 왼쪽에 나누어 적어야 하고 “”을 찍어서 풀이를 유보하고 왼쪽에 구결토를 적었던 敍述語계통의 말을 거슬러 올라가 읽어야 하는 번거로움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한문독해력이 향상됨에 따라 語句 단위로 끊어서 읽는 단순화한 구결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순독구결이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구결자료는 순독구결인데, 이러한 순독구결자료는 아무리 오래된 것이라 할지라도≪구역인왕경≫보다 시기상으로 앞서는 것은 없다. 이것은 석독구결이 간명하게 투식화하면서 순독구결로 한문의 해독법이 바뀌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고려시대 순독구결자료로 가장 오래된 것은 安東本≪南明泉和尙頌證道歌≫(略稱 安東本≪南明集≫)로서 고종 26년(1239)에 鑄字本으로 간행된 책에 역시 붓으로 써넣은 구결이 있다. 책의 간행연대에 비추어 구결자료가 13세기 이후의 것인 점은 분명하나 14세기까지 내려가지는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0442) 金斗燦,≪高麗版 南明集의 口訣硏究≫(檀國大 博士學位論文, 1987). 이≪南明集≫은 뒤에 논의할≪直指心體要節≫보다 140년이나 앞서 鑄字本으로 간행되었다. 비록 순독구결자료이기는 하나,≪구역인왕경≫과 연계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시기의 자료라는 점에서 주목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58개의 구결문자가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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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약체구결자를 이용하여 표시한 격조사, 활용어미 등 문법형태는 모두 251종에 이르는데, 이것은≪구역인왕경≫과 비교하면 그 숫자가 상당히 감소된 것이다. 구결토의 이와 같은 감소현상은 석독구결이 순독구결로 바뀌면서 한문독법에 엄청난 단순화가 이루어졌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이 단순화는 한문의 상당부분을 우리말 어휘체계 안에 받아들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익숙한 부분에 대해서는 구결토를 생략해도 해석상에 지장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만큼 한문은 고려 후기에 오면 그 이전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보급되고 이해되었음을 나타낸다.

 이 안동본≪南明集≫에 나오는 구결자를 다시 가나다순으로 정리하면, 토에 나타나는 우리말 발음 49종을 표기하기 위하여 모두 45자의 한자가 응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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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구결자를 이용하여 만든 구결토를 문법형태별로 보면 격조사는 주격 3가지 외에 속격·처격·대격·구격 등이 있으며 5가지 특수조사 및 보조사(주제·방편·지목·강세·양보), 8가지의 연결어미(설명·병렬·조건·대조·양보·인과·가상·역접), 그리고 4가지의 종결어미(평서·의문·명령·감탄)로 정리할 수 있다. 이 정도의 문법형태라면≪남명집≫을 이해하는 데에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을 것이다. 한편 13세기 중엽의 구결로 추정되는 이러한 문법형태의 확인은 아직 미해결로 남아 있는≪구역인왕경≫의 문법형태를 추정할 수 있는 디딤돌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후대의 구결자료들이 어떻게 변모하였는가를 알아볼 수 있는 기반으로서의 의미도 갖는다.

 ≪남명집≫에 이어 고려 후기의 구결자료를 보여주는 책은≪直指心體要節≫이다. 이 책은 세간에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알려진 것인데 우왕 3년(1377)에 간행되었다. 고려 말의 曹溪大禪師 景閑(白雲和尙)이 역대의 이름난 스님들의 偈·頌·讚·銘·書·詩·法語·說法 가운데서 禪의 핵심을 깨닫는데 필요한 내용들을 발췌하여 만든 것으로≪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 원래의 책이름이다. 모두 39장으로 되어 있는 것인데 그 첫 장은 떨어져 나갔고, 가운데 18장에 약체구결토가 군데군데 부분적으로 적혀 있다. 또 구두점도 찍혀 있다. 이 책이 간행된 뒤에 어느 학습자가 처음에는 구두점만 찍었다가 그 후에 또 다른 학습자가 구결토를 붙인 것으로 생각된다.0443) 金斗燦,<直指心體要節의 口訣에 대하여>(≪國語學≫16, 1987). 전편에 다 기록된 것이 아니므로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14세기 말엽의 순독구결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이해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다. 그 목록을 정리하면 구결자의 전모는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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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표에서는 위의 약체구결자로 이루어진 구결토를 자료에 나타난 그대로 싣고, ( )에는 그 원자와 추정되는 한글표기를 함께 싣는다(숫자는 장, a, b는 전후면 ‘복’은 2회 이상 나타남을 표시한다).

<1 획>
(良/애·에)29b복 30a복
(良隱/앤·엔) 32a
(乙/을) 2a 30b
丷(乙爲奴叱多/을놋다) 19a
丷ㅌ(乙爲飛尼/을니) 19b 29b
(乙古/을고) 30a
(是/이 主格) 2a복 12a
(是尼/이니) 35a
リ(是利五/이리오) 30b
(是羅/이라) 30b
丿(乎羅/호라) 12a
丿(乎隱矣/혼) 35b복
丿(乎隱地/혼디) 32b
丿(乎乙地尼羅/홀디니라) 34a
丿(乎尼/호니) 34a 35a
丿(乎矣/호) 2a 12a
丿リ(乎利羅/호리라) 32a
<2 획>
(乃/나) 2a복
(尼/니) 2a 31a
(尼羅/니라) 2a복 30a
(刀/도) 2a
(入乙爲旀/들며) 29b
(入乙爲奴羅/들노라) 29b
(奴/로 具格) 2a복 19b
リ(利五/리오) 32a 32b
リ(利午/리오) 29b복 30a
(厓/애 處格) 2a복 12a복
(亦φ/예 處格) 35a복
(亦/여 呼格) 35a복
(亦/여 感歎) 12a
卜(臥/와 共同格) 30a복 35b복
卜(臥是/왜) 30a복
(隱/은) 2a 19b
ラ(衣/·의 屬格) 2a 30a
(爲多可/다가) 12a
(爲也/야) 2a복 12a
(爲也是叱古/야잇고) 19b
(爲也尼/야니) 33a
(爲也示旀/야시며) 32a
(爲也示φ底/야신뎌) 35a
(爲也斤乙/야) 12a 33a
(爲乙士φ/) 33a 34a복
(爲奴隱地/논디) 31a 32b복
(爲奴隱/논) 2a
(爲奴尼/노니) 35a
(爲奴叱多/놋다) 29b 30a
(爲尼/니) 19b복 30a복
(爲尼羅/니라) 19b 30a복
(爲刀多/도다) 35a
(爲刀所尼/도소니) 12a
(爲了/료) 2a
リ(爲利尼/리니) 12a
リ(爲利奴多/리로다) 34a
リ(爲利羅/리라) 2a
リ(爲利φ士是/릴) 34a
リ(爲利五/리오) 34a
(爲旀/며) 30a복 31a
(爲面/면) 2a복 30a복
(爲示尼/시니) 33a 35a
(爲示尼羅/시니라) 2a
リ(爲示利尼/시리니) 34a
(爲示旀/시며) 2a
(爲示隱底/신뎌) 35a
(爲亦羅/여라) 12a
(爲隱大/대) 34a
(爲去入隱/거든) 32b
(爲古/고) 19b 29b
ㅌ(爲飛多/다) 32b
ㅌ(爲飛尼/니) 30a복 30b
ㅌ(爲飛尼羅/니라) 30a 30b
(爲大/대) 33a
(爲羅/라) 2a 34a
 (爲小立/쇼셔) 35a
(爲小立/쇼셔) 34a 35a복
(爲利羅/리라) 30b
(爲舍矣/샤) 12a 34a
要(爲要多/려다) 34a
<3 획>
(古/고 接續) 2a 12a
(古隱/곤) 31b
大(大/대) 2a복
大(大隱/댄) 32a 34a
(羅/라) 2a 19b복
(羅斗/라두) 30a복
(羅爲尼/라니) 35b
(羅古/라고) 31b
(沙/사) 2a 34a
(於多/어다) 30b
(於乙/어늘) 29b 34a
(於乙沙/어늘사) 29b
(於尼/어니) 32a
(去乙/커늘) 12a 29b
(去是羅/게라) 32b
(去尼/거니) 29b 30b
(去尼五/커니오) 12a
(去入隱/커든) 2a복 30a
(去等/커든) 34a
(土彔/토록) 12
<4 획>
(午/오 接續) 32a
(午/오 疑問語尾) 35a
(五/오 接續) 2a복 30a
(五/오 疑問語尾) 34a 34b
<5 획>
(可/가 疑問語尾) 2a 34a복
(知叱爲也/딧야) 32b
(知叱爲尼/딧니) 31a
(利午/리오) 30b
(利/리오) 33a
<8 획>
(果隱底/관뎌) 35a
(知叱爲尼/딧니) 30b
      합 계 略字吐 108
          全字吐 103

 위의 구결토를 면밀히 검토하면 최소한 3명의 학습자가 각기 다른 시기에 적어 넣은 것들이 섞여 있음을 판별할 수 있다. 처음 두 사람의 것은 14세기 말로 추정되며 끝의 것은 한글창제 이후의 구결토로 확인된다. 이 책이 고려 말에 간행되었기 때문에 구결자료가 여말선초에 걸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폭넓은 구결토의 사용실태는 고려 후기의 문자생활을 특징짓는 중요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한글창제의 저변에는 구결문자의 광범위한 사용과, 그 불완전성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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