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Ⅱ. 문화의 발달
  • 4. 역사학
  • 3) 일연과≪삼국유사≫
  • (1) 일연의 생애와 사상적 경향

(1) 일연의 생애와 사상적 경향

 普覺國尊 一然의 생애를 알려주는 기본적인 자료는 일연의 비 앞면과 뒷면에 있는 기록이다. 현존하는 비석이 殘碑로 되어 있으나 앞면은 이전의 필사본에 의해 崔南善의<三國遺事解題>를0487) 崔南善,<三國遺事解題>(≪啓明≫ 18, 1927 ;≪新訂三國遺事≫, 1946 ;≪六堂崔南善全集≫ 8, 玄岩社, 1973, 18∼43쪽). 위시한 여러 자료집에 널리 수록되어 쉽게 접할 수 있었으며, 더욱이 근래에는 완전한 탁본이 발견되어 필사본의 일부 틀린 글자가 수정되기에 이르렀다.0488) 一然碑의 앞면에 대한 탁본 중 비석이 파손되기 이전의 완전한 것으로는 최근에 발견되어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소장된 것이 있다. 이를 1981년에 소장처에서 영인하여 배포하였다. 또 일부이긴 하지만 善本인 것으로는 朴永弴 소장본이 있다(≪文化財≫, 月刊文化財社, 1979. 10, 참조).
최근에는 일연비 탁본과 비첩을 종합, 정리한 자료집을 간행하기도 하였다(中央僧伽大學 編,≪麟角寺普覺國師碑帖≫, 1992).
뒷면의 陰記도 마찬가지 사정이나 필자는 이에 관련되는 기록들을 참고하면서 단편의 탁본을 대조하여 불완전하나마 그 음기의 전문을 복원하고자 시도한 바가 있었으며0489) 蔡尙植,<普覺國尊 一然에 대한 硏究>(≪韓國史硏究≫ 26, 1979 ;≪高麗後期佛敎史硏究≫, 一潮閣, 1991). 이후 최근에도 이에 대한 논의가 끊이지 않고 있다.0490) 金相鉉,<麟角寺 普覺國師碑 陰記 再考>(≪韓國學報≫ 62, 一志社, 1991).
朴永弴,<신자료를 통해서 본 麟角寺普覺國師碑陰記>(≪비블리오필리≫ 3, 1992).

 그러면 일연의 생애를 추적하기에 앞서 일연의 비 앞면(이하<일연비문>으로 칭함)에 나타나는 그의 생애와 관련된 몇 가지 판독상의 논의점을 지적하기로 한다. 첫째, 일연이 원종 2년(1261)에 왕의 명에 의하여 당시 수도인 강화도에 부름을 받고 禪月社에 머물면서 開堂했을 때 ‘遙嗣牧牛和尙’했다는 구절이다. 종래의 필사본에 ‘遙’자를 ‘逢’자로 잘못 판독한 결과 “一然은 迦智山門의 법통을 계승했기 때문에 知訥의 嗣인 慈眞圓悟國師를 만났다”라고0491) 閔泳珪,<三國遺事解題>(≪韓國의 古典百選≫-≪新東亞≫부록-, 1969. 1). 한 해석까지 있었으나 ‘멀리 牧牛和尙, 즉 지눌을 계승했다’는 해석이 옳다고 하겠다. 이 자료를 통한 가지산문 출신인 일연과 修禪社와의 관련 여부는 뒤에서 언급할 것이다. 둘째, 일연 아버지의 이름은 金彦弼임이 확실하다. 셋째, 일연의 행장과 음기를 찬술했으며 또 일연의 비를 건립한 인물은 眞靜大禪師 淸玢임이 확인되었다.

 위의 사실 중에서 일연과 진정대선사 청분과의 관계는 당시 가지산문의 동향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 청분은 후에 寶鑑國師로 추증되는 混丘(1251∼1322)와 같은 인물이며,0492) 李齊賢,≪益齋亂藁≫ 권 7, 碑銘 有元高麗國曹溪宗慈氏山瑩源寺寶鑑國師碑銘(≪東文選≫ 권 118). 이외에도≪삼국유사≫에는 ‘無極老人’으로 또 일연비의 음기(이하<일연비음>으로 칭함)에는 山立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일연비문>과<일연비음>에 나타난 일연과 청분의 관계를 살펴보면, 청분은 일연이 생존한 때에는 그의 직계문도가 아니었으나 일연의 사후 그의 행장을 지어 충렬왕에게 바친다든가, 또 일연이 입적한 해에 일연이 이미 주석한 바 있는 雲門寺의 주지직을 맡는다든가, 또한 일연의 비를 건립한 충렬왕 21년(1295)에 일연이 말년을 보낸 麟角寺의 주지로 있으면서 寶鏡寺와 內願堂의 주지직까지도 겸임한 것을 미루어 볼 때, 충렬·충선왕 양대에 걸쳐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가지산문의 핵심적 승려임을 알 수 있다. 추측컨대 청분은 일연과 함께 가지산문의 출신으로서 일연의 직계문도는 아니지만 일연을 정점으로 가지산문이 크게 등장하여 불교계의 교권을 장악하게 되자, 일연의 입적을 계기로 하여 그의 제자를 자처하면서 후계자로 추대된 인물이 아닌가 한다.0493) 불교계에서는 승려로 입문할 때부터의 恩弟子가 있고, 직접 입문한 제자는 아니더라도 뒤에 法弟子가 된 사례는 무수히 많다. 混丘는 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청분 즉 보감국사 혼구가 일연의 직계제자가 아니라는 사실은≪삼국유사≫의 초간시기에 대한 이해에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현 학계에서는≪삼국유사≫의 초간시기를 일연이 생존한 때로 보는 설과 그가 죽은 뒤 혼구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견해로 나뉘어 있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는 달리 혼구가 일연이 생존했던 때의 직계문도라면 일연이 생전에 이미 간행한≪삼국유사≫를 그렇게 오랜 기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부기를 수록하면서까지 새로이 간행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당시의 판각기술이나 몽고와의 대전쟁을 겪은 뒤의 인적·물적 여건으로 보아 재간행된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결국≪삼국유사≫는 일연이 남긴 많은 저술 중에 포함된 것으로서 卷子本이나 折帖本 형식으로 분권을 하지 않고 내용항목 순으로 제1∼9까지 만들어 놓은 것을, 그가 죽은 뒤 일연의 계승자로 자처한 혼구가 자신의 의견을 보충하여 5권으로 분권한 登梓本을 만들고 이를 토대로 초간한 것이라고0494) 柳鐸一,<三國遺事의 文獻變化 樣相과 變因>(≪三國遺事硏究≫ 상, 嶺南大, 1983). 보는 것이 논리상 타당할 것이다.

 이상의 자료에 나타나는 몇 가지 문제점에 대한 예비지식을 토대로 일연의 생애를 검토해 보자. 일연이 생존했던 시기는 최씨집정기에서 대몽항전기를 거쳐 몽고의 간섭이 시작되는 시기로서 국내외적으로 변동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 불교계의 판도는 원 간섭기의 초반에 책봉된 국사·왕사를 통해서 그 윤곽을 짐작할 수 있다.0495) 許興植,<高麗時代의 國師·王師制度와 그 機能>(≪歷史學報≫ 67, 1975 ;≪高麗佛敎史硏究≫, 一潮閣, 1986). 국사·왕사로 책봉된 사실은 개인적 차원의 영예라기보다는 전 교단의 판도와 깊은 관련이 있는데, 원 간섭기 초에 일연이 국존에 책봉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속한 가지산문이 불교계의 중심교단으로 부각되었음을 의미한다.

 가지산문은 신라 말에 道義가 당에 유학하여 받아들인 禪法에 기초한 종파인데, 나말여초에 지방세력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고 일시적으로는 교단의 중심세력이 되기도 했지만, 고려사회가 집권적 귀족체제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선종이 후퇴함으로써 그 명맥을 겨우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가지산문은 인종 즉위년(1122)에 왕사로 책봉된 學一(1052∼1144)이 출현하여 한때 중심교단으로 부각된 적이 있으나, 일연이 출현한 시기까지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였다. 다만 인종 7년에 학일이 운문사에 은퇴하여 머문 이후 이 지역이 가지산문의 중심지로 부각된 계기가 된 것으로 생각한다.0496) 특히 雲門寺와 연접한 石南寺(경남 언양 소재)에는 신라 말에 조성된 八角圓堂型의 道義國師浮圖(보물 369호)가 남아 있고, 또 石南寺가 소재하고 있는 산이름이 迦智山으로 불리고 있는 것은 운문사 일대가 가지산문의 근거지였음을 시사해 준다.

 그러면 일연의 생애를 통해서 가지산문의 등장배경과 과정을 살펴보자. 일연은 최충헌이 집권할 때 경주의 속현인 章山郡(현재의 慶山)에서 출생하였는데, 뒤에 아버지 김언필이 左僕射를 추증받고 어머니 이씨는 樂浪郡夫人으로 봉해진 사실로 미루어 그 출신은 이 지역의 독서층이거나 향리층이었던 것 같다. 그의 처음 이름은 見明이고 자는 晦然이었다가 뒤에 一然으로 바꾸었다. 일연은 9세에 海陽(현 光州) 無量寺에서 취학했으나 승려로서 정식으로 입문한 것은 14세에 설악산 陳田寺의 大雄長老에게서였다. 본래 진전사는 가지산문의 개창자인 도의가 은거한 곳으로서 가지산문의 주요사찰이었다. 가지산문에 입문한 이후 일연의 생애는 다음의 네 시기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包山의 여러 사찰에서 주석하던 시기(1227∼1248), 둘째, 鄭晏의 초청에 의하여 남해 定林社와 지리산 吉祥庵에 거주하던 시기(1249∼1260), 셋째, 원종의 명에 의해 선월사에 주석한 이후 경상도의 여러 사찰에서 주석하던 시기(1261∼1276), 넷째, 충렬왕의 명에 의해 운문사에 주석하다가 국존에 책봉되고 입적할 때까지의 시기(1277∼1289)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정치적으로 최충헌을 이어 崔瑀(怡)가 정권을 담당하던 시기로 대몽항쟁기와 일치한다. 청·장년기의 일연으로서는 수행에 힘썼겠지만 현풍의 琵瑟山에서 약 22년간을 보내는 동안 그렇게 뚜렷한 행적을 남기지 못했다. 다만 몽고병이 침입하여 일연이 난을 피할 때의 영험을 기록한 것으로서,<일연비문>에 “병신년(고종 23 ; 1236) 가을에 병란이 있어 師는 이를 피하고자 하여「文殊五字」를 마음속으로 염송하면서 감응이 있기를 기대하였는데, 갑자기 벽에서 문수의 현신이 나타나서 이르기를 ‘無住에 거처하라’고 하였다”는 대목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행적은 같은 해에 재조대장경을 간행하기 위한 大藏都監이 설치되고 백련사에서 白蓮結社文을 반포한 것과 비교하면 일연의 소극적 면모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學一이 말년에 운문사에서 구축한 가지산문의 세력이 운문사 주위 지역의 계속적인 對武人抗爭으로0497) 金光植,<雲門寺와 金沙彌亂>(≪韓國學報≫ 54, 1989). 그 세력이 위축된 것과도 관련되리라 본다.

 제2기는 일연이 정안을 매개로 최씨정권과 연결되면서 개인으로서는 수선사와 사상적 연관을 가지게 된 시기이다. 이러한 계기를 마련해 준 정안은 무신란 이후에 등장한 鄭世裕의 손자이며, 그의 아버지인 鄭叔瞻은 최우의 장인이라는 점에서, 최씨정권과 정안의 집안은 밀접한 유대를 가졌음을 말해준다. 그는 한때 晉陽의 수령으로 나갔으나 뒤에 최우가 정권을 전횡하는 것을 싫어하여 남해에 은거하면서 불교를 깊이 믿어 개인재산을 희사하고 대장경간행에도 참여한 인물이다.0498)≪高麗史≫ 권 100, 列傳 13, 鄭世裕 附 晏. 그리고 그는 고종 10년(1223)에 남해에 江月庵을 창건하여 수선사 2세인 慧諶에게 법문을 청할 만큼 그와 깊은 교류를 맺었으며0499)≪眞覺國師語錄≫(≪韓國佛敎全書≫ 6, 東國大 出版部, 1984), 3쪽. 최우가 죽은 뒤 崔沆에 의해 일시 등용되었다가 결국 죽음을 당한다.

 이즈음에 정안이 일연을 초청한 연유는 잘 알 수 없다. 아무튼 이 시기 일연의 행적은 가지산문이 최씨정권과 연결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과 고종 38년에 완성된 대장경조판 중 南海分司에서의 작업에 일연과 그의 문도들이 참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 등을 말해준다. 특히 수선사와의 사상적 교류를 맺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깊다.

 제3기는 정치사적으로 최씨정권이 전면적으로 붕괴되고 강화도정부가 몽고에 항복함으로써 몽고와 화해의 분위기로 접어든 시기이다. 이 때 원종이 즉위하면서 선월사에 일연을 초청한 것은 정치적 차원에서 불교계를 재편하기 위한 조처의 일환으로 생각된다. 여기에 일연은 목우화상 즉 지눌을 계승한 것으로 표현될 만큼 크게 부각되었다. 중앙정계와 직접 연결됨에 따라 이를 바탕으로 일연은 경상도의 여러 사찰에 주석하면서 가지산문의 재건에 힘썼다. 예컨대 원종 9년(1268)에 왕명에 의해 雲海寺에서 선·교종의 명승을 모아 大藏落成會를 주관한 것은 단적인 예이다. 특히 이 기간 중에 仁弘社(뒤에 인흥사로 사액)에 머물면서≪삼국유사≫를 찬술하기 위해 예비작업으로서≪역대연표≫를 간행한 점은 주목된다.

 제4기는 고려가 원에 예속되고 원이 일본을 정복하기 위해 고려에 가중한 부담을 지워 사회상이 극도로 피폐한 시기이다. 이 때 원에 예속된 고려왕실로서는 그 이전의 체제에서 주류를 이루던 불교계를 일단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가졌으며, 그 의지의 일단이 일연을 불교계의 정점으로 하여 가지산문을 핵심적 교단으로 지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충렬왕 7년(1281)에 왕이 경주에 갔을 때 일연은 행재소에 초청받아 갔으며, 그 후 최고의 승직을 얻게 된다. 일연이 경주에 불려갔을 당시 불교계의 피폐된 사정은 승려들이 뇌물로써 승직을 얻어 ‘綾首座’·‘羅禪師’로 불리고 처를 가진 승려가 반이라는 조소적인 표현에0500)≪高麗史≫ 권 29, 世家 29, 충렬왕 7년 6월 계미. 의해서도 그 실태를 짐작할 수 있다.

 일연이 국존이 된 이후 인각사에서 2회의 九山門都會를 개최한 사실은 가지산문이 禪宗界, 나아가서 전 불교계의 교권을 장악한 것으로 파악된다. 가지산문과 함께 이 시기 불교계의 양대세력으로서 天台宗의 妙蓮寺계통이 등장하여 교권장악을 위한 대립상을 보이기도 하였으나,0501) 蔡尙植,<妙蓮寺의 창건과 그 성격>(앞의 책), 191∼192쪽. 고려 말 가지산문에서 太古普愚가 출현하여 중국의 臨濟禪을 도입함으로써 불교계의 통합을 시도할 정도로 가지산문은 원 간섭기 불교교단의 중심세력이었다.

 이상에서 불교계의 동향과 정치사의 흐름에 주목하면서 일연의 생애가 지닌 면모를 살펴보았다. 특히 가지산문의 대두는 중앙권력을 배경으로 교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일연의 위치와 밀접한 함수관계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한편 일연이 세속적인 중앙정계와 연계를 맺게 된 것은 그 자신이 갖는 불교계의 위치도 작용했겠지만 그의 檀越의 역할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려시기의 지배계층은 공통적으로 사원을 그들의 願堂으로 장악하여 면세지로서의 寺院田을 확보하는 현실적 욕구뿐 아니라 사후의 세계에서도 안식을 보장받으려는 신앙적 욕구까지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이들은 특정한 승려와 맺어진 유대를 기반으로 그가 소속된 종파세력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특정의 승려와 종파세력을 지원하는 단월의 출신을 검토하는 것은 나름의 의의가 크다.

 일연의 생애를 통해서 중요한 그의 단월은 鄭晏과 朴松庇를 비롯한<일연비음>에 보이는 인물들이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정안이 일연을 초청한 것은 일연계통이 수선사와 사상적 교류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 의의가 깊다. 뒤에 강화도 선월사에 초청되어 일연이 ‘遙嗣牧牛和尙’이라는 표현이 가능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이다. 그리고 정안과 함께 일연계통이 대장경조판에 참여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독자적 판각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비해 정치적으로 일연이 중앙정치무대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장본인은 박송비를 포함한<일연비음>에 나타나는 단월이라고 할 수 있다. 박송비는 德原(경북 영해)의 향리 출신으로 軍伍에 적을 두어0502)≪高麗史≫ 권 130, 列傳 43, 金俊. 장군으로 입신한 후 고종 45년에 柳璥·金俊 등과 함께 최씨정권을 제거하는 거사에 참여하여 고위관직을 역임하게 된다. 그 후 김준이 집권하게 되자 일시 파직되었으나 다시 복귀된 인물이다. 일연과 박송비의 행적은 다음에서 보듯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일연이 대선사가 된 고종 46년은 박송비 등에 의해 崔竩가 제거된 다음해이고, 그 뒤 왕명에 의해 선월사에 거주하다가(원종 2년) 경북 영일의 吾魚社로 내려오게 된 원종 5년은 박송비가 일시 몰락하고 김준이 권력을 장악한 해이다.0503) 鄭修芽,<金俊勢力의 形成과 그 向背>(≪東亞硏究≫ 6, 西江大, 1985). 그러다가 왕명에 의해 운해사에서 禪敎名德으로 하여금 대장낙성회를 열게 하고 이를 일연이 주맹한 원종 9년은 김준이 제거된 해이다. 이처럼 일연이 중앙정치무대에서 부각될 수 있었던 것은 박송비의 지원에 의한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볼 때 일연의 정치적 입장은 최씨정권과 김준 등과는 그 이해관계를 달리하며 왕정복고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는지도 모른다.0504) 여기서 왕정복고로 표현한 것은 최씨정권의 몰락에 따라 무인정치가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 왕권이 절대적으로 신장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 까닭에≪삼국유사≫에서 일연은 三別抄의 대몽항쟁을 ‘賊難’으로 표현하였을 것이다.0505)≪三國遺事≫ 권 3, 塔像 4, 前後所將舍利.

 일연의 단월로서 박송비를 제외한 나머지는 일연이 최고의 승직을 걷게 된 단계에 관계를 맺은 인물들로서 이들과 일연과의 구체적인 교류관계를 볼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다만 이들은 東征軍을 격려하고자 충렬왕이 경주에 행차한 전후의 시기에 경상도와 경주의 지방관을 역임한 인물들이 많다.

 이상에서 일연의 행적을 살펴보았으므로 다음은 그의 사상적 경향을 살펴보자. 이 방면의 연구는 자료가 거의 없어서 단정하기 어렵지만 근래 일연이 중편한≪重編曹洞五位≫가 발굴되고0506) 閔泳珪,<一然의 重編曹洞五位 二卷과 그 日本重刊本>(≪人文科學≫ 31·32, 延世大 人文科學硏究所, 1974).
―――,<一然重編 曹洞五位 重印序>(≪學林≫ 6, 延世大, 1984).
그와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어 그의 사상적 단면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를 위해서는<일연비문>과≪삼국유사≫ 소재의 ‘讚’이 중요하지만, 찬은 禪詩의 성격을 띠기 때문에0507) 印權煥,<一然의 讚詩>(≪高麗時代 佛敎詩의 硏究≫, 高麗大 出版部, 1983).
金周漢,<三國遺事 所載 讚에 對하여>(≪三國遺事硏究≫ 상, 嶺南大, 1983).
사상적 경향을 추적하기 어려우므로<일연비문>을 중심으로 검토할 생각이다.

 일연이 看話禪에 바탕한 선승이라는 사실은 쉽게 발견된다. 즉 고종 23년 가을 몽고병란을 피하기 위해 ‘阿羅婆遮那’라는 ‘文殊五字呪’를 염송하다가 문수보살의 감응을 받아 無住庵에 거주하고 그 이듬해에 妙門庵에 거주하게 된다. 일연은 이 때 “늘 ‘중생의 세계도 멸하지 않으며 부처의 세계도 늘어나지 않는다’라는 화두를 참구하였다. 홀연히 하루는 활연한 깨달음이 있어 말하기를 ‘내가 오늘 三界가 幻夢과 같음을 알게 되었으며, 대지에는 가는 티끌 만큼의 걸림이 없다는 것을 알았노라’고 한” 것처럼 화두(公案)의 參究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고 있다. 일연의 이러한 면모는 입적하기 직전에 남긴 임종문답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일연은 이후 정안의 초청에 의해 남해 정림사에 거주하게 된 것을 계기로 간화선에 더욱 몰입하게 된다. 일연이 정림사로 처음 왔을 때는 이미 수선사의 2세인 慧諶이 입적한 뒤이지만, 혜심이 편찬하고 그의 제자가 보충한≪禪門拈頌≫이 남해분사에서 간행된(1244∼1248) 직후이기 때문에 일연은 분명히 그 책을 열람하였을 것이다. 이는 일연이 편집한≪禪門拈頌事苑≫(30권, 失傳)과 혼구가 중편한≪重編拈頌事苑≫(30권, 失傳)이 혜심의≪선문염송≫을 계승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일연은 혜심의≪선문염송≫을 통해 사상적으로 간화선에 더욱 심취했을 것이며, 이를 기화로 수선사계통을 계승한 것으로 자처하였을 것이다.0508) 일연은≪禪門拈頌≫뿐 아니라 혜심의 語錄까지도 열람할 만큼 혜심을 존숭하고 있었으며, 이는 혜심이 쓴 시의 일부를≪삼국유사≫에 수록한 것에서 알 수 있다. 혜심의 경우도 일연과의 직접적인 교우관계는 확인할 수 없지만 가지산문과 접촉한 흔적은 발견된다.

 이상과 같이 일연이 선승으로서 간화선에 깊이 심취하였음은 분명하나,<일연비문>에 일연을 가리켜 “修禪하는 여가에 다시 대장경을 읽고 제가의 章疏를 깊이 연구하였으며, 한편 儒書를 섭렵하고 아울러 백가서에도 관통하였다. 이에 의해 방편에 따라 사물을 이롭게 하고 종횡으로 妙用을 발휘한 지 무릇 50년이나 되었다”는 표현이라든가 ‘禪林虎嘯 敎海龍吟’이라는 평가를 볼 때, 그는 수선만을 고집하는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는<일연비음>에서 혼구가 일연을 가리켜 “화상의 門風은 광대함을 모두 갖추어 헤아릴 수 없다”고 표현한 것과도 맥락이 닿는다.

 이러한 일연의 사상적 경향은 그가 20대의 수학기를 지낸 비슬산의 사상적 경향과 관련되리라 생각한다. 역대로 다양한 불교신앙의 자취가 남아 있던 비슬산에서 감수성이 예민한 20대의 수학기를 보낸 일연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다양한 신앙경험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맛보았을 것이다. 결국≪삼국유사≫의 찬술 배경에는 유학과 기타 사상체계를 광범하게 포용하고 있던 그 자신의 사상적 경향과 깊이가 작용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을 알려주는 자료로≪삼국유사≫와 함께 일연이 직접 관계한 저술 중에서 현전하는 것으로서 근년에 발굴된≪중편조동오위≫가 있다. 일연은 고종 43년(1256)부터 중국 曹洞宗의 기본서인≪曹洞五位≫의 보완에 착수하여 원종 원년(1260)에≪중편조동오위≫를 초간하였다.≪조동오위≫는 洞山良介(807∼869)가 제창한 것에 曹山本寂이 주를 더하여 유포함으로써 조동종의 기본서가 된 저술이다.0509) 蔡楨洙,<五家七宗禪의 歷史的 性格>(≪丁仲煥博士還曆紀念論文集≫, 東亞大, 1974), 382∼386쪽. 이러한 성격을 띤≪조동오위≫를 단지 일연이 편수했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선사상의 경향을 조동종에 가깝다고0510) 閔泳珪,<一然과 陳尊宿>(≪學林≫ 5, 延世大, 1983), 5쪽. 할 수는 없다. 늦어도 13세기 초에는 고려사회에 전래되었던≪조동오위≫를 일연이 중편한 의도는 당시 대표적인 선사상으로 풍미하던 간화선과 다른 계통의 선사상인 조동선을 적극 수용함으로써 여러 갈래의 선사상을 융합하고 조화시키려는 것에 있었기 때문이다.0511) 일연이 禪宗의 일파인 雲門宗계통의 저술로서 일종의 事典이랄 수 있는≪祖庭事苑≫을 편수한 것도 그의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는 어느 특정 사상에만 머무르지 않는 그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일연은 다양하면서도 포용력이 있는 사상적 경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원종 5년 인흥사에 주석한 이후에는 특히 신앙면을 강조하게 된다. 이 때 他力的인 관음신앙을 통한 공덕과 다라니신앙을 통한 신비적 요소까지도 표방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오랜 전란에 지친 민중들로 하여금 신앙적 활로를 갖도록 하기 위한 현세구원적 의미가 컸다고 하겠다. 이는 뒤에서 언급하겠지만≪삼국유사≫를 찬술한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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