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4. 역사학
  • 1) 각훈의≪해동고승전≫
  • (3)≪해동고승전≫의 특징과 문제

(3)≪해동고승전≫의 특징과 문제

 각훈은≪해동고승전≫을 편찬하면서 중국 양·당·송의 세 고승전을 참고했다. 그러나 “옛날 양·당·송의 고승전에는 모두 譯經篇이 있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번역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이 科를 두지 않는다”고 하였듯이 중국 고승전의 역경편을 대신하여≪해동고승전≫에서는 유통편을 설정하여 편찬체제에 차이를 두고 있다. 따라서≪해동고승전≫의 체제는 중국 세 고승전의 체제를 참고한 것이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대로 모방한 것은 아니고 필요에 따라 달리 편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해동고승전≫ 유통편의 論에는 圓光으로부터 大覺國師에 이르기까지의 구법에 의한 불법 전래에 대해 언급하면서, “順道가 중국으로부터 고구려에 들어온 지 지금 844년이 되었다. 道가 스스로 넓혀지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 의해 넓혀지는 까닭에 유통편을 지어 뒷사람에게 보이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해동고승전≫에 수록된 마지막 고승은 각훈이 찬술할 당시에까지 미치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또한 최자가 李允甫로부터 들었던 黙行者의 傳을 지어 僧史(즉≪해동고승전≫)에 빠진 것을 보유하려 했던 것도,0458) 崔 滋,≪補閑集≫ 권 하, 華嚴月首座.≪해동고승전≫에는 편찬 당시까지의 고려 고승이 수록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이처럼≪해동고승전≫은 불교수용으로부터 고종 2년경까지 840여 년 동안의 우리 나라 고승들의 전기이다. 따라서 이 책의 분량은 상당히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시대까지의 고승전으로 끝나고 있는 현존 유통편 권 1·2는 완전한 것이 아닌 듯하다. 유통편 전체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 論에서 순도가 고구려에 온 지 지금까지 844년이 된다고 하면서 원광·자장·의천 등의 구법과 유통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1과가 1권으로만 구성되었더라도 10권이 되는데,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은 분량이었을 것이다.

 현존하는 유통편의 구성은 삼국 불교의 전래와 수용에 관한 것과 구법고승에 관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 구법고승전의 경우도, 覺德으로부터 安含까지는 중국에 구법했던 승려들이고, 阿離耶跋摩로부터 마지막 玄太까지 모두 인도로 구법의 길을 갔던 승려들에 대한 기록이다. 아마도 원래의 유통편에는 논에서 언급한 원광·자장·의천 등에 관한 전기도 수록되어 있었을 것 같다.≪해동고승전≫ 중에 원광전이 실제로 있었던 것은 일연의 언급에 의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밖에도 元曉와 嚴莊에 관한 기록, 신문왕 때의 憬興, 경덕왕 때의 李純·郁面 등에 대해서 서술되어 있었음은≪三國遺事≫나≪法華靈驗傳≫ 등에 의해서 확인된다.

 현존≪해동고승전≫ 유통편은 몇 종의 사료를 활용하여 서술했다. 국내자료로는≪삼국사기≫·≪殊異傳≫·≪花郞世紀(記)≫·≪耆老記≫ 등의 전적과, 阿道·安含 등의 비문과 高得相의 詩史, 吳世文의≪歷代歌≫등의 영사시류가 있고, 중국의 전적으로는≪法苑珠林≫, 양·당·송의 세 고승전, 義淨의≪大唐西域求法高僧傳≫ 등이 인용되었다. 불교수용 초기에 관한 정보의 결핍과 현존≪해동고승전≫의 적은 분량 등을 감안한다면 여기에 인용된 사료가 결코 적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가 참고로 했던 모든 전적이나 사료를 일일이 다 밝혔다고도 보기 어렵다. 현존≪해동고승전≫에는 15개의 주가 있는데, 인용된 원전에 있던 것을 그대로 옮겨 쓴 경우와 각훈 이후의 필사자에 의해서 첨가된 후주 등 4개를 제외하면, 각훈이 직접 단 주는 10여 개에 불과하다. 그의 자주는 이설의 소개, 문자의 이동, 지명의 비정, 서술방법에 대한 언급 등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각훈은≪해동고승전≫의 서술에 있어서 인용한 전거를 밝혀 기록했고, 주를 통해서 자신의 견해를 객관적으로 분명히 하고자 했다. 이외에도 그는 찬을 활용하여 주인공의 생애를 칭송하기도 했다. 이러한 서술방법에 의해 역사가로서의 각훈의 자세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해동고승전≫에는 몇 군데 오류가 보인다. 일찍이 一然은≪삼국유사≫에서≪해동고승전≫ 중의 몇 가지 잘못을 지적하면서 “뒷사람들이 의심하고 잘못 알게 했으니, 그 얼마나 무망한 짓인가”라고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었다.0459)≪三國遺事≫ 권 4, 義解 5, 寶壤梨木. 아무래도 각훈의 역사서술에 어느 정도의 문제는 없지 않은 것 같다. 아리야발마로부터 현태에 이르는 서역으로 갔던 신라의 구법고승들에 대한 전은 의정의≪대당서역구법고승전≫을 기본사료로 하여 쓴 것인데, 이를≪해동고승전≫의 서술과 대조해 보면 몇 가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이는 각훈의 서술이 주도면밀하지 못했기에 빚어진 문제로 생각된다.

 ≪해동고승전≫의 문체 및 서술방식을 검토하고서, 이 책의 성격은 다른 승전들에 비해 보다 월등한 사전적 지향이 강해서 문학이나 철학보다 역사적 서술 지향이 두드러진다는 견해가 있다.0460) 金承鎬,≪韓國僧傳文學의 硏究≫(民族社, 1992), 153쪽.≪해동고승전≫을 문학의 측면에서 바라볼 때, 문학적 서술이기보다는 역사적 서술 지향이 두드러져 보일 수 있음은 당연한 결론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책에 대한 평가의 기준을 역사적 측면에 옮겨 놓으면 다분히 문학적인 서술이 돋보인다. 물론 이것은 이 책을 재는 잣대가 다름으로 해서 생겨난 차이일 수 있다. 각훈의≪해동고승전≫ 서술은 사료의 검토나 비판, 혹은 선별보다 문학적인 표현이나 윤문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다. 그 한두 사례를 보기로 한다.

 유통편 권 2의 智明傳은 전거를 밝히지 않았지만, 이것이≪삼국사기≫를 근거로 한 서술임은 거의 확실하다.≪삼국사기≫에는, 진평왕 7년(595)에 고승 지명이 陳나라에 가서 불법을 구했고, 동왕 24년에 입조사 上軍을 따라 지명이 귀국했는데, 왕이 그의 계행을 존경하여 대덕을 삼았다는 간단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를 각훈은 자신의 상상으로 장황하게 윤색하고 있다. 지명은 진평왕 7년부터 24년까지 17년간 진나라에서 유학했다. 각훈은 이 연대를 기록하고서도, “훌훌 한번 떠나 어느새 10년인데 학문은 이미 진수를 얻어 그 마음은 전등하기에 간절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경우 10년 운운의 표현은 문학적일 수는 있어도 역사적인 서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각훈의 이와 같은 서술방법은≪대당서역구법고승전≫의 신라 구법승들에 관한 기록을 토대로 하여 쓴 아리야발마 등의 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같은 자료에 의해서 서술하고 있는≪삼국유사≫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그 윤색은 더욱 더하다. 번거롭기에 그 원문의 인용을 생략하지만, 단순히 글자수만을 비교해 보아도 이 점을 알 수 있다.≪구법고승전≫ 중의 아리야발마전은 78자로 되어 있는데≪삼국유사≫는 이를 71자로 서술했고,≪해동고승전≫에서는 186자로 늘려 기술했다.

 ≪해동고승전≫의 서술이 문학적 표현에 많이 의지하고 있는 것은 각훈이 문장에 뛰어나 당시 유명한 문사들과 교유하고 있었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각훈은 객관적 사료를 있는 그대로 제시해 보여주기보다 주관적으로 처리해 버린 경우도 없지 않았다. 한림 薛某가 지은 안함의 비명을 소개하면서, 그는 “비문에 이끼가 침식하여 4, 5자가 없어졌으므로 분간할 수 있는 글자만 대강 취하여 짐작으로 문장을 만들어 적었다”고 했다. 이것은 그가 사료를 주관적으로 처리한 구체적인 사례이다. 한 글자라도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금석문을 인용하려 했던 일연에 비하면, 각훈의 서술 태도는 다분히 주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