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4. 역사학
  • 1) 각훈의≪해동고승전≫
  • (2) 각훈의 생애와 편찬배경

(2) 각훈의 생애와 편찬배경

 ≪해동고승전≫의 찬자인 각훈의 생애를 자세히 알 수 있는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그와 교유했던 당시 고려 후기 문인들이 언급한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서 그의 한두 가지 모습을 더듬어 볼 수 있을 뿐이다. 각훈은 젊은 시절 李仁老(1152∼1220)와 함께 놀았던 동년배였고, 고종 17년경에 사망하였다. 따라서 각훈은 무신집권시기에 속하던 12세기 후반으로부터 13세기 전반에 활동하였을 것이다.

 각훈은 興王寺 및 靈通寺 등을 중심으로 활동한 화엄종의 고승이었다. 개경의 흥왕사는 2,800칸이나 되는 거대한 사찰로 당시 화엄종의 중심도량이었고, 영통사도 대각국사 義天의 비가 있던 화엄종의 대찰이었다. 그와 함께 교유했던 문인 崔滋는 각훈을 ‘華嚴月首座’로 부르기도 하였는데, 수좌는 교종법계 중에서도 높은 위치에 해당한다. 즉 교종의 법계는 대선→대덕→대사→중대사→삼중대사→수좌→승통의 순서로 되어 있었는데, 수좌와 승통의 법계는 왕사나 국사에 추대될 수도 있었다. 각훈의 법계가 수좌에 해당했고, 영통사의 주지를 역임하였으며, 李奎報가 그의 부음을 듣고 지은 시 가운데 “이제 법문의 동량 꺾였으니, 후학은 누구를 의지해서 十玄緣起를 토구하랴”고 했던 구절이 전하는 것으로0455) 李奎報,≪東國李相國集≫ 전집 권 16, 次韻文禪師哭覺月首座. 볼 때, 각훈이 당시 불교계에서 차지하였던 위치를 짐작하고도 남겠다.

 화엄종은 고려 전기에 크게 융성했던 대표적 종파였지만, 무신란(1170) 이후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무신들의 등장은 왕실 및 귀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화엄종 등의 교종세력에 많은 타격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흥왕사의 승통 寥一은 승려들과 더불어 무신제거의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받기도 했다.0456)≪高麗史≫ 권 129, 列傳 42, 崔忠獻. 이처럼 초기 무신집권기는 각훈이 크게 활동한 시기에 해당하는데, 당시 불교계의 타격과 항쟁 등 어수선한 분위기는 그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씨집권기에 이르러 화엄종은 어느 정도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대장경을 간행할 때에 교정을 담당했던 守其와 均如의 저술을 보판으로 간행했던 天其 등의 활동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왕명에 의한 각훈의≪해동고승전≫ 저술도 이러한 분위기에서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각훈은 비록 승려였지만 화엄교학뿐만 아니라, 儒學에 많은 이해를 갖고 있었으며 문장에도 뛰어났다. 그가 유학에 관한 이해를 갖고 있었음은≪해동고승전≫의 贊에서 확인할 수 있고,0457)≪海東高僧傳≫의 贊에는≪周易≫·≪詩經≫·≪書經≫·≪論語≫·≪孟子≫ 등에서 인용한 것이 상당히 많다. 그가 문장에도 조예가 깊어 당대 문인들에게 두루 알려졌음은 다음과 같은 기록으로 알 수 있다.

① 흥왕사의 月上人은 매우 총명하고 문장도 좋아하여 眉叟와 교유하면서 스스로 호를 高陽醉髡이라고 칭하였다(林椿,≪西河集≫권 2, 贈月師幷序).

② 시를 지음에 賈島의 풍이 있었다(李仁老,≪破閑集≫권 중, 華嚴月師).

③ 餘事로 문장에 조예가 깊어 詩文이 士林에 전하며 일찍이≪海東高僧傳≫을 지었다(崔滋,≪補閑集≫권 하, 華嚴月首座).

④ 각월수좌는 일찍이 詩評을 지었고,≪高僧傳≫을 엮었다(李奎報,≪東國李相國集≫전집 권 16, 次韻文禪師哭覺月首座).

 이상은 교유했던 문인들의 각훈에 관한 평이다. 각훈은≪해동고승전≫이외에도 시평을 썼다고 하지만 하나도 전하는 것이 없다. 그는 당대의 뛰어난 문인 李仁老·李奎報·林椿 등과 교유했고, 시랑 趙沖과도 인연이 있었다.

 각훈은 승려지만 술을 상당히 즐기고 시를 아는 풍류인이었던 듯 하다. 그가 스스로 부른 ‘高陽醉髡’은 ‘高陽酒徒’에서 유래한 ‘술 마시는 승려’의 뜻으로 사용된 것 같다. “매일 고상한 이와 취하고 보니 그 풍류 고양취도란 호에 걸맞다”고 한 임춘이나, “고맙게도 스님이 눈 속에 술을 사와 산속의 하룻밤을 빌려주누나”라고 한 이규보의 시구 등으로도 이 점은 확인된다.

 단편적인 기록에 의해서나마 각훈의 자취를 더듬어 보았다. 그는 대개 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 초기까지 영통사·흥왕사 등에서 활동한 화엄종의 고승으로 그의 법계는 수좌였다. 그는 화엄학은 물론 유학 등에도 많은 이해를 가졌고, 또한 시문에도 능해서 당시의 대표적인 문인들과 교유했던 풍류인이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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